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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3D3D3><colcolor=#000> 팔츠의 선제후 보헤미아 왕국 비텔스바흐 왕조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5세 Friedrich V. von der Pfalz | |
출생 | 1596년 8월 26일 |
팔츠 선제후국 오버팔츠 라우터호펜 | |
사망 | 1632년 11월 29일 (향년 36세) |
마인츠 선제후국 마인츠 | |
재위 |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 |
1610년 9월 19일 ~ 1623년 2월 23일 | |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 |
1619년 8월 26일 ~ 1620년 11월 8일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1613년 결혼) |
자녀 |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1세 루트비히, 엘리자베트, 루프레히트, 모리츠, 루이제 홀란디네,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헨리에테 마리, 필리프 프리드리히, 샤를로테, 조피, 구스타프 아돌프 |
아버지 |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
어머니 | 오라녀나사우의 루이세 율리아나 공녀 |
형제 | 루이제 율리아네, 카타리나 조피,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안나 엘레오노르, 루트비히 빌헬름, 모리츠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필리프 |
종교 | 칼뱅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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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의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에 대항하여 체코인 귀족들이 들고 일어난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를 수락했으나 결국 이로 인해 파멸하고 말았다. 페르디난트 2세와 더불어 사실상 30년 전쟁의 시작을 끊은 인물.2. 초창기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와 네덜란드 공화국 빌럼 판 오라녀의 딸 루이제 율리아나(Louise Juliana van Nassau 1576~1644)의 아들로 어린 시절에는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1610년 부친의 뒤를 이어 팔츠 선제후가 되었고, 1613년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했다.여기까지만 보면 조상들처럼 팔츠 선제후로 살면서 황제선거가 열리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가 합스부르크 가문 후보나 지지하고 돌아오는 평범한 일생을 살았을테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 개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오죽하면 팔츠 선제후국조차도 프리드리히 2세와 오토 하인리히때는 루터파, 증조부 프리드리히 3세때는 칼뱅파, 다시 조부 루트비히 6세때는 루터파,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때 또 다시 칼뱅파로 개종하는 등 군주의 성향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는 다시 루터파와 칼뱅파끼리 싸우는 등 종교 문제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는데 그는 하필 이 격동의 시기에 팔츠 선제후로서 제국의 칼뱅파를 대표하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다.[1]
3. 30년 전쟁 발발과 보헤미아 국왕 즉위
1619년 3월 20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마티아스의 사촌동생이었던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교육을 받아 골수 가톨릭 신자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 중에서도 오래전 후스 전쟁까지 겪어 가톨릭 신자가 별로 없던 보헤미아 왕국 귀족들은 페르디난트가 즉위하면 극도의 탄압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제국의 개신교를 대표하는 유력 제후 중 하나였던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제안했다. 당시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나 장인 제임스 1세 등 유력 군주들은 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경고했으나 혈기왕성하고 패기만 앞섰던 프리드리히 5세는 별 고민 없이 이를 수락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페르디난트의 분노를 불러왔고, 프리드리히 5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페르디난트의 선출을 막기 위해[2] 요한 게오르크 1세와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 친척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 등을 설득했으나 모두 거절당해 결국 본인의 대리인조차 페르디난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말았다.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자진 포기하지 않으면 제국 추방령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프리드리히 5세는 이를 거부하여 30년 전쟁의 1막인 보헤미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어떠한 비전도 없었고 아내 엘리자베스와 함께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 바빴다. 게다가 후스주의 성향이 강한 보헤미아에서도 칼뱅파 신자로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동맹이자 물주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은 페르디난트 2세는 프리드리히 5세를 압박했고 결국 1620년 빌라호라 전투에서 틸리 백작에게 패한 프리드리히 5세는 외가인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팔츠 선제후국은 황제군에게 짓밟혔고 결국 1623년 팔츠 선제후국과 팔츠 선제후 지위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의 도움을 받아 1628년 오버팔츠를 빼앗아 병합했다.
4. 말년
망명지인 헤이그에서 장인 제임스 1세와 처남 찰스 1세가 보내는 연금으로 연명하면서 폐인 생활을 하다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참전하자 그를 따라 스웨덴군의 독일 원정에 참전했다. 그러나 구스타브 2세가 팔츠 선제후국을 되찾으면 루터파 신도의 지위를 칼뱅파 신도의 지위와 동등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해 결국 갈라졌다. 구스타브 2세는 얼마 후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고,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지원에 나서겠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 마인츠 선제후국의 수도 마인츠에서 사망하고 말았다.5. 기타
짧은 재위기간 때문에 독일과 체코에서는 겨울왕(독일어: Winterkönig, 체코어: Zimní král)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차남[3] 카를 1세 루트비히는 오버팔츠를 제외한 팔츠 선제후국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인 카를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지메른 분가는 단절되었고 이후 가톨릭의 팔츠노이부르크 분가가 팔츠 선제후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이를 핑계[4]삼아 9년 전쟁을 일으켜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선제후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라인 공자 루퍼트로 알려진 3남 루프레히트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외숙부 찰스 1세를 도와 참전했다.[5]
막내딸인 팔츠의 조피는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시집을 갔다. 이후 후계자가 끊긴 영국 왕실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나 그녀가 앤 여왕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 결국 앤 여왕 사후 그녀의 아들이 영국 왕위에 오르며 그가 바로 하노버 왕가의 시조인 조지 1세이다. 또한 그녀의 딸 조피 샤를로테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혼인하며 그녀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손녀 빌헬미네가 낳은 아들이 훗날 프리드리히 5세 모친의 조국 네덜란드의 초대 국왕이 되는데 바로 빌럼 1세이다.
[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칼뱅파로 개종하긴 했으나 브란덴부르크 귀족들이나 신민들은 여전히 루터파를 믿었다.[2] 프리드리히 5세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보헤미아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적법한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하여 황제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인정했다는 점이다.[3] 장남 프리드리히 하인리히는 망명 생활 도중인 1629년 물에 빠져 요절했다.[4] 카를 루트비히의 딸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가 바로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아내였다.[5] 유리 공예품 중 하나인 루퍼트 왕자의 눈물에 붙은 루퍼트가 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