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00 Greatest Britons | ||||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rowcolor=#ffe>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윈스턴 처칠 |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 다이애나 스펜서 | 찰스 다윈 | 윌리엄 셰익스피어 | |
<rowcolor=#ffe>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이작 뉴턴 | 엘리자베스 1세 | 존 레논 | 호레이쇼 넬슨 | 올리버 크롬웰 | |
11위~100위 | |||||
<rowcolor=#ffe>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어니스트 섀클턴 | 제임스 쿡 | 로버트 베이든 파월 | 알프레드 대왕 | 아서 웰즐리 | |
<rowcolor=#ffe>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마거릿 대처 | 마이클 크로포드 | 빅토리아 여왕 | 폴 매카트니 | 알렉산더 플레밍 | |
<rowcolor=#ffe>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앨런 튜링 | 마이클 패러데이 | 오와인 글린두르 | 엘리자베스 2세 | 스티븐 호킹 | |
<rowcolor=#ffe>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윌리엄 틴들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윌리엄 윌버포스 | 데이비드 보위 | 가이 포크스 | |
<rowcolor=#ffe>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레오나르드 체셔 | 에릭 모어캠브 | 데이비드 베컴 | 토머스 페인 | 부디카 | |
<rowcolor=#ffe>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 토머스 모어 | 윌리엄 블레이크 | 존 해리슨 | 헨리 8세 | |
<rowcolor=#ffe>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찰스 디킨스 | 프랭크 휘틀 | 존 필 | 존 로지 베어드 | 어나이린 베번 | |
<rowcolor=#ffe>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보이 조지 | 더글러스 베이더 | 윌리엄 월레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 존 웨슬리 | |
<rowcolor=#ffe>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아서 왕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로버트 스콧 | 이넉 파월 | |
<rowcolor=#ffe>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클리프 리처드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 프레디 머큐리 | 줄리 앤드류스 | 에드워드 엘가 | |
<rowcolor=#ffe>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해리슨 | 데이비드 애튼버러 | 제임스 코널리 | 조지 스티븐슨 | |
<rowcolor=#ffe>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찰리 채플린 | 토니 블레어 | 윌리엄 캑스턴 | 바비 무어 | 제인 오스틴 | |
<rowcolor=#ffe>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윌리엄 부스 | 헨리 5세 |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 로버트 1세 |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 |
<rowcolor=#ffe>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무명용사 | 로비 윌리엄스 | 에드워드 제너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찰스 배비지 | |
<rowcolor=#ffe>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제프리 초서 | 리처드 3세 | J. K. 롤링 | 제임스 와트 | 리처드 브랜슨 | |
<rowcolor=#ffe>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보노 (아일랜드인) | 존 라이든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도날드 캠벨 | 헨리 2세 | |
<rowcolor=#ffe>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 J. R. R. 톨킨 | 월터 롤리 | 에드워드 1세 | 반스 월리스 | |
<rowcolor=#ffe>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리처드 버튼 | 토니 벤 | 데이비드 리빙스턴 | 팀 버너스리 | 마리 스톱스 | |
출처 | |||||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이넉 파월 Rt. Hon Enoch Powell MBE | |
| |
본명 | 존 이넉 파월 John Enoch Powell |
출생 | 1912년 6월 16일 |
영국 잉글랜드 버밍엄 | |
사망 | 1998년 2월 8일 (향년 85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파멜라 윌슨[1] |
자녀 | 2명 |
학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
종교 | 개신교 (성공회) |
직업 | 정치인, 언어학자 |
소속 | (1947년~1974년) (1974년~1987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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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정치인이자 언어학자.보수당과 얼스터 연합당에서 하원의원을 지냈고, 해럴드 맥밀런 내각의 보건부장관, 에드워드 히스 그림자 내각의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이민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이전인 1968년 이민자 수용에 반대하는 '피의 강(Rivers of Blood)' 연설을 발표하는 등 '반이민' 을 주장한 최초의 영국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이민 메시지와 그에 담긴 제노포비아적 사상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2. 초기 생애
존 이녹 파월은 영국 버밍엄의 스테치포드에서 중산층 가정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웨일스 혈통으로, 아버지 알버트 이넉 파월(Albert Enoch Powell)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어머니 엘렌 메리(Ellen Mary)는 리버풀 경찰관의 딸이었다. 파월은 1918년 버밍엄 내의 킹스노턴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아 때부터 읽기에 능숙했고 책읽기를 즐겼다. 6살이라는 나이에 일요일마다 부모님에게 자신이 읽은 책 내용을 강연할 정도로 이해력이 뛰어났다.파월은 킹스노턴 중등학교와 킹 에드워드 학교를 다녔으며 학업능력이 우수해서 식스폼을 다른 학생들보다 2년 일찍 거쳤다. 본래 클라리넷 등 악기연주를 좋아해서 왕립음악원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설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노리게 되었다. 17세에 트리니티 컬리지 장학시험에 응시해서 최우수 성적을 거두며 합격했고 1930년부터 33년까지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공부했다. 평소 인도 총독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는 SOAS에서 우르두어를 배웠고, 웨일스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등 다른 언어도 습득했다.
