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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 ||레오 3세의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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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롬바르디아 철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목록 문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은 프랑크족의 게르만 전통에 따라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렇다고 전임 황제와 아무런 연고 없는 생판 남이 되는 게 아니었고, 가급적이면 그와 조금이라도 혈연 관계(부계, 모계, 방계, 먼 친척, 사위 등)가 있는 사람이 다음 황제 후보로 추대되었다.[1] 물론 그에 걸맞은 세력과 지지는 필수였다. 이러한 선거 관습은 대공위시대 이후 선제후 제도가 정착되어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마인츠 대주교가 주재하는 황제선거에서 7인 선제후 중 다수의 표를 받아야 했고, 선출된 다음날 아헨 대성당 또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2]에서 마인츠 대주교와 트리어 대주교가 보좌하고 쾰른 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에서 일단 로마왕(Rex Romanorum) 또는 독일왕(Germaniae Rex)으로 즉위하였으며, 이후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한 번 더 왕관을 받아야만 비로소 황제라고 불릴 수 있었다.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경우, 로마왕(독일왕)이라는 칭호에 그쳤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이 대립하는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파문을 남발하거나 대관식을 집전하지 않는 수법이 악용되자 점차 교황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방안이 강구되었다. 그 결과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로 황제선거에서 교황의 개입을 막으려 했으며, 이어 막시밀리안 1세 황제부터는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치르지 않고, 선출됨과 동시에 그냥 황제 칭호를 썼다.[3]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의 공식 명칭으로 Imperator Romanus Electus(Erwählter Römischer Kaiser; 선출된 로마인들의 황제)[4]를 사용했으며, 이 명칭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승, 유지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 모든 황제는 선출 이후 교황 대관 없이 황제가 되었다.[5] 막시말리안 1세 이후 '로마왕'이라는 작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태자, 즉 차기 제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2. 카를(카롤루스) 왕조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에 관해서는 오토 1세의 대관식을 그 출발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는 이전에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은 카롤루스 대제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도 오토 1세 당시에 수립된 것이 아니었으며, 오토 1세 본인은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할 뿐이었다.11세기 무렵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6]으로 발전한 것이었으며, 12세기 무렵 신성[7] 제국(Heiliges Reich), 13세기 이후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라는 명칭이 완성되었다. 이 이름 또한 수세기 후 바뀌게 되는데, 16세기에 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로마 제국이나 카롤루스 1세의 프랑크 왕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의미였으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 국왕이었으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로마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이 관점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800년 12월 25일,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왕관과 도유를 받아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된 이후를 제국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이후 924년 베렝가르의 암살 이후 왕관 수여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지위가 복원되었다. 이 시각을 따를 경우,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황제 지위를 작센(또는 오토)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이름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카를 1세(카롤루스 마뉴스, 샤를마뉴) | 800.12.25 | 814.01.28 | 프랑크, 롬바르디아의 왕 |
루트비히 1세(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 | 813.09.11 | 840.06.20 | 프랑크, 롬바르디아의 왕 |
로타르 1세(로타리우스 1세) | 817.04.05 | 855.12.12 | 중프랑크, 이탈리아의 왕 |
루트비히 2세(루도비코 2세, 루도비쿠스 2세 이탈리아왕) | 850.12.05 | 875.08.12 | 이탈리아의 왕 |
카를 2세(샤를 2세, 카롤루스 2세 대머리왕) | 875.12.29 | 877.10.06 | 서프랑크, 이탈리아의 왕 |
카를 3세(카롤루스 3세 뚱보왕) | 881.02.12 | 888.01.13 | [8] |
