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교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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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bordercolor=#f8e6c0><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gcolor=#fff,#000><bgcolor=#293f6e> 조로아스터교
مزدیسنا[1] | Zoroastrianism
拜火敎 | 배화교 ||
مزدیسنا[1] | Zoroastrianism
拜火敎 | 배화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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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3f6e><colcolor=#f8e6c0> 창시자 |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 자라수슈트라) |
기원 | 기원전 1800년경 ~ 기원전 640년경 페르시아 |
신에 관한 사상 | 단일신교Henotheism |
규모 | 약 12만 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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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의 대표 상징 파라바하르(Faravahar)[3]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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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유적의 파라바하르 부조 |
[ruby(𐬵𐬏𐬬𐬀𐬭𐬱𐬙𐬀, ruby=huvarshta)] [ruby(𐬵𐬏𐬑𐬙𐬀, ruby=hūkhta)] [ruby(𐬵𐬎𐬨𐬀𐬙𐬀, ruby=humata)][4]
[ruby(کردار نیک, ruby=kerdaar-e nik)] ،[ruby(گفتار نیک, ruby=goftaar-e nik)] ،[ruby(پندار نیک, ruby=pendaar-e nik)][5]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또는 배화교(拜火敎)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로,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일신교(Henotheism)이다.[6]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ruby(کردار نیک, ruby=kerdaar-e nik)] ،[ruby(گفتار نیک, ruby=goftaar-e nik)] ،[ruby(پندار نیک, ruby=pendaar-e nik)][5]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
'배화교'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묘사한 이들의 모습이 주로 불을 숭상한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실제로는 조로아스터교도가 하루에 5번 진행되는 의식을 신성히 여기기 때문에 의식에 쓰이는 성화를 보존하려고 한 것이지, 토속 신앙에서처럼 불을 숭배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이란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란 국민들에게는 전통적인 페르시아를 상징하던 유서 깊은 종교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묻히게 되어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는 것은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조로아스터교와 매우 연관이 깊은 페르시아 신화는 이란과 중앙아시아 국가 등지에서 문화적 자긍심 고취의 목적에서 중요하게 교육 및 홍보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종교 자체는 오히려 본고장인 이란보다 저 멀리 유럽에서 더 인기가 많다.[7]
경전은 아베스타이다.
2.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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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역사
고로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연구는 창시자로 알려진 자라투스트라의 생년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자라투스트라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19세기 말까지는 소위 '전통적인 연대'라고 하는 기원전 6세기란 주장이 지배적이었으나 19세기 말 이후부터 바르톨로메아(Bartholomea)와 크리스텐센(Christensen)과 같은 학자들이 '전통적인 연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자라투스트라의 글로 알려진 가타스의 고대 아베스타 언어와[9] 리그베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가타스와[10] 리그베다의 언어가 비슷한 시기의 언어임을 밝혀냈다.[11]
리그베다와 고대 아베스탄어는 매우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근거 이외에도 내용에서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서로 매우 유사하다. 이는 두 집단이 인도-이란(Proto-Indo-Iranian)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12]
결론적으로 기원전 6세기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전무하지는 않지만, 조로아스터의 활동 시기를 두고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기원전 제2천 년기 말에서 제1천 년기 초 사이이다.[13]
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Moubed)에 의하면 서사시와 천문학에 기반하여 기원전 1768년을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의 태어난 년도로 측량한다고 한다. #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1. 창시와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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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하위 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3.2. 사산 왕조 시대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 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 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 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 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단순한 신앙 체계를 넘어 국가 운영의 사상적·제도적 근간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왕권 강화와 제국의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이러한 조로아스터교 중심 질서 강화 과정에서 제국 내 다른 종교들과의 갈등도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마니교 등 경쟁 종교 집단들에 대해서 처음에는 관용적인 입장을 보였지만[14] 이후 조로아스터교적 국가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되었으며, 특히 마니교 창시자 마니가 처형된 사건은 조로아스터교 정통주의가 이단적 요소를 배제하는 전형적 사례로 평가된다. 한편 호스로 1세가 마즈다크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주요 경전인 아베스타의 재편찬/첨삭 사업이 시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아베스타에서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은 동서 교역로를 장악한 대제국으로서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다원적 성격을 유지했으며, 종교적 갈등과 더불어 일정한 수준의 종교적 공존도 병존하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산 왕조 시대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제국 영내에서 국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로아스터교 교리가 폐쇄, 배타적으로 변하면서 사산 제국 영토 바깥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를 무너트리는 시점에 등장한 마니교가 기존 조로아스터교 대신에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한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이슬람 세력의 등장이었다.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급속히 사산 제국 영토로 확장되었고, 결국 651년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의 죽음과 함께 사산왕조는 멸망했다. 조로아스터교는 그와 함께 국교의 지위를 잃고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인도 서부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집단이 바로 오늘날 인도 뭄바이 지역에 존재하는 파르시(Parsi) 공동체다.
