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9:16:25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0b500, #ffcc20 20%, #ffcc20 80%, #f0b500); color: #1e1e1d;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1e1e1d> 카를 왕조
카를 1세 루트비히 1세 로타르 1세 루트비히 2세 카를 2세
<rowcolor=#1e1e1d> 카를 왕조 비도 왕조 카롤 왕조 보조 왕조
카를 3세 비도 람베르트 아르눌프 루트비히 3세
운루오히 왕조 오토 왕조
베렝가르 오토 1세 오토 2세 오토 3세 하인리히 2세
잘리어 왕조 주플린부르크 왕조
콘라트 2세 하인리히 3세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5세 로타르 2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벨프 왕조
콘라트 3세 프리드리히 1세 하인리히 6세 필리프 오토 4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나사우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 루돌프 1세 아돌프 알브레히트 1세
룩셈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하인리히 7세 루트비히 4세 카를 4세 벤첼 루프레히트
룩셈부르크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지기스문트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합스부르크 왕조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합스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페르디난트 3세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 카를 7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프란츠 1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
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 나치 독일 · 동독 · 독일

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트리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바벤베르크 왕조
하인리히 2세 레오폴트 5세 프리드리히 1세 레오폴트 6세
<rowcolor=#fff> 바벤베르크 왕조 공위기 합스부르크 왕조
프리드리히 2세 오토카르[주장자] 루돌프 1세 알브레히트 1세
루돌프 2세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알브레히트 1세 프리드리히 1세 알브레히트 2세 루돌프 4세
루돌프 3세 레오폴트 1세 오토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알브레히트 3세 알브레히트 4세 알브레히트 5세 라디슬라우스
레오폴트 3세 빌헬름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5세
알브레히트 6세
레오폴트 4세 프리드리히 4세 지기스문트 }}}
[주장자]: 프리드리히 2세의 자매인 마르가레테의 아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
마르가레테의 두 번째 남편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인 게르트루드의 첫 번째 남편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지슬라프
게르트루드의 두 번째 남편 바덴의 헤르만
게르트루드의 세 번째 남편 로만 다닐로비치
게르트루드의 아들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가 혈연 관계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작위 주장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후녀디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라디슬라우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대립왕] 막시밀리안 1세 카를 1세
합스부르크 왕조
프리드리히 5세
알브레히트 6세
지기스문트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5세 알브레히트 7세
페르디난트 2세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3세
카를 2세 페르디난트 3세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페르디난트 3세 페르디난트 4세 레오폴트 6세 요제프 1세
레오폴트 5세 페르디난트 카를 지기스문트 프란츠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3세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 레오폴트 7세
로트링겐 왕조
프란츠 1세
<rowcolor=#fff>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프란츠 2세 }}}
[대립왕]: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대공위 주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13C3B, #B13C3B 20%, #B13C3B 80%, #B13C3B); color: #FAE572;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AE572>
파일:76BAC47C-8666-410C-9DE5-ADF16C798377.png
파일:B899C105-4A71-4048-A5FA-4FF1D9D6B515.jpg
파일:C2D2B033-C933-4D54-A465-E64AABDAE8EF.jpg
파일:4E8F8F66-22A4-42C1-AB25-47731606D876.jpg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그레고리아 갈리스토 비오
<rowcolor=#FAE572>
파일:DA536CA1-3A0B-4A59-BD19-E6ACEC50D32B.jpg
파일:Hans_Burgkmair_d._Ä._005.jpg
파일:4563F30D-0A4E-49A9-BCE1-44FF98DB86BD.jpg
파일:53486796-A138-41DA-BC9F-1D3F6A6C2FB2.jpg
알리폰소 프리드리히 스프란체스 바오로 }}}}}}}}}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초대 황제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파일:Hans_Burgkmair_d._Ä._005.jpg
제호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출생 1415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 공국 티롤 인스브루크
사망 1493년 8월 19일 (향년 77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린츠
재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452년 3월 19일 ~ 1493년 8월 19일
독일왕
1440년 2월 2일 ~ 1493년 8월 19일
오스트리아 공작 혹은 대공[1]
1424년 6월 10일 ~ 1493년 8월 19일
배우자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1452년 결혼 / 1467년 사망)
자녀 막시밀리안 1세, 쿠니군데
아버지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
어머니 마조프셰의 침바르카
형제 마르가레테, 알브레히트 6세, 카타리나, 에른스트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문화적 영향4. 가족
4.1. 조상4.2. 아내
5. 평가6. 여담

[clearfix]
A.E.I.O.U.