- 루이 2세(루도비쿠스 말더듬이왕) (877 ~ 879): 샤를 2세의 아들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았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 프리울리의 베렝가르(베렝가리오 1세) (887 ~ 891): 명목상의 황제. 카를 3세 사후 이탈리아 왕위를 획득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100%><-9> 카롤루스 대제
—
초대 황제 카를 1세 ||
—
초대 황제 카를 1세 ||
서프랑크 | 중프랑크 | 동프랑크 | ||||||
경건한 루도비쿠스 1세 — 제2대 황제 루트비히 1세 | 카를 2세[9] | |||||||
피핀 1세 — 아키텐 | 대머리 샤를 2세 — 네우스트라시아 — 서프랑크 — 제5대 황제 카를 2세 | 로타리우스 1세 — 이탈리아 — 제3대 황제 로타르 1세 | 독일의 루트비히 2세 — 바이에른 — 동프랑크 | |||||
피핀 2세 — 아키텐 | 말더듬이 루이 2세 — | 프로방스의 카롤루스 — 프로방스 |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2세 — 이탈리아 — 제4대 황제 루트비히 2세 | 로타리우스 2세 | 뚱보 카를 3세 — 슈바벤 — 알레만시아 — 제6대 황제 카를 3세 | 카를로만 — 바이에른 — 동프랑크[12][13] | 흘로도비쿠스 | |
당시 프랑크 왕국은 여자가 군주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에 따라 동로마 제국의 여황제 이리니를 인정하지 않았고, 로마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증서>와 함께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즉위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카롤루스는 이에 더 나아가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정통 로마 황제로 인정받아 교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감정싸움과는 별개로 서유럽 사람들도 이리니의 전임인 콘스탄티노스 6세까지는 동로마 황제를 정통 로마 황제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카롤루스의 황제 즉위도 명목상으로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후계를 자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카롤루스 대제 시대의 프랑크계 작위의 계승은 프랑크 《살리카법》에 의한 아들 사이의 분할 계승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생전에 다른 적자들을 모두 잃고,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를 말년에 공동황제에 임명하여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작위를 수여했다. 크로아티아와 바이에른 등은 반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탈리아는 잠시 둘째아들 쪽의 손자에게 계승되었으나 몇년 후 루도비쿠스 1세가 다시 상속받았다.
카롤루스 왕조 때의 신성 로마 황제는 대체로 중프랑크(이탈리아)의 왕위를 겸직했다. 분할 상속 계보가 너무 복잡하다 싶으면 누가 이탈리아(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얻는지만 알아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의 행방을 쉽게 알 수 있다.
루트비히 1세(경건왕 루도비쿠스)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왕을 제외한 모든 작위를 받았고, 조카의 사망으로 4년 후 이탈리아 왕위까지 모두 가지게 되었다. 분할상속을 없애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며 결국 많은 아들•딸을 성직자나 수녀로 만들어 후환을 없애려 했다. 그럼에도 아들들은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장남 로타르 1세(로타리우스 1세)에게는 롬바르디아 황제와 공동 제위를 주어 같이 통치하였지만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루트비히 1세는 실권을 잃었고(이후 다시 전쟁을 해서 찾고 잃는 것을 반복),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3분할되며, 로타르 1세는 중프랑크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갖게 되었다. 중프랑크는 로타르 1세 사후 이탈리아, 프로방스와 로타링기아로 다시 분할되었다. 로타링기아는 국왕 로타르 2세 사후 메르센 조약으로 동•서프랑크에 분할되었다.
로타르 1세는 아들인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루도비쿠스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이탈리아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분할에 분할을 거쳐 황제의 직할령은 고작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에 불과했기에 루트비히 2세는 실질적으로 다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이후 동생(로타링기아 왕 로타르 2세)과의 협상, 다른 동생(프로방스 왕 샤를)의 사망으로 인한 상속으로 로타링기아(로트링겐, 로렌) 및 프로방스 지방을 일부 가져왔다. 다만 전쟁과 병환으로 메르센 조약으로 인한 로타링기아 분할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남부(카푸아, 베네벤토, 바리 등)로의 끊임없는 사라센인의 침공으로 인해 중부 유럽의 복잡한 정치 구도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며 이는 독일과 프랑스가 사실상 남남의 길을 걷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2세는 결국 이와 같이 평생에 걸쳐 지켜낸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사촌이자 '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로만(후에 바이에른의 카를만)에게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숙부이자 서프랑크의 왕이었던 '대머리왕' 카를(샤를 2세)이 재빨리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받아 가져갔고, 이때문에 동프랑크와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탈리아, 프로방스, 부르군트(부르고뉴) 왕위 및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모두 가져간 대머리왕 카를(카를 2세 또는 샤를 2세)은 동프랑크와의 전쟁 도중 사망했다.
