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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5:14:07

루돌프 1세(보헤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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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1대 국왕
루돌프 1세
Rudolf I Habsburský
파일:루돌프 1세.png
제호 독일어 루돌프 3세
(Rudolf III)
체코어 루돌프 1세
(Rudolf I Habsburský)
출생 1281년
사망 1307년 7월 3일 또는 7월 4일 (향년 26세)
보헤미아 왕국 호라주됴비체
재위 오스트리아 공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
1298년 11월 21일 ~ 1307년 7월 3일 또는 7월 4일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306년 ~ 1307년 7월 3일 또는 7월 4일
배우자 프랑스의 블랑슈 (1300년 결혼 / 1305년 사망)
폴란드의 릭사 엘즈비에타 (1306년 결혼)
아버지 알브레히트 1세
어머니 케른텐의 엘리자베트
형제 아나, 아그네스, 엘리자베트, 프리드리히 1세, 레오폴트 1세, 카타리나, 알브레히트 2세, 하인리히, 오토, 유타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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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공국 공작,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공작,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다. 보헤미아 국왕이 더 높은 작위이나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으로 재위한 기간이 더 길고 그냥 오스트리아인이다.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작으로서는 루돌프 3세이다.

2. 생애

1281년경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1세티롤 후백국의 후백 마인하르트 2세의 딸 엘리자베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 자매로 아나[1], 아그네스[2], 프리드리히 1세[3], 엘리자베타[4], 레오폴트 1세[5], 카타리나[6], 알브레히트 2세[7], 하인리히[8], 오토[9], 유타[10]가 있었다.

1298년 6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선제후들은 나사우바일부르크 백작이었다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던 아돌프를 몰아내고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1세를 독일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1298년 7월 2일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아돌프를 패사시켰고 7월에 열린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뉘른베르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자신의 세 아들 루돌프, 프리드리히, 레오폴트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공동 봉토로 부여했다. 당시 프리드리히는 9살, 레오폴트는 5살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루돌프가 사실상 단독 공작이었으나 알브레히트 1세가 여전히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국정을 관장했다.

1299년, 알브레히트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루돌프와 필리프 4세의 여동생 블랑슈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선제후들은 프랑스가 이를 빌미 삼아 독일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해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1299년 11월 말, 알브레히트 1세와 필리프 4세는 대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인 콰트레보에서 만난 뒤 결혼 계약을 체결했다. 루돌프는 지참금으로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단독 통치자로 정식으로 인정될 예정이었고, 블랑슈는 스위스의 프리부르 지역과 알자스 북부 지역을 지참금으로 받기로 했다. 결혼 협약은 1299년 12월 초에 비준되었고, 1300년 오순절에 루돌프와 블랑슈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300년,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케른텐 귀족들의 반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외삼촌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를 도왔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자신을 도와준 루돌프에게 이렇다 할 감사를 표하지 않았고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사람간의 사이가 나빠졌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케른텐 공국-크라인 변경백국-티롤 후백국을 지배하고 있으며 아내 엘리자베트의 친정인 마인하르트 가문과 잘 지내고 싶었기에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11]