케임브리지 졸업 이후 그는 그리스, 이집트의 고대 사본을 연구하거나 헤로도투스 사전을 비롯한 학술 저술에 힘을 쏟았고, 1937년에는 무려 25세의 나이로 시드니 대학교의 그리스어 교수로 임명되었다.[2] 교수 취임 강의에서 당시 영국의 미온적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말을 남겼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영국군 왕립연대 사병으로서 군에 자원 입대했다.
사병, 상병과 장교 훈련을 거친 끝에 1940년 그는 장교가 되었고, 기갑사단의 정보부대로 배치되었다. 1941년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어 엘 알라메인 전투의 작전 기획에 기여했고, 이 공로를 통해 대영제국훈장도 수여받았다. 1943년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원해왔던 인도로 파견되어 군사정보부 중령으로 배치되었고, 인도-미얀마 전선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다. 1944년 3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인도 군사정보국 부국장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되었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을 맺어가는 가운데 1945년 그는 전간기에 뮌헨 협정 등으로 나약한 외교적 면모를 보여준 보수당을 비판하며 노동당을 지지했다. 그러면서도 1947년 입당은 보수당에 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전통, 보수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1947년 보궐선거에 하원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0년 총선에서 울버햄튼 사우스웨스트에서 당선되는 데에 성공한다.
3. 정치 활동
3.1. 보수당 초기
외교적 매파였던 파월은 수에즈 위기 당시 수에즈 운하에서의 영국군 철수에 반대하는 '수에즈 그룹'의 일원이었다. 수에즈에서 영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세계에서의 영국의 지위를 지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1956년 그의 바람과 달리 영국군이 철수하고 이집트가 운하를 차지하자 '영국은 더 이상 세계적 강국이 될 수 없다'며 회의주의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운하의 탈환 시도에도 반대했다.1955년 그는 주택 및 지방정부부에서 던컨 샌디스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고, 하원에서 주택 보조금 법안과 빈민가 철거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수행했다. 1957년 해럴드 맥밀런이 총리가 되었을 때 파월은 재무부장관의 대리인인 재무담당 정무차관(Financial Secretary to the Treasury)직을 제안받았고 이를 승낙했다. 통화주의자이자 작은 국가를 지지했던[3] 그는 정부가 진행하는 지출 증가 계획에 반대했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통화공급 통제, 통신의 민영화 등 현대 신자유주의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58년 차관직을 사임했다.
1959년 영국령 케냐의 홀라 수용소에서 11명의 마우마우[4] 수감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비에게 곤봉으로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 하원에서 이 사건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일부 의원들은 피해자들을 '인간 이하'로 묘사하고, 아프리카와 같은 식민지에서는 본국과 달리 통치에 있어 가혹한 방법이 필요하다며 수용소의 대응을 옹호했지만, 파월은 '지역에 상관없이, 인종에 상관없이 통치에서의 기준은 동일해야 한다'며 수용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는 있으면 안된다고 연설에서 주장했다. 이후 알렉 더글러스흄 내각에서 일하기를 거부한 데에도 그의 이러한 인종 자유주의적 시각이 영향을 끼쳤다.