카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는 서프랑크의 왕위만을 받았다. 이탈리아 왕위는 바이에른의 카를만에게 갔고, 부르군트와 로타링기아 등도 역시 분할되어 다른 사람이 왕위를 가져갔다. 제위의 권한은 카를만에게 넘어갔지만 교황이 인정을 해주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4년간 공석이 되었다. 카를만은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제위를 동생인 '비만왕' 카를 3세에게 상속했다.
스폴레토 공작에게 위협받던 로마 교회는 881년 당시 슈바벤과 이탈리아의 왕이자 프로방스의 보호자였던 비만왕 카를(카를 3세)을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했다. 카를 3세는 즉위 직후 수년간의 전쟁을 통해 북으로는 네덜란드 지방의 바이킹들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서프랑크의 섭정임을 주장하며 일시적인 프랑크 왕국의 재통일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통치력 및 건강 문제로 순식간에 몰락하면서 887년 실각, 이듬해 사망하여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의 손자이자 비만왕 카를 3세의 조카뻘인 아르눌프가 알레마니아, 작센, 슈바벤, 로타링기아 및 바이에른까지 통합한 동프랑크의 왕이 되었으며, 서프랑크의 왕위는 파리 백작 외드에게 갔고, 아키텐은 루돌프 2세에게, 부르군드는 루돌프 1세에게, 프로방스는 '맹인왕' 루이(루트비히) 3세에게로 가면서 제국은 산산조각났다.
베렝가리오 1세,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와 그의 아들 람베르토, 아르눌프, 부르고뉴의 루돌프 1세, 프로방스의 '맹인왕' 루이(루트비히) 3세가 이탈리아의 왕위 및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아래 왕들을 보듯이 제위의 의미는 사라졌고, 사실상 이탈리아 왕위를 놓고 제후들이 다투는 모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 비도(귀도) 왕조
이름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비도(스폴레토의 귀도 3세) | 891.05 | 894.12.12 | [14] |
람베르트(람베르토) | 892.04.30 | 898.10.15 | [15] |
4. 카를 왕조
이름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아르눌프 | 896.02.22 | 899.12.08 | [16] |
5. 보조(보종) 왕조
이름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루트비히 3세(프로방스의 루이 3세) | 901.02.22 | 905.07.21 | 루도비쿠스 2세의 외손자 |
6. 운루오히 왕조
이름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베렝가르(베렝가리오 1세) | 915.12 | 924.04.07 |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외손자 |
7. 궐위(924 ~ 962)
베렝가리오 1세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약 40년간 궐위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탈리아의 군주들을 명목상의 황제로 간주하기도 한다. 베렝가리오 1세 사후부터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정벌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보종 가문과 안스카르 가문이 계승했다.한편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 마지막 국왕인 루트비히 유아왕(아르눌프의 아들)이 후사없이 죽자 콘라트 1세가 왕으로 뽑혔지만 그 또한 아들없이 죽어 작센의 하인리히 1세가 새롭게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하인리히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936년 동프랑크 왕위에 오르고, 962년 베렝가리오 1세의 외손자로서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베렝가리오 2세를 격파하여 이탈리아 왕위를 겸한 뒤 교황으로부터 도유를 받고 왕관을 수여받으면서 작센 왕조, 즉 오토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왕위는 이후 16세기 카를 5세 때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겸임했다.
독일 중심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따질 때는 작센 왕조의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보기도 한다.