1304년 8월, 루돌프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포조니에서 상 헝가리 대귀족 마투시 차크, 쿠만족 대표, 그리고 쿠야비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합류해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위를 놓고 바츨라프 3세와 대립하고 있던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바츨라프 3세를 지원하고 있는 보헤미아 왕국폴란드 왕국의 국왕 바츨라프 2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합동 공세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다른 연합군이 헝가리-크로아티아와 폴란드에서 바츨라프 2세의 군대를 붙들어놓는 동안, 루돌프는 아버지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보헤미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이후의 공세 때, 루돌프가 이교도인 쿠만인들을 고용하면서 임금을 지불하는 대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삼고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는 바람에 심각한 약탈과 파괴가 발생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남부를 침공했지만 보헤미아의 대귀족인 비트코프 가문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루돌프가 아버지와 합세한 뒤 1304년 10월 초에 쿠트나호라로 진군했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4세의 지원을 받은 보헤미아군이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유격전을 벌이면서 피해가 갈수록 커진 데다 보급물자마저 바닥나자, 이 상태로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쿠트나호라를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눈보라가 치는 동안 고원 지대인 비소치나 지역을 통과하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알브레히트 1세와 루돌프는 무력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꺾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상을 벌였다. 바츨라프 2세는 평화 협상이 진행되던 1305년 6월 21일에 병사했고, 뒤를 이어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한 바츨라프 3세는 알브레히트 1세와의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1305년 8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국왕을 반역자로 비난했던 칙령을 취소하고 바츨라프의 전임자들이 소유한 권리와 특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와 헝가리-크로아티아에 대한 권리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체브스코(Chebsko)를 알브레히트 1세에게 양도하고 마이센튀링겐을 통치하던 베틴 가문에 모젤을 넘겼다.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원정 때 자신을 도우지 않은 처남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는 하인리히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아내인 엘리자베트에게 아직 지급되지 않은 지참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며, 아들 루돌프에게 하인리히의 영지에 속한 크라인 변경백국과 빈트 변경백국에서 6,000 흐르지브나[12]를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1306년 8월 4일,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3세가 올로모우츠에서 보텐슈타인의 콘라트라는 하급 기사에게 피살당했다. 바츨라프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프르셰미슬 왕조는 단절되었다. 1306년 8월 말, 보헤미아 귀족들은 프라하로 집결한 뒤 차기 국왕으로 누구를 선출할 지를 논의했다. 여러 귀족들은 지난날 대립 독일왕이었던 콘월의 리처드[13]가 1265년경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에게 보헤미아 왕국을 봉토로 하사했을 때 프르셰미슬 왕조 출신의 여성도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며, 바츨라프 2세의 딸이며 바츨라프 3세의 누이인 안나의 남편인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귀족들은 리처드가 그런 특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인지를 의심하며,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루돌프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306년 9월 초, 프라하 의회에서 격렬한 논의 끝에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 인드르지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1세는 이미 보헤미아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 베틴 가문에 대항하는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바츨라프 3세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원정 준비를 중단하고 뉘른베르크로 달려가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자신의 아들 루돌프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하도록 요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귀족들이 듣지 않고 하인리히를 왕으로 추대하자, 알브레히트 1세는 제국의 봉토였던 보헤미아 왕국이 부당하게 이탈했으니 도로 회수하겠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이끌고 체브스코를 거쳐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아들 루돌프 역시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 남부로 진격했다. 하인리히는 이에 대응해 니더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1세와 동맹을 맺고, 도마즐리체에서 뷔르템베르크 백작 에버하르트 1세의 사절단에게 에버하르트 1세가 자신에게 병력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10,000 흐르지브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루돌프는 1306년 10월 1일 프라하성 앞에 진을 쳤고, 알브레히트 1세는 로우니 인근에서 진을 쳤다. 보헤미아 대귀족들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제공받자 두 사람에게 대거 귀순했다. 하인리히는 합스부르크군에게 사로잡힐 것을 우려해 아내 안나와 함께 보헤미아를 빠져나가 슈테판 1세의 영토를 통해 티롤 후백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루돌프는 10월 16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폴란드 국왕 프셰미수 2세의 딸이자 바츨라프 2세의 미망인인 폴란드의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서부 보헤미아에서는 슈테판 1세의 지원을 받은 발데크의 빌렘 자이츠, 콤베르크의 오지르, 스트라코니체의 바보르 3세가 하인리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루돌프 1세에 대항했다.

1307년 1월, 알브레히트 1세는 장남 루돌프 1세가 사망한다면 그의 남동생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들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307년 6월, 루돌프 1세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남부 보헤미아 귀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스트라코니체의 바보르 3세는 호라즈도비체에서 농성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호라주됴비체 공방전을 이끌던 루돌프1세는 돌연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14] 그의 유해는 프라하성의 성 비타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인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복위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차남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보헤미아를 공격하다가 1308년 5월 1일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피살당했고, 뒤이어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 된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 국왕이 되기 위한 원정을 중단하고 인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인드르지흐는 보헤미아 귀족들간의 알력다툼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무능한 행보로 일관하다가 1310년 알브레히트 1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된 룩셈부르크 가문하인리히 7세가 자기 아들 요한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세우고 보헤미아 귀족들이 요한에게 귀순하면서 티롤로 쫓겨났다.