3.3. 이슬람 시대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사이의 악연은 예언자 무함마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니샤푸르에서 의학을 배워 와서 메카에 병원을 차린 안 나디르 빈 알 하리스(An Nadhir Ibn Al Harith)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할 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함마드의 설교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있던 아랍인 청중들에게 카야니아 왕조[15] 연대기에 나오는 에스판디야르왕이나 로스탐 신화를 들려준 후,“여러분, 무함마드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재밌는 우화를 말했다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나디르는 바드르 전투 때 패배하며 포로로 잡혔는데, 다른 쿠라이쉬 포로들의 경우는 관대한 처우[16]가 내려졌던 것과 반대로 나디르는 무함마드 앞에서 바로 참수당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동로마군이 7세기 초 동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 왕조를 격퇴하자 이를 매우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정통 칼리파 시대의 아랍 정복자들도 페르시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속 신앙과 달리 조로아스터교도 단일신교에 해당하는 종교이고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와 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근친혼 풍습까지 허용해 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 취급 받던 마즈다크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 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게다가 10세기를 전후로, 마잔다란의 사산 왕조 후계국도 모두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아파로 개종하며 공식적인 국가도 없어진다.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마즈다크교 등의 이단 운동이 일어나 교단이 분열되었다. 또한 이슬람 지배 하에서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효과적인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구심점을 잃고 엘부르즈 산맥과 카스피해 연안 지역, 그리고 야즈드와 케르만 등 사막 지역에 고립된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들은 점진적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17]
3.4. 중국의 배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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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晋中市) 관할 제슈시(介休市, 개휴시)에 남아있는 옛 조로아스터교 사원 건물 |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에 처음 전파된 것은 북위(386~534) 시기로 추정된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이 종교는 주로 소그드인에 의해 전파되었다. 소그드족은 이란계 민족으로서 실크로드의 주요 상업 민족이었으며,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 소그드 문자를 여러 지역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6세기 중후반부터 7세기 초까지 중국 경내에서 활동한 소그드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불교적, 마니교적 요소는 물론 중국적 요소까지도 포함하는 매우 혼종적인 종교 문화를 형성했다. 중국 서안 등지에서 발견된 소그드인 무덤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사후세계 관념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중국에서 조로아스터교는 '현교(祆敎)', '천교(祆敎)', '명교(明敎)', '화교(火敎)', '천화교(祆火敎)', '배화교(拜火敎)'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천신(祆神)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당나라 시기였다. 694년 페르시아 승려 불다탄이 마니교 경전인 『이종경』을 가지고 중국에 오면서 명교가 정식으로 관방에서 전래되었다. 당나라는 대외적으로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수도 장안은 세계 각지에서 온 상인들과 유학생들이 모이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페르시아계 서역인들이 자주 왕래하던 당나라 때는 수도 장안에 배화교 사원이 건립되기도 했다. 이 사원들은 '파사사'라고 불렸는데, '파사'는 '페르시아'를 의미했다. 당시 조정은 명교경전을 도장(道藏)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 무종의 회창 5년(845년) 멸불 사건은 조로아스터교에게도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이 사건에서 불교와 함께 조로아스터교도 탄압을 받았고, 이후 공개적으로는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는 비밀종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북송 말기부터 절강, 강서, 안휘 등지에서 명교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명교는 미륵교, 백련사와 결합하여 명나라 말기의 백련교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 시기 명교는 정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일반 민중종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원나라 말기 홍무제과 명교의 관계이다. 주원장은 명교의 제자였으며, 그의 수하인 서달, 상우춘 등도 명교 출신이었다. 명교 세력은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우는 데 일조한 농민봉기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7세기 이슬람의 등장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점차 쇠퇴했으며 중동 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게되었다. 중국으로 피난간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인도의 파르시와 달리 전부 현지인과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중국에서 조로아스터교의 명맥을 이어가는 곳은 매우 제한적이다. 푸젠성 취안저우시에 소재한 초암이 현대 중국에 남아 있는 명교 세력의 중심지이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명교 사원이다. 전 세계적으로 조로아스터교도는 약 15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대부분은 인도의 뭄바이와 이란 일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중국에 전파된 조로아스터교는 비록 주류 종교로 자리잡지는 못했지만, 중국 종교사와 문화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화 교류의 상징적 사례로서, 또한 중국 민간종교 발전에 영향을 준 종교로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분법적 세계관과 유일신 사상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 다른 종교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이 있으며, 이러한 종교적 교류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4. 현대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으로 유명하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등 이슬람 극단주의에 질린 쿠르드족이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2019년에는 북미 최초의 여성 성직자가 나오기도 했다. #
4.1.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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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워낙 고생이 심해서 성전 아베스타조차도 극히 일부분밖에 남지 않았다.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성경으로 예를 들자면 신약하고 구약 중 한두 편만 남고 죄다 없어졌다. 하지만 그 남은 분량만 해도 꽤 많고, 조로아스터교는 아베스타 이외에도 중세 시기에 작성된 여러 문서도 함께 사용한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루홀라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2500년 제전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는데 수구 이슬람주의자답게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페르시아의 전통을 욕하는 저시퀴는 매국노!"라는 거센 비난을 받고서야[20] 부랴부랴 '아니 잘못 생각했어요! 나는 낭비가 심해서 욕한 거라고요!'라고 변명을 하며 평생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야 했던 호메이니였으니[21] 아무리 이교도인 조로아스터라도 함부로 까다가 자칫하다간 자국 페르시아를 까는 것으로 봤기에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한때 부활 운동이 펼쳐졌었다. 워낙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종교이기도 해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조로아스터교 부활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현 이란인들이 과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때는 엄청난 기세를 보였지만, 이란 지도부에서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기 때문에[22] 그냥 별 성과 없이 끝났고,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조로아스터인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과거 페르시아가 아랍을 지배하며 호령할 때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인데, 왜 현대에는 정작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이 아랍인의 이슬람에 정복당해 버린 거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이란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란에서는 '대신 소수 계열인 시아파를 믿으며 아랍과 대립하잖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고. 이슬람의 2대 칼리파를 죽인 폐르시아계 기독교인 피루즈 나하반디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게 시아파이니...
다만 여전히 문화적으로서 흔적이 꽤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얄다, 노루즈가 있다.
4.1.1. 시아파 샤리아에서의 흔적
상속법의 연속성보딜 예를란드(Bodil Hjerrild)의 연구에 따르면, 시아파 상속법은 순니파와 달리 사산조 상속법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사산조 상속법의 특징인 "모든 아들의 균등 상속, 정처의 아들과 동등한 상속권, 딸의 절반 상속권" 원칙이 시아파 상속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특히 사산조 법에서 딸을 통한 상속 계승이 가능했던 점은 시아파가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한 알리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이는 부계 혈통만을 중시하는 순니파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임시혼인(무타)의 사산조 기원
시아파에서만 허용되는 무타(임시혼인)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해진 기간 혼인 제도에서 기원한다. 사산조 법전에는 상속자 확보를 위한 10년 계약 혼인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시아파 무타의 직접적 선례가 되었다. 이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타(임시혼인)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국가다. 순니파 이슬람과 구별되는 시아파만의 특징이다.
사법 체계의 이중 구조
이슬람 정복 이후 이란의 사법 체계는 사산조 전통을 계승하여 세속법원(ʿorfi court)과 종교법원(qāẓi court)의 이중 구조를 유지했다. 이는 사산조 시대 왕법(royal law)과 조로아스터 종교법의 이원 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태양력 달력 체계
이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히즈라(이슬람력) 연도를 태양력으로 계산하는 태양 히즈라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한다.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적 태양력과 이슬람의 히즈라 기점을 결합한 독특한 체계다.
