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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행정 구역|바이에른의 현 |
뉘른베르크 전경 |
뉘른베르크 Nürnberg Nuremberg | |||||
깃발 | 문장 | ||||
<colbgcolor=#0098d4> 뉘른베르크의 위치 | |||||
행정 | |||||
국가 | 독일 | ||||
시간대 | (UTC+1/+2) | ||||
주 | 바이에른 | ||||
현 | 미텔프랑켄 | ||||
인문환경 | |||||
면적 | 186.38km² | ||||
인구 | 526,091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2,822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마커스 쾨니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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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뉘른베르크(Nürnberg)는 독일의 도시로 186.38㎢의 면적에 바이에른주에서 마인강의 지류 페그니츠강 우안의 해발고도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바이에른주에서 뮌헨 다음의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이며 독일 유수의 상공업도시이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오랜 제국 도시로서 옛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환상성벽과 역사적인 탑, 재건된 성이나 교회가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2. 표기
'-g'를 '그'로 잘못 옮긴 '뉘른베르그', 'r' 뒤에 'e'가 있는 걸로 오인한[1] '뉘렌베르크', '뉘렌베르그' 등의 표기 예가 있다.프랑스어로는 Nuremberg[nyʁɛ̃bɛʁ](뉘랭베르)[2]라고 한다. 묘하게 'e'가 들어갔고 'n'이 'm'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프랑스어에서는 저 자리에 'n'이든 'm'이든 비모음화돼서 별 차이가 없기는 하다. 그런데 영어에서 이 표기를 그대로 따라가서 영어에서는 [ˈnjʊ(ə)rəmbɜːrɡ](뉴럼버그)와 같이 [m]으로 발음된다.[3]
3. 역사
11세기 중엽 황제 하인리히 3세가 뉘른베르크 황제 거성을 건설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192년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3세가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von Nürnberg-Zollern)로 임명되면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나, 12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자유도시가 되면서 호엔촐레른 가문과 시시건건 반목했다. 이후 독립투쟁이 일어나 142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4]는 황제 거성을 시(市)에 매각하였고, 1450년에는 선제후로부터 시의 독립을 인정받으면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16세기까지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극성기를 맞아 알브레히트 뒤러, 조각가 아담 크라프트, 바이트 슈토스, 황동 주조공 비셔, 시인 한스 작스 등이 활약하였다.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1525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으며, 1532년에는 '뉘른베르크의 종교 회의'를 체결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대에 이미 인구 수만 명을 보유한 도시였고 30년 전쟁이 완전히 끝난 1683년의 인구는 4만 여 명이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바이에른 왕국에 편입되었다. 이 당시에는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 1804년에는 인구가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1919년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서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하에서 바이에른 자유주의 일부가 되었고, 1933년 10일부터 16일까지 독일 국민 50만명이 참가한 나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1930년대 초반만 해도 군소정당이었던 나치당은 중소도시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된 보궐선거에 온 당력을 쏟아부어 선거에 압승하도록 총력전을 펼쳤고, 괴벨스는 이 결과를 적극 왜곡하여 마치 독일 국민들이 나치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처럼 선전전을 펼쳤다. 이후 뉘른베르크 및 독일 남부 지역은 마치 나치의 본진처럼 여겨졌으며,[5] 이 때문인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열렸다. 한마디로 나치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도시인 셈이다.
4. 인구
1950년부터 현재까지의 인구 추이는 다음과 같다.연도 | 전체 인구 |
1950년 | 362,000명 |
1955년 | 410,000명 |
1960년 | 458,000명 |
1965년 | 468,000명 |
1970년 | 478,000명 |
1975년 | 481,000명 |
1980년 | 484,000명 |
1985년 | 489,000명 |
1990년 | 494,000명 |
1995년 | 491,000명 |
2000년 | 488,000명 |
2005년 | 499,000명 |
2010년 | 506,000명 |
2015년 | 510,000명 |
2020년 | 515,000명 |
2024년 | 526,000명 |
5. 유명한 것
문화적으로는 옛 고도이기에 뉘른베르크 황제 거성, 바이트 슈토스의 '천사의 인사(Engelsgruß)'로 유명한 장크트 로렌츠 교회,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6] 일가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장크트 제발트 성당 등의 많은 유적지가 있다. 하지만 전쟁때 영국 공군이 하도 여기다가 폭탄을 쏴재껴서 복원된 것들도 많다.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희가곡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로 유명해졌다.[7] 캐논으로 유명한 요한 파헬벨이 이 곳 출신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발상지이기도 해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나치 전당대회장과 전당대회장이 건축되기 이전 전당대회가 열린 체펠린 비행장이 있다. 이중 전당대회장은 전쟁 중 시공이 중단되었기에 파사드만 완성된 미완성 상태이다가 현재는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6세기 무렵에는 시계공업 등 정밀 기계 공업의 중심으로 뉘른베르크의 달걀(Nürnberger Ei)이라고 불리던 회중시계나 오토마톤이라는 자동인형으로 유명했다. 근대부터는 공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기 대문에 교외에 금속 · 전기 · 기계 · 자동차 · 광학기계 · 완구 · 문방구 등의 공장이 많으며 그 연안을 따라 새로운 공장지대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완구박람회가 열리는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마인강과 페그니츠강 사이에 운하를 개통하면서 상업 또한 활발하다.
