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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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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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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die Merc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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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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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988
[ Compi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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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2000

2006

2016

2019
[ 관련 문서 ]
||<tablewidth=100%><tablecolor=#19233e,#fff><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fff><colcolor=#000><width=20%> 일생 ||<width=1000>생애 · 솔로 활동 ||
소속 그룹
관련 인물 메리 오스틴 · 폴 프렌터 · 짐 허튼
에세이 Queen 예술적 상상력의 르네상스
기타 음역대 · 추모 콘서트 ·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 · 프레디 머큐리 동상 · 프레디 머큐리 호텔 · 가든 로지


파일:퀸(밴드) 심볼.svg
Queen
프레디 머큐리
브라이언 메이
존 디콘
로저 테일러
[ Spinoffs ]
||<tablebgcolor=#fff,#1c1d1f><tablecolor=#000,#fff><width=999><nopad>파일:Queen+Paul.png
파일:Queen+Adam.png

2004 - 2009

2011 -
[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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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1974

1974

1975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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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1978

1980

1980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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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1986

1989

1991

1995
이후의 콜라보레이션 앨범에 관한 내용은 퀸(밴드)/+ 폴 로저스, 퀸(밴드)/+ 아담 램버트 문서의 '디스코그래피' 문단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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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파일:Freddie Mercury New Haven.jpg
출생 1946년 9월 5일
잔지바르 술탄국 스톤타운
(現 탄자니아 잔지바르 스톤타운)
사망 1991년 11월 24일 (향년 45세)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로건 가 가든 로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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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업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소속 Ibex (1969)
Sour Milk Sea (1970)
(1970 - 1991)
서명 파일:프레디 머큐리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부모 아버지 : 보미 불사라
(1908년 12월 14일 - 2003년 12월 26일)
어머니 : 제르 불사라
(1922년 10월 16일 - 2016년 11월 13일)[2]
형제자매 여동생 : 카쉬미라 쿡 (1953년 - )[3]
파트너 메리 오스틴 (1970 - 1976)[4]
바바라 발렌틴 (1984 - 1985)[5]
짐 허튼 (1985 - 1991)[6]
학력 세인트 피터스 스쿨 (졸업)
아이즐워스 공예 대학교 (졸업)
일링 미술 대학교 (졸업)[7]
종교 조로아스터교[8]
신체 178cm, 72kg[9], B형
활동 기간 1969년 - 1991년
장르 ,
악기 보컬, 피아노
레이블 팔로폰 레코드, 할리우드 레코드, EMI 레코드, 컬럼비아 레코드, 폴리도르 레코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
1. 개요2. 생애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3.1. 보컬리스트로서
3.1.1. 보컬 스타일3.1.2. 음역대
3.2. 프론트맨으로서3.3. 작곡가로서3.4. 작사가로서3.5. 연주자로서
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4.2. 컴필레이션 앨범
5.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언사
5.1. 밴드 멤버5.2. 음악가
5.2.1. 국내
5.3. 배우5.4. 유명 인사
6. 프레디 머큐리 동상7. 기타8. 여담9. 둘러보기


1. 개요

<nopad> 파일:230426101346-freddie-mercury-file-1986-restricted.jpg
1986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영국싱어송라이터로, 영국의 록 밴드보컬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10]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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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 소속되어 있던 퀸은 리스너와 평론가의 평가가 갈리는 밴드이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재능만큼은 평론가든 청자든 모두가 인정하며, 보컬부터 키보드 연주와 작곡까지 모든 부분을 소화한 불세출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야누스적인 보컬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 그리고 특유의 오페라틱하고 멜로딕한 작곡력으로 퀸이 세계구급 밴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레이디 가가, 커트 코베인, 케이티 페리 등 후대의 여러 보컬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러한 보컬계에서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록 음악과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1. 보컬리스트로서

1981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의 Bohemian Rhapsody 라이브
프레디 머큐리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격과 그의 모든 열정은 우리가 포착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진짜 문제는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He was a sweet guy, great voice. His personality vocally and his whole projection we can't capture. The real thing about today is that he is not here.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물론 록 보컬계에서는 여러 밴드들의 보컬리스트들이 높은 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는 로버트 플랜트, 로니 제임스 디오 등과 더불어 가창력 부문에서 본좌급에 위치해 있는 아티스트이다. 특히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기라성 같은 재능의 소유자들이 즐비한 록 음악사에는 '프레디보다 큰 성량과 넓은 음역대를 가진 보컬'도 있고 특정 스타일의 노래에서는 프레디를 능가하는 소화력을 지닌 '전문성이 프레디보다 투철한 보컬'도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처럼 록 음악 외의 다양한 음악 장르[12]의 감성을 록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보컬은 그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퀸의 음악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슈퍼마켓 음악'이라고 폄하당한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다양함에 있었는데, 이토록 폭넓은 퀸의 음악 세계를 이음매나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형태로 표현해낸 프레디 머큐리의 다채로운 보컬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3] 애초에 드럼 리듬뿐인 "We Will Rock You"나 기타 사운드가 거의 없이 베이스 리프로 진행되는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같은 곡을 빈틈없이 완벽한 노래로 만들었던 건 프레디의 보컬과 라임, 리듬 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14]
Love Is The Hero (1985) Ensueño (1988)
대중들에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테너 성부의 보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부일 가능성이 높다.#[15] 80년대에 있었던 6차례의 인터뷰를 발췌하여 유럽 3국[16] 연구팀이 연구한 결과, 프레디 머큐리가 말하는 중간 기본 주파수가 117.3Hz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주파수는 바리톤의 노래 목소리를 암시하기도 한다. 솔로 앨범 <Barcelona>를 같이 작업한 적이 있던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는 이를 간파하고 프레디 머큐리에게 "당신의 성부는 바리톤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굳이 고음을 부르지는 말아요. 고음역대는 소프라노인 내가 할게요."라고 했고, 이에 프레디 머큐리는 "아니요, 제 팬들은 저를 록 가수로만 알고 있고 제가 바리톤으로 노래하면 제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navertv(85380022)]
Rock in Rio 페스티벌 공연에서 선보인 보컬
파일:pav vs fre.jpg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프레디 머큐리의 비브라토 속도 비교[출처]
초당 4,000프레임으로 스웨덴의 가수 다니엘 장거 보르히의 성대를 촬영하면서, 연구팀은 프레디 머큐리가 어떻게 노래했을지 자세히 분석한 적이 있다. 이 방법을 통해 프레디 머큐리가 실제로 서브하모닉스(subharmonics)[18]를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록 가수에게는 희귀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프레디 머큐리의 비브라토를 분석한 결과 머큐리의 성대가 다른 가수들의 성대보다 더 빨리 진동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머큐리의 비브라토는 무려 7.04Hz로 움직였지만, 전형적인 서양 클래식 가수는 5.4Hz에서 6.9Hz 사이의 비브라토를 가지고 있다. 또한, 프레디 머큐리의 비브라토 파형은 0.57의 값을 가졌는데, 성대가 다중 주파수로 변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가장 이상적인 비브라토는 진폭 1의 완벽한 정현파이며, 오페라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거의 근접했다. 따라서 프레디 머큐리의 비브라토는 불규칙적이었고, 매우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프레디 머큐리는 개인적 생활에서 마약을 접하였다는 루머는 있지만, 음원 녹음이나 공연 준비를 위해 약물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스튜디오와 무대에서만큼은 매우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목 관리와 발성 준비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중 하나는 따뜻한 차를 자주 마시는 것이었다. 특히 레몬을 첨가한 허브차나 진한 홍차를 즐겨 마셨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성대를 촉촉하게 유지하고 점막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녹음 세션 전후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습관이었다. 또한 그는 차뿐만 아니라 ‘보이즌베리 시럽’[19]과 같은 달콤한 과일 시럽을 목을 코팅하는 용도로 마시기도 했다. 이러한 음료들은 약물이 아닌, 목소리를 위한 자연스러운 보조 수단이었다. 이와 함께 프레디는 본격적인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장시간의 발성 연습을 진행했다. 저음에서 고음까지 음계를 오가며 성대를 충분히 워밍업했고, 스튜디오 안에서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치며 목소리를 풀기도 했다. 그는 특유의 폭넓은 음역대를 안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이러한 기본적인 루틴을 철저히 지켰다.