노루즈의 공식 국경일 지정
조로아스터교의 최대 축제인 노루즈(Nowruz)는 이란에서 공식 국경일로 지정되어 13일간 연휴로 운영된다. 비록 종교 보수파의 반대가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차하르샨베 수리의 암묵적 허용
노루즈 전 수요일에 열리는 차하르샨베 수리(불 축제)는 명백한 조로아스터교 기원의 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이란 정부가 완전히 금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 문화의 깊은 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타지야(추도 의식)의 조로아스터교 애도 전통
시아파의 대표적 의례인 타지야(후세인 추도 의식)는 형식면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적 애도 의식과 유사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집단적 애도와 순교자 숭배는 사산조 시대부터 이어진 페르시아 문화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4.2. 인도
652년 사산 제국이 아랍 무슬림들에게 패배하면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파르스 지역 출신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이 8-10세기에 인도 구자라트 주 산잔으로 피난을 떠났고, 이들이 바로 현재의 파르시인이 되었다.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 민족 집단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힌두교 신자들은 이들을 카스트 제2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 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파르시와 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개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생활 방식이 서구화되고 뭄바이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 파르시들은 출생률도 낮아 인구가 감소 중이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인도의 여러 민족 중에서 파르시들이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고 익힌 덕분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친 근현대에 와서 이들의 상권이 더 강화되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 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 가문이 파르시이다.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자동차 소유이다. 타타모터스뿐만 아니라 타타 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 우주 산업까지 안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영국의 전설적 록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 역시 파르시 혈통이었다.[23]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였다.[24]
19세기부터 20세기에는 이란에서 영국령 인도로 떠나는 추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이라니'라고 불리고 있다. 통계상으로도 다르게 집계되고, 파르시와 이질감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기 때문에 통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5.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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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주님', '지혜로운 주님' 이라는 뜻을 가진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단일신교 종교'이다. 아후라 마즈다는 모든 선의 근원이자 우주의 창조자로 여겨진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선과 악이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 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 마즈다/오르마즈드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존재가 부정되진 않으나, 신들의 성격은 아후라 마즈다 단일신에 집중되어 숭배된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으며, 선과 악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도덕적 선택은 이 우주적인 선과 악의 대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선한 생각(Humata)을 하고, 선한 말(Hūxta)을 하며, 선한 행동(Huvarshta)을 하는 것이 바로 악을 물리치며 선의 영향력을 키우는것이다. 이러한 선의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넘어 우주 질서의 회복과 최종적인 선의 승리에 기여하는 신성한 행위로 여겨진다. 인간은 아후라 마즈다가 부여한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악을 물리치고 아샤(진리, 정의, 질서)의 길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도덕적 선택은 단순한 윤리적 판단을 넘어, 신과 협력하여 세상을 정화하고 완성으로 이끄는 신적인 사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인간의 삶은 단지 이 땅 위의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아후라 마즈다의 창조물이며, 인간마다 영혼(fravashi)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 이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며,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살아생전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심판받는다. 선한 영혼들은 천상의 세계로 인도되며,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이를 천국(Garo Demana)이라 부르고, ‘노래의 집’, ‘기쁨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아후라 마즈다의 빛과 진리 속에서 영혼이 기쁨과 온전한 평온을 누리는 장소다. 악한 행위로 가득 찬 영혼은 고통과 어둠이 가득한 지옥(Druj Demana)에 떨어진다. 이곳은 거짓과 혼돈이 지배하는 세계로, 영혼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개인의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기 전까지 영혼이 머무는 임시적인 거처를 결정하는 것이다. 영혼은 각 장소에서 우주의 완전한 정화와 회복을 위한 궁극적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심판을 넘어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이 존재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의 시간이 유한하며, 그 끝에 종말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때, 아후라 마즈다가 예고한 구세주 ‘소쉬안스(Saoshyant)’가 출현한다. 소쉬안스는 악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세상을 궁극적으로 갱신할 운명을 지녔다. 소쉬안스의 도래와 함께, 모든 죽은 자들은 부활한다. 그들은 아후라 마즈다의 법 앞에서 최종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심판은 악과 거짓을 제거하고, 각 영혼을 진리와 정의의 법칙(아샤)에 따라 판별하는 절대적인 법정과 같다.
심판 후 불의 강이 온 땅을 뒤덮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불은 악한 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의 형벌로 다가오지만, 선한 자들에게는 온화하고 따스한 정화의 빛이 되어 영혼을 깨끗이 씻어낸다. 이 거대한 불길은 단순한 파괴의 불이 아니라, 우주의 어둠과 혼돈을 태워 없애는 신성한 정화의 불꽃이다. 그 불길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악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영혼은 빛나는 순수함으로 새로 태어난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이 끝난 후에는 고통과 죽음, 거짓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립은 완전히 종식되고, 아후라 마즈다가 창조한 본래의 선하고 완전한 상태가 회복된다. 인류는 깊은 정화를 통해 본래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되찾으며 아후라 마즈다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불멸의 생명을 얻고 영원한 평온을 누린다. 이러한 과정이 조로아스터교에서 프라쇼케레티(Frashokereti, 세상의 갱신)라고 불린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아후라 마즈다가 창조한 모든 것이 순수하며 사랑과 존경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창조물인 인간뿐만아니라 자연 환경 또한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불, 물, 흙 등의 자연 요소를 오염시키는 것을 금기시한다. 특히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대신 독수리에게 맡기는 조장(장례)[25]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땅이나 불, 물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불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은 아후라 마즈다의 순수함과 진리를 드러내는 상징일 뿐이다. 불은 거짓을 태우고 어둠을 몰아내는 진리의 상징이며, 신의 현존을 느끼는 매개체이자 성스러운 빛의 표현으로 존중된다.
5.1. 단일신교
조로아스터교는 단일신교(Henotheism)이다. 단일신교는 비슷한 말인 일신 숭배(Monolatry)나 유일신교(Monotheis)와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다른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부정하진 않으나 신들의 모든 속성을 한 신에게 집중시킨 한 신 숭배를 말한다. 고대 이집트 종교[26],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서 주장된 우주 발생적 원리[27], 그리고 조로아스터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신 숭배(Monolatry)는 여기서 더 나아간 개념으로, 다른 신의 존재/비존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단일신교(Henotheism)와 같으나, 다른 신 숭배의 '무효성' 곧 '헛됨'을 주장하며, 한 특정 집단(씨족, 종족)과 강력하게 결부되어 이 집단과 관련하여 독점성이 요구된다. 왕정 시대 유대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일신교(Monotheism)는 여기서 더더욱 나아간 개념으로, 다른 신의 존재가 이론적으로도 부정된다. 유대교에선 왕정 시대 말기 예언자들에게서 조금씩 나타나다가, 바빌론 유배를 기점으로 급격히 확산된다.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혼란을 겪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종교를 다신교/유일신교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다 보니 일리아스의 제우스 같은 단순 주신 개념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배 후 유대교의 신론과도 너무나 다른 아후라 마즈다의 성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대중적인 오해 수준을 넘어서, 비교 종교학과의 학술 교류가 적은 학자들과 번역가들도 자주 실수하는 대목이다.
가령 바로 위에서 인용한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철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28]의 번역자인 이신철 교수[29]는 원서의 "a monotheist, a henotheist, or a polytheist"를 "유일신론자, 즉 단일신론자, 아니면 다신론자"로 오역하였다.(한국어판 105쪽)[30]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단일신론(Henotheism)은 이스라엘과 페르시아뿐 아니라 이집트, 그리스에서도 낯설지 않았다. 다신교가 주신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다신교로 나아가고,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신을 단일신의 단면이나 피조물로 보는 건 지중해 세계에서 거의 전형적이라고 해야 할 현상이었다. 물론 동시대 동 지역에서도 다양한 신론이 병존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되지만(유배 후에도 이스라엘엔 다신론자가 있었고,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단일신론은 명백하게 전통 다신교와 공존했다), 아무리 그 비중을 낮게 잡더라도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란, 그리스에서 단일신론의 개념 자체가 낯설다고 볼 순 없다.
