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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캐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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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75대 총리
치핑 노턴의 캐머런 남작
Rt Hon. Baron Cameron of Chipping Norton
PC
파일:데이비드 캐머런 총리.jpg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데이비드 윌리엄 도널드 캐머런
David William Donald Cameron
출생 1966년 10월 9일 ([age(1966-10-09)]세)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메릴본
재임기간 제75대 총리
2010년 5월 11일 ~ 2016년 7월 13일
서명
파일:데이비드 캐머런 서명.svg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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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이안 캐머런
어머니 메리 마운트
배우자 서맨사 캐머런 (1971~ / 결혼: 1996)[1][2]
자녀 슬하 4명
학력 헤더다운 스쿨 (졸업)
이튼 칼리지 (졸업)[3]
옥스퍼드 대학교 브라스노즈 컬리지 (PPE / M.A.)[4]
종교 개신교 (성공회)
작위 치핑 노턴의 캐머런 남작
신체 185cm
정당
지역구 옥스퍼드셔 주 위트니[5]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53, 54, 55, 56 }}}}}}}}}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2.2. 정계 입문 이후2.3. 13년만의 정권교체, 영국 총리 취임2.4. 경제 회복
2.4.1. 재정건전성 확보2.4.2. 기업 투자 활성화,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2.4.3. 제조업 성장2.4.4. 물가 안정과 실질임금 상승세
2.5. 2015년 영국 총선 단독 과반2.6. 브렉시트 국민투표2.7. 총리직 사임 이후2.8. 정계 복귀, 외무영연방개발부장관으로
3. 논란4. 여담5. 선거 이력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영국정치인. 제75대 총리(2010년 5월 ~ 2016년 7월)를 역임했으며, 2023년 11월부터 2024년 7월까지 외무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2010년 5월 11일, 약 13년 만의 보수당 정권 교체에 성공함과 동시에 취임했고, 이후 6년 동안 재임했다. 그러나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1966년 10월 9일 런던 출생. 윌리엄 4세의 사생아의 후손으로, 엘리자베스 2세와는 먼 친척 사이다.[6] 종교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 참고로 캐머런 가문 자체는 스코틀랜드젠트리 가문이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이미 꽤나 먼 조상대부터 본가와 거리가 먼 분가 출신이었지만[7] 캐머런 가문 본가는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존재한다. 학력을 봐도 이튼 스쿨 → 옥스퍼드대 PPE(정치학, 철학, 경제학 복합전공) 과정이라는 영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2.2. 정계 입문 이후

역대 영국 총리들이 내각의 주요 보직인 재무장관, 외무장관, 내무장관 등을 거쳐 총리의 지위에 오른 것과 달리, 캐머런은 내각 주요 보직을 한 번도 거치지 않고 총리에 오른 이례적인 인물이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2001년에 처음 하원의원으로 당선 되었고, 2005년에 보수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림자 내각 교육장관 경력을 제외하고 내각에서 몸담은 적이 없었던 재선 하원의원 캐머런은 당원들에게 신선함을 주었고, 캐머런 특유의 연설 능력과 잘생긴 외모[8], 그리고 이러한 장점들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경쟁 후보들을 제칠 수 있었다. 캐머런이 출마할 때는 거의 인지도가 낮았고, 3~4선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출마하는 당 대표 경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였지만, 당선되고 나서는 제1야당 당수로서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정치적 입지와 인지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물론 캐머런은 하원의원 경력 이전에 보수당 내 분석 연구원을 한 적이 있고, 초선 때는 예비내각의 교육장관을 하기 전에 마이클 하워드, 윌리엄 헤이그, 노먼 라몬트 재무장관 등 중진들을 보좌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정당인으로써의 경력은 최소 20년 이상은 되었다. 즉 대학생 때부터 청년보수당원으로 일했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총리가 되기 직전인 2009년에 첫째 아들 이반 레지널드 이언 캐머런(Ivan Reginald Ian Cameron, 2002년생)이 오타하라 증후군(大田原症候群, Ohtahara syndrome)이라는 희귀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2.3. 13년만의 정권교체, 영국 총리 취임

계속되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노동당의 실책을 발판으로 삼아, 2010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1997년 노동당에 정권을 내준 이후 13년 만에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당도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넘기지 못한 상황이라 결국 보수당이 제1당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당과의 연정 협상을 통해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의 연정체제로 총리에 재임했다. 이후 2015년 영국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확보해 1년 정도는 보수당 단독 내각의 총리로 재임하였다.