이러한 습관은 동시대 록 아티스트들과 대조적이었다. 롤링 스톤스키스 리처즈, 브라이언 존스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 존 본햄 등은 녹음 과정에서조차 알코올과 마약의 영향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반면, 프레디는 사생활에서의 방종과는 달리 녹음과 공연 준비 과정에서는 목 관리와 체력 유지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음반에서나 라이브 무대에서나 일관되게 높은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컨디션이 최상인 공연에서도 3옥타브 초반의 곡들은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낮추어 불렀는데, 이것의 이유가 프레디 머큐리의 성부가 바리톤이기에 여러 번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아닌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초고음을 한 번에 깔끔하게 내지르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다만 성부라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고, 프레디 머큐리처럼 성부가 애매한 사람들은 그날의 컨디션마다 테너일수도 바리톤일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프레디 머큐리는 바리톤이라기엔 톤이 높고 음색이 얇기에, 흔히 말하는 '테리톤'일 가능성이 높다.[20][21]

보컬로서 역량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의 대학 시절부터였다. 단, 그 당시에는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다소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22]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스스로 수많은 연습을 통해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이미 테크닉적으로 거의 안정된 보컬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이는 대다수의 록 보컬리스트들의 특징으로, 이들은 정석적인 발성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창법을 썼기 때문에 금방 목이 상하고 컨디션의 기복이 큰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본인이 존경한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로버트 플랜트, 로저 달트리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느낌으로 곡을 소화하며, "It's Late"에서는 로버트 플랜트의 느낌으로 곡을 소화해낸다. 가끔씩 맑은 가성으로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만큼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로큰롤부터 로버트 플랜트 풍의 하드 록, 심지어 오페라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그에 걸맞은 보컬을 소화할 수 있었기에, 대중들과 평론가들 모두 프레디를 보고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3]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창법을 바꾸어 그 특성을 많이 잃은 케이스이기도 하다. 1980년 이후로 성대 질환이 생기고 담배를 피워 피치가 조금 떨어지고 음색이 변한 감이 있지만 그보단 창법의 변화로 내츄럴 보이스를 내지 않고 먹는 소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차이점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이다. 주로 연대별로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데, 1970년대 보컬은 자신의 미성을 매우 활용해 모험적인 발성은 최대한 삼가며, 성대가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 창법을 주로 사용했다. 고음에서는 맑고 힘차며, 종종 오페라틱한 요소가 느껴질 만큼 극적인 표현을 사용했고, 중저음은 풍부하고 따뜻하면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텍스처를 가지고 있어 곡의 감정적 깊이를 더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으며,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 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1980년대 스타일이다.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경탄의 대상이기도 하다.

3.1.1. 보컬 스타일

1974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1991년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의 전성기는 대체로 1979년 후반 ~ 1982년 중반 정도로 규정된다.[24] 1982년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계속되는 공연으로 점점 목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프레디의 지속적인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2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발매한 퀸의 10집 앨범 <Hot Space>가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며, 1983년에는 밴드에서의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1984년 퀸의 11집 앨범 <The Works>와 함께 다시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으나 이 시기는 프레디의 컨디션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기였다. 목 상태는 지난 투어로 인해 나빠져 있었고 흡연으로 목소리도 두터워져 본 고장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상당히 많은 삑사리를 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변화된 목소리에 적응된 프레디 머큐리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에는 두터워진 목소리로 고음을 지르는데 전성기만큼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두터운 고음이 전성기 고음보다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27]

1984년의 마지막 공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반투스탄들 중의 하나인 보푸사츠와나의 선 시티[28][29]에서 가졌는데,[30] 변화된 목소리에 완벽히 적응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총 9일간의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10월 7일의 공연에서 4번째 세트리스트의 "Somebody to Love"를 부르다 목에 생긴 혹으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프레디가 백스테이지로 퇴장하고 조명이 전부 꺼진 후에, 프레디가 나오길 기대하던 관중들이 특유의 리듬을 만들며 "We Will Rock You"를 떼창하던 도중, 선 시티 라이브 기획자인 헤이즐 펠드먼이 라이브가 취소되었다고 관중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때 프레디 머큐리는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1985년은 브라질상파울루에서 13만 1천명[31]이라는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다. 첫째 날 콘서트에서는 "Somebody to Love"를 매우 잘 소화했다.[32]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2옥타브 라#(A#4)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상당히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다.[33] 그리고 찾아온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하게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기도 하였다.[34]

계속되는 투어로 1980년대 중-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보컬을 잘 소화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1986년의 웸블리 공연의 둘째 날의 공연에서 프레디의 가창력이 좋지 않은 부분이 여럿 보이는데, 첫째 날 공연에서 갑작스럽게 비가 내려 그대로 그 비를 맞으며 불러서 둘째 날의 공연은 최악의 컨디션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35] 보통의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진성 고음을 잘 보여주진 않지만[36][37], 가성 고음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3옥타브 후반대 ~ 4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을 자유자재[38]로 낼 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가성이 날카롭다면, 프레디 머큐리의 가성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이다.[39]

굳이 단점을 꼽자면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것이다.[40] 다만 이는 로버트 플랜트, 이안 길런 등 당시 고음형 록 보컬리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다. 이는 정석적인 발성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닌 본인들만의 고유한 창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련받지 않은 목을 혹사시키는 창법을 사용한 이들이 세계 투어를 다니면서 성대에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을 때의 라이브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며,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이 위대한 보컬리스트임을 절대 부정할 수 없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대가 약했다는 추측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에서 순간적으로 성대 근육을 조이고, 흉식호흡법[41]을 통해 순간적으로 크게 들이킨 호흡을 폭발시켜 벤딩없이 피치를 높이고, 심지어 이런 방식에 스크래치까지 넣는 창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는 음성학이 발달하고 보컬 트레이닝이 보편화된 지금은 절대 권장되는 창법이 아니다. 일반인은 비슷하게 따라하기도 힘들며 숙련된 보컬리스트도 몇곡 부르고 나가 떨어질 정도로 목에 무리가 간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는 이런 창법으로 거의 대부분의 곡을 소화하며 끝까지 기복 없이 공연을 마친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프레디의 성대가 유난히 약했다기보다는 다른 가수에 비해 성대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써야하다보니 기복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 활동을 하던 시기는 컴퓨터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던 때가 아니었고, 이를 감안하면 스튜디오에서 그의 가창력은 왜 그가 록 역사상 최고 중 한 명으로 불리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나오지 않는 고음을 마구 난사하기도 하고, 저음도 굉장히 안정적이며, 발음도 정확하다.[42]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는 가성을 라이브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진성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면서 부르면 템포가 처질 것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나 "Somebody to Love"가 그렇다. 원곡엔 가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나, 거의 모든 부분을 진성으로 처리했다. 거의 모든 곡을 진성으로 처리하다 보니 컨디션 좋은 날과 안 좋은 날의 차이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프레디가 가성을 못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가성 고음을 뽐내는 경우가 많아 이유를 추정하기 힘들 뿐이다.

자신을 포함한 퀸 멤버들 모두의 곡을 앨범에 싣다 보니 장르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 퀸은 발라드[43], 디스코[44], 성악[45]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는 미성 위주였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탁성까지 쓰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미성과 탁성을 자유자재로 쓴다.[46] 가성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데, 아름다운 가성[47]을 보여줄 때가 있는가 하면, 샤우팅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가는 부분[48]을 보여줄 때도 있는데, 이게 다 곡에 있어서 어색함이 없다.

1990년대 들어서는 1970년대보다도 더 가볍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1980년대의 폭발적인 성량과 노련한 발성 테크닉에 흡연 이전의 1970년대의 음색이 더해지며 소리가 더욱 날카롭고 명확하게 들린다.

퀸의 곡은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막상 약 2~3시간 진행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퀸의 곡을 불렀지만, 원곡만큼 해냈다고 평가받는 무대는 조지 마이클의 "Somebody to Love", 씰(Seal)[49]이 부른 "Who Wants to Live Forever",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정도뿐이다. 사실 이는 절대적인 난이도 자체가 엄청 높은 게 아니라 프레디만큼 올라가는 보컬은 찾아보면 많지만 프레디처럼 올라가는 보컬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레드 제플린이 보급했던[50] 보컬과 기타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방식을 퀸 또한 받아들여서 프레디 머큐리는 보컬과 피아노만 담당했다.[51] 그래서 퀸이 처음 데뷔했을 때, 보컬과 기타가 철저하게 분리된 퀸을 보고 평론가들이 레드 제플린의 짝퉁이라고 많이 비판했다고 한다. 물론 프레디 머큐리는 애초에 밴드의 시작점부터 다르다며, 평론가들의 억지 주장을 반박했다.