일단 아후라 마즈다의 위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를 비롯한 일반적인 다신교의 주신 개념과는 다르다. 숭배받을 이(야자타)로 지칭되는 아후라들은 모두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피조되어 그의 선한 질서(아샤)에 속해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피조되지 않고 인식된 앙그라 마이뉴와 그로부터 발생한 다이바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철저한 배제 대상이자 끝내 아후라 마즈다에 의해 멸망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일신을 넘어 유일신 개념으론 볼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애초에 숭배의 단일성은 19왕조 이후의 이집트 전통 종교도 공유하는 개념이며, 모든 신이 아문-레-프타 삼위일체의 피조물에 불과하단 관념이 이집트 전통 종교를 '유일신교'로 만드는 건 아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타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나온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타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타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이후, 이들을 만든 상위의 신인 주르반이 있다는 개념으로 세계관이 확장되면 주르반교로 분화된다.
6. 파생 종파
페르시아의 종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마니교 마즈닥교대충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상에 있고, 향후 수백 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 주르반교: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 참조.
- 미트라교: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대승 불교, 특히 미륵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 마니교: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불교, 그리스도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주류로부터 탄압받으며 키운 맷집 덕분인지 이슬람 칼리프조 시대에도 주류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은 아바스 왕조 시절에도 이슬람에 맞서 마니교를 대놓고 전교하고 다녔으며, 마니교 선교사들과 이슬람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중세 무타질라 학파[31]의 시발점이 되었다.
- 마즈다크교: 5~6세기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재산의 공동 소유 교리에는 배우자를 공유해야 하는 사항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 귀족들의 하렘을 습격해서 여자들을 납치해서 마즈다크 교단에 편입시킨 사건 이후 결국 호스로 1세 치세에 이단으로 몰려 거의 절멸당했다.
7. 다른 종교와의 관계
7.1.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britannica-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신교 중 하나이고 일신론적 요소와 이원론적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 기독교 및 이슬람의 신념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history
-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 교리가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을 통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포함한 주요 아브라함 종교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 단 하나의 신, 천국과 지옥, 심판의 날을 포함한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은 유대 왕국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감금되어 살아온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공동체에 처음 도입되었을 수 있다.
-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했을때, 그는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그들의 후손들이 히브리 성경을 만드는 것을 도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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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는 미국과 유럽의 정체성과 가치를 정의하고 이러한 가치를 중동인 '타자'의 가치와 대조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고대 종교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건전한 서구의 이상, 신념 및 문화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실제로 이란으로부터 그 뿌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대이란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살았다고 믿는다. 자라 투 스트라 이전에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힌두교로 알려지게 될 인도-아리안 종교에 상응하는 옛이란 아리아 종교의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나 자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관행을 비난하고 지혜의 주님 아후라 마즈다에게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도 아리아인과 이란 사이의 큰 분열을 기여했을 뿐만아니라 인류에게 최초의 일신교 신앙을 소개했을 것이다. 이외에 천국과 지옥, 심판의 날과 세계의 마지막 계시, 천사와 악마의 개념은 모두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과 조로아스터교 문학에서 유래했다. 사탄의 개념조차 근본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이다.
- 조로아스터교 사상은 어떻게 아브라함 신앙과 다른 곳으로 들어갔을까? 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개념들 중 많은 것들이 페르시아 황제 키루스 대왕에 의해 해방된 바빌론의 유대인들에게 소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유대인 사상의 주류로 흘러들어갔고, 베엘제붑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성기에 페르시아가 그리스 땅을 정복한 후, 철학은 다른 방향을 택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전에 인간에게는 선택의지가 거의 없으며, 인간의 운명은 변덕과 공상에 따라 행동하는 많은 신들의 자비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란 종교와 철학을 접한 후 그들은 마치 자신이 운명의 주인인것처럼 느끼기 시작했고, 그들의 결정은 그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조로아스터교는 서구권의 사상, 종교, 문화에 대한 모든 기여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의 유일신 신앙과 이란의 창시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거의 잊혀진 종교 조로아스터교는 '우리(서구)'가 '그들'과 얼마나 비슷한 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지도 모른다.
worldhistory
-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세운 유일신교 신앙이며 초기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조로아스터교를 박해했지만 조로아스터의 근본 개념은 유대교 뿐만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실 구원에 대한 개인의 책임, 사후심판, 메시아, 종말,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발전시킨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며, 후대 종교의 선구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비전들은 실제로 몇세기전에 조로아스터에 의해 수립되었다.
이 외에 학자들은 창조주 중심의 일신 사상,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선과악의 이원론적 대립,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 창조신이 다스리는 천상의 천국, 사후 형벌을 받는 지옥, 주신의 계획으로 인간을 돕는 하위신격인 야자타들(천사), 선과 대적하는 악마(사탄), 종말론과 최후의 심판, 육신의 부활과 영생, 메시아(구세주) 사상, 심판 후 새로운 왕국의 도래, 영적전쟁, 회개/속죄를 통한 정화의 중요성, 의식적 순수성에 대한 관심, 의로움에 대한 이상화, 기도/경전/예배의 중요성 등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문화·군사·체제 정비 등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 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토라(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전시기에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로 편집되고 수정된 것이 바빌론 유배 이후이고 이 시기에 쓰여진 새로운 역사와 연대기는 유다 성전이 독점적으로 있었던 예후드(페르시아의 식민지 속주)의 영향이 반영되어있다.[32] 또한 바빌론 유배기 동안 유대인은 고난과 고통으로 민족일치를 강화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교를 정립하였고, 이 기간 동안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실 유대교 유일신론은 조로아스터교 표절이다" 같은 자극적인 글도 쉽게 돌아다닌다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유대교의 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이를 근거로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표절이란것은 어불상설이고 유대교의 유일신교의 기반은 유대인의 고유의 역사와 이에 따른 신학적 발전을 통해 확립되어 온 것이다. 반대로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7.1.1. 이슬람 전환의 복합성
신학적 영향: 일신교에서 일신교로아후라 마즈다에서 알라로의 개념적 연속성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지혜로운 주님") 개념은 이슬람의 알라 개념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아베스타에서 아후라 마즈다는 "창조되지 않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꾸란의 알라 개념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이러한 이슬람 특유의 유일신 교리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차별화된다.
천사론과 악마론의 체계적 전승
조로아스터교의 6대 아메샤 스펜타(Amesha Spentas, 불멸의 성자들) 체계는 이슬람의 4대 대천사 체계의 원형이 되었다. 특히 보후 마나(Vohu Mana, 선한 마음)는 지브릴(가브리엘)과, 아샤 바히시타(Asha Vahishta, 최고의 진리)는 미카일(미카엘)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악의 화신인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는 이슬람의 이블리스(샤이탄) 개념의 직접적 원형이다. 두 종교 모두 선과 악의 우주적 대립을 상정하되, 최종적으로는 선이 승리한다는 종말관을 공유한다.