Alles Erdreich Ist Österreich Untertan (지상의 모든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복종한다.)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 (오스트리아가 전 지구를 다스린다.)
en, Amor Electis, Iniustis Ordinor Ultor (보아라,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불의한 자들에게 두려움받는다.)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다. 오스트리아 공작 혹은 대공으로서는 프리드리히 5세이다.[2]

2. 생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3]와 마조프셰의 심푸르기스의 아들로, 1424년 부친이 죽자 영지인 내지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4]를 상속받았다.

1439년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고 서열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재위기간 내내 끊이지 않은 친척들과의 갈등과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에 시달렸다.

교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프리드리히는 1452년 이탈리아 반도를 여행하면서 롬바르디아 철관을 받았고, 다시 로마에서 교황의 주관으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교황에 의해서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된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한때는 친척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을 현지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실하기도 하였으며 정부 개혁을 추진할 수 없는 무능력, 친족들과 독일 귀족들의 반란이 겹치면서 독일에서의 정사에서 물러나는 등 상당한 시련에 시달렸다.

그러나 1463년에 분할되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가 아들 막시밀리안의 이름 하에 재통합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고, 1477년에 막시밀리안과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서 풍요로운 저지대 지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명군 마차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에게 1485년 을 빼앗기고 린츠로 도망가는 등 오스트리아 대공국 대부분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으나 마차시 사후인 1490년 ~ 1491년의 전쟁에서 막시밀리안이 헝가리를 격파함으로 오스트리아를 재탈환하였다.

부인이 사망한 이후로 26년을 더 살긴 하는데 재혼을 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서 다리를 절단하다가 사망하는데, 무덤에 묻힐 때 절단된 다리를 함께 넣어줬다.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면서 명목상으로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완전히 독점 세습하게 된다.[5]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질적인 독점 세습은 프리드리히 3세의 선왕인 알브레히트 2세부터이지만, 알브레히트는 명목상으론 어디까지나 '로마왕'이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러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했다.

3. 문화적 영향

중세 말의 다른 통치자들처럼 연금술과 마술, 천문학에 몰두했으며 여러 인문주의자와 교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서적과 귀금속들을 수집하였다. 또한 성지순례를 한(1437년) 몇 안 되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4. 가족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colbgcolor=#fff3e4,#331c00>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
(Ernst, Duke of Austria)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
(Leopold III, Duke of Austria)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6]
(Albrecht II, Duke of Austria)
피르트의 요하나
(Johanna of Pfirt)
베르데 비스콘티
(Verde Visconti)
베르나보 비스콘티
(Bernabò Visconti)
베아트리체 레기나 델라 스칼라
(Beatrice Regina della Scala)
마조프셰의 침바르카
(Cymburgis of Masovia)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
(Siemowit IV, Duke of Masovia)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3세
(Siemowit III, Duke of Masovia)
오파바의 유페미아
(Euphemia of Opava)
리투아니아의 알렉산드라
(Alexandra of Lithuania)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
(Algirdas, Grand Duke of Lithuania)
트베리의 울리아나
(Uliana of Tver)

4.2. 아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ns_Burgkmair_d._%C3%84._006.jpg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포르투갈의 레오노르

36살의 프리드리히는 18살의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공주와 결혼하여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와 이후 바이에른의 공작 부인이 되는 쿠니쿤데를 낳았다.[7] 결혼 당시 프리드리히는 특사를 파견해서 미래의 신부가 될 레오노르의 모습을 미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기를 원했는데 당시 프리드리히가 받아본 레오노르의 초상화는 예쁘고 귀여워서 만족스러워 했고 레오노르의 오빠인 아폰수 5세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이때의 레오노르는 프리드리히와 프랑스 왕국의 도팽 중에 남편감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프리드리히를 선택했다. 황후의 칭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이후로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프리드리히는 아내가 데려온 시종을 모두 돌려보내 레오노르를 향수병에 시달리게 하고 레오노르의 지참금을 자기가 홀라당 써버린다. 거기다 아이 몇몇이 어려서 사망하자 레오노르가 포르투갈 음식을 먹여서 그렇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부인은 물론 자녀들과의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고, 자녀의 양육은 아내인 레오노르가 모두 담당했다. 특히나 레오노르는 살아남은 아들인 막시밀리안에게 집착적으로 애정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감정 교류가 없던 것에 대한 상심이 컸는지 레오노르는 1467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사망한 뒤에 프리드리히 3세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새 장가를 들지는 않았다. 물론 이때 나이가 51살이라 새 장가를 들기 어렵기도 했거니와 제위를 계승할 아들도 있었기에 재혼에 목매달 필요도 없었다.