루돌프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1300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딸 블랑슈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이 없을 때 대리인으로서 공국을 다스렸고, 남편을 다정하게 대했다. 그러나 1304년 사산아를 낳은 뒤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1305년 3월 19일 에서 병사했다. 이후 루돌프는 폴란드 국왕 프셰미수 2세의 딸이자 바츨라프 2세의 미망인이며 바츨라프 2세와의 사이에서 딸 아네슈카를 낳았던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재혼해 보헤미아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지만, 자식을 낳기 전에 병사했다.

리체차 엘즈비에타는 루돌프 사후 루돌프의 형제 프리드리히를 지원했고, 알브레히트 1세가 피살당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를 장악할 가망이 없어진 뒤 프라하에서 탈출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에서 지내다 나중에 인드르지흐의 사면을 받고 흐라데츠 크랄로베에 정착했다. 이후 얀 루쳄부르스키를 지원해 그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도록 도왔고, 보헤미아의 혼란한 실정에 질려서 룩셈부르크에서 머물면서 관망하기만 했던 얀을 대신해 보에미아의 정치에 깊이 관여했으며, 리페의 대귀족 인드르지흐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말년에 보헤미아 각지에 여러 수도원과 성당을 세우고 딸과 함께 라인란트로 순례를 떠나 여러 성유물을 가져왔다. 1335년 10월 18일 브르노에서 사망했고, 브르노에 있는 성모 승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돌프 1세
(Rudolf I)
<colbgcolor=#fff3e4,#331c00> 알브레히트 1세
(Albrecht I)
<colbgcolor=#ffffe4,#323300> 루돌프 1세
(Rudolf I)
합스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 4세
((Albrecht IV, Count of Habsburg)
키부르크의 헤드비히
(Hedwig of Kyburg)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트
(Gertrude of Hohenberg)
호엔베르크 백작 부크하르트 5세
(Burkhard V, Count of Hohenberg)
튀빙겐의 마틸데
(Mathilde of Tübingen)
케른텐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of Carinthia)
케른텐 공작 마인하르트
(Meinhard, Duke of Carinthia)
고리치아티롤 백작 마인하르트 1세
(Meinhard I, Count of Gorizia-Tyrol)
티롤의 아델하이드
(Adelheid of Tyrol)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of Bavaria)
바이에른 공작 겸 라인 궁정백 오토 2세
(Otto II, Duke of Bavaria)
라인팔츠의 아그네스
(Agnes of the Palatinate)


[1] 1280 ~ 1327, 브란덴부르크잘츠베델 변경백 헤르만 3세와 초혼,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6세와 재혼[2] 1281 ~ 1364,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3세의 왕비[3] 1289 ~ 1330,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자 루트비히 4세대립 독일왕. 둘의 동시 선출은 결국 선제후 제도가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4] 1293 ~ 1352, 로트링겐 공작 프리드리히 6세의 부인[5] 1293 ~ 1326,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6] 1295 ~ 1323,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의 아들인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의 부인[7] 1298 ~ 1358,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공작. 형제들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이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모두 이 알브레히트 2세의 후손이다.[8] 1298 ~ 1327, 오스트리아 공작[9] 1301 ~ 1339,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공작[10] 1302 ~ 1329년 이후, 외팅겐 백작 루트비히 4세의 부인[11] 심지어 알브레히트 1세의 장인 고리치아-티롤 백작 마인하르트는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킨 1등 공신이었다. 이때의 전공을 바탕으로 루돌프 1세로부터 케른텐과 크라인을 넘겨받았다.[12] 중세 보헤미아 왕국폴란드 왕국에서 사용된 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 우크라이나 흐리우냐의 어원이기도 하다.[13]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14] 일각에서는 연대기에 다른 사람이 이질에 걸렸다는 내용이 없는 것을 근거로 위궤양이나 크론병으로 사망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