3.1.2. 음역대

Exercises In Fre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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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이 곡에서 최고음은 3옥타브 파(F5)로 기록되었다. 여성 성악가를 연상시키는 고음부터 남성 특유의 진한 저음까지 자유롭게 넘나들며, 남성과 여성의 영역을 초월하는 독특한 음역을 선보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파(F2)[52]에서 3옥타브 파(F5)[53], 가성 음역대는 5옥타브 미(E7)[54][55][56]까지 선보인 적이 있다. 곡 중에서는 아니지만 0옥타브 도♯(C♯2)까지 내린 적도 있다.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의 이러한 가성 실력으로 완성된 앨범이 <Barcelona>이기도 하다. 한 인터뷰에서 로저 테일러가 말하길, "난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남자 보컬리스트인 레드 제플린로버트 플랜트,[57] 건즈 앤 로지스액슬 로즈[58]와 자주 비교되지만, 그 표현력과 음색의 다양성에서는 차별성을 보였다.

3.2. 프론트맨으로서

파일:Queen - Radio Ga Ga G.gif
파일:KNEBWORTH RADIO GAGA.gif
대표적인 퍼포먼스인 Radio Ga Ga 코러스 파트[59]
로큰롤 역사에 프레디 머큐리를 능가하는 쇼맨이 있었는가?
Did rock and roll ever have a better showman than Freddie Mercury?

빌보드, <The 25 Best Rock Frontmen of All Time>
연극적인 연기를 하는 모든 공연자들 중에서도 프레디는 다른 이들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한계를 넘어섰다.
Of all the more theatrical performers, Freddie took it further than the rest. He took it over the edge.

프레디는 단순한 가창력 좋은 보컬리스트란 평가를 넘어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중 한 명이자 라이브 공연계의 본좌로 평가받는다.[60] 퀸이 같은 록 밴드, 아니 대중음악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뮤지션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프레디의 폭발적인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프레디는 더 후의 어마어마한 팬이었기에, 더 후가 추구하던 파괴적인 무대 매너에 영향을 받아 무대 위에서 온갖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하면서 관중들을 조련하였다.[61] 또한 프레디 머큐리는 레드 제플린, 특히 로버트 플랜트의 광팬이었기에, 프레디 사후 브라이언 메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프레디는 라이브 공연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62] 그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프론트맨인 믹 재거의 영향 또한 받았다고 한다.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유도 기술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타디움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기획자인 밥 겔도프[63]는 '그날 공연한 밴드 중에서 그냥 퀸이 최고였다'라고 평했고[64], 같은 공연에 출연한 엘튼 존이 퀸의 공연 이후, 프레디의 트레일러로 가서 'You bastards, you stole the show[65]'라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하며 농담했다.[66] 당시 라이브 에이드 공연 특성상 모든 아티스트에게 20분의 시간만 주어졌고 퀸의 콘서트에 평소 사용하는 조명, 특수효과 장치 같은 것은 전혀 쓸 수 없었기에, 이 날의 공연은 오직 프론트맨인 프레디의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매료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레디는 그걸 해냈다. 당시 U2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은 공연이었다.

특히 밴드의 피아니스트[67]라는 특성 때문에 세션 피아니스트를 고용하기 전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프레디는 공연 거의 대부분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휘어잡고 조련하는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은 얼마나 그가 비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68][69]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프레디의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서있는 것 조차 부담백배인 10만명 청중 앞에서 쫄기는 커녕 확 제압해버리는 무게감과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퀸에 뒤늦게 빠진 팬들은 무대에서 마치 거인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파일:magic-tour-live-at-slane-castle-1986.webp
프레디가 그처럼 인상적인 무대 매너와 쇼맨쉽을 보일 수 있었던 건, 단지 퍼포먼스 면에서의 기교와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걸 좋아하고 그들과 같이 호흡하는 걸 즐길 줄 아는 타고난 무대 체질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뛰어난 록 뮤지션이라 해서 모두가 청중앞에서의 공연을 좋아하는 무대체질인 건 아니다. 프레디와는 정반대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의 공연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록 보컬리스트의 대표적인 예로 커트 코베인이 있다. 그는 유서에서 자기는 프레디 머큐리처럼 공연에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즐길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즐기는 것처럼 연기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싫으니 어찌하면 좋냐는 내용의 비통함을 적어 놓기도 하였다.[70][71]

프레디는 공연이란 하나의 '쇼'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퀸 초기 때부터 적자를 보더라도 공연 조명과 의상에 예산을 가장 많이 쏟아부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조명부터 후기에 사용하던 거대한 조명 장치 등 화려한 조명이 퀸 공연의 또다른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멤버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날개옷과 강렬한 화장도 모두 프레디의 취향이며, 다른 멤버들이 밝히길 프레디가 계속 화려한 옷들을 입으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입게 되었다고 한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의 관중 조련
공연 중간에 목을 풀 겸 독특한 소리[72]를 낸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공연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 프레디 머큐리가 외치면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호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의 'Ay-Oh'는 전체 공연 중 가장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손꼽히며, 라이브 공연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장면은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 장악력과 퀸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중 조련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1975년 일본 나고야에서의 공연에서부터 관중과의 보컬 교류가 존재했었고, 이후 1978년~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형태가 잡혀갔다. 그리고 1985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공연부터는 'Ay-Oh'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특히 1986년 웸블리 공연의 관중 조련 영상은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

3.3. 작곡가로서

1985년 발매한 One Vision의 제작 과정[73]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에는 "Bohemian Rhapsody",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Love of My Life", 그리고 솔로 시절의 "I Was Born to Love You" 등 시대를 초월하는 명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초기에는 하드 록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무거운 곡들을 썼지만, 점차 발라드, 디스코, 오페라, , 가스펠,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해 나갔다. 특히 "Bohemian Rhapsody"는 이런 장르적 융합의 상징과도 같은 곡으로, 오페라, 발라드, 록을 결합한 혁신적인 구성을 통해 1970년대 록 음악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다.

프레디의 작곡 방식은 매우 직관적이었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악보를 읽는 데 능숙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청음 능력과 감각으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곡을 쓸 때는 전통적인 악보가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기호와 메모 형식을 사용했으며, 대부분의 곡은 피아노를 기반으로 작곡되었다. 멜로디가 떠오르면 즉시 녹음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선율만을 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프레디의 말에 따르면, '기억되지 않는 멜로디는 그만큼 가치 없는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프레디는 단순하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쓰는 데 능했지만, 동시에 음악 구성 자체는 복잡한 편이었다. 수 차례의 조성 전환, 예상치 못한 전개, 하모니 구조 등은 그가 단순한 팝 작곡가가 아닌 창의적 구조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항상 장르적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에 발표한 Hot Space 앨범은 디스코와 댄스 음악의 비중이 높아 기존 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프레디의 작곡이 한동안 가볍고 상업적인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1987년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판정을 받은 이후, 그는 다시 창작에 몰두하며 Barcelona, The Miracle, Innuendo 등의 앨범에 참여한다. 특히 'Barcelona'에서는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클래식과 록의 결합을 시도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Innuendo'에서는 마지막까지 장대한 스케일의 곡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후반기의 창작은 프레디가 단지 스타성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끝까지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했던 진지한 작곡가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퀸 멤버들과의 협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저 테일러존 디콘이 곡을 쓸 때도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구성을 함께 고민했고, 브라이언 메이와는 자주 충돌하면서도 서로를 자극하는 관계였다. 다만 브라이언은 곡에 대한 자신의 철학이 뚜렷했기 때문에, 종종 둘 사이의 의견 충돌이 심한 언쟁으로 번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프레디 머큐리는 완벽히 정형화된 작곡가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성과 직관, 그리고 장르적 호기심을 기반으로 음악을 창조해낸 다층적인 창작자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감하거나 산만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도들은 퀸을 단순한 록 밴드가 아닌 음악 실험실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결국 프레디의 작곡 세계는 록 음악을 넘어선 하나의 예술적 개성으로 기억되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3.4. 작사가로서

1984년 자신의 작사 과정에 대한 인터뷰
프레디 머큐리의 가사는 장르와 어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편집 감각이 특징적이다. 록 오페라 서사극 "Bohemian Rhapsody", 가스펠 합창을 차용한 "Somebody to Love", 로커빌리 향취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까지, 곡마다 어휘·운율·형식을 달리해 “같은 일을 반복하길 싫어한다”던 그의 창작 태도가 드러난다. 동시에 그는 복잡한 음악 구조에도 관객이 곧바로 흥얼거릴 수 있는 핵심 후렴을 배치해 실용성을 확보했다. 대표 사례가 "We Are the Champions"로, 머큐리는 ‘We’가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두”를 가리킨다고 설명하며 집단 합창을 노렸고, 이 곡은 2005년 Sony Ericsson 전 세계 인기곡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비슷한 해에 발표된 "We Will Rock You"와 짝을 이루며 스포츠 경기장 단골 응원가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참여형 구조가 존재하기도 하다.

