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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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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디즈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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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볼드 프림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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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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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8세
<rowcolor=#ffc224> 제59대
스탠리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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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rowcolor=#ffc224> 제63대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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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c224>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해럴드 윌슨 해럴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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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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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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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19대

데이비드 비티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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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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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볼드윈
백작
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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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윈스턴 처칠
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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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에드먼드 알렌비
자작
26대

허버트 그리어슨
27대

존 도널드 폴록
28대

앤드루 커닝엄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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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러스터 심
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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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시드니 알프레드 스미스
32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3대

조 그리몬드
남작
34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5대

맬컴 머거리지
36대

케네스 올솝
37대

조너선 위트니 개리옥 윌즈
38대

고든 브라운
39대

마그누스 마그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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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로스
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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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42대

아치 맥퍼슨
43대

뮤리얼 그레이
44대

도니 먼로
45대

맬컴 매클라우드
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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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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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디엘
준남작
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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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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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피터 맥콜
5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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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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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 카옘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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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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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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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컬처넷 컴리 선정 위대한 웨일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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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2위3위4위5위
어나이린 베번 오와인 글린두르 톰 존스 귄보 에반스 리처드 버튼
6위7위8위9위10위
게러스 에드워즈 딜런 토머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로버트 오언 손더스 루이스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avid_Lloyd_George.jpg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출생 1863년 1월 17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랭커셔주 코를던온메드록[1]
사망 1945년 3월 26일 (향년 82세)
영국 웨일스 캐나르폰셔주 트네위드
재임기간 제53대 총리
1916년 12월 6일 ~ 1922년 10월 19일
서명
파일: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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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작위 제1대 드와이퍼의 로이드조지 백작[2]
배우자 마가렛 오웻(1888년 결혼~1941년 사별)
프랜시스 스티븐슨(1943년 결혼)
자녀 5명
정당
}}}}}}}}}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소장파 의원 시절2.3. 내각 활동2.4. 전시 수상으로서2.5. 전후 처리2.6. 실각과 말년
3. 선거 이력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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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차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인물. 클레멘트 애틀리보다 30여년 앞서서 현대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국제적으로도 파리 강화 회의, 아일랜드 독립 승인과 같은 굵직한 사안들에 자취를 남겼다. 덧붙여서 현재 기준으로 자유당에서 배출한 마지막 총리이기도 하다.

'데이비드'가 이름(first name), '로이드'가 가운데 이름(middle name), '조지'가 성(last name)이라고 오해하여 '데이비드 조지' 혹은 '데이비드 L. 조지'라고 부르기 쉬운데, 가운데 이름 없이 '로이드 조지(Lloyd George)'가 통째로 성(last name)이기 때문에 그냥 '조지'가 아니라 '로이드 조지'라고 불러야 맞다. 하이픈(-)으로 연결된 Lloyd-George도 아니고 그냥 Lloyd George로 표기하는데도 그 자체로 하나의 성인 흔치 않은 케이스.

2. 생애

2.1. 초기

1863년 맨체스터에서 출생했다. 맨체스터에서 출생하였지만 부모는 웨일스인이었고, 그의 모어도 웨일스어였다. 지금까지도 모어가 영어가 아닌 영국 총리는 그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그 때문인지 그의 별명도 '웨일스의 마법사(Welsh Wizard)'였다.[3]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890년 실시된 영국 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4] 정치인으로의 생활을 시작한다. 다만 이 시기에 영국 국회의원은 무보수직이어서 먹고 살려고 변호사 활동도 꾸준히 했다고 한다.[5]

2.2. 소장파 의원 시절

그가 막 초선의원에 당선됐을 시절, 자유당의 지도자이자 영국의 수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자 백방 노력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로이드 조지 역시 부모의 모국인 웨일스의 자치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아일랜드 자치권 법안이 영국 하원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면서 글래드스턴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웨일스 자치 운동 역시 시들해졌고, 결정적으로 1895년 영국 총선에서 자유당의 참패 원인으로 지방 자치 운동이 거론되면서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 자치 운동을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6]