지역 특산물로는 아무래도 뉘른베르크 소시지가 꼽힌다. 일반적인 독일 소시지와는 다르게 약간 얇은 두께와 비교적 작은 크기가 특징. 먹어보면 약간 딱딱하고 퍼석퍼석하게 씹히는맛이 다른 소시지와는 다른 느낌이다. 지역 특산물 치고는 상당히 유명해서 타 지역에서도 구하기 어렵지 않은 편이고 맥도날드에도 뉘른베르크 소시지를 베이스로한 메뉴가 있을정도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먹는 생강과자인 뉘른베르크 레브쿠헨(Nürnberger Lebkuchen)도 잘 알려져 있다.
나치와 관련되어 뉘른베르크법,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뉘른베르크 강령 등이 유명하다.
독일의 상용차 제조사 MAN의 합병 전 회사 중 하나인 Maschinenbau-AG Nürnberg의 본거지도 이곳이다. 이 때문에 비록 지금의 MAN 본사가 뉘른베르크에 있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사명 MAN의 N은 뉘른부르크를 뜻한다.[8]
겨울 시즌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도 유명한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한다. 다만 명성만큼 인파도 엄청나기 때문에 인파에 쓸려다니는 수준이라 여유롭게 구경하고 싶다면 다른 도시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찾는 편이 낫다.
독일의 크리스마스 전통 음료인 글뤼바인[9]로도 명성이 높다.
6. 교통
대중교통으로는 뉘른베르크 중앙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 버스와 트램도 있지만 의외로 뉘른베르크 지하철이 개통되어 있다. 도시 규모상 슈타트반일 것 같지만 중전철 U반이다. 노선이 3개밖에 안되지만 뉘른베르크 시내 자체가 크지않아서 그다지 불편하진 않다. U반이 다니는 만큼 S반도 있다.도시 북부에 공항(뉘른베르크 공항)이 있으며, 시내 중심과는 U반(U2호선)으로 연결되어있다. 활주로는 길이 2700m짜리 1개만 있으므로 장거리 노선이나 대형 기종 취항은 어렵다. 우리나라로 가는 직항편은 없으며, 에어프랑스(파리 환승), KLM(암스테르담 환승), 루프트한자(프랑크푸르트, 뮌헨 환승), 터키항공(이스탄불 환승) 이용시 1회 환승으로 올 수 있다.
7. 시설
교육기관으로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가 있다. 바이에른 주에서는 뮌헨 대학교에 이어서 둘째가는 규모. 참고로 이 학교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도 해외 캠퍼스가 있었다. 2019년에 폐교했다.전시장으로는 뉘른베르크 메세가 있다.
8. 파생 고유명사
8.1. 축구 구단
자세한 내용은 1. FC 뉘른베르크 문서 참고하십시오.8.2. 경순양함
자세한 내용은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문서 참고하십시오.8.3. 영화
자세한 내용은 뉘른베르크(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1] 독일어 한글 표기에서 중립 모음 슈와 [ə\]는 'ㅔ'로 적기 때문에, 모음이 없는 뉘른베르크의 경우에도 슈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ㅔ'로 적는 실수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2] 2음절과 3음절의 모음의 음가는 (IPA 표기상) 같으나, 프랑스어 외래어 표기법 규정상 비모음 /ɛ̃\/는 '앵', /ɛ\/는 '에'로 적게 되어있어 이를 따랐다. 또 실제로는 /ɛ̃\/의 음가가 다소 이동하여 /ɛ\/와는 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외래어 표기법/프랑스어 문서 참고.[3] 사실 프랑스어 표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nb-였다 해도 영어에서는 음절 말-음절 초 조음위치 동화가 활발하기에 -mb-로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 알브레히트 3세의 아버지인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가 1415년 독일왕 지기스문트로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5] 밴드 오브 브라더스 제9화에 이와 관련된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다.[6] 앞서 언급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차남으로 종교개혁 당시 활약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와 프로이센 공국을 설립한 알브레히트의 아버지이다. 그의 이복형 요한 치체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7]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바이로이트도 1시간 거리에 있다.[8] 나머지 M은 Maschinenfabrik, 즉, 기계 공장을 뜻하고 A는 아우크스부르크의 머릿글자다.[9] 프랑스의 뱅쇼와 유사한 따뜻한 와인 음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