가사 해석을 둘러싼 불가해성도 머큐리 작품의 중요한 특질이다. "Bohemian Rhapsody"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그냥 인간관계에 관한 노래”라며 추가 설명을 거부했고, 밴드 역시 “해석은 듣는 사람 몫”이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결과적으로 학계·언론이 40년 넘게 ‘자아 살해 서사’ · ‘커밍아웃 은유’ 등 여러 가설을 제시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노래에 서사적 깊이를 부여하는 동시에, 청중이 스스로 의미를 투영하도록 여지를 남긴다.

머큐리 본인은 자신의 가사를 고급 예술로 포장하기보다 즉각 소비되는 팝 제품으로 간주했다. “내 노래는 면도날 같다. 즐기고 버리는 일회용 팝”이라는 1980년대 발언은 그가 효과 중심의 실용적 작법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자평은 ‘문학적 완성도’보다는 노래 전체의 음향·퍼포먼스를 우선시한 그만의 우선순위를 설명해 주는 자료다.

예컨대 퀸의 대표곡 "Bohemian Rhapsody"에는 이탈리아어아랍어 어원을 가진 외국어 어휘(“Scaramouche”, “Bismillah”, “Figaro” 등)가 혼합되어 등장한다. 또한 <Mustapha>에서는 아랍어페르시아어에서 기원한 듯한 문구들을 반복해 사용하며, 록 음악에서 드물게 이슬람 문화권의 언어적 색채를 도입했다. 이런 시도는 당대 서구 록 밴드 중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솔로 활동과 퀸의 후기 곡들에서는 스페인어일본어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Las Palabras De Amor (The Words Of Love)"는 스페인어 구절을 전면에 내세워 라틴풍 감성을 표현했으며, 실제로 남미 투어 당시 현지 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일본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그는 일본어 단어와 정서를 노래에 녹여내기도 했으며, 일본 투어에서는 현지어로 팬들과 교류하려 노력했다. 심지어 퀸의 곡 "Teo Torriatte (Let Us Cling Together)"는 일본어 가사가 포함된 몇 안 되는 록 발라드로, 지금도 일본 팬들에게는 상징적인 곡으로 남아 있다.
파일:a-winters-tale-ukcd1inner.jpg
생전 마지막으로 작사했던 A Winter's Tale의 자필 노트
특히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 마지막으로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A Winter's Tale"은 평소 즐겨 쓰던 극적 전개나 다중 파트, 언어유희는 찾아보기 어렵고, 대신 창밖의 눈과 붉은 하늘, 강물 소리를 담담히 묘사하며 현재의 고요를 포착한다. 이러한 단순성과 관조적 시선 덕분에 곡은 삶의 끝자락에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화자의 평온함을 선명히 드러냈다. 영국의 평론가는“거의 눈으로 보는 듯한 ‘Dreamy Landscape’를 말 몇 줄로 완성한 시”라며 머큐리를 “자유형 시인”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했다.#

3.5. 연주자로서

1979년 해머스미스에서의 Don't Stop Me Now 라이브 1986년 부다페스트에서의 Seven Seas of Rhye 라이브
퀸에서 리드 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가장 차별적인 특징이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도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74]

건반악기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록 밴드에서 그랜드 피아노는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를 놔두고 왜 그런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존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75]
파일:JLRULKEPIBNHJIA474IM7IJJ24.jpg
프레디 머큐리가 사용했던 Yamaha G2 Grand Piano
한편, 개인적으로 특히 야마하의 G-2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를 애용했다고 한다. 해당 그랜드 피아노는 머큐리가 1975년 자신의 음악을 위해 이상적인 악기를 찾겠다며 약 6개월 간의 철저한 조사 후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해당 피아노로 "Bohemian Rhapsody"의 오페라 파트와 피아노 파트를 작곡하기도 했다.[76]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을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1982년 Hot Space Tour부터는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식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라이브 한정 세션맨이었던 스파이크 에드니에게 거의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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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연주 中
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으나, 기타도 자주 연주했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6개의 코드를 연주했다.[78][79] 참고로 1982년의 Hot Space Tour까진 12현 통기타[80]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81] 기타 실력은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수준급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브라이언 메이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타 아이디어를 그에게 설명할 때 기타를 붙잡고 안되는 연주를 시도하다가 피아노로 뛰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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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앨범
발매일 제목 리드 싱글 UK Charts Billboard 200 총 판매량
1985.04.29. Mr. Bad Guy I Was Born to Love You 6위 159위 500,000 ~ 1,000,000장
1988.10.10. Barcelona Barcelona 25위[82] - 1,000,000 ~ 2,000,000장

4.2.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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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앨범
발매일 제목
1992.11.16. The Freddie Mercury Album
2000.10.23. The Solo Collection
2006.09.04. Lover of Life, Singer of Songs
2016.09.02. Messenger of the Gods: The Singles
2019.10.11. Never Boring

5.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언사

5.1. 밴드 멤버

프레디는 정말 엄청난 천재였다. 그는 한 번 무대에 서면 그 자체로 공연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는 다른 사람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다.
브라이언 메이
프레디는 우리가 한 일을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담아냈다. 그는 천재였다.
로저 테일러

5.2. 음악가

프레디는 내가 만난 가장 자유로운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그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했다. 나는 그가 굉장히 혁신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존 레논
그는 정말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였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끝없이 즐거웠다.
엘튼 존
프레디는 나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나를 이해해 주었고, 내가 그와 함께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꿈만 같았다.
데이비드 보위
프레디는 나에게 록의 본질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이 진정한 록 스타인지, 어떻게 관객과 소통해야 하는지 보여줬다. 나는 그와 함께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꿈과 같았다.
애덤 램버트
프레디 머큐리는 내가 아는 가장 대단한 아티스트 중 하나였다. 그와의 작업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가 남긴 음악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독특했으며, 그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전설적이었다.
조지 마이클
화려함 뒤에는 진정한 공연자로서 성공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성공적인 음악가가 되고도 자신감을 가지고 그것을 투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순종적인 조건이다. 프레디는 그것을 가졌고, 그것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로버트 플랜트
저는 프레디 머큐리를 좋아했고 퀸은 "Radio Ga Ga"로 히트를 쳤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좋아한다. 그는 독특했고, 팝 음악에서 가장 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가수일 뿐만 아니라 환상적인 공연자였고, 연극인이었고,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천재였다.
레이디 가가
프레디 머큐리는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사를 쓸 때의 그의 냉소적인 접근과 '난 엿도 안 사줘'라는 태도가 합쳐져서 내 음악에 큰 영감을 줬다.
케이티 페리
어렸을 때 프레디 머큐리의 가사를 붙잡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음악 형식에 대해 알려주었고... 내 마음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위대한 선생님은 없었다.
액슬 로즈
그는 관객의 사랑과 환호를 진심으로 즐기고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점을 정말 존경하고, 또 부러워한다.
커트 코베인
음악 산업은 예술 대 상품이다. 폭발하는 것 말고 뭐가 남았는가? 제발, 하루 중 어느 시점에 아이들에게 "Bohemian Rhapsody"를 틀어주도록 하라. 듣게 하라. 가능성을 보여주어라.
시로 그린
나에게 그는 사람들이 삶을 충만히 사는 것을 덜 두려워했던 시대를 대표한다. 이는 록의 사치가 극에 달했던 70년대였다. 아마도 우리는 더 이상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로큰롤의 정신 전체를 대표하는 영광스러운 반항심, 자유가 있다.
애니 레녹스
나는 꿈을 쫓고 있었고, 그것은 그 덕분이다.
테일러 호킨스
가장 중요한 프론트맨, 프레디 머큐리.
제라드 웨이
프레디 머큐리는 정말 큰 인물이었어요. 퀸은 제 인생 내내 레코드를 냈고, 모두가 잃어버린 우리의 일부예요.
리사 스탠스필드
프레디는 경기장을 정말로 바로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엘리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팬과 함께 저는 그의 뛰어난 공연과 훌륭한 목소리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프랜시스 로시

5.2.1. 국내

평생의 롤 모델이자 영웅, 그의 작곡 능력에는 범접할 수조차 없지만 그의 쇼맨십은 비디오를 통해 많이 배웠다. 만약 영국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퀸을 만나 내가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말하고 싶다.
싸이
나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보컬 스타일을 퀸의 프레디 머큐리의 창법에서 많이 따왔다. 그와 퀸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인터뷰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김종서
그전에는 프레디 머큐리, 조지 마이클 등 내가 존경하는 가수들의 목소리를 흉내내 보려고 했다. 일부러 성대의 후두부를 죄어서 여리고 가는 소리를 내려고도 했다. 그런데 한 보컬 트레이너가 '말처럼 전달할 수 있는 노래가 가장 어필하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조성모

5.3. 배우

프레디 머큐리는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혜성처럼 우리 문화 풍경을 가로질러 달려간 특별한 록 스타이다. 그의 재능의 밝은 빛은 그의 삶이 너무나 잔인하게 사라져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고,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금도 흥분시킨다. 제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
엘리자베스 테일러

5.4. 유명 인사

프레디 머큐리는 단순히 록 밴드의 일원이 아니라, 영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세계적으로 사랑받았고, 그는 대중 문화에서 위대한 아이콘으로 남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6. 프레디 머큐리 동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레디 머큐리 동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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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ddie_Bronzestatue_rueckansicht.jpg
몽트뢰 레만호의 동상

7. 기타

7.1.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레디 머큐리 동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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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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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같은 퀸의 멤버였던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가 1992년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 종료 후 설립한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퇴치 자선단체 재단이다.