5. 평가

프리드리히 3세는 초기 근대인들에게 가혹한 평가를 받았다. 특히 계몽 시대 이후 평화왕(der Friedlich)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는 훌륭한 통치로 국토를 평정해서가 아니라 '한 게 없어서' 평화왕이었다. 이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게으름뱅이(Erzschlafmütze), 잠꾸러기(Schlafmütze)라고도 불렸다. 특히나 항상 반기를 들었던 친동생 알브레히트 6세,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위 계승자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프리드리히의 후견인 자격을 무시했던 칠리 백작 울리히 2세, 외부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보헤미아 왕국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존재는 19세기까지 그가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8] 하지만 프리드리히 3세의 50년이 넘는 긴 치세를 단지 자리만 차지함으로써 막시밀리안 1세 시대 합스부르크의 흥기에 기여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편적인 묘사이다. 이는 아들 막시밀리안 1세부터가 아버지보다는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기를 원했던 것 역시 한몫했다.

더군다나 프리드리히 3세 시대에는 서면 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3만에서 5만에 이르는 방대한 공문서를 남겼는데, 이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까지는 그중에서 8천 개 정도만이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통치 초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1980년대 이후 페터 모라브를 중심으로 중세 후기 독일사를 단순한 '쇠퇴' 혹은 '위기'의 시대로 바라보기보다는 그 시대의 고유한 발전 및 근대로의 전환기로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모라브는 대공위시대에서 프리드리히 3세까지의 중세 후기 제국을 근대 초 제국의 중요한 헌법적 구조인 제국의회를 중심으로 한 황제와 제국신분(Reichsstände) 간의 이원 체제가 형성되는 '구조적 공고화(gestalteter Verdichtung)'의 시기로 보았고, 중세 후기 대학의 발전에도 주목했다. 프리드리히 3세 시대는 합스부르크가의 황제위 세습의 시작점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제도화된 이원 체제가 형성되는 핵심적인 시기였다.

또한 1982년 이후 프리드리히 3세 시대의 사료가 정리되어 출판되면서, 프리드리히 3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수정되었다. 1997년 파울-요아힘 하이니히(Paul-Joachim Heinig)가 출간한 프리드리히 3세 전기는 여기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국에 출판된 마틴 래디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에서도 프리드리히 3세 시대를 독립적 장으로 저술하며 균형 잡힌 서술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볼프강 라인하르트는 "하버드 C.H.베크 세계사"에서 그의 치세를 '강력한 통치'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6. 여담



[1] 분가 출신으로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등을 포함해 전체 영지의 일부인 내지오스트리아를 다스렸으나 친척들의 사망과 통치권 포기로 1490년부터 통일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1453년 1월 6일부터 대공의 칭호를 인정하고 공식화했으며, 1457년 11월 23일 합스부르크 본가의 친척 라디슬라우스 대공의 사망으로 사실상 본가가 되어 명맥을 잇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 역시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주장했으나 1490년 4월 6일에 먼저 사망하였다.[2]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1세/3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의 대립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다. 루트비히 4세와 프리드리히의 동시 선출은 훗날 선제후 제도가 완전히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알브레히트 1세의 손자이자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가운데에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3세가 있다.[3]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의 3남으로 독일왕 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4남 알브레히트 2세의 손자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5대손.[4]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트리에스트. 1500년 이후 괴르츠 백국이 추가되었다.[5] 단,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넘어가던 시기, 카를 7세에 의해 잠시 다른 가문이 제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6]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가 아니다. 알브레히트 2세는 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 알브레히트 5세였다.[7] 총 3남 2녀를 낳았는데, 3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8] 오죽하면 전문 역사서는 아니지만 국내에 소개된 기쿠치 요시오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무능력하고 멍청한 프리드리히 3세에게도 한 가지 재주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오래 사는 것'이었다. 그가 끈덕지게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이 적을 죽여주셨다.라고 서술할 정도였다.[9] 플랑드르 반란 때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도 교황청에 요청해 플랑드르에 파문을 때린다. 이걸로 말미암아 플랑드르는 동방 교회로 개종하며 막시밀리안 역시 이걸로 플랑드르가 두려워 할리 있냐며 아버지의 경솔함에 치를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