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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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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ral of the Fleet
The Right Honourable[1]
The Earl Beatty
GCB OM GCVO DSO PC
파일:2B77A5B2-BAEC-4792-B54C-4BDDC4C7CB68.jpg
이름 David Richard Beatty
데이비드 리처드 비티
출생 1871년 1월 17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체셔 스테이플리
사망 1936년 3월 12일 (향년 65세)
영국 런던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복무 기간 1884년 ~ 1927년
최종 계급 파일:영국 해군기.svg 해군 원수
(Admiral of the Fleet)
지휘 제1순양전함전대
(1st Battlecruiser Squadron)
순양전함함대
(Battlecruiser Fleet)
대함대
(Grand Fleet)
제1해군경
(First Sea Lord)
작위 비티 백작, 웩스포드 카운티의 웩스포드의 보로데일 자작, 레스터 카운티의 브룩스비와 북해의 비티 남작 (1919)[2]

1. 개요2. 생애3. 커리어4.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 해군제독. 최종계급은 해군 원수.

2. 생애

데이비드 리처드 비티는 1871년 체셔 주 하우벡 로지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데이비드 롱필드 비티와 캐서린 에디스 세들레어 사이의 다섯 자식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교 출신인 비티의 아버지는 다른 장교의 아내였던 캐서린과 불륜을 저지른 상태였고, 그들의 관계를 알아챈 비티의 할아버지가 아들을 인도로 보내려 했으나, 비티의 아버지는 제대하고 캐서린과 가정을 꾸리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캐서린의 이혼이 마무리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결혼할 수 없었다.

이후 비티의 아버지는 말 훈련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내의 사망 이후 사업을 접게 된다. 비티는 킬케니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1882년 사관후보생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884년 13세의 나이에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한 비티는 1886년 중국으로 발령받으나, 비티의 어머니가 해군에 있는 지인인 찰스 베레스포드에게 편지를 보내 지중해로 발령받았다. 비티는 1890년에 중위로 진급한 뒤, 그리니치의 왕립 해군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어뢰를 제외한 다른 과목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다. 해군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에는 포술학교를 수료하고, 왕실 요트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소위 시절에 같이 근무했던 스탠리 콜빌의 요청으로 나일 강 전단에 합류한 비티는 동골라 공격 도중 콜빌이 부상을 입자 그를 대신해 공격을 지휘했고, 이로 인해 비티는 공로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수여받게 된다. 휴가에서 복귀한 후, 비티는 하르툼 원정에 참여해 옴두르만 전투파쇼다 사건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흐디 전쟁 당시 세운 전공으로 인해 약 400명의 다른 대위들을 제치고 중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중국에서 근무하던 비티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차출된 수병들과 함께 톈진 방어군에 배치되어 의화단과 청군을 방어하게 되었다. 비티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왼팔에 부상을 입어 영국으로 돌아와 수술을 받게 된다.

대령 진급 후, 함장 직을 수행하게 된 비티는 여러 대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수단에서 돌아와 휴가를 보내던 중 알게 된 마셜 필드[3]의 딸인 에델 뉴컴 트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에델은 당시 유부녀로 자식도 있었지만, 이혼 후 비티와 결혼한다.

그리고 1910년에 호레이쇼 넬슨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소장이 된 비티는 대서양함대의 부사령관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본토함대로 가려다가 한동안 무보직 신세가 되었다. 이로 인해 비티는 예비역으로 편입될 뻔 했으나 수단에서 안면을 익힌 윈스턴 처칠이 해군장관으로 부임하자 해군장관 부관으로 임명된다.[4] 1913년 비티는 제1순양전함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HMS 라이온을 자신의 기함으로 삼게 된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에서 제1순양전함전대를 지휘했던 비티는 이후 독일 해군이 도거 뱅크로 출격하자 이를 감지한 영국 해군의 명령으로 독일 해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한다.