7.2. 프레디 머큐리 호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레디 머큐리 호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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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레디 머큐리 호텔#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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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레디 머큐리 호텔#|]]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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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몽트뢰에 위치한 호텔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의 말기 당시에 거주했던 건물이며, 시간이 지나 호텔로 리모델링되었다.

8. 여담

파일:external/29.media.tumblr.com/pU1p3ehaPpu7pfzb15B3Upjdo1_500.jpg
마이클 잭슨 & 프레디 머큐리 & 존 디콘[86]
2014년 마이클 잭슨과의 듀엣 리믹스로 발매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
파일:로버트 플랜트 & 프레디 머큐리.jpg
로버트 플랜트 &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 & 브라이언 메이 - Imagine
파일:external/www.mibba.com/e8b78c5f.jpg
짐 허튼
작가 존스에 따르면, 자신이 'B'라고 주장하는 딸이 2022년에 자신을 찾아와 '나는 프레디의 딸'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해당 여성은 현재 48세로, 유럽에서 의료 전문가로 일하는 중인 것으로 전해지며, 'B'는 "프레디 머큐리는 내 아버지였고 지금도 그렇다"며 "그는 나를 사랑했고, 헌신적이었다. 내가 태어난 환경이 비정상적일 수도 있지만 나를 사랑한 아버지가 보여준 헌신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언급했다. 딸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머큐리의 부모와 여동생, 퀸의 멤버들, 그리고 머큐리의 파트너였던 메리 오스틴만 알고 있었다고 존스는 전했다. 'B'는 프레디 머큐리가 1991년 사망하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자신을 찾아왔고, 직접 쓴 17권 분량의 일기를 건네줬다고 밝혔다. 'B'는 이제 와 머큐리의 일기를 공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30년 넘게 이어진 거짓말과 추측, 왜곡 끝에 프레디가 말을 할 때가 됐다"면서 "중년의 나이에 내 존재를 밝히기로 한 건 오로지 내 결정이고 강압을 받거나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해당 일기를 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1976년 6월 20일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존스는 주장했다. 일기에는 머큐리가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기숙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이후 1964년 영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이 자세히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마지막 일기는 건강이 악화한 1991년 7월 31일에 쓴 것이었다고 한다. 존스는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본능적으로 모든 걸 의심했지만, B가 몽상가가 아니란 것이 명백했다"면서 "누구도 그 모든 것들을 꾸며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9. 둘러보기

프레디 머큐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입성 연도 2003년 출처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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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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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빌보드 직원들이 록 밴드의 리드 싱어 50위를 선정했다. 따라서 솔로 아티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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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 재거 스티비 닉스 프레디 머큐리 로버트 플랜트 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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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번 데비 해리 조지 클린턴 보노 액슬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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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스미스 로저 달트리 헤일리 윌리엄스 스티븐 타일러 크리시 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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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타이프 크리스 코넬 잭 화이트 캐슬린 한나 데이비드 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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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모리슨 에디 베더 캐런 오 롭 핼포드 재니스 조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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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요크 루 리드 앤서니 키디스 앤 윌슨 스티브 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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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제인 그레이스 오지 오스본 구스타보 세라티 체스터 베닝턴 그레이스 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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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스트러머 그웬 스테파니 이기 팝 폴 매카트니 브리트니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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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갤러거 세르이 탄키안 코트니 러브 제리 가르시아 코리 글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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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티렌 폴 웨스터버그 데이브 그롤 루벤 알바란 잭 데 라 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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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빌보드 직원들이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 기준이 아닌 영향력, 음악적 유산 등을 고려하여 Top 25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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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스프링스틴 프레디 머큐리 지미 헨드릭스 엘비스 프레슬리 재니스 조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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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믹 재거 척 베리 데이비드 보위 패티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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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스티비 닉스 짐 모리슨 조니 미첼 로버트 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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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밥 딜런 보노 데비 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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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제인 그레이스 조 스트러머 캐슬린 한나 스티븐 타일러 존 본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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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Voices of the Century
※ 2001년 영국 BBC 방송이 약 44,756명의 대중들과, 현직 가수들, 음악 전문가를 상대로 조사한 투표를 바탕으로 '20세기의 목소리'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엘라 피츠제럴드 빙 크로스비
6위 7위 8위 9위 10위
존 레논 아레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프레디 머큐리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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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NME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보컬리스트)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2011년 영국의 대중음악 전문지 NME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를 진행. 1,000만 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엘비스 프레슬리 액슬 로즈 존 레논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데이비드 보위 로버트 플랜트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아레사 프랭클린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매튜 벨라미 레이 찰스 짐 모리슨 밥 말리 엘튼 존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커트 코베인 스티븐 타일러 믹 재거 마빈 게이 티나 터너
출처 }}}}}}}}}