2.4. 경제 회복

2.4.1. 재정건전성 확보

데이비드 캐머런은 처음부터 강력한 재정보수주의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내걸고 당선되었다. 캐머런 내각의 재정 정책은, 정부지출의 확장을 억제함으로써 재정적자를 줄이고, 따라서 재정건전성을 다시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이러한 정책은 많은 반발을 불러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머런 내각, 특히 캐머런과 캐머런 내각의 재무장관 조지 오스번은 이러한 정책을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빚으로 하는 복지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 캐머런의 소신이었다.

한 때는 IMF가 경고를 할 정도로 캐머런의 이러한 경제 행보는 위태로워 보였으나, 그 뒤로 IMF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뚝심있는 재정보수주의 정책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 ##

실제로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이 이끌던 노동당 정권의 첫 예산안이었던 1998년도 예산안부터, 마지막 예산안이었던 2009년도 예산안까지를 비교할 경우, 영국의 정부지출 증가액이 무려 3385억 파운드였고, 이는 같은 기간동안의 GDP 증가액인 3138억 파운드보다도 많을 정도였다. # 정부지출의 증가율도 무려 연평균 7.13%였다. 전체 GDP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도 노동당 정권 13년동안 9.7%p나 증가했으며, 이는 같은 기간동안 OECD 평균이 3.1%p 증가에 그친 것에 비하면 매우 급격한 정부지출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2008년부터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지출의 급격한 확대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블레어-브라운 정권의 1998년도부터 2007년도 예산안까지의 정부지출 증가액 또한 무려 2545억 파운드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동안의 GDP 증가액의 63.1%나 됐다. 해당 기간동안의 정부지출 증가율 또한 6.52%나 됐다. 해당 기간동안에는 전체 GDP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도 3.9%p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OECD 평균 GDP 대비 정부지출은 오히려 0.2%p 감소했다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파일:화면 캡처 2022-05-27 092622.jpg

이러한 급격한 정부지출 증액으로 인해, 노동당 정권동안 영국의 연간 재정적자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1998년도부터 2009년도까지 영국의 연간 재정적자는 1726억 파운드로, 같은 기간동안의 GDP 증가액의 55%를 넘을 정도이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이라 전세계적으로 경제가 호황이었던 1998년도부터 2007년도의 경우에도 재정적자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316억 파운드 늘어났다. 대외채무 또한 1조 5000억 파운드에서 6조 파운드로 증가하여, 액수로 따지면 4조 5000억 파운드, 배수로 따지면 무려 4배나 늘어났다. 대외채무의 급증은 순대외채권에도 악영향을 주어, 1997년에 -0.2%였던 영국의 GDP 대비 순대외채권(대외채권에서 대외채무를 제외한 수치)의 비율은 2010년에는 -3.1%까지 악화되었다.

파일:화면 캡처 2022-05-27 100701.jpg

반면 캐머런 내각의 경우, 마지막 예산안이었던 2016년도 예산안이 노동당 정권의 마지막 예산안에 비해 1010억 파운드 늘어나는 것에 그쳤고, 이는 같은 기간동안의 GDP 증가액의 35.70% 정도이다. 정부지출의 연평균 증가율 또한 2.02%에 그쳤다. 전체 GDP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도 2010년에 비해 7.3%p나 감소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OECD 평균 정부지출 대비 GDP 비율이 2.3%p 감소한 것에 비하면 그만큼 캐머런 내각이 정부지출를 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파일:화면 캡처 2022-05-27 092906.jpg

덕분에 캐머런 내각 재임기동안, 영국의 연간 재정적자는 놀라울 정도로 감축되었다. 노동당 정권 마지막 예산안에서 1750억 파운드에 육박하던 영국의 재정적자는, 2016년도에는 560억 파운드로 무려 1/3 이하로까지 줄어들었다. # 대외채무 또한 1500억 파운드 증가에 그쳤으며, 이는 노동당 정권 증가액의 1/30에 불과하다. # 대외건전성 또한 대폭 향상되어, 2009년만 해도 -433억 파운드로, 자산보다 부채가 많았던 영국의 순대외자산이, 2016년에는 3728억 파운드까지 크게 늘어났다. #

파일:Screenshot_20220527-095205_Chrome.jpg

2.4.2. 기업 투자 활성화,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파일:Amir-10-25-1.png

정부지출을 억제하는 대신, 캐머런과 오즈본은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 투자를 활성화함으로써 경제를 살리고자 했다. 주로 자가용 보유자들이 많이 부담하는 유류세를 동결하는가 하면, 법인세율을 28%에서 20%까지 인하했다. # 또 규제완화를 위해 규제총량제를 도입하여, 규제를 건수가 아니라 비용을 기준으로 평가함으로써, 규제를 새로 만들거나 강화했을 때 늘어나는 직접적인 경제적 순비용만큼 기존 규제를 풀어 전체적인 규제비용의 총량이 유지되도록 관리하는 것을 정책적 목표로 삼았다.