하지만 이 시련은 그에게 추진력을 주기 위함이었고 1902년 보어 전쟁제국주의의 비도덕성을 비판[7]하는 연설을 행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정치인이 된다. 이 연설에 분노한 전쟁 지지자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하고, 전쟁 수행 지지 여부를 놓고 자유당이 분열되는 등 시련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감한 연설 덕분에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내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연이어서 교회학교에 국가가 보조금을 제공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8]하면서 자타공인 자유당 내 거물이 된 로이드 조지는 1905년 헨리 캠벨배너먼을 수상으로 하는 자유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상무원(商務院) 장관으로 등용된다.

2.3. 내각 활동

상무원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로이드 조지는 기업인들을 설득하여 노조의 대표권을 인정하는 한편 노사분규를 제어할 목적으로 노사정위원회[9]를 설치한다.[10] 이어서 새로 수립된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내각에서는 1908년 재무부 장관으로 위치를 옮긴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건함 경쟁이 한창이던 와중이었는데 로이드 조지는 파격적이게도 드레드노트 전함의 군축과 이를 통한 복지 증대를 주장한다. 심지어 다음해인 1909년에는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한 개념이었던 불로소득에 대한 징세를 주장하여서 영국의 상류층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다만 로이드 조지의 이런 제안들은 당시 영국 정계에서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나 상원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보수당의 격렬한 반발을 샀던 탓에 모두 무산되고 만다. 특히나 전함 군축 문제와 관련되어서는 야당 보수당이 "We want eight[11] and we won't wait."라임 오지고요이라는 슬로건까지 들고 격렬하게 반대했고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불타오르던 일반 대중들 역시 보수당의 슬로건에 크게 호응하면서 신나게 욕만 먹고 끝난다. 그래도 의의는 있었던게, 이를 계기로 자유당 정부에서 1911년에 예산안에 대해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켜[12] 영국 정치에서 하원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는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비를 조달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러던 중 전쟁 2년차인 1915년에 포탄 위기(Shell Crisis)가 영국 정계를 뒤흔든다. 이 시기 영국군은 포병 전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포탄의 공급량과 질이 크게 떨어졌던 것. 애스퀴스 수상은 부랴부랴 탄약부(Minister of Munitions)이라는 새로운 정부 조직을 만들고 로이드 조지를 이 탄약부의 장관으로 임명한다. 탄약부 장관으로 임명된 로이드 조지는 군수물자의 생산 및 보급 과정에 있어 일대 개혁[13]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효과를 거두면서[14] 로이드 조지는 이 시기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된다.

1916년에는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이었던 키치너 경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에 사망하면서 로이드 조지가 이 자리까지 겸하게 된다. 1916년 7월 그가 전쟁성 장관을 맡기 시작했을 당시 전황은 암울했다. 막 시작된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량[15]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진격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었다. 이런 막장 상황에 빡친 로이드 조지는 더글러스 헤이그를 비롯한 영국군 수뇌부들에게 극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런 극딜과 간섭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16] 한편 영국 정계에서는 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인하여 총리 애스퀴스의 전시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만 갔고, 마침내 1916년 12월 로이드 조지가 파워 게임 끝에 애스퀴스를 사임시키고 영국의 수상이 된다.

2.4. 전시 수상으로서

로이드 조지의 취임과 동시에 독일은 강화 협상을 제의하지만 단칼에 이를 물리친다. 로이드 조지의 주도 하에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1917년 4월 아라스 전투를 개시하고 부분적인 성과를 거둔다. 이 시기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통해 영국을 봉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역시 이에 대항하여 유보트 격파와 상선 생산량 증진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의 이런 전시 정책은 영국에게 소중한 노하우로 자리잡았고 20년뒤인 2차대전 당시에도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전시 연합내각이 그대로 벤치마킹하면서 영국이 암울한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준다.