의례적 영향: 5회 기도의 기원
가흐 예배에서 살라트로
조로아스터교의 하루 5회 가흐(Gah) 예배 체계는 이슬람의 5회 살라트의 직접적 원형이다. 조로아스터교 기도 시간은 하반(새벽), 라피스완(정오), 우지렌(오후), 아이위수스렘(저녁), 우샤엔(밤)으로, 이슬람의 파즈르, 주흐르, 아스르, 마그리브, 이샤와 거의 일치한다.
정화 의례의 연속성
조로아스터교의 4원소(불, 물, 땅, 공기) 정화 사상은 이슬람의 우두(작은 정화)와 구슬(큰 정화) 의례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도 전 손과 얼굴을 씻는 의례는 두 종교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디스가 받은 영향
이란의 사상과 관습의 영향을 받은 것
이슬람 전통에 대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무함마드의 페르시아인 교우인 살만은 본래 조로아스터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슬람 개종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Magu)가 되기 위해 훈련받았다고 전승된다.
7.2.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는 모두 인도-이란(Proto-Indo-Iranian)의 아리아인 종교적 전통에서 기원한 고대 종교 체계로, 여러 신화적 요소와 개념 구조에서 유사성을 보였다. 이 두 종교는 기원전 제2천년기 무렵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인도이란어족[33] 민족들의 공통 조상 종교 기반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화하거나 이동하여 서로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아베스타, 리그베다, 브라흐마 비교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가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각 종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리그베다를 비교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두 문헌은 모두 기원전 1000년대 중반에, 인도이란어족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서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아베스타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동부, 리그베다는 인도 북서부에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전의 형성이 시기적으로도 매우 근접해 있다. 특히 아베스타어와 리그베다에 쓰인 산스크리트어는 사투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한 시기에 쓰인 자매 언어라는것이 문법 구조, 어휘 체계, 발음 규칙 등에서 드러나며 서로는 뚜렷한 유사성을 보인다.
예를 들어, 두 언어는 동사와 명사의 활용 방식이 유사하고, 공통된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베스타의 Haoma와 리그베다의 Soma는 모두 의례 음료를 가리키며, 같은 조상 언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또한 아베스타의 Manthra(만트라)와 산스크리트의 Mantra는 모두 '성스러운 주문', '기도문', '진리를 표현하는 말'을 의미하며, 종교 의식에서 신성과 진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언어적 도구로 사용된다. Magu(마구) 역시 조로아스터교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 계층을 의미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의 Magha(마가) 또는 Magavan(마가반)과 어근을 공유하며, 의례와 권위, 신성과 관련된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어휘뿐만 아니라, 종교적 상징과 제의 용어마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두 문헌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아베스타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의 명칭인 아후라(Ahura)는 리그베다에서 아수라(Asura) 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 역시 어원적으로 동일한 단어이다. 초기 리그베다에서 '아수라'는 본래 '생명력 있는 자', '영적인 힘을 지닌 자'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초기 리그베다에서는 주요 신들조차 아수라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정도로, 신성하고 위엄 있는 존재를 뜻했다. 이와 달리 데바(Deva)는 '신성한 신' 이라는 뜻으로 인드라(천둥과 전쟁의 신), 아그니(불의 신), 바유(바람의 신) 등 자연현상과 제의를 받는 신들을 뜻하였다. 즉, 데바는 자연현상과 제의(ritual)의 신들이고, 아수라는 윤리와 형이상학(법과 진리)의 수호자로 기능적 특성이 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브라만교 세계관에서 데바 중심의 의례가 우위에 놓이게 되었고, 이에 도전하거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아수라의 뜻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후기 브라만교와 힌두교 체계가 정비되고, 특히 의례를 주관하는 제사장인 브라만 중심의 사회 권력 구조가 강화되면서 아수라는 기존 권력과 질서에 도전하거나 반하는 자로 정의되었고 데바는 일반적인 신이라는 의미로 정통 신적 체계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반면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라는 말의 긍정적 의미가 유지되고 데바는 잔혹한 제물(동물 제사)을 요구하고 인간 사회의 질서보다는 자연의 힘을 숭배하도록하는 악한 존재로 정의되었다.
이 외에도 아베스타의 가타와 리그베다의 찬가는 모두 운율 있는 시 형식의 찬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래 철저히 암송되어 전해지던 신성한 종교 시가라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모두 제의나 의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을 찬양하고 도덕적·우주적 질서를 노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과적으로,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문화적, 철학적 길을 걸어갔지만, 그 속에는 공통된 종교적 기억과 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7.3. 대승 불교
대승불교는 인더스강 이서 지역인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지역은 전통적인 인도의 힌두교 문화권이 아닌 페르시아 문화권의 지역으로, 고대부터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이자 아케메네스, 파르티아, 사산조 등 페르시아 제국들의 문화와 종교가 깊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특히 대승불교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서부, 즉 고대 간다라 지역을 비롯한 인더스강 이서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며 그 사상적·문화적 전환점을 맞이하게되었는데 간다라는 지리적으로 인도 아대륙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이란 고원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문화적으로는 인도, 페르시아, 헬레니즘 세계가 오랫동안 교차하며 융합되어 온 ‘문명의 경계지대’이기도 하였다.불교가 이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계기는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 때였다. 아소카는 칼링가 전쟁 이후 깊은 회한에 사로잡혀 불교에 귀의하였고, 이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제국 전역에 불교를 확산시켰다. 그는 제3차 결집을 주관하고 교단을 정비했으며, 간다라와 박트리아, 중앙아시아, 심지어 지중해 인근 헬레니즘 세계까지 불교를 알리기위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간다라 지역에는 아소카 시대 이후 불교 사원, 석주, 비문 등 다양한 불교 유산이 등장하며 불교 전파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간다라는 기원전 530년부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세력, 마우리아 왕조, 쿠샨 왕조 등 다양한 제국의 통치를 거치며 다층적인 문화가 축적된 지역이다. 이곳은 페르시아의 전통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불교가 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와 상징체계 등이 자연스럽게 불교와 접촉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승불교는 간다라라는 특수한 문화적 지형 위에서 단순히 인도 내부의 종교에서 벗어나,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세계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융합된 국제적 사상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 융합의 배경에는 아소카의 선제적 전파와 쿠샨 왕조의 적극적 후원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아소카 대왕의 비문을 통해서도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상호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인들에게 악신을 뜻하는 '데바'라는 단어를 배제하는가 하면 조로아스터교에 '좋다'는 수식어를 자주 사용하는 등 표현상 배려가 보인다.# 이는 당시 두 종교의 만남이 단순히 서로 다른 종교로서 대립하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유연한 종교적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대승불교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신격의 모습인 보살사상이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보인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보살사상에는 이타적인 존재로서 사람들을 이끄는 구도자, 구원자로서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 아후라 마즈다의 계획에 따라 선의 질서를 유지하기위해 사람들을 돕는 신들인 야자타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불교적 수용 결과로 분석되며 특히 아미타불은 무한한 빛과 생명을 상징하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의 신격과 특징이 동일하다.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의 구원자 개념인 '소쉬안스'는 말세에 인류를 이끌어 마지막 악과 투쟁하는 존재로, 종말적 세계관을 전제로 한 소쉬안스의 출현은 말세에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등장하는 미륵보살과 유사하다.#
또한 초기불교의 윤회론과 별개로 대승불교는 정토신앙과 지옥세계라는 이원적 사후세계의 종교적 교리를 구축했다. 이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원론과 사후의 과보적 의미인 천국과 지옥의 이원론적 사후세계 공간개념을 대승불교가 수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다만 직접적인 문헌 증거의 부족으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 분야의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견과 비교종교학적 분석을 통해 두 종교 간의 상호작용과 영향관계는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8. 유명 신자
9. 대중문화에서
조로아스터교는 현실에서 교세가 이슬람교에 비해서 매우 약하고, 신자 수도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는 이슬람교와 함께 중동/중양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대중매체에서도 테러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이슬람에 비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소설)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여 극의 핵심을 관통하는 요소로 쓰인다.