2010년 9월 규제총량을 유지하는 원 인 원 아웃(One-in, One-out) 제도를 도입한 데 이어, 2013년 1월부터는 기존 총량을 더 줄이는 규제감량제인 원 인 투 아웃(One-in, Two-out) 제도를 도입했다. 규제를 신설하려면 그 순비용의 2배에 해당하는 기존 규제를 철폐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규제 시행일도 국민 편의를 위해 연 2회로 정했다. 지난 1월에만 올해 상반기 동안 73개의 규제평가(16개 규제, 27개 규제 철폐, 30개 중립 규제)가 이뤄진다고 예고했다. 이러한 규제총량제 도입으로 줄어든 규제비용은 2011년 1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모두 12억 파운드(약 2조1358억 원)에 이르렀다. #

이러한 캐머런 내각의 노력들에 힘입어, 영국의 기업 투자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실제로 노동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주관했던 1998년부터 2010년까지의 총고정자본형성(Gross Fixed Capital Formation, GFCF), 다시 말해서 기업 투자(Investment)의 경우, 연평균 증가율이 1.53%에 불과했다. 반면 캐머런이 이끄는 보수당 내각의 감세와 규제완화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2011년부터 캐머런이 임기를 마친 2016년까지의 기업 투자는 연평균 증가율이 3.84%나 되었다. #

또 캐머런 내각에서의 기업 투자 활성화는 전체 경제의 성장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경제성장률은 다시 오르고,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 세계금융위기의 여파에 신음하는 동안 영국은 아주 빠르게 금융위기의 늪에서 벗어났다. # 실제로 캐머런 임기동안 영국경제성장률은 줄곧 유로존 평균을 웃돌았다. #

캐머런 내각에서의 가파른 경제성장은 일자리 창출의 호황으로도 이어졌다. 실제로 노동당이 집권했던 1997년 5월부터 2010년 5월까지의 연평균 일자리 창출은 21만개에 그친 반면, 캐머런 보수당 내각이 재임했던 2010년 5월부터 2016년 7월까지의 연평균 일자리 창출은 43만개나 되었다. #

이러한 차이는 국제적인 기준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블레어와 브라운이 집권했던 2005년 1분기부터 2010년 1분기까지의 영국 일자리 증가율은 0.78%에 불과해, 같은 기간동안에 유럽연합이 기록한 2.51%에 크게 못 미친다. 고용률 또한 2.80%p 감소하여, 같은 기간동안에 OECD가 기록한 0.81%p 감소에 비해서도 더더욱 고용지표가 부진했던 것이다.

파일:화면 캡처 2022-05-30 101621.jpg

반면 캐머런 내각이 재임했던 2010년 1분기에서 2016년 2분기까지의 영국 일자리 증가율은 9.42%로, 같은 기간동안에 유럽연합이 기록한 3.02%를 무려 3배 이상으로 상회했다. 고용률 또한 4.23%p 증가하여, 같은 기간동안에 OECD가 기록한 2.83%p 증가를 상회했다. #

더욱 긍정적인 부분은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업 투자 활성화의 노력이 재정수입 증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상단에서도 언급했듯이, 비록 법인세율은 28%에서 20%까지 파격적으로 인하했지만, 기업들의 이윤이 크게 늘어난만큼 법인세 부과 대상은 그 이상으로 증가한 덕분이다. 실제로 블레어와 브라운이 집권했던 1999년부터 2010년까지의 연평균 법인세입 증가액은 7.93억 파운드에 그쳤지만, 캐머런 내각이 재임했던 2010년부터 2016년까지의 연평균 법인세입 증가액은 10.82억 파운드나 되었다. #

2.4.3. 제조업 성장

사실 블레어와 브라운의 노동당 정권 13년동안, 영국의 경제성장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단에서도 언급한 정부지출의 급격한 증액과, 금융업의 폭발적인 성장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특히 금융업의 경우, 2001년 12월에 출범된 금융감독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금융감독청은 영국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서, 영국의 내각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된 기관이었던 만큼, 당시 집권 노동당의 전반적인 경제정책 기조와 달리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규제의 정도를 매우 낮게 유지했다. 실제로 존 메이저 보수당 내각이 재임했던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금융업 매출액은 78억 파운드 증가했다가, 노동당 정권 초기였던 1997년부터 2001년까지는 26억 파운드 증가에 그쳤다. 하지만 금융감독청이 주관하게 되고 나서부터는 영국 금융업이 다시 활성화되어,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매출액이 무려 393억 파운드나 증가하게 되었다. #