파일:cos 로고.jpg파일:cos_로고_다크.png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16년 영화/음악/TV를 주제로 다루는 컨시퀀스 잡지 스태프들이 '가장 위대한 가수 Top 100'을 선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빌리 홀리데이 프레디 머큐리 아레사 프랭클린 제임스 브라운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휘트니 휴스턴 로이 오비슨 에이미 와인하우스 로버트 플랜트 비요크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같이보기: 사운드트랙, 힙합, 이모, 인더스트리얼 }}}}}}}}}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08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000,#ddd ※ 롤링 스톤이 2008년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아레사 프랭클린 레이 찰스 엘비스 프레슬리 샘 쿡 존 레논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빈 게이 밥 딜런 오티스 레딩 스티비 원더 제임스 브라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 - 50위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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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폴 매카트니 리틀 리처드 로이 오비슨 알 그린 로버트 플랜트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믹 재거 티나 터너 프레디 머큐리 밥 말리 스모키 로빈슨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조니 캐시 에타 제임스 데이비드 보위 밴 모리슨 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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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윌슨 행크 윌리엄스 재니스 조플린 니나 시몬 프린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하울링 울프 보노 스티브 윈우드 휘트니 휴스턴 더스티 스프링필드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닐 영 엘튼 존 제프 버클리 커티스 메이필드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척 베리 조니 미첼 조지 존스 보비 밴드 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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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시 클라인 짐 모리슨 버디 홀리 도니 해서웨이 보니 레이트
51위부터는 문서 참조.
}}}}}}}}} ||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23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000,#ddd ※ 롤링 스톤2023년 새해를 맞아 2008년에 발표됐던 위대한 가수 리스트를 리뉴얼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아레사 프랭클린 휘트니 휴스턴 샘 쿡 빌리 홀리데이 머라이어 캐리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비욘세 오티스 레딩 알 그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 - 5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리틀 리처드 존 레논 팻시 클라인 프레디 머큐리 밥 딜런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프린스 엘비스 프레슬리 셀리아 크루즈 프랭크 시나트라 마빈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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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시몬 아델 스모키 로빈슨 조지 존스 메리 제이 블라이즈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폴 매카트니 돌리 파튼 마할리아 잭슨 샤카 칸 행크 윌리엄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루서 밴드로스 데이비드 보위 베시 스미스 톰 요크 더스티 스프링필드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커트 코베인 밴 모리슨 커티스 메이필드 루이 암스트롱 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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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타 제임스 테디 펜더그래스 아리아나 그란데 제임스 브라운 엘라 피츠제럴드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마비스 스테이플스 린다 론스태드 토니 브랙스턴 로드 스튜어트 조니 미첼
5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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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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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1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록 리드 싱어 10인"을 선정한 것이다.
록 음악이 아닌 재즈, 소울 등 다른 분야의 가수들은 투표에서 제외되었다.
1위2위3위4위5위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 보노 믹 재거 짐 모리슨
6위7위8위9위10위
로저 달트리 에디 베더 존 레논 크리스 코넬 커트 코베인
같이 보기: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파일:the top tens 로고.png선정 10대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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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Top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10대 싱어송라이터 순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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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밥 딜런 폴 매카트니 조쉬 그로반 폴 사이먼
<rowcolor=#ffffff,#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브루스 스프링스틴 로저 워터스 닐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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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top tens 로고.png선정 10대 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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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Top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10대 송라이터 순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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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마이클 잭슨 폴 보크토르사보이
<rowcolor=#ffffff,#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폴 사이먼 프레디 머큐리 피트 타운젠드 캐롤 킹 조니 미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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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top tens 로고.png선정 10대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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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Top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10대 작사가 순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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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로저 워터스 존 레논 에미넴 커트 코베인
<rowcolor=#ffffff,#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프레디 머큐리 폴 사이먼 닐 영 투팍 샤커 엘리엇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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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top tens 로고.png선정 10대 보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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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Top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10대 보컬리스트 순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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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잭슨 엘비스 프레슬리 로버트 플랜트 휘트니 휴스턴
<rowcolor=#ffffff,#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폴 매카트니 아레사 프랭클린 아델 존 레논 프랭크 시나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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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top tens 로고.png선정 10대 섹시한 남성 록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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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Top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10대 섹시한 남성 록 가수 순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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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액슬 로즈 짐 모리슨 크리스 코넬 로버트 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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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본 조비 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허친스 빌 발로 자레드 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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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모님이 인도계 파르시이고 프레디 본인도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인도에서 보냈지만, 인도 국적은 가져본 적이 없다. 과거 영국은 형식상이긴 했지만 식민지인들도 본토 영국인과 같이 대영제국의 신민으로 간주해 영국 시민권을 주었는데, 프레디가 태어난 잔지바르도 1964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이었기 때문에 프레디 역시 영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프레디가 영국으로 이주할 때까지만 해도 식민지인들이 영국 본토에서 영국인으로써 정착하는 것에 법적으로 별다른 제약이 없었기에 프레디도 영국으로 이주한 후 별다른 제약 없이 영국에 정착했으며 따라서 다른 국적은 가져본 일 없이 단독 영국 국적이다.[2] 프레디 본인이 단명한 것과 반대로, 부모님은 두 사람 모두 90대까지 장수하였다.[3] 로저 쿡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고, 현재 자말 주크, 나탈리 쿠크 두 명의 자녀가 있다. 프레디 머큐리와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4] 1951년 3월 6일 ~[5] 1940년 12월 15일 ~ 2002년 2월 22일. 오스트리아의 여배우. 프레디의 두번 째이자 마지막 이성 파트너로 알려져 있다.[6] 1949년 1월 4일 ~ 2010년 1월 1일. 마지막까지 프레디와 함께했던 동성 연인으로 프레디와 마찬가지로 에이즈에 감염됐으나 이후 완치되어 사인은 폐암이였다.[7]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피트 타운젠드도 이 학교를 나왔다.