1960년 보건부장관으로 임명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한 이후 에드워드 히스 당수를 중심으로 한 그림자 내각의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방부 장관으로서 영국이 식민지 운영을 위한 제국주의적 군사정책에서 벗어나, 공산권의 공격에 대비해 서유럽 국가들과의 군사적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에즈 동쪽(중동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서방 세력이 군사활동을 벌이는 것이, 오히려 공산권의 내분을 방지하고 그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이는 당시 진행되던 베트남 전쟁에의 영국군 참전 역시 반대하는 발언이었다. 이 주장이 영국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자 당시 해럴드 윌슨의 노동당 정부도 여론을 의식해 기존의 참전 계획을 철회했다.
3.2. 1968년 '피의 강' 연설
3.2.1. 내용
Here is a decent, ordinary fellow Englishman, who in broad daylight in my own town says to me, his Member of Parliament, that the country will not be worth living in for his children. I simply do not have the right to shrug my shoulders and think about something else. What he is saying, thousands and hundreds of thousands are saying and thinking—not throughout Great Britain, perhaps, but in the areas that are already undergoing the total transformation to which there is no parallel in a thousand years of English history. Those whom the gods wish to destroy, they first make mad. We must be mad, literally mad, as a nation to be permitting the annual inflow of some 50,000 dependents, who are for the most part the material of the future growth of the immigrant descended population. It is like watching a nation busily engaged in heaping up its own funeral pyre. So insane are we that we actually permit unmarried persons to immigrate for the purpose of founding a family with spouses and fiancées whom they have never seen.
여기 한 선량하고 평범한 영국인이 있는데, 그는 대낮에 제 고향에서 의원인 저에게, 이 나라는 그의 자식들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에게 어깨를 으쓱하고 다른 생각을 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아마 영국 전역은 아닐지라도, 영국 역사 천 년간 유례가 없는 총체적 변화를 겪고 있는 지역의, 수천, 수십만명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없애버리고 싶은 자들이 있을 때, 먼저 그들을 분노케 만든다' 우리는, 말 그대로 분노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민자 후손 인구 성장의 재료가 될 5만명의 피부양자들을 매년 유입되도록 허용하는 국가라는 사실에 분노해야 합니다. 마치 국가가 자신의 장례용 화덕을 스스로 쌓아가는 것을 보는 듯 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우자나 약혼자와 함께 가정을 꾸릴 목적으로 미혼자에게 이민을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여기 한 선량하고 평범한 영국인이 있는데, 그는 대낮에 제 고향에서 의원인 저에게, 이 나라는 그의 자식들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에게 어깨를 으쓱하고 다른 생각을 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아마 영국 전역은 아닐지라도, 영국 역사 천 년간 유례가 없는 총체적 변화를 겪고 있는 지역의, 수천, 수십만명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없애버리고 싶은 자들이 있을 때, 먼저 그들을 분노케 만든다' 우리는, 말 그대로 분노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민자 후손 인구 성장의 재료가 될 5만명의 피부양자들을 매년 유입되도록 허용하는 국가라는 사실에 분노해야 합니다. 마치 국가가 자신의 장례용 화덕을 스스로 쌓아가는 것을 보는 듯 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우자나 약혼자와 함께 가정을 꾸릴 목적으로 미혼자에게 이민을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As I look ahead, I am filled with foreboding. Like the Roman, I seem to see "the River Tiber foaming with much blood". That tragic and intractable phenomenon which we watch with horror on the other side of the Atlantic but which there is interwoven with the history and existence of the States itself, is coming upon us here by our own volition and our own neglect. Indeed, it has all but come. In numerical terms, it will be of American proportions long before the end of the century. Only resolute and urgent action will avert it even now. Whether there will be the public will to demand and obtain that action, I do not know. All I know is that to see, and not to speak, would be the great betrayal.