하지만 노동당 정권 13년동안 영국의 제조업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려갔다. 실제로 마거릿 대처와 존 메이저의 보수당 내각 18년동안 1610억 파운드에서 1860억 파운드로 250억 파운드 증가했던 영국의 제조업 총부가가치는, 블레어와 브라운의 13년동안에는 1860억 파운드에서 1450억 파운드로 410억 파운드나 감소해버렸다. # 제조업 일자리 또한 1997년 1분기만 해도 437만개였던 반면, 13년이 지난 2010년 1분기에는 282만개가 되어, 무려 155만개 제조업 일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

노동당 정권 13년은 특히 영국 제조업의 주력 업종인 중공업에 타격이 컸다. 2000년에는 181만대에 이르던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이 2009년에는 109만대까지 추락해버렸다. # 철강 생산량 또한 1997년의 1850만톤에서 2010년에는 970만톤까지 급감해버렸고, 제철업계 종사자들 또한 35000명에서 19000명까지 감소해버렸다. #

그렇기 때문에 보수당 당수 캐머런은 제1야당 당수였던 시절부터 제조업 부흥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 캐머런 내각은 상단에서 언급한 감세, 규제완화와 함께, 2010년 6월에는 중소 제조업체들의 수출, 기술, 혁신, 대출을 한번에 지원하는 정부 전담팀을 설립했다. # ## 또 2010년 12월에는 각 제조업 분야들을 활성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로 구성된,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성장전략을 수립했다. #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노동당 정권 말기에 1450억 파운드에 그쳤던 영국의 제조업 총부가가치는 캐머런 보수당 내각 6년동안 364억 파운드 증가하여 2016년에는 1814억 파운드까지 회복되었다. # 기업들의 신규투자에 힘입어,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 또한 2009년의 109만대에서 2016년에는 182만대에 육박하게 되었다. # ## ### 그외에도 기계, 정보기술 등 주요 제조업 업종들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되었다. #

제조업 일자리 또한 증가세로 돌아서, 2010년 1분기부터 2016년 2분기까지 22만개 증가하여 제조업 일자리가 304만개에 육박하게 되었다. # 즉 제조업 일자리가 블레어와 브라운의 13년동안에는 연평균 12만개씩 사라진 반면, 캐머런 내각 6년동안에는 연평균 3.6만개씩 늘어난 것이다. 상단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체 일자리 연평균 증가 수의 차이가 22만개(블레어와 브라운 21만개, 캐머런 43만개)인 것을 감안하면, 제조업 일자리에서의 15.6만개 격차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4. 물가 안정과 실질임금 상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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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와 브라운의 노동당 정권 직전에 재임한 메이저 보수당 내각에서는 영국의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1992년 4월부터 메이저 내각 마지막 달인 1997년 4월까지,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61개월 연속으로 OECD 평균 물가상슬률보다 낮았다. 덕분에 노동당 정권으로서는 적어도 물가관리에 있어서는 훨씬 수월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당 정권에서는 보수당 내각에서 안정시켰던 물가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여, 2008년 9월부터 노동당 정권 마지막 달인 2010년 4월까지 20개월 연속으로 OECD 평균보다 높은 물가상승률을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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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문제가 되었던 건, 이러한 물가상승이 임금상승을 상회했다는 것이었다. 명목임금상승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높은 상황, 즉 실질임금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8년 7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영국의 실질임금상승률은 22개월 연속으로 감소했다. 불황경제학적으로 정의할 때, 2분기(6개월) 연속 실질성장률 마이너스로 정의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실질임금상승률 22개월 연속 마이너스는 그야말로 민생대공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즉 노동당 정권 말기 영국인들은 민생경제의 파탄을 피부로 느꼈고, 이러한 상황이 2010년 영국 총선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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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수당이 재집권한 이후에도, 2011년의 국제유가 급등 때문에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 하지만 영국의 기준금리가 2009년 이후로 동일하게 유지된 반면, 상단에서도 언급했듯이 정부지출 증가가 크게 억제되었던 덕분에 시중으로 유입된 통화의 증가량이 시장에서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상단에서 언급된 유류세 동결 또한 영국 내 유가를 안정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덕분에 영국의 전반적인 물가가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2014년 3월부터 캐머런이 총리직에서 물러난 2016년 7월까지 29개월 연속으로 OECD 평균보다 낮은 물가상승률을 구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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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2014년 10월부터는 명목임금상승률이 다시 물가상승률을 상회하게 되었고, 따라서 영국의 실질임금상승률은 플러스로 돌아왔다. 이후 2017년 1월까지 영국의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증가세를 구가했다. 즉 보수당 내각이 집권하면서 투자가 활성화되고 경제가 성장한 과실을 일반 대중들 또한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경제회복이 2015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2.5. 2015년 영국 총선 단독 과반