8. 오토(작센)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오토 1세 | 936 | 962.02.02 | 973.05.07 | |
오토 2세 | 961 | 967.12.25 | 983.12.07 | |
오토 3세 | 983.06 | 996.12.21 | 1002.01.23 | |
하인리히 2세 | 1002.06.07 | 1014.02.14 | 1024.07.13 | [17] |
9. 잘리어(프랑켄)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콘라트 2세 | 1024 | 1027.03.26 | 1039.06.04 | [18] |
하인리히 3세 | 1028 | 1046.12.25 | 1056.10.05 | |
하인리히 4세 | 1053 | 1084.03.31 | 1105.12 | 카노사의 굴욕 |
하인리히 5세 | 1099.01.06 | 1111.04.13 | 1125.05.23 |
10. 주플린부르크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로타르 3세 | 1125 | 1133.06.04 | 1137.12.04 | [19] |
11. 호엔슈타우펜(슈바벤)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콘라트 3세 | 1138 | X | 1152 | [20] |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 1152.03.04 | 1155.06.18 | 1190.06.10 | 콘라트 3세의 조카 |
하인리히 6세 | 1169.04 | 1191.04.14 | 1197.12.28 | |
필리프 | 1198 | X | 1208 | [21] |
12. 벨프 가문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오토 4세 | 1198.06.09 | 1209.10.04 | 1215 | [22] |
13. 호엔슈타우펜(슈바벤)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프리드리히 2세 | 1215 | 1220.11.22 | 1250.12.13 | 하인리히 6세의 아들 |
콘라트 4세 | 1250 | X | 1254 | 로마왕 |
14. 대공위시대(1254 ~ 1273)
콘라트 4세가 죽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대통이 끊긴 이후 제후들 중 누구도 황제로 선출되지 않으면서, 약 20년간 대공위시대가 이어지게 되었다.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와 교황권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유력 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해서 황제 선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교황 역시 자신의 권력에 가장 큰 위험요소가 될 황제가 선출되지 않는 상황을 반겼다. 그러나 황제의 공석 상황이 지속되자 독일에서 혼란이 지속되었고, 이제는 교황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이 제후들에게 제발 황제를 선출해달라고 닥달하는 상황이 되었고, 1273년 교황이 어렵사리 마련한 선제후 회의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이자 다른 가문에 비해 큰 세력이 없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유력 가문 출신들은 아무래도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콘라트 4세가 죽은 뒤 정식으로 황제가 뽑히지 않았고, 독일왕 작위만 가지고 있었다. 정식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괄호안의 연도는 재위년도가 아니라 생몰년이다.
- 빌렘 2세 (1227~1256) - 홀란드 백작, 독일왕 ,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콘라트 4세의 대립왕으로 선출됨
- 리처드 (1209~ 1272) - 콘월 백작,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 플랜태저넷 가문으로 호엔슈타우펜 황실의 모계 친척.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대립왕.
- 알폰소 10세 (1221~1284) - 카스티야 국왕. 호엔슈타우펜 황실의 모계 친척.
15. 대공위시대 이후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루돌프 1세 | 1273.09.29 | X | 1291.07.15 | 합스부르크 가문, 로마왕 |
아돌프 | 1292.05.05 | X | 1298.06.23 | 나사우 가문, 로마왕 |
알브레히트 1세 | 1298.06.24 | X | 1308.05.01 | 합스부르크 가문, 로마왕 |
하인리히 7세 | 1308.11.27 | 1311.06.13 | 1313.08.24 | 룩셈부르크 가문 |
루트비히 4세 | 1314.10.20 | 1328.01.17 | 1347.10.11 | 비텔스바흐 가문 |
카를 4세 | 1346.07.11 | 1355.04.05 | 1378.11.29 | 룩셈부르크 가문 |
벤첼 | 1376.06.10 | X | 1400.08.20 | 룩셈부르크 가문, 로마왕 |
루프레히트 | 1400.08.21 | X | 1410.05.18 | 비텔스바흐 가문, 로마왕 |
지기스문트 | 1410.09.20 | 1433.05.03 | 1437.12.09 | 룩셈부르크 가문 |
16. 합스부르크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알브레히트 2세 | 1438.03.18 | X | 1439 | 로마왕 |
프리드리히 3세 | 1440.02.02 | 1452.03.16 | 1493.08.19 | |
막시밀리안 1세 | 1486.02.16 | 1508.02.04 | 1519.12.12 | |
카를 5세 | 1519.06.28 | 1519.06.28 | 1556.01.16 | |
페르디난트 1세 | 1531 | 1558.03.14 | 1564.07.25 | |
막시밀리안 2세 | 1562.11 | 1564.06.25 | 1576.12.12 | |
루돌프 2세 | 1575 | 1576.11.02 | 1612.01.20 | |
마티아스 | 1612 | 1612.06.13 | 1619.03.20 | |
페르디난트 2세 | 1618 | 1619.03.10 | 1637.02.15 | |
페르디난트 3세 | 1636 | 1637.11.18 | 1657.04.02 | |