앞을 내다보면서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로마인처럼 나는 '테베레 강이 피를 마구 흘리는' 것을 보는 듯했다. 대서양의 건너편에서 우리가 공포에 질려 지켜보는 그 비극적이고 다루기 힘든 현상은 그 나라의 역사 및 존재와 얽혀 있는 문제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의지와 방조로 인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그것은 거의 다 다가왔다. 숫자로 따지면 한 세기가 끝나기도 훨씬 전에 미국과 같은 규모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단호하고 긴박한 행동만이 그것을 피하도록 할 것이다. 대중들이 그 행동을 요구하고 획득하려는 의지가 있을지는 난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배신과 같다는 것이다.
- '테베레 강이 피를 흘린다'는 인용구는 그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인용한 것이다. '피의 강'이라는 연설 이름 역시 이 연설구에서 나왔다.
관련 영상앞을 내다보면서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로마인처럼 나는 '테베레 강이 피를 마구 흘리는' 것을 보는 듯했다. 대서양의 건너편에서 우리가 공포에 질려 지켜보는 그 비극적이고 다루기 힘든 현상은 그 나라의 역사 및 존재와 얽혀 있는 문제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의지와 방조로 인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그것은 거의 다 다가왔다. 숫자로 따지면 한 세기가 끝나기도 훨씬 전에 미국과 같은 규모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단호하고 긴박한 행동만이 그것을 피하도록 할 것이다. 대중들이 그 행동을 요구하고 획득하려는 의지가 있을지는 난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배신과 같다는 것이다.
- '테베레 강이 피를 흘린다'는 인용구는 그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인용한 것이다. '피의 강'이라는 연설 이름 역시 이 연설구에서 나왔다.
그가 '반이민'의 대표 정치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건 1968년 4월 20일 그가 버밍엄에서 '피의 강(Rivers of Blood)' 연설을 한 이후부터이다. 단순 반이민적 요소만이 아니라 연설에 내포된 제노포비아적 요소는 노동당뿐만 아니라 파월이 소속된 보수당에서도 큰 반발과 파장을 일으켰다.
파월은 전후 영국의 식민지를 중심으로 영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 인구에 대해 계속해서 주목해 왔다. 보건부장관 재임 시절 NHS 이민자의 유입에 대해 경계했으며 1964년 총선 당시 '이민자 수 통제'를 주장했다. 1968년 해럴드 윌슨의 노동당 정부는 '인종 관계법' 을 제정하여 '피부색, 인종, 민족 또는 국가적 기원을 이유로 주택, 고용, 공공서비스의 제공을 거부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사실상의 반차별 법안이었는데 파월은 여기서 '차별도 개인의 권리인데 범죄화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와 함께 영국으로 몰려오는 이민자 문제를 엮어서 법안 반대 연설을 준비한 것이다.
그는 연설에서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시민이 동료 시민을 차별할 권리를 거부당해야 한다'거나 '이민자 계층이 특수 계층으로 격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상 누군가를 차별할 권리 역시 시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는 한 중년 노동자에게서 "돈만 있다면 이 나라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내 세 자녀들과 자녀의 가족들이 모두 해외에 정착하는 것을 보기 전까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15년이나 20년 후면 이 나라에서 흑인이 백인을 압도할 것이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가 인용한, 하숙집을 운영하는 한 백인 여성의 편지에 따르면, 자신은 거리의 유일한 백인 거주자이며, 흑인 이민자들이 지역에 유입된 이후 백인 하숙인들은 그녀의 집을 떠났다. 하루는 흑인 이민자들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집전화를 쓰고 싶다고 문을 두드렸는데 이를 거부하자 자신에게 언어적 위협을 가했다. 이후 흑인에 대한 경계로 세입자를 받기 꺼리면서 지자체에 세율 인하를 요청했으나, 그러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서는 이 나라에서 편하게 살기 힘들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가 언급한 두 사연 모두 흑인이라는 인종적 요소와 연관된다.