-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보트에 탑승한 작살잡이 중에서 필리핀 출신인 페댈라가 조로아스터교 신자다. 모비 딕을 발견한 지 이틀째 날에 모비 딕이 에이해브 선장의 보트에 격돌하고 그 과정에서 실종되는데, 사흘째 날에 모비 딕의 몸체에 그물과 작살과 함께 묶인 페댈라의 시신이 발견된다. 페댈라는 에이해브에게 밧줄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죽은 뒤 에이허브 선장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바로 그 사흘째 날에 그의 경고와 예언이 실현된다.
- 페르시아의 왕자 2: 그림자와 불꽃의 후반부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왕자가 자파를 무찌르기 위해 조로아스터의 불을 훔치러 가는 것. 맨 위의 상징처럼 독수리 모자와 옷을 입고 등장한다. 불을 얻기 전에는 병사와 똑같이 움직이지만 불을 얻으면 칼을 버리고 굽신거린다.
- 악튜러스에 조로아스터교 관련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앙그라 마이뉴 등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된 소재가 많이 나온다.
- 신좌만상 시리즈의 흑백의 아베스타는 세계관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온 판타지 소설이다. 주인공 파티의 일원의 절반과 적 세력인 칠대마왕, 주신이 이름이 모두 조로아스터교에서 따왔다.
- 중국에서는 배화교나 현교(祆敎), 화천교(火祆敎)라고도 불렸다. 김용의 작품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명교는 현교와 명교(明敎)라 불린 마니교, 그런 마니교와 불교, 도교, 토착 신앙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의 특성들을 혼합한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다. 작가 김용은 명 태조 주원장이 백련교의 영향을 받던 홍건적의 일원이었다는 점과 중국을 통일하고 난 뒤에 백련교를 금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소설의 배경을 만들었다. 소설 속 명교는 원래 주원장이 소속되어 있는 종교로 원 왕조를 몰아내는데에 앞장섰지만,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주원장에게 토사구팽당한다는 결말을 맞이했다. 문제는 소설을 읽은 이들이 소설 속 명교와 현실 세계의 조로아스터교를 혼동하여 명백히 현교라 불린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에서 명교라 불렸다고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이뤄지던 일인데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관심도 적고 종교 자체의 영향력도 낮아서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기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이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확장팩 올드 갓(Old God)에서부터 플레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일 경우 근친혼(신성혼)을 하면 봉신들과의 관계가 올라가고 신앙심을 얻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붙은 별명이 현관교. 단, AI가 너무 근친혼을 선호해서 자손이 늘지 않는다.[38]
- 위와 같은 패러독스 게임인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단 1개 프로빈스가 조로아스터교로 등장하며, 시작 시점에서 국교로 삼은 나라는 없다. 조로아스터교 커스텀 국가를 만들어 특정 프로빈스들을 정복하라는 업적이 있는데, 게임 내 모든 종교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초반 운신이 힘들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867년 시나리오 플레이시 이란 북부에 위치한 마잔다란과 타바리스탄 지역의 영주들만이 믿던 소수 종교였고 1066 시나리오에서는 아예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독립 영주는 사라진 상태다. 이후 페르시아의 유산 dlc로 마잔다란 영주들의 비밀 종교로 바뀌게 되어 시작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독립 영주는 없어졌다. 물론 비밀종교인 만큼 신앙력 250을 지불하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비밀종교 폭로 이벤트에서 조로아스터교 선택시 다시 공식 종교로 돌아오긴 한다. 특히 3에 들어와서 조로아스터교가 세부종파별로 나뉘게 되는 등 좀 더 신경 쓴 느낌이 난다. 특히 조로아스터교 신앙을믿는 상태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통제하고 있을 경우 사오샨트(= 구세주) 결단을 수행할 수 있는데 이슬람교의 사이드와 같이 동일 신앙에게 +5 의견을 주나 추가로 학습력 +1이 붙어 있어 유니크 특성 수집을 할 생각이라면 나쁘지 않다. 따라서 숙련된 플레이어라면 한번 조로아스터교 부흥을 목표로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컨셉 플레이다. 참고로 조로아스터교의 대성전 이름은 대정화라 불린다.
- 종말의 크로니클의 9th-G
- 삼류무사에서는 마교로 몰려 오래 전에 멸문했다. 지상 최강의 단일문파로, 그들의 수장이자 당대 명교주였던 서문탁의 [대정일검보]와 그를 곁에서 수행했던 좌우쌍사의 [일천마라형], [철화정련]은 삼류무사 세계관에서도 불패삼공으로 통한다. 명교는 교리(대표적으로 금식과 금욕, 특히 성욕의 자제를 통해 초인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는 점)와 막강한 무공(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비무를 청해 서로 겨뤘지만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 나갔고, 이는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구파일방을 자극했다. 결국 구파일방이 당문의 독[39]을 써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하나하나를 철저히 뒤쫓아 살해함으로써 명교의 세력을 뿌리 뽑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율법자들을 만들어 명교의 불패삼공을 뒤쫓았다.
- 얼음과 불의 노래의 를로르교가 조로아스터교를 모델로 하였다. 마찬가지로 불을 신성시하며 빛과 불의 신 를로르와 어둠과 추위의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다른 신"이 대립하는 이신론적인 교리를 보인다.
그리고 근친상간 대신 근친살해를 부추겨 막장을 실현하고 있다. - 영웅전설 4의 발두스와 오크툼 역시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한 측면을 보여준다.
- 웹소설 나노 마신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웹툰 나노마신에 등장하는 가상의 종교인 천마신교의 전신이 배화교라고 나온다.
- 만화 쟈히 님은 기죽지 않아!의 등장인물 쟈히와 드루지, 사르와는 조로아스터교의 악마 이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 원신의 수메르는 조로아스터교에서 명칭을 따온게 많다.[40] 이외에도 리월의 야타용왕의 영어 이름은 아지다하카에서 따왔다.