레오폴트 1세 | 1658 | 1658 | 1705.05.05 | |
요제프 1세 | 1690.01.06 | 1705.05.01 | 1711.04.17 | |
카를 6세 | 1711.12.11 | 1711.12.22 | 1740.10.20 |
17. 비텔스바흐 가문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카를 7세 | 1742.01.24 | 1742.02.12 | 1745.01.20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18.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이름 | 선출 | 대관식 | 퇴위년일 | 비고 |
프란츠 1세 | 1745.12.13 | X | 1765.08.18 | |
요제프 2세 | 1765 | X | 1790.02.20 | |
레오폴트 2세 | 1790 | X | 1792.03.01 | |
프란츠 2세 | 1792 | X | 1806.08.06 |
이 왕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군주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프랑수아 에티엥) 로트링겐(프랑스어로 로렌) 공작의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전까지만 해도 남자만 계승권이 있었으나 이 당시 카를 6세에게는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고 딸만 있자 딸에게 가문을 물려줄 심산으로 규정을 바꿔 여성 군주를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문의 규정일 뿐, 신성 로마 제국은 여황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 때에 와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독일 접경지대의 공작 가문인 로렌 가문에 비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와 후광이 워낙 강대하여 이후 황제들이 자신들을 합스부르크로 칭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로 부른다.
19. 기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그가 득세할 때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개신교 제후들 사이에서 있었다.
20. 관련 문서
[1] 대공위시대에 권력 세습을 막기 위해 황제로 선출된 한미한 집안의 백작이던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역시 샤를마뉴의 후손이다.[2] 1562년부터 1792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3] 다만 대관식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독일 대주교가 대관식을 치렀다.[4] 이후 라틴어가 완전히 사문화되고 독일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Römisch-deutscher Kaiser로 불렀다.[5]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 중 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교황 대관을 유일하게 받았지만, 카를 5세는 선출로 황제가 된지 11년이 지난 후에 포로로 잡은 교황에게 받은 대관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6] 독일어 'Reich'는 라틴어 'Imperium'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제국"을 의미한다.[7] '신성'이라는 형용사는 1157년에 프리드리히 1세가 제후들에게 발포한 소환장에서 처음 나타난다.[8] 상속을 통해 일시적으로 부르군트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했으나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큰형 카를로만의 아들인 조카 아르눌프에게 축출당했다. 나머지 작위는 모두 분할상속되어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갈라졌다.[9] 부왕인 카롤루스 대제가 공동황제로 임명했으나 단명[10] 대관을 거부하였다.[11] 4대손 루이 5세를 끝으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12] 루트비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사촌인 루도비코 2세에게 황제 자리를 약속받았으나 삼촌인 샤를 2세가 먼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치루었다. 단명하여 이탈리아와 제위를 막내 카를 3세에게 상속하였다.[13]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가 일시적으로 황제 자리를 얻었으나, 그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끝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된다.[14] 카롤루스 대제의 먼 모계후손 (요절한 아들 피핀의 딸 아들리아드의 손자)으로 비만왕 카를 3세가 축출당하자 교황에게 압력을 가해 이탈리아 왕위와 제위를 강탈했다.[15] 비도의 아들. 불법으로 강탈된 제위라 하여 교황에게 박탈당했다. 아르눌프에게 패배하고 정적에게 암살당했다.[16]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자손인 바이에른의 카를만의 서자이다. 887년 숙부인 비만왕 카를 3세를 축출하고, 동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896년 이탈리아를 원정해 비도를 격파하고 황제에 즉위했다.[17] 독일 왕국의 하인리히 1세에 이어서 하인리히 2세로 센다.[18] 대제 오토 1세의 모계 후손이며, 동프랑크 왕국의 콘라트 1세에 이어서 콘라트 2세로 센다.[19] 대제 오토 1세의 모계 후손으로 순전히 실력으로 제위에 오른 경우이나 단명했다.[20] 로마왕, 잘리어 왕조의 모계 후손이다.[21] 로마왕, 하인리히 6세의 동생, 바이에른 백작 오토 8세에게 암살당함.[22] 로타르 3세의 외증손자, 호엔슈타우펜의 모계 친척, 필리프의 사위, 독일왕, 1209년부터 단독 황제, 1215년 폐위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