전쟁 마지막 해였던 1918년에는 영국 내부의 만연한 반전주의,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인력 부족[17],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동맹국의 전선 이탈(+ 서부 전선으로의 독일군 역량 집중)와 같은 고난이 연이어 벌어졌지만 로이드 조지는 굴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영국은 승리를 거둔다.

2.5. 전후 처리

종전 직후였던 1918년 12월에 진행된 선거에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자유당 + 보수당 연립 내각은 압승을 거두면서 국민의 재신임을 받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뒷처리는 남아있었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빅4의 일원[18]으로 참가한 로이드 조지는 전반적으로는 독일에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여줬다.[19]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에는 오랜 세월 영국의 골치를 썩힌 아일랜드의 독립을 사실상[20] 승인한다.

이런 국제 문제 이외에도 로이드 조지는 내정 개혁도 실시한다. 전쟁 와중에 남성을 대신하여 생산 현장에 투입됐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30살 이상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다.[21]

그 외에도 최저임금 관련 법안, 건강 보험 등의 제도를 개정하면서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영국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노력한다.

2.6. 실각과 말년

1922년 로이드 조지가 아일랜드의 실질적인 독립 승인과 더불어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자 연립 내각의 일원이었던 보수당 안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그럼에도, 터키 독립전쟁에 더 무리한 파병을 부르짖으며 1차대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는데 또 전쟁이냐는 비난을 받았고 여기에 로이드 조지 개인의 비리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연립 정권은 빠른 속도로 붕괴됐고 결국 로이드 조지는 같은해 10월 19일에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총리직 사임 후에도 정계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총리직 재도전에 대한 야망을 공공연히 표출했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192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당이 급부상하면서 자유당이 설 입지가 더더욱 좁아지는 결과를 빚어낸다. 그렇지만 로이드 조지 본인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 위상은 대단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22] 1945년 1월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으나 같은 해 3월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890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카나번
1,963 (50.2%) 당선(1위) 초선
1892 영국 하원의원 선거 2,154 (52.4%) 재선
1895 2,265 (52.2%) 3선
1900 2,412 (53.3%) 4선
1906 3,221 (61.7%) 5선
1910.1 3,183 (60.2%) 6선
1910.12 3,112 (62.0%) 7선
1918 13,993 (92.7%) 8선
1922 [[국민자유당(영국)|
국민자유당
]]
무투표 당선 9선
1923
12,499 (63.1%) 당선(1위) 10선
1924 16,028 (82.5%) 11선
1929 16,647 (58.0%) 12선
1931 17,101 (59.3%) 13선
1935 19,242 (66.6%) 14선[23]

4. 여담


파일:AKR20190824055800371_11_i_P2.jpg
'애란(愛蘭)영(英) 수상(首相)'
1920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만평