For reasons which they could not comprehend, and in pursuance of a decision by default, on which they were never consulted, they found themselves made strangers in their own country. They found their wives unable to obtain hospital beds in childbirth, their children unable to obtain school places, their homes and neighbourhoods changed beyond recognition, their plans and prospects for the future defeated; at work they found that employers hesitated to apply to the immigrant worker the standards of discipline and competence required of the native-born worker; they began to hear, as time went by, more and more voices which told them that they were now the unwanted. On top of this, they now learn that a one-way privilege is to be established by Act of Parliament; a law which cannot, and is not intended to, operate to protect them or redress their grievances, is to be enacted to give the stranger, the disgruntled and the agent provocateur the power to pillory them for their private actions.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그들이 결코 동의하지 않은 기본적 결정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내가 출산할 때도 병원 침대를 얻을 수 없고, 아이들은 학교 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그들의 집과 주변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전망은 좌절되었습니다. 직장에서 그들은 고용주가 이민 노동자에게 원주민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규율과 역량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주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이 따라 자신들이 이제 원치 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말을 점점 더 많이 듣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법에 따라 일방적 특권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작용할 수 없고, 그럴 의도도 없는 법률이, 낯선 사람, 불만을 품은 사람, 선동가에게 그들의 사적 행동을 비난할 권한을 주기 위해 제정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그들이 결코 동의하지 않은 기본적 결정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내가 출산할 때도 병원 침대를 얻을 수 없고, 아이들은 학교 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그들의 집과 주변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전망은 좌절되었습니다. 직장에서 그들은 고용주가 이민 노동자에게 원주민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규율과 역량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주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이 따라 자신들이 이제 원치 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말을 점점 더 많이 듣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법에 따라 일방적 특권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작용할 수 없고, 그럴 의도도 없는 법률이, 낯선 사람, 불만을 품은 사람, 선동가에게 그들의 사적 행동을 비난할 권한을 주기 위해 제정되어야 합니다.
그는 인종 관계법을 비판하며 원주민에 대한 역차별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인종 관계법이 시행되고 이민자 관용책이 지속된다면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로 사회가 병들고 갈등이 만연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3.2.2. 반응
연설이 발표된 이후 에드워드 보일, 퀸틴 호그, 로버트 카 등 그림자 내각의 주요 보수당원들은 파월의 발언에 경악하면서 히스가 파월을 당장 해임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다만 당내 우파에 속한 일부 의원들은 파월의 해임이 당이 처한 위기를 고조시킬 것이라며 반대했고, 이 중에는 향후 영국 총리가 되는 마거릿 대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스는 파월이 '선동적이고 인종 갈등을 조장한다'며 해임하기로 결정했다.보수성향 신문인 더 타임스는 파월의 연설을 '사악하다'고 표현하며 '중대한 영국 정치인이 전후 역사상 처음으로 인종적 증오에 호소했다'고 비난했다. 타임스에 따르면 파월의 연설 직후 인종범죄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울버햄튼에서 14명의 백인 청소년들이 '파월'을 연호하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인도 제도인들의 행사에 난입해 칼부림을 벌여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노동당 소속 총리 해럴드 윌슨은 "계산적인 선동가나 무지한 편견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인종 갈등에 나라가 휩쓸리는 것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며 파월의 연설을 공식 비판했다. 이후 10월에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도 "노동당은 인권당이며,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은 전 세계적인 투쟁이다", "야당을 구성하는 당의 가치에 대한 비판이 있다면, 파월주의 바이러스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라며 파월과 보수당이 인종주의를 선전한다고 비난했다.
