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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DEA4><colcolor=#000> 헤센 방백 필리프 1세 Philipp I., Landgraf von Hessen | |
출생 | 1504년 11월 13일 |
신성 로마 제국 헤센 방백국 마르부르크 | |
사망 | 1567년 3월 31일 (향년 62세) |
신성 로마 제국 헤센 방백국 카셀 | |
재위 | 헤센 방백 |
1509년 7월 11일 ~ 1567년 3월 31일 | |
배우자 | 작센의 크리스티나 (1523년 결혼 / 1549년 사망) |
마르가레테 폰 더 잘레 (귀천상혼) (1540년 결혼 / 1566년 사망) | |
자녀 | 아그네스[1], 아나, 빌헬름 4세, 필리프 루트비히, 바르바라, 루트비히 4세, 엘리자베트[2], 필리프 2세, 크리스티네, 게오르크 1세, 필리프, 헤르만, 크리스토프 에른스트, 마르가레테, 알브레히트, 필리프 콘라트, 모리츠, 에른스트, 아나 |
아버지 | 헤센 방백 빌헬름 2세 |
어머니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아나 |
형제 | 엘리자베트 |
종교 | 가톨릭 → 루터교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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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센의 방백.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최대의 후원자 중 한 사람으로 헤센 가문의 중시조이다.
2. 생애
니더헤센 방백 빌헬름 2세(Wilhelm II. von Hessen 1469~1509)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아나(Anna von Mecklenburg 1485~1525)의 유일한 아들로 불과 5세에 부친이 사망해 헤센의 방백이 되었다.토마스 뮌처가 이끈 독일 농민전쟁을 진압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1524년 마르틴 루터의 저작을 꼼꼼히 읽어본 뒤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1526년 작센 선제후 요한과 손잡고 신성 로마 제국 중북부의 제후들을 루터교회로 끌어들였다. 1527년부터 본격적인 종교 개혁을 시작해 가톨릭 수도원들을 해체하고 국유화했으며 마르부르크에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인 마르부르크 대학교를 설립했다.
1529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같은 해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 울리히 츠빙글리를 중재하기 위해 마르부르크에서 회담을 열었다.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해 개신교 제후들의 연합을 만들었다. 1534년 쫓겨난 전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Ulrich von Württemberg 1487~1550)를 복권시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인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이끄는 남독일의 합스부르크 가문 지지 세력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그러나 1546년 카를 5세가 독일 종교 문제를 마무리짓기 위해 슈말칼덴 전쟁을 일으키자 아직 지지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별다른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사로잡혀 수감되었다. 사위이자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선제후 작위를 넘겨받은 모리츠가 카를 5세를 배신한 덕분에 1552년 해방되었다.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는데 힘썼으며 말년에는 카셀로 돌아가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를 화합시키고 헤센 방백국을 발전시키는데 힘쓰다 카셀에서 사망했다.
자식을 차별하지 말라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 헤센을 맏아들 빌헬름에게는 카셀, 둘째 루트비히에게는 마르부르크, 셋째 필리프에게는 라인펠스, 막내 게오르크에게는 다름슈타트로 분할해 나누어주었다. 이중 셋째 필리프는 후사 없이 일찍 죽어 카셀로 통합되었고 둘째 루트비히도 후사 없이 사망해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가 30년 전쟁 도중 마르부르크 계승 전쟁을 벌인 끝에 카셀이 가져갔다. 첫째 빌헬름의 후손과 막내 게오르크의 후손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이후 헤센 선제후국과 헤센 대공국을 이루었으나 1937년 발생한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의 여파로 헤센다름슈타트 가문도 단절되면서 현재는 헤센카셀 가문만 남아있다.
3. 기타
헤센 지역은 역사적으로 오버헤센, 니더헤센, 헤센 선제후국, 헤센 대공국 등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헤센을 온전하게 통치한 몇 안되는 군주 중 하나이다.[3]원래는 작센의 크리스티나(Christina von Sachsen 1505~1549)[4]와 결혼했는데 1540년 마르가레테 폰 데어 잘레(Margarethe von der Saale 1522~1566)라는 여인과 중혼을 했다. 마르틴 루터는 '이혼보다 중혼이 낫다.'며 이에 찬성했는데 루터의 흑역사가 되었다.
[1]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아내[2]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6세의 아내[3] 다른 사람은 헤센 가문의 시조 하인리히 1세와 필리프의 아버지 빌헬름 2세.[4] 작센 공작 게오르크의 딸로 필리프의 누나 엘리자베트는 게오르크의 아들 요한과 결혼했다. 여담으로 게오르크 공작은 사위 모리츠의 큰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