[8] 부모가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도였다. 프레디 본인은 크게 종교적인 삶을 살지 않았으나 신앙 자체를 버리지는 않은 듯하다.[9] 초창기에는 54kg의 저체중이었다. 72kg는 1984-85년의 건강한 체격일 때였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90kg까지 증량, 이후 지병으로 인해 다시 감량되었다.[10] 보컬과 키보드 외에도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와 같은 곡에서는 세컨 기타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11] 프레디 머큐리의 롤모델이나 다름 없는 로버트 플랜트가 한 평가이니, 그야말로 할 말은 다 한 셈이다.[12] 오페라틱, 소울, 디스코, 흑인 음악 등.[13] 당장 퀸이 평론가들에게 한창 까일 때에도 멤버들의 세션 실력으로 까인 적은 없었다.[14] 이 노래의 작곡가인 존 디콘은 프레디에게 흑인 음악의 느낌을 담아주기를 원했고, 실제로 발매 후 이 노래를 들은 미국 흑인들은 퀸이 흑인 밴드인 줄 알았다고 한다.[15] 프레디 머큐리와 마찬가지로 하드 록 계열에서 바리톤 성종인 보컬리스트로는 로저 달트리, 액슬 로즈, 데이비드 커버데일 등이 있다.[16] 스웨덴, 오스트리아, 체코[출처] Herbst, CT, Hertegard, S., Zangger-Borch, D., & Lindestad, P. Å. (2016). Freddie Mercury—말하는 기본 주파수, 비브라토, 그리고 하모닉의 음향 분석. Logopedics Phoniatrics Vocology , 42 (1), 29–38.[18] 성대를 특수한 방식으로 진동시켜 기본음보다 한 옥타브 낮은 음을 내는 기술을 서브하모닉스 창법이라고 한다. 성악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19] 블랙베리·라즈베리 교배종인 보이즌베리로 만든 달콤한 과일 시럽으로, 목을 부드럽게 코팅해주는 효과가 있어 가수들이 애용하기도 한다.[20] 이와 비슷한 보컬로는 프레디 머큐리가 영향을 받은 가수인 로저 달트리가 있다. 로저 달트리 또한 성부는 바리톤이지만 음색이 다소 얇은 편이었으며, 당대 기준 매우 안정된 발성을 바탕으로 라이브에서도 3옥타브 대의 고음과 샤우팅, 스크리밍을 원키로 구사하였다.[21] 사실 바리톤이나 테너란 용어 자체가 성악에서 나온 용어인데, 성악가들은 소화하는 음역에 따라 저음은 굵은 음, 고음은 얇은 음으로 나뉘지만 대중 가수들은 발성법이 각자 천차만별로 다르기에 이런 식으로 단순히 나뉘지 않는다.[22] 로저 테일러는 "양이 시끄럽게 우는 것 같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3] 보통 로저 달트리, 로버트 플랜트와 같이 "카멜레온같은 보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4] 라이브 투어로는 Crazy Tour부터 유럽 Hot Space Tour까지이다. 77~78년의 News of the World Tour 또한 보컬 컨디션이 뛰어나고 안정적이었던 투어다.[25] 사실 이런건 록, 특히 고음 위주로 노래를 부르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리스트들이 예외 없이 겪는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목 관리를 잘 하지 않고 전성기 시절 역량을 다 소화해서 현재는 제대로 된 보컬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이안 길런, 액슬 로즈 등이 있다. 굳이 하드 록으로만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리암 갤러거 역시 목을 갈아마시는 창법으로 인해 목이 많이 상해서 한때는 액슬 로즈 급으로 보컬을 소화하지 못하다가, 꾸준한 관리와 창법 변경을 통해 현재에는 제2의 전성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회복하였다. 오히려 프레디 머큐리는 기복은 있었어도 커리어 말기까지 보컬 기량 자체는 거의 떨어지지 않은 케이스다.[26] 반면에 1984년 9월 5일 런던 공연에서는 "Under Pressure"의 3옥타브 라(A5) 파트를 4옥타브 파(F6)로 올려 부른 적도 있다.[27] 선시티 라이브나 슈가르트 공연에서 느낄 수 있다.[28] Sun City (선 시티), 현 남아공 노스웨스트 주에 있는 대규모 콘도, 카지노 시설이다.[29] 참고로 공연은 선 시티 내부의 공연장인 슈퍼 볼에서 진행했다. 실내 공연장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어서 현재까지도 많은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는 곳이다.[30] 하지만 그때 당시의 뮤지션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발하여 남아공에는 공연을 하러 가지 않았는데, 퀸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최대 병크인 반투스탄까지 가서 공연을 했기에 언론에서 인종차별 밴드라고 지탄을 받게 되기도 했다.[31] 음악사상 가장 많은 관중이 참석한 콘서트 중 14위.#[32] 지역 방송국에서 유출된 화질과 음질이 나쁜 영상은 존재하지만, 공식 발매된 앨범에서는 이 부분이 포함되지 않았다.[33] 여담으로 퀸은 일본 투어에서는 Sheer Heart Attack Tour와 대부분 일본 투어의 첫 날을 제외하면 컨디션이 늘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는 퀸의 마지막 일본 공연인 오사카 공연만 제외하면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 그런데 하필 도쿄에서는 3차례의 공연을 가졌는데 그 중 가장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마지막 날 공연만 영상 자료가 남아있다.(물론 도쿄 공연 중 에서지, 실제로는 최악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다른 The Works 투어에 비하면 꽤나 좋은 컨디션이다.)[34] 라이브 에이드는 사실 프레디가 의사와 상담한 결과 프레디의 목에서 혹이 발견돼서 의사조차 공연을 말렸으나, 프레디가 강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목에 혹이 난 상태로 3옥타브 도(C5)를 소화한 것은 경이롭다.[35] 이렇다보니 목소리를 덧붙이는 오버더빙이 많은 부분에서 사용되었다.[36] 뉴캐슬에서의 "Bohemian Rhapsody", 영상에서 3분 21초에 3옥타브 도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37] 컨디션이 매우 좋은 공연에서도 원곡의 3옥타브 대의 고음을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처리하는 편인데, 못 낼 것 같아서 못 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컨디션 조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38]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았던 웸블리 공연의 둘째 날 공연에서도 3옥타브 라#(A#5)의 엄청난 고음을 냈다.[39] 다만 프레디 머큐리도 로버트 플랜트처럼 샤우팅스러운 가성을 못 냈던 것은 아니다. It's Late에서의 가성을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로버트 플랜트 또한 부드러운 가성을 못 냈던 것은 아니었다. "Kashmir"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40] 1986년 웸블리 공연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차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날도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지라 목소리 갈라짐이 꽤 있었지만 둘째 날처럼 탈진된 목소리는 아니었고 파워풀한 고음을 뿜어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41] 1981년 몬트리올에서의 'Let Me Entertain You' 라이브 영상(1분 18초 경부터 참조). 워낙 빠른 곡인데다가 가사가 빽빽해서 그랬기도 하지만, 숨을 쉴 수 있는 타이밍이 있으면 최대한 짧고 빠르게 흉식호흡을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프레디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에 올라오는 목빗근은 흉식호흡의 보조 역할을 하는 호흡근이다.[42] 이는 퀸의 7집 앨범 <Jazz>에 수록된 "Dead on Time"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속도가 거의 랩 수준인데도 발음이 완벽하다.[43] 대표적으로 "Love of My Life", 프레디 머큐리의 감성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곡으로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44] <Hot Space>에 수록된 몇몇 트랙들.[45] 솔로 앨범 <Barcelona> 등[46] 퀸의 14집 앨범 <Innuendo>에 수록된 "Don't Try So Hard"에서는 1970년대의 보컬이 되돌아왔다고 봐도 될 정도의 미성을 내며, A Kind of Magic에 수록된 "Gimme the Prize"에서는 굉장히 강한 하드 록 분위기에 맞는 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47] "Under Pressure" 등.[48] "One Vision"에서의 3옥타브 솔(G5) 부분, "It's Late"에서의 4옥타브 미(E6) 부분 등.[49] 흑인 팝 가수로, 항상 대머리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걸로 유명한데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선 레게 스타일을 하고 나왔다. 히트곡으론 Crazy, Kiss from a Rose, Fly Like an Eagle 등이 있다.[50] 레드 제플린 이전에도 더 후로저 달트리피트 타운젠드라는 보컬-기타 듀오가 있긴 했지만, 이를 대중화시킨 것은 플랜트-페이지였다. 또한 애초에 피트 타운젠드는 거의 서브 보컬에 가까울 정도로 보컬에 많이 참가했다.[51] 그 외에 다룬 악기는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서 기타를 연주하거나 일부 곡에서 (대표적으로 "Keep Yourself Alive", "Liar") 탬버린을 두들기는 게 전부이다. 하지만 둘 다 그의 주 악기는 아니었다.[52] "All Dead, All Dead", "Somebody to Love", "Don't Try Suicide", "Bijou".[53] "All God's People".[54] 도나 소토 모레티니의 대중가요 도서 <Popular Singing: A Practical Guide To: Pop, Jazz, Blues, Rock, Country and Gospel, A & C Black>에는 4옥타브 파 (F6)으로 기록되어 있다.[55] 5옥타브 미(E7)은 1981년 2월 16일 공연 <Get Down, Make Love> 부분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노래에서만 4옥타브 솔# (G#6), 4옥타브 레(D6)를 추가로 선보였다.[56] 반면에, 최대 D8까지 선보였다는 정보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프레디 머큐리/음역대 문서를 참고.[57] 0옥타브 도 ~ 4옥타브 시[58] -1옥타브 파 ~ 4옥타브 라#으로 음역대가 알려진 모든 가수들 중에서 가장 넓다. 하지만 이는 전성기 기준이며, 현재는 목이 엄청 상하였다.[59] 위의 공연은 라이브 에이드, 아래의 공연은 퀸 완전체 마지막 라이브 공연Queen Live at Knebworth Park이다.[60] 보통 ‘최고의 프론트맨’을 꼽지면 믹 재거, 로저 달트리, 재니스 조플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액슬 로즈,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로버트 플랜트, 리암 갤러거 등과 함께 절대 빠지지 않는다.[61] 그래도 더 후처럼 악기를 부수거나 하지는 않았다. "Sheer Heart Attack"을 연주할 때 스피커를 쓰러뜨리는 정도였다.[62] 다만 프레디의 실제 성격은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기에,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불안감과 수줍음이 묻어나오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63]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로, 핑크 플로이드의 벽에서 주인공 핑크를 연기한 사람이기도 하며, 사실 이 사람도 그리 히트를 치지 못했지만 엄연한 뮤지션이다. 아일랜드의 펑크 밴드 Boomtown Rats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었다.[64] 관련 업계인의 증언에 따르면 밥 겔도프는 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퀸의 라이브 에이드 섭외도 공연을 며칠 앞둔 나중에서야 이루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프레디 머큐리는 퀸 휴식기에 TV 방송으로 라이브 에이드 광고를 보고 자기가 섭외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자괴감을 느꼈을 정도였다고.[65]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이 자식들아, 니들끼리 다 해먹냐?' 정도.[66] Queen’s Live Aid Performance: How Rock’s Royalty Stole The Show[67] 키보드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므로 키보디스트로 서술하지 아니하였다.[68] 이 마이크의 유래는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프레디의 퀸 이전 소속 아마추어 밴드였던 Wreckage 공연에서 마이크를 스탠드에서 분리하던 중 스탠드가 부서지며 마이크에 막대기가 달린 채 분리되어 버렸고, 프레디는 얼떨결에 생겨난 이 새 유형의 마이크를 마음에 들어해 이후 공연에서도 계속 쓰게 된 것이다.[69] 이는 후대에도 전승되어 후배 밴드인 건즈 앤 로지스의 보컬 겸 프론트맨 액슬 로즈가 받침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마이크 스탠드를 쓰기도 했다.[70] 유서 중 해당 부분: "나는 당신들 누구도 속이기 싫다. 