총선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보수당은 노동당과 박빙의 접전을 벌여 재집권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일각에서는 에드 밀리밴드가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었다. 하지만 투표 당일 BBC출구조사 결과 보수당이 316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되면서 재집권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한국시각 8일 기준으로 보수당이 321석을 차지한 상태로, 명목적 다수인 326석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단독 재집권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 보수당이 예상 외의 승전을 거둔 데에는 에드 밀리밴드의 공약이 급진적이어서 보수층의 결집을 자초했다는 의견이 대세다. 그리고 캐머런 정부는 경제 측면에서 커다란 실책을 한 상황도 아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캐머런의 재집권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지만,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선전이 복병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총선 결과 보수당이 331석으로 과반수를 넘겨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단독 집권을 해서 자민당을 제외하고 보수당만으로 내각이 구성되었는데 이는 1997년 이후 18년만에 처음이다.[9] 총선 전 영국의 기업가들은 보수당이 이기면 유럽연합 탈퇴 문제로 리스크를 져야 하고,[10] 노동당이 이기면 경제 자체에 리스크를 져야 한다[11][12]며 푸념했는데 결국 둘 중에 유럽연합 리스크(기업인들의 관점에 따른다면)를 지게 됐다.

게다가 친유럽적인 SNP(스코틀랜드 국민당)가 이번 총선에서 스코틀랜드에 할당된 전체 의석 59석 중 무려 56석을 차지한 상태라 유럽연합 탈퇴를 빌미로 독립을 재시도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중.[13] 그래서 미국 언론들은 총선 직후 영국이 유럽연합도 탈퇴하고 스코틀랜드도 잃어서 캐머런이 '리틀 잉글랜드'[14]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15]가 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끝내 영국은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2.6. 브렉시트 국민투표

Je pense surtout qu'il croyait qu'il allait le gagner
그는 브렉시트 투표가 잔류로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봅니다.(후략) - 프랑수아 올랑드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EU 탈퇴파가 승리하자 결과에 승복하며 8월 이내로 사임할 것임을 발표했다. # #

캐머런이 이러한 승부수를 던진 이유는 당시의 여론조사가 '잔류'가 '탈퇴'보다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브렉시트 직전의 여론조사에서도 '잔류 52% vs 탈퇴 48%'라는 결과가 나왔다. 영국의 경우 샤이 보수(Shy Tory)가 자신들이 여론조사에서 잘 응하지 않는것을 감안해서 상황을 더 낙관적으로 봤다. 하지만, 그렇게 쳐도 고작 오차범위 내로 접전 중인 찬반양론이 뜨거운 주제였음에도 캐머런은 이러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맹신하고 과감하게 국민투표를 제안했으나 결과는 자신의 예상한 것과 달랐다. 그리고 영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벌어진 최고 오판은 청장년층이 잔류 지지측이고, 노년 및 기득권층이 탈퇴 지지측이라는 것을 생각 못했다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해 이 인간들이 생각한 진보와 보수 진영이 지지하는 안건이 정반대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샤이 보수(= 탈퇴 지지)가 투표에 참여할 경우, 브렉시트 찬성율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질 이유가 없던 것. 브렉시트란 이슈 자체가 기존의 보수, 진보 셈법이 아닌 도시와 낙후된 지방의 대결이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결국 투표는 런던 VS 낙후된 지방의 대결로 펼쳐졌고 노동당 지지층 내에서도 미국의 힐 밸리처럼 망한 산업도시들은 브렉시트에 대한 지지가 높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국가 지도자가 겉으로 볼 때 자기와 생각이 같은 국민들이 많아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생각과 관련된 찬반 국민투표를 함부로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16]

7월 12일, 마지막으로 의회 PMQ에 출석하여 "저도 한때는 미래였습니다.(I was the future once.)"라는 명언(?)[17]을 남기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원래 이 말은 지난 2005년 12월 보수당 당수로서 처음으로 의회 간담회에 나섰던 캐머런이 영국 학교들의 입학 정책 자율화 문제와 관련,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를 향해 "그의 접근법은 구닥다리다. 나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블레어)도 한때 미래이긴 했다(This approach is stuck in the past. And I want to talk about the future. He was the future once)"고 말했던 내용의 셀프 패러디.

예상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왔을 경우를 대비한 계획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점도 큰 실책으로 평가된다. 이는 미래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후폭풍을 야기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에 자신있게 시장직을 걸고 무상급식 찬반 투표를 하였다가 힘껏 몰락한 사례가 있다. 차이점이라면, 캐머런은 자신의 지지층이 브렉시트를 찬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으나, 오세훈의 경우, 아예 투표를 안함으로서 개표를 못하게 한 민주당의 전략에 휘말린 것.