한국 언론에 캐리커처가 실린적이 있다.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 직전 벌어진 독립전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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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랭커셔주가 아닌 맨체스터 소속이다.[2] 1st Earl Lloyd-George of Dwyfor[3] 원래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신하인 존 디의 별명이었다.[4] 박빙의 차로 당선되었다. 딱 19표 차이.[5] 지금 한국에서야 국회의원의 세비 문제가 꾸준히 논란이 되지만, 사실 국회의원의 보수는 재산이 없는 노동자 출신 의원들이 의정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하라는 요구에서 나온 것이다.[6] 참고로 그가 꿈꿨던 웨일스 자치는 토니 블레어 집권 초기인 1997년에 주민 투표로 가결되면서 1998년에야 자치의회가 설치되면서 시작된다.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 자치도 시작되고 1970년대에 정지됐던 북아일랜드 자치가 부활했다.[7] 다만 추후 총리 시절 1차대전 와중에는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다가 종전 이후 입을 싹 씻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그 역시 엄연한 제국주의자였다. 뭐 그나마 온건한 성향의 제국주의자이기는 했지만...[8] 글래드스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영국 자유당의 핵심 정체성 중 하나는 바로 정교분리였다.[9] 오늘날 한국처럼 노-사-정이 처음부터 한자리에 모이지는 않았다. 역시 자유주의 신봉자 일단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협상을 거쳐 타협에 실패할 경우에만 정부가 개입하는 시스템이었다.[10] 여담이지만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였던 빌헬름 2세 역시 로이드 조지의 이런 조치를 격찬했다고 카더라(...)[11] 당시 영국 해군법(영국 해군의 전력은 세계 2위 3위 국가의 전력을 합친 것보다 많아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법.)에 의거하여 영국 해군은 8척의 드레드노트를 보유해야만 했다. 로이드 조지는 이 8척을 4~6척으로 줄이자고 주장.[12] 물론 상원에서 이 법안도 거부할 수 있었는데 당시 영국 보수당이 분열을 겪었고, 국왕인 조지 5세도 이 법을 지지해 상원에서도 통과될 수 있었다.[13] 전쟁 초반부에는 군 측에서 물자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이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리고 로이드 조지가 군 인사들과 대판 싸운끝에 물자 생산을 철저히 탄약부 및 산업부의 통제 밑으로 두는데 성공한다.[14] 다만 몇몇 군사학자들의 경우에는 로이드 조지가 탄약성 장관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이미 생산 과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고, 로이드 조지는 그냥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15] 개전 첫날에만 5만 8천명의 영국군이 독일군 기관총 앞에 녹아내렸다.[16]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 주도한 갈리폴리 전투를 비롯하여 정치인들이 주도한 군사작전이 다 실패로 끝나자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제발 전쟁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니들 정치인들은 뒷바라지나 잘해라!'라는 분위기가 커져갔다.[17] 로이드 조지 본인도 스페인 독감에 감염됐었다.[18] 파리 강화 회의 조약들의 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4개국과 그 지도자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로이드 조지 외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아 총리가 포함된다. 아래는 파리 강화 회의 당시 4개국 정상의 사진.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71448-004-9BCD8C64.jpg
[19] 클레망소와 달리 독일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재기 불능으로 만드는데 강경히 반대했다.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기 전 독일인들을 레몬짜듯 쥐어짜야 한다고 발언했고, 군사보다는 경제적으로 옭아매려 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적당히 약화시킬 필요는 그도 느꼈기 때문에 카이저의 재판과 신생 폴란드의 바다로 나가는 통로 확보 등의 안건에는 동의를 표했다.[20] 사실상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형식상으로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일부로 남아있었으며, 영국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게다가 북동부 일부가 영국의 영토로 남아있던 건 덤. 아일랜드가 완벽히 영국에게서 독립을 선언한 것은 1937년의 일이다.[21] 영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연령대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1928년이다.[22] 가장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이후 네빌 체임벌린을 실각시키고 윈스턴 처칠을 수상으로 등극시킨 이면에 그의 정치공작이 있었다.[23] 1945.2.13 귀족 임명으로 인한 서민원 의원직 상실.[24] 사실 로이드 조지 뿐만 아니라 다른 각료들도 니콜라이 2세의 망명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의 헤센 대공국 출신인데, 당시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중이여서 자칫하면 왕실폐지론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로 애초에 공주를 독일에 시집보낸 것은 영국이고, 로마노프 왕조가 막장이 된 것에는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가 큰 몫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25] 해당 문제는 파리 강화 회의에 관련된 문제인데,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이름이 다 나오는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만 이름이 안 나오고 성의 일부인 '로이드'가 이름처럼 나왔다. 여담으로 해당 문제에서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클레망소 총리는 (가)은/는 알자스 로렌 지방에 대한 모든 이익과 권리를 지체없이 프랑스에 반환해야 한다고 했고, 로이드 조지 총리는 (가)은/는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가)의 정체는 다름아닌 독일 제국.[26]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영국 외무부 대표단으로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