- 배틀로얄 소설과 만화판의 여자 1번 이나다 미즈호가 광신적으로 아후라 미즈다를 믿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도가 아니더라도 이계열일듯
- 토탈 워: 아틸라: 종교 중 하나로 나오며 사산 왕조와 그 속국들이 믿고 있다.[41] 고유 특성으로 모든 속주의 성장률을 증가시켜주며 관련 칙령으로 부패 감소 칙령과 성장률 증가 및 타종교 공질 페널티 감소 칙령이 존재해 내정 특화 종교다. 건물은 납골당 테크와 신전 테크로 나뉘는데 신전 테크는 종교 영향력과 공질 보너스에 특화되어 있으며 납골당은 다량의 위생 보너스를 제공한다.
[1] 페르시아어로 마즈다야스너라고 읽으며 그 뜻은 '마즈다를 믿는 종교', 즉 마즈다교. 현재 이란 현지에서 해당 종교를 부르는 명칭이다. 영어권에서도 이를 차용해 Mazdayasna, 혹은 Mazdaism이라고 일컫기도 한다.[2] 신자의 대부분은 인도·이란 지역에 거주 중이다. 다만 이란의 경우 이슬람 근본주의로 인해 신자 수가 적어지고 있는 추세이다.[3] 다만, 날개 달린 형상은 아후라 마즈다 자체의 형상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에서 '프라바시(Faravashi)' 또는 '파라바하르(Faravahar)'로 불리는 영적 존재의 상징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아후라 마즈다는 형상이 없는 초월적 존재로 여겨졌으며, 기본적으로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4] 아베스타어.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읽는다.[5] 페르시아어.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읽는다.[6] 유일신교(Monotheism) 혹은 일신 숭배(Monolatry)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세한 건 후술.[7] 서양은 현대에 들어 오리엔털 판타지 바람이 불며 동양 철학, 동양 종교 붐이 주기적으로 돌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히브리 신화 기반인 기독교보다는 인도유럽신화 기반인 조로아스터교가 오히려 더 근본 유럽 종교에 가깝긴 하다. 히틀러가 인도 사상에 심취했다는 말도 있듯 이런 현상은 그리 최근만의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구시대적인 그리스도교적 가치나 물질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모양. 오컬트적 요소에 대한 관심도 있다. 이건 불교나 도교 등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 정작 본토에선 이슬람교에 밀려 사장되었으나 서양에선 뜨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8] 고고학적 한계도 있지만, 자라투스트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이란계 민족의 토속 신앙에 기반해서 성립된 종교라 기존의 토속 신앙과 신화의 많은 부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느 시기부터 단일신 종교로 변화했는지 칼로 자르듯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있다. 창시자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점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의 정확한 성립 시기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9] 아베스탄어는 고대와 신대 아베스탄어로 나뉘는데, 고대 아베스탄어는 베다 경전이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와 동일한 어족인 동시에 같은 시대에 자매어로서 존재하였다.[10] 조로아스터교 경전 중 하나인 가타스는 전통적으로 자라투스트라가 직접 작곡한 17곡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다.[11] 신양섭. (2009). 페르시아 문화의 동진과 조로아스터교. 한국중동학회논총, 30(1), p44.[12] Bryant 2001:130–131 The oldest part of the Avesta... is linguistically and culturally very close to the material preserved in the Rigveda... There seems to be economic and religious interaction and perhaps rivalry operating here, which justifies scholars in placing the Vedic and Avestan worlds in close chronological, geographical and cultural proximity to each other not far removed from a joint Indo-Iranian period.[13] Bruce Lincoln. Death, War, and Sacrifice, 1991, pg 150[14]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15]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왕조.[16] 글을 모르는 무슬림 10명에게 글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해방한다든지.[17] 중국으로 피난 간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인도의 파르시처럼 부유한 무역 상인으로 유명했었다. 당나라 때 속담으로 '의사가 앓고 페르시아 사람이 궁한 상황'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 중국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인도에서와 다르게 전부 현지인과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18] 본래 페르시아의 고장인 파르스 지방에 있었는데 15세기경 이곳으로 옮겨졌다.[19]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유대인도 마찬가지 적용을 받음.[20] 비록 페르시아는 현 이란과 종교는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란인들에게는 자국 역사의 일부이고 무엇보다 이웃한 아랍인들과의 경쟁관계(?) 때문에라도 페르시아를 띄워준다. 어느 정도냐면 보수 이슬람 성향이 강한 고령층이라도 "무함마드를 배출한 아랍인이 더 위대하냐 페르시아인이 위대하냐"라고 물으면 다들 페르시아인이 더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21] 심지어 사석에서는 내가 그 때 뭔 깡으로 그런 개소리 했는지 모르겠다고까지 했다.[22] 대놓고 탄압을 가하면 조로아스터교 부활 운동이 큰 관심을 받기 십상인 데다가 심리적으로도 씁쓸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23] 하나 프레디는 본인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를 부끄러워하고 항상 숨기려고 했으며, 대놓고 조로아스터교에서 금지하는 흡연을 당당하게 할 정도로 부모와 달리 조로아스터교 신도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1991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프레디의 유가족들은 그를 조로아스터교 전통 풍습인 조장으로 장례 지내려 했으나 그의 평소 세속적인 삶을 알던 퀸 멤버 등 주변인들의 반대로 화장되었다.[24] 단 소랍지는 이탈리아계, 스페인계 혈통이 섞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파르시로 인정받지 못한다.[25] 언덕에 벽돌이나 돌로 쌓고 시체를 안치할 받침대를 설치한 '다크마(dakhma)'라는 8m 정도 높이의 장례용 탑을 만들고, 대머리수리들이 시체를 뜯어 먹게 하면 깨끗한 뼈만 땅으로 떨어진다고한다. 문제는 환경 오염으로 조장에 쓰이는 대머리수리의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본고장인 이란에서는 이슬람 정권 수립 이후 금지된 장례법이어서 이 풍습도 위협받는 중.[26] 신들은 제18왕조부터 아문의 피조물로, 제19왕조부터는 아문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몇 번이고, 이집트 원천들은 신의 일성/하나임/유니크함을 가리킨다."("Time and again, the Egyptian sources predicate the oneness/singleness/uniqueness of a god.", Jan Assmann, Moses the Egyptian: The Memory of Egypt in Western Monotheism, Havard University Press, 1998, p.193)[27] "그리스 철학은 시인들에 의해 촉진되고 그리스 민중들이 공유하게 된 믿음의 자극하에 그 경력을 시작했다. 