2.7. 총리직 사임 이후

2016년 7월 13일 총리직 사퇴 후 두 달 동안 백벤쳐로서 활동하다 동년 9월 12일 사임했다. 그 뒤 치매알츠하이머병와 관련된 비정부기구 수장을 맡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2019년 9월 13일 오후 5시 (한국 시간 14일 오전 2시), 더 타임즈에서 캐머런 전 총리를 인터뷰한 기사를 냈다. 자서전 내기 전에 인터뷰를 한건데 그동안 정치 이슈에 대해 말을 삼갔던 것과 달리 보수당 원로 21명의 출당 조치를 비판하고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대해 매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안하다. 내가 실패했다"라며 브렉시트의 불확실성에 대해 아직도 걱정한다는 점을 밝혔다.

후임자인 보리스 존슨 총리에 대해선 런던 시장으로서의 행적은 칭찬했지만 2011년 영국 폭동 당시 코브라 회의[18]에 늦었던 점 등을 지적하며 총리로서는 자질은 의심한다고 밝혔다 후속 기사 1 £. 이외에도 도미닉 커밍스 총리 특별 정치 고문[19][20]마이클 고브[21] 국무조정실장 등을 비판했다.

한편 회고록 발간을 앞두고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당시에 엘리자베스 2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자 푸틴이 본인 재임기 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시각이나 지금 시각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며 설득하기 매우 어려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선거구 주민, 영국 적십자 직원, 보수당 당원들과 같이 전쟁 피해자인 난민 지원을 하기 위해 폴란드까지 직접 자동차를 몰고 가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리시 수낙이 차기 영국 총리로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최초의 인도계 총리는 보수당에서 나올 것이라는 10년 전 캐머런의 예측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

리시 수낙이 신임 총리로 선출된 것을 축하하는 트윗을 올렸다. #

2.8. 정계 복귀, 외무영연방개발부장관으로

2023년 11월 13일 개각에서 부적절한 언행으로 논란을 자초해 내각에 대한 국내외 여론을 비판적으로 끌어내린 수엘라 브레이버먼이 내무장관 직에서 경질되어 제임스 클레벌리 외무영연방개발부장관이 내무장관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긴 공석을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어 받으며 7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영국은 의원내각제 국가들 중에서도 반드시 현역 의원만이 장관을 할 수 있는 국가[22]라 장관을 하기 위해서는 의원직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캐머런은 7년 전 서민원(하원) 의원직을 사퇴해 현재 민간인이므로 보궐선거나 차기 총선에서 서민원 의원으로 당선되거나 일대귀족 혹은 세습귀족 작위를 통해 귀족원(상원) 의원으로 장관직을 수행해야 하는데, 보궐선거를 할 지역구도 없고, 차기 총선은 내각불신임 등 특이한 상황이 아닌 이상 2025년에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캐머런은 일대귀족 남작 작위를 받아 귀족원 의원으로서 장관직을 수행한다.

전직 총리의 외무장관 임명은 알렉 더글러스흄 이후로 53년, 귀족원 의원의 외무장관 임명은 마거릿 대처 내각의 피터 캐링턴 남작(1970~1974 국방장관, 1979~1982 외무장관 역임) 이후 44년 만이다. #관련 영상

부임 후 첫 해외 일정으로 11월 16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였다. #

12월 19일에는 프랑스 외무장관과 회담한 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야한다고 합의했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한 지원 대오가 균열 조짐을 보이는 데에 경고장을 날렸다는 평.

12월 31일, 이란 외무장관에게 이란 역시 후티 반군의 홍해 공격을 막아야할 책임이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안팎을 위협하는 권위주의 국가들과 적대적 세력의 밀착에 맞서야 한다며 안보를 강조했다.#

2024년 7월 4일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하고 정권이 교체되자 1년도 못 채우고 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3.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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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어느 한 중산층 가정을 방문했을 때 어설픈 서민 코스프레를 시전하다 역풍을 맞았다. 핫도그를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서 먹은 것이다. 이로 인해 "캐머런은 우리(서민)와는 다른 사람(귀족)"이라고 각인되었다.현장 동영상 이후 캐머런은 굳이 포쉬함(Poshy)을 숨길 생각은 없다고 반응했다.[23]