정치권과 언론의 반응만 보면 파월이 커다란 똥볼을 찬 것으로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적 여론은 파월에게 우호적이었다. 연설이 이뤄진 후 4월 말에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74%가 파월이 말한 내용에 동의한다고 밝혔고, 69%가 히스가 파월을 해임한 것은 잘못이라고 여겼다. 연설 전에는 보수당 당수 후보로 1%의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파월이 연설 후 24%로 껑충 뛰어 20%로 선두를 달리던 레지널드 모들링(Reginald Maudling)을 뛰어넘었다. 오히려 기존의 정치인들은 입닫고 있던 문제를 파월이 수면 위로 꺼내준 것이 속시원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런던에서 1000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우리는 이녹 파월을 원한다'를 외치며 파업을 벌였고 '영국을 지지하라, 흑인들의 영국이 아니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웨스트민스터 궁전까지 행진했다. 이어 다른 부두와 전국의 수많은 소규모 공장들에서 노동당 정부에 반대하고 파월을 지지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다만 파월에 반대하는 시위 역시 상당했고 이들은 다우닝가로 행진하여 '파월을 체포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파월의 연설이 1970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깜짝 승리를 일정 부분 견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영국의 정치학자 R.W. Johnson은 기존에 노동당을 지지했던 백인 노동자 계층이 파월의 연설에 영향을 받아 보수당에 투표한 것이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주장했다. 심화되어가는 경기 침체와 빈부격차, 일자리 부족 속 이민자들을 이러한 사회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한 파월의 연설이 원주민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2016년 도널드 트럼프도 불법이민자들을 일자리 부족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기존에 민주당을 지지했던 경합주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표를 상당수 가져와 대선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둔 바가 있다.
파월은 5월 4일 버밍엄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믿지 않으며,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면에서 유럽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에 반박했다. 1977년 그는 인터뷰에서 연설에 대해 오히려 '문제를 당시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을 밝혔다.
연설이 있고 8년이 지난 1976년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콘서트 도중 파월을 지지하며 '검둥이들을 쫓아내자' '영국을 계속 하얗게'와 같은 극단적, 인종주의적 발언을 일삼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3.3. 보수당 후기
3.4. 얼스터 연합당으로
3.5. 정계 은퇴와 이후
4. 평가
연설 이후 내각에서 파월을 해임하는 데에 반대했던 마거릿 대처는 1990년 파월이 '때로는 유감스러운 표현을 사용했지만 타당한 주장을 했다'며 그를 평가했다.연설 30년 후 파월을 해임한 당사자인 에드워드 히스 전 총리도 파월이 이민정책의 '경제적 부담'에 관해 한 발언에 관해서는 '선견지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2010년대 들어서 브렉시트가 진행되고 유럽회의주의, 반이민을 내세운 극우 정치인들이 힘을 얻으면서 그의 발언도 재조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 독립당을 이끌었고 현재 개혁 영국 대표를 맡고 있는 나이젤 패라지는 파월을 공개적으로 존경해왔으며 한때 자신의 정치적 영웅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파월이 다른 국적, 인종의 사람들이 섞일 수 없다고 평한 것이 틀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민에 대한 주장의 핵심 요지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2014년 1월 패라지는 '피의 강' 연설에서 내세운 핵심 원칙은 옳았으며, 파월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고 그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종 간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 말했다.
대처 내각에서 장관직을 맡았던 보수당 정치인 노먼 테빗(Norman Tebbit)은 '트로이 목마 스캔들'[5]을 언급하면서 '버밍엄의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파월이 훨씬 전에 경고했던 것과 같다'며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많은 이민자들을 수입해왔다'고 주장했다. 보수당 의원 제럴드 하워스(Gerald Howarth)는 '분명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유입되면서 이녹 파월이 경고했듯이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말했다.
2018년 웨일스의 영국 독립당 정치인 닐 해밀턴(Neil Hamilton)은 '이녹 파월이 인종차별주의 악당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해밀턴은 플라이드 컴리 대표와 노동당으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받았다.
[1] 1952년 결혼[2] 이는 24세에 대학교수가 된 프리드리히 니체 다음으로 어린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3] 통화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시카고 학파를 중심으로 하여 1970년대에 떠오른 이론으로, 오일 쇼크에 동반된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이 제안되면서 등장했다. 1950년대 당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케인스주의적 정책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파월은 당시로서는 비주류적이고 다르게 말하면 선구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4] 케냐의 독립군[5]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버밍엄의 여러 학교에 이슬람주의 정신을 주입시키고자 한다는 음모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