이 믿음은 우주 만물에서 드러나는 모든 힘이 신이거나 신적이며, 모든 신이 힘이고, 모든 신이나 신적인 힘들이 서로 관계되어 있으며, 하나의 신이나 신적인 힘이 다른 모든 신이나 힘들에 대해 최고의 주권을 지니고, 그로부터 현실의 신적인 우주와 다른 신들을 포함하여 그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된 우주 발생론적인 신이나 신적인 힘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철학적 사유의 본질적인 새로움과 예를 들어 탈레스와 피타고라스를 초기 그리스인들과 구별시키는 특징은 탈레스와 피타고라스가 이러한 믿음 가운데 마지막 두 항목을 명시적으로 융합하여 우주 발생론적인 신적인 힘을 최고의 신적인 힘과 동일시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p.211f[28] 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도서출판 b, 2011[29] 건국대학교 철학박사,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30] 영어에서 A, B or C는 "A 또는 B 또는 C"로 문자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번역자가 a monotheist와 a henotheist를 동일 의미로 혼동한 바람에 과도한 기교를 넣어서 "유일신론자, 즉 단일신론자"로 잘못 의역한 것이다.[31] 이슬람 사변철학[32] Coogan, Michael David; Brettler, Marc Zvi; Newsom, Carol Ann (2007). "Editors' Introduction". In Coogan, Michael David; Brettler, Marc Zvi; Newsom, Carol Ann (eds.).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with the Apocryphal/Deuterocanonical Books.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288803.[33] 인도이란어족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거대한 언어계통의 한 하위 분파에 해당한다. 인도유럽어족은 오늘날 유럽 대부분과 서아시아, 남아시아에 걸쳐 분포하는 언어들의 공통 조상 언어에서 갈라져 나온 계통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계열의 로망스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슬라브어, 켈트어, 발트어 등 다양한 유럽 언어들을 포함한다. 이 방대한 어족은 유럽에서 동쪽으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는데, 그 중 남아시아와 이란 고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의 언어들이 ‘인도이란어족’으로 분화되었다.[34] 단, 초대 황제인 키루스 2세의 경우, 현재까지 발견된 당대 기록물들 중에서 벨-마르두크와 나부 등 바빌론의 신들을 공경하고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확인되는 반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선 후대의 위조가 확실시되는 비문을 제외하고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신앙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35] 프레디 머큐리의 부모님은 상당히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로, 그들은 아들 프레디가 죽은 뒤 조로아스터 교리대로 조장을 하려 했다. 하지만, 프레디는 신자이긴 해도 세속적 성향이 강한 신자였던 데다, 퀸의 다른 멤버들의 반발과 사람들의 거부감을 우려하여 화장을 하였다.[36]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생전에 상당한 골초였는데, 조로아스터교 특성상 흡연은 원칙적으로 절대 금기이다.[37] 전에 종교가 조로아스터교로 표기되어 있었다. 출생지는 남인도 지역인 케랄라지만, 남인도 사람이라기엔 피부색이 굉장히 밝고 유년기를 뭄바이에서 보낸 것을 보면 파르시임이 유력하다(뭄바이를 비롯한 인도 북서부 지역은 파르시 인구가 몰려사는 곳이다).[38] 실제로 조로아스터 귀족과 사제들은 Xwedodah라 불리는 근친혼을 하곤 했다. 모자결혼이 가장 경건한 행위이고 그 다음이 부녀결혼, 남매결혼이었다고(...). 그리스인, 로마인, 무슬림, 혜초같은 불교 순례자들은 하나같이 혐오감을 표했으며 이러한 풍습은 중세 시대에 스리슬쩍 사라졌다. 요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그런 짓 안하니 오해말자.[39] 마치 생물처럼 닿은 것을 모조리 강한 산성으로 변화 시키는 산(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걸 써서 명교 총단의 근방의 우물물들을 모조리 오염시켜 총단을 지키던 명교도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40] 아나히타에서 따온 나히다, 파리둔을 도운 대장장이 카베에서 따온 카베, 아메샤 스펜타에서 따온 수메르 아카데미아의 각 학부 등[41] 단 라흠과 아르메니아는 원역사를 고증해 동방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래도 종교 개종은 가능해 이들이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p.211f[28] 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도서출판 b, 2011[29] 건국대학교 철학박사,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30] 영어에서 A, B or C는 "A 또는 B 또는 C"로 문자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번역자가 a monotheist와 a henotheist를 동일 의미로 혼동한 바람에 과도한 기교를 넣어서 "유일신론자, 즉 단일신론자"로 잘못 의역한 것이다.[31] 이슬람 사변철학[32] Coogan, Michael David; Brettler, Marc Zvi; Newsom, Carol Ann (2007). "Editors' Introduction". In Coogan, Michael David; Brettler, Marc Zvi; Newsom, Carol Ann (eds.).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with the Apocryphal/Deuterocanonical Books.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288803.[33] 인도이란어족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거대한 언어계통의 한 하위 분파에 해당한다. 인도유럽어족은 오늘날 유럽 대부분과 서아시아, 남아시아에 걸쳐 분포하는 언어들의 공통 조상 언어에서 갈라져 나온 계통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계열의 로망스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슬라브어, 켈트어, 발트어 등 다양한 유럽 언어들을 포함한다. 이 방대한 어족은 유럽에서 동쪽으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는데, 그 중 남아시아와 이란 고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의 언어들이 ‘인도이란어족’으로 분화되었다.[34] 단, 초대 황제인 키루스 2세의 경우, 현재까지 발견된 당대 기록물들 중에서 벨-마르두크와 나부 등 바빌론의 신들을 공경하고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확인되는 반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선 후대의 위조가 확실시되는 비문을 제외하고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신앙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35] 프레디 머큐리의 부모님은 상당히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로, 그들은 아들 프레디가 죽은 뒤 조로아스터 교리대로 조장을 하려 했다. 하지만, 프레디는 신자이긴 해도 세속적 성향이 강한 신자였던 데다, 퀸의 다른 멤버들의 반발과 사람들의 거부감을 우려하여 화장을 하였다.[36]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생전에 상당한 골초였는데, 조로아스터교 특성상 흡연은 원칙적으로 절대 금기이다.[37] 전에 종교가 조로아스터교로 표기되어 있었다. 출생지는 남인도 지역인 케랄라지만, 남인도 사람이라기엔 피부색이 굉장히 밝고 유년기를 뭄바이에서 보낸 것을 보면 파르시임이 유력하다(뭄바이를 비롯한 인도 북서부 지역은 파르시 인구가 몰려사는 곳이다).[38] 실제로 조로아스터 귀족과 사제들은 Xwedodah라 불리는 근친혼을 하곤 했다. 모자결혼이 가장 경건한 행위이고 그 다음이 부녀결혼, 남매결혼이었다고(...). 그리스인, 로마인, 무슬림, 혜초같은 불교 순례자들은 하나같이 혐오감을 표했으며 이러한 풍습은 중세 시대에 스리슬쩍 사라졌다. 요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그런 짓 안하니 오해말자.[39] 마치 생물처럼 닿은 것을 모조리 강한 산성으로 변화 시키는 산(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걸 써서 명교 총단의 근방의 우물물들을 모조리 오염시켜 총단을 지키던 명교도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40] 아나히타에서 따온 나히다, 파리둔을 도운 대장장이 카베에서 따온 카베, 아메샤 스펜타에서 따온 수메르 아카데미아의 각 학부 등[41] 단 라흠과 아르메니아는 원역사를 고증해 동방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래도 종교 개종은 가능해 이들이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