4. 여담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97 제52회 영국 총선 스태퍼드
20,292 (39.2%) 낙선 (2위)
2001 제53회 영국 총선 위트니 22,153 (45.0%) 당선 (1위) 초선
2005 제54회 영국 총선 26,571 (49.3%) 재선
2010 제55회 영국 총선 33,973 (58.8%) 3선
2015 제56회 영국 총선 35,201 (60.2%) 4선[32]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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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장관 제러미 헌트
외무영연방개발부장관 제임스 클레벌리데이비드 캐머런
내무부장관 수엘라 브레이버먼제임스 클레벌리
내각 장관
랭커스터 공국상 겸 내각부장관 올리버 다우든
법무부장관 도미닉 랍알렉스 초크
국방부장관 벤 월러스그랜트 섑스
보건사회부장관 스티브 바클레이빅토리아 앳킨스
산업에너지기술전략부 장관 그랜트 섑스클레어 코치뉴
상무부장관 케미 베이드녹
노동부장관 멜 스트라이드
교육부장관 질리언 키건
농림부장관 테리즈 코피스티브 바클레이
주택부 장관 마이클 고브
운수부장관 마크 하퍼
북아일랜드부장관 크리스 히튼-해리스
스코틀랜드부장관 알리스터 잭
웨일스부장관 데이비드 데이비스
문화체육부장관 미셸 도넬란
무임소장관 겸 당 의장 나딤 자하위그렉 핸즈리처드 홀든
귀족원 여당 대표 니콜라스 트루
서민원 여당 대표 페니 모돈트
국무회의 참석자 (비내각구성원)
내각부장관 제레미 퀸존 글렌
재무부 정무수석차관 존 글렌로라 트롯
서민원 여당 원내총무 사이먼 하트
잉글랜드 웨일스 법무관장 빅토리아 프렌티스
안보담당 부장관 톰 투겐햇
이민담당 부장관 로버트 젠릭톰 퍼스글러브
제대군인담당 부장관 조니 머서
개발담당 부장관 앤드류 미첼
무임소장관 개빈 윌리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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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1년생(만 [age(1971-01-01)]세)[2] 제8대 준남작 레지널드 셰퍼드의 딸. 서맨사의 어머니는 서맨사 캐머런을 낳은 이후 이혼한 뒤 제4대 애스터 자작과 재혼해 살고있다.[3] 졸업 직후 1년가량 갭 이어를 하였는데 이 때 홍콩소련을 방문하였다.[4] 1985년 - 1988년.[5] 사우스 이스트 잉글랜드 서북부에 있고 주변 지역구 역시 보수당 강세가 두드러지는 시골지역이다. 해당 지역에 속하진 않으나 옥스퍼드 대학교와 가깝다. 다만, 옥스퍼드가 위치한 옥스퍼드 시는 노동당 강세 지역이다.[6] 사생아의 후손이기에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없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서자도 계승 가능성이 있었지만, 서양에서는 원칙적으로 일부일처제였기 때문에 서자는 사생아로 취급됐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는 윌리엄 4세의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다.[7] 18대 로치엘(Lochiel, 캐머런 가 당주의 칭호) 존 캐머런(John Cameron)의 후손이며 그의 고조부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청나라에 세력을 뻗칠 당시 홍콩 상하이 은행(Hongkong and Shanghai Bank) 런던 지부장을 역임했던 유언 캐머런(Sir Ewen Cameron, 1841-1908)이다.[8] 영국의 패션모델 Erin O' Connor 또한 캐머런을 직접 만난 후, 캐머런이 매우 잘생겼고 피부도 정말 좋다고 증언했다. #[9] 앞서 말했듯이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대처, 메이저로 이어진 보수당 장기 집권 시대가 끝났다. 보수당이 정권에 복귀한 건 2010년이지만 이때는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었으므로 보수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1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10] 영국이 만약에 EU를 탈퇴하게 되면 유럽 단일시장에서 배제될 수 있는 데다가, EU의 정책에 영국의 입장을 반영할 길이 막히게 된다.[11] 당시 노동당 대표인 에드 밀리밴드가 당내 좌파 라인이라 토니 블레어 시절의 소위 신노동당(뉴 레이버) 시절보다 더 좌파적인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기업의 우려가 컸다. 그래서 기업인들은 노동당의 경제 정책 중 보수당보다 나은 건 EU 탈퇴 리스크가 없다는 것 하나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12] 이건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2015년 5월 2일자 커버스토리였다. 당시 표지[13] 물론 주민투표가 가까운 시일 내에 재실시되기는 쉽지 않다. 주민투표가 실시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명분이 있는 데다가, 2014년에 예상과 달리 독립 직전까지 갔었던 기억 때문에 향후의 영국 총리들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 실시를 받아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캐머런도 더 이상의 주민투표를 실시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상태이고.[14] 영국 국호에 들어가 있는 '그레이트 브리튼'을 정 반대의 뜻으로 바꿔 쓴 표현이다. 물론 스코틀랜드(약 530만 인구)가 독립해도 웨일스(약 300만 인구)와 북아일랜드(약 185만 인구)가 영국에 남아 있지만 잉글랜드(약 5,300만 인구)가 영국 국내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져 버린다(스코틀랜드가 빠진 영국 인구의 약 92%가 잉글랜드 거주자). 따라서 과장을 보태면 스코틀랜드가 없는 영국은 사실상 잉글랜드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15]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아담스 등)을 부정적 의미로 쓴 표현이다.