내가 공연할 때 100% 즐기는 척하며 속이는 건 (뮤지션으로서) 최악의 범죄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난 그것이 억지로 가야만 하는 직장 출근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I can't fool you, any one of you. The worst crime I can think of would be to rip people off by faking it and pretending as if I'm having 100% fun. Sometimes I feel as if I should have a punch-in time clock before I walk out on stage."[71] 본인도 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순위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이건 사실 너바나라는 이름값으로 올라간 것이고 커트 코베인은 유능한 프론트맨이라고 보긴 어려웠다.[72] 통상적으로는 'Ay-oh' 또는 'Vocal Improvisation'이라고 표기되며, 부틀렉 등에선 'Day-oh'로 표기된다.[73] 본 영상은 로저 테일러의 드럼 트랙과 자신의 보컬 트랙의 화음을 작업하는 상세한 과정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이다.[74]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 참조.[75] 이후 인터뷰에서 프레디는 그 전기 피아노를 꺼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름을 말하는 것도 질색하는 수준의, 거의 경멸에 가까운 반응(전기 피아노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 망할 것"(That damn thing)이라고 그냥 뭉뚱그려 말했다.)을 보였다. 해당 곡은 라이브에서는 프레디가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한다.[76] 2023년, 이 피아노는 메리 오스틴에 의해 경매에서 174만 2000파운드(약 30억 원)에 낙찰되었다.#[77] 가령, 1970년대의 투어에서는 거의 공연의 절반을 피아노에 앉아 보냈지만 마지막 투어였던 Magic Tour의 경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곡은 In the Lap of the Gods...Revisited", "Seven Seas of Rhye",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단 4곡 뿐이었다. 다만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공연의 세트 리스트에서 피아노 연주곡이 점점 적어진 탓도 있다. 매직 투어에서는 위의 곡들도 포함해서 피아노 연주곡이 <Tutti Frutti>,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까지, 여섯 곡이었다.[78] 라이브에서 브라이언 메이가 아니라 프레디가 직접 친 이유는 스튜디오 버전의 해당 파트를 녹음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레디 머큐리 사후 공연들에선 브라이언이 프레디 파트까지 모두 연주한다.[79] 1982년의 Hot Space Tour의 밀턴 케인스 공연에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연주하기 전, 프레디는 "10년 전 내가 기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코드 3개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코드 3개뿐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80] Ovation 사의 Pacemaker 12-Strings 기타.[81] 텔레캐스터는 본인 소유의 기타로 추정된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 사후에 분실되었다고 한다.[82] 1992년 재발매 15위[83] 이곳에는 퀸의 옛 녹음 스튜디오이자 퀸 박물관이 있다. 퀸의 매니저 짐 비치(Jim Beach)가 여기에 거주하고 있다. 카지노 안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처음 방문하는 경우 입구를 찾기 어려운 편이다.[84] 위에서 세번째 사진 속 모습.[85] 다만 브라이언 메이는 이 동상에 대해 탐탁지 않아했다고 한다. 프레디는 단순히 기념 동상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었다.[86] 1982년 9월 15일, 퀸의 마지막 북미 공연인 로스엔젤레스 잉글우드 공연에서의 모습이다.[87] <Victory>, <State of shock>,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 이 중 <State of shock>은 마이클이 프레디의 권유로 롤링 스톤스믹 재거와 마무리 작업을 거쳐 공개되었다.[88] 2014년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Queen Forever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89] 레슬리 앤 존스의 프레디 머큐리 전기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90] 로버트 플랜트는 프레디 머큐리를 향해 'Great Voice'라며 칭찬했으며, 한창 퀸이 평론가들에게 대차게 까이고 있을 때 본인은 퀸을 좋아한다고 했다. 또한 로버트 플랜트와 프레디 머큐리에 따르면 이 둘은 꽤나 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레드 제플린의 리더인 지미 페이지와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는 같은 동네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향이기에 이를 통해 친분을 맺었을 수도 있다.[91] 그러나 밴드 대 밴드로서 레드 제플린과 퀸이 비교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적 영향력이 워낙 거대하며 퀸 또한 레드 제플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밴드이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은 동시대의 거대한 밴드이자 똑같이 영향력이 막대한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와 자주 비교되며, 그 외 동시대 밴드로는 딥 퍼플, 블랙 사바스와 자주 엮이는 편.[92] 퀸이 데뷔한 1973년 당시 레드 제플린은 5집 Houses of the Holy를 발매하며 당시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발매한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진출에 성공한 The Game 시기를 퀸의 전성기로 본다면, 퀸이 한창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을 당시 레드 제플린은 드러머 존 본햄의 죽음으로 인해 해체했을 때였다. 그러나 A Night at the Opera 시기로 따지면 당시 레드 제플린은 Physical Graffiti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려가던 시기였다. 즉 주 활동 시기는 고작 5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셈.[93] 두 보컬 모두 넓은 음역대를 바탕으로 저음과 고음에서 탄탄한 보컬을 보여준 것은 맞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주로 3옥타브 초중반대의 고음역대에서 허스키하면서도 중성적인 미성 샤우팅을 구사하는 하이 테너의 대명사로 꼽히는 반면, 프레디 머큐리는 주로 2옥타브 중후반대의 중고음에서 폭발적인 두꺼운 미성을 구사하는 로우 테너 혹은 하이 바리톤에 가깝다.[94] 물론 나이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폭발적인 가창력은 거의 볼 수 없으나, 현재의 가창력도 어마어마한 것은 사실이다.[95] 1980년 12월 9일, 영국 런던 웸블리 아레나[96] 의외로 당시 영국 음악 씬은 굉장히 좁았기에,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뮤지션들이 알고보면 상당히 친한 사이인 경우가 많다.[97] 다만 이런 프레디에게도 절친한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엘튼 존로드 스튜어트. 엘튼의 콘서트에 프레디가 게스트로 참여한 적도 있다.[98] "So you're this Freddie Platinum bloke that's supposed to be bringing ballet to the masses."[99]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를 하는 건 프레디가 초기에 콘서트에서 입었던 발레의상같은 의상들을 비꼰 것이다.[100] "Ah, Mr. Ferocious, we're trying our best, dear.''[101] 사실 프레디 머큐리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만약 거기서 치고 받으며 싸웠다면 이기든 지든 결국 손해보는 건 잃을 게 없는 시드 비셔스가 아닌, 이미 톱스타인 프레디 머큐리쪽이다.[102] 언론들의 질문 공세에 자기는 그냥 자신일 뿐이라고 일갈했었다.[103] 메리 오스틴과의 연애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80년대 중반에도 바바라 발렌틴이라는 여배우와 사귄 전적이 있다.[104] 남녀 상관없이 애인 관계가 복잡했던만큼 바람 핀 애인들도 많다. 프레디 동성애인 중 한명인 '토니 바스틴'이 프레디가 미국투어를 하고 있을 때 바람피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를 미국으로 오라며 비행기표를 보냈고 도착해서 프레디를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한뒤 바로 영국으로 돌려보냈다.[105]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는 그 아들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106]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107] 짐 허튼은 아일랜드계이다. 아일랜드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108] 쫓겨났지만 자신보다 메리를 더 믿은 프레디나 메리를 그다지 원망하지 않았고 상속받은 50만 달러로 아일랜드로 돌아가 편히 살다가 사망했다.[109] 메리는 프레디 전재산의 절반과 모든 저작권, 집 등을 상속받았다.[110] 로저 테일러가 책에 대해서 '짐 허튼을 잘 알고 출판계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 이 책을 반대하진 않지만, 프레디라면 이런 책의 출판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111] 참고로 로저 테일러 179 cm, 존 디콘 180 cm, 브라이언 메이 188 cm[112]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 동료 뮤지션이 프레디의 이를 보고 드라큘라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프레디가 정색하면서 욕을 해서 주변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113] 프레디는 뻐드렁니가 심했다. 특히 어린 시절 사진은 튀어나온 앞니만 보일 정도이다. 치의학적으로는 상악이 과다 발달한 2급 부정교합에 해당한다. 거기에다 아랫니들의 치열은 덧니가 울퉁불퉁하게 나있기도 했다. 그러나 프레디는 치아 교정을 권유하는 지인들에게 혹시라도 발성에 지장이 있을까봐 교정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114] 정확히는 1987년 "The Great Pretender" 커버 당시 밀었는데 위선자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밀었다 한다.[115] 솔로 앨범 1집 <Mr. Bad Guy>도 자신의 고양이와 전 세계의 애묘인에게 바쳤다.[116] The Game Tour, Hot Space Tour[117] 다만 평소에 원음으로 부르던 'No time for losers cause We are the champions'파트는 낮춰불렀다.[118] 로저 테일러는 중년이 넘어갈 때까지도 괜찮은 목상태를 유지했고, 선천적으로 높은 성부에 창법 상의 이점이 더해져 고음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목소리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파워는 프레디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경향이 있다.[119] 1984년의 Sun City에서의 공연은 몹시 유려한 가창을 들려준다.[120] 공연마다 20곡을 넘게 연주했고 그나마 쉰다해도 이동하고 2~4일 만에 공연을 다시 진행해 때마다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진행했다.[121] 기모노를 꽤 좋아하는지 이후 1976년 9월 Summer Gigs 공연들과 1977년 북미 A Day at the Races Tour에서도 입었다.[122] 그렇다고 레오타드를 그만 입은 것은 아니었다. 1978년 영국 공연, 북미 재즈 투어 일부 공연, 1979년 일본 공연이나 몇몇 크레이지 투어 공연에서도 공연 후반에 반짝이 레오타드를 입었다.[123] 빨강과 검정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124] 12월 4일 뉴캐슬 공연 때는 흰색이었다.[125] 바지가 빨강일 때는 파랑, 검정일 때는 빨강 무릎 보호대를 찼었다 다만 리버풀 12월 7일 공연에서는 리버풀과 에버튼 축구팬들을 위해 두색의 무릎 보호대를 각각 두 개 다 찼다.[126] 가끔 맨발핫팬츠도 입었었는데 영상으로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연 후반부와 81 몬트리올 공연 후반부에서 볼 수있다.[127] 나시티의 디자인이나 백바지는 플래시 고든 투어에서 입던 것들과 다르긴 하다.[128] 주로 노란 재킷이었으나 완전 하얀색이거나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경우도 있었다.[129] 노란줄이거나 하얀줄인 경우도 있다.[130] 공식 석상에서는 로우탑도 많이 신기는 했는데, 오니츠카타이거나 아디다스 삼바 등을 주로 신었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대부분 하이탑을 신었다.[131] 공연에서 신었던 레슬링화는 나이키 블레이저 미드 '77과 디자인이 비슷했다.[132] 다만 1985년 호주는 예외였다.[133] 1976년 당시에는 여성 파트너인 '메리 오스틴'과 교제 관계였으므로 '불륜 관계'로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