[16] 국민투표가 아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의 사례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또한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콘크리트 지지층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 참패한 바 있다. 겉으로 볼 때 현 국가 지도자(여당)와 생각이 같은 국민들이 그렇지 않은 국민들보다 더 많아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그 국가 지도자(여당)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셈이다.[17] 원래 PMQ는 신랄하게 서로를 몰아붙이고 말다툼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날만큼은 마지막 자리였던 만큼 전반적으로 여유와 유머가 넘쳐났다.[18] 비상시에 총리, 재무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 법무장관과 같은 국가안보회의 회원들과 런던시장 등 주요한 인사들이 참여하는 비상회의이다.[19] Special Political Advisor to the Prime Minister[20]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탈퇴파를 주도한 브레인로서 이전엔 마이클 고브 당시 교육장관의 고문이었다. 채널 4에서 커밍스를 주인공으로한 TV 영화를 만들었다.[21] 캐머런 내각에서 교육장관과 법무장관을 지내고 테레사 메이 내각에선 환경장관을 지냈다[22] 일본, 이탈리아 등처럼 꼭 현역 의원이 아니더라도 장관을 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 국가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민간인 국무대신이 전체 정원의 절반을 넘을 수 없고, 최근 들어 민간인 국무대신이 임명된 예도 노다 내각에서 딱 1명 된 것 이래로 나오지 않고 있으며 애초에 민간인 국무대신 자체를 잘 임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탈리아는 마리오 드라기 총리가 첫 조각 당시 장관을 100% 관료로만 채운 테크노크라트 내각을 수립하려 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혀 포기한 적이 있다.[23] 총리의 일과 동영상은 핫도그 해프닝 이전에 찍은 것인데 인터뷰하면서 먹는 파이를 옆에 포크와 나이프가 없다. 그러므로 캐머런이 핫도그 먹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24]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의 이름을 땄다. 말이 좋아 총신이지 사실상 애인에 가까운 존재였는데, 그 악명높은 벌링턴 클럽보다도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다보니 개버스턴의 이름을 따온 것. 참고로 여기서 언급한 벌링턴 클럽은 2010년 초연한 연극 Posh와, 2015년 영화 더 라이엇 클럽의 모티브가 된다.[25] 드라마 블랙 미러시즌 1 1화에서 영국 수상이 돼지성관계를 하려는 장면을 떠오르게 해서 그런지 그 드라마 사진이 해당 사건 글에 많다.[26] 1997년 총선 때 스태퍼드(Stafford)에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 낙선.
2001년 옥스퍼드 근처 위트니(Witney)에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 당선.
2005년 12월 6일 당수 경선에서 승리, 38세의 젊은 나이에 보수당 대표 취임.
2010년 5월 11일 총리 취임. 43세.
2015년 5월 7일 총리 재선, 48세.
2016년 6월 23일 총리 사임 발표, 49세.
2016년 7월 13일 총리 퇴임, 49세.
[27] 이 시기 버락 오바마미국 대통령도 방한하여 3일 청와대를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접견한 바 있다.[28] 아일랜드 매체 JOE.ie의 영국판이다. JOE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젊은 남성을 주요 독자로 둔 매체이다. 맥시멈 미디어(Maximum Media)라는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참고로 이 회사는 아일랜드 여성 독자를 겨냥한 Her.ieHerFamily.ie라는 매체도 거느리고 있다.[29] 캐머런이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 실시를 동의하는 바람에 진짜 독립할 뻔했고,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인해 EU 탈퇴에 반발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독립 열망에 다시 기름을 부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먼저 실시하고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를 그 다음에 실시했으면 스코틀랜드가 진짜로 독립하게 됐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30] 이 매체는 2주 전에도 보수당 브렉시트 강경파 모임인 유럽연구그룹(ERG)의 의장 제이컵 리스모그(Jacob Rees-Mogg)를 조롱하는 Jacob Rees-Mogg's message for the Common People 매드무비를 공개해 SNS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친 바 있다. 이 패러디의 소스가 된 영상은 Pulp의 Common People 뮤직 비디오이다.[31] 만약 리즈 트러스가 2025년에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21세기에 취임한 영국 총리 3년 징크스가 생길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친다고 가정할때, 다른 총리들이 3년 단임으로 끝날때 캐머런은 6년으로 재임에 성공한 것과 비슷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즈 트러스는 취임 한 달 만에 사임해 이 징크스는 성립되지 않았다.[32] 2016.9.12 사퇴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로 정계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