도거 뱅크 해전에서 비티는 프란츠 히퍼가 지휘하는 정찰부대를 27노트의 속력으로 추격했다. 그러나 비티가 지휘하는 제1순양전함전대는 신형 순양전함인 HMS 라이온, HMS 프린세스 로열, HMS 타이거로 구성된 반면, 아치발드 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제2순양전함전대는 구형 순양전함인 HMS 뉴질랜드HMS 인도미터블로 구성되어 제1순양전함전대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없었고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비티의 기함인 HMS 라이온은 제1정찰단의 후위에 있던 SMS 블뤼허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다른 함정들이 포격 거리에 들어오자 비티는 각 함은 상대 번호함과 교전할 것[5]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령은 영국 함정이 5척이고, 독일 함정이 4척인 상황에서 약간의 혼란을 초래했고, HMS 타이거가 판단 실수로 SMS 몰트케를 포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SMS 자이틀리츠를 HMS 라이온과 같이 포격했다.

영국 함정들이 SMS 자이틀리츠를 대파시킨 상황에서, 독일 함정들 역시 영국 함정들의 선두에 있는 HMS 라이온을 집중적으로 포격해 큰 피해를 입고 속력이 떨어졌다. 결국 비티는 기함을 옮기면서 적과의 거리를 더 좁히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했으나[6] 해당 신호가 코드 북에는 없어 대신 적에 더 접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7] 하지만 HMS 라이온은 여기저기 손상되었는데다가 명령을 받은 장교의 실수로 무어 소장에게는 북동쪽의 적을 추격하라고 전달이 되었고, 하필 그 자리에는 SMS 블뤼허가 있었기에 결국 SMS 블뤼허를 격침시키는 데에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비티는 기함을 HMS 프린세스 로열로 옮겼지만, 이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다음이었다. 이 때 나타난 신호 문제는 유틀란트 해전에서 다시 비티의 발목을 잡게 된다.[8]

도거 뱅크 해전 이후 비티는 순양전함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유틀란트 해전에서 비티가 지휘하는 순양전함함대는 독일의 대양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출항했다. 그러나 순양전함함대에 배속된 휴 에번토마스 소장의 제5전투전대[9]가 비티의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는 바람에 전열에서 뒤쳐졌다. 하지만 히퍼의 정찰부대를 저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비티는 제5전투전대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정찰부대와 교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비티의 신호를 알아보지 못한 HMS 퀸 메리가 사격배분을 따르지 않아 SMS 데어플링어가 자유롭게 포격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결국 독일 함정의 포격으로 기함인 HMS 라이온이 이탈하자 SMS 데어플링어는 영국 함정들의 포격을 견뎌내던 SMS 자이틀리츠와 함께 HMS 퀸 메리를 격침시키고 만다. 이 와중에 SMS 폰 데어 탄과 포격을 주고 받던 HMS 인디패티거블마저 격침되자 비티는 자신의 기함이었던 HMS 라이온의 함장에게 "오늘 우리 망할 배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10]

결국 난타전 끝에 히퍼가 순양전함함대를 대양함대의 사정거리 안에 끌어들이는 임무를 완수하자 비티 역시 이를 알아채고 북쪽으로 물러나 대양함대를 대함대의 사정거리 안에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또 다시 제5전투전대에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제5전투전대는 상황을 제 때 파악하지 못하고 조금 늦게 북상하게 된다.[11] 이 와중에 대함대 본대와 함께 움직이다 비티를 돕기 위해 호러스 후드 소장의 제3순양전함전대가 합류하지만 후드 소장의 기함인 HMS 인빈시블마저 독일 함정들의 포격에 탄약고가 유폭되어 격침되고 만다. 결국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보다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략적 승리를 거두는 데 성공했고, 결국 영국 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데 실패한 독일 해군은 U보트를 이용한 통상파괴전에 집중하게 된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 비티는 존 젤리코의 뒤를 이어 대함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HMS 퀸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기함으로 삼은 비티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함대 총사령관 직을 유지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대양함대를 스캐파플로로 이송해 억류하게 된다.

2.2. 제1해군경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비티는 비티 백작, 웩스포드 카운티의 웩스포드의 보로데일 자작, 레스터 카운티의 브룩스비와 북해의 비티 남작(Earl Beatty, Viscount Borodale of Wexford in the County of Wexford, Baron Beatty of the North Sea and of Brooksby in the County of Leicester)에 서임되었고, 그 해 말에는 69대 제1해군경으로 취임하게 된다. 비티는 자신의 임기 동안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관여했으며, 새로운 순양함 건조를 두고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반대하던 재무장관 윈스턴 처칠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제1해군경 임기 동안 비티는 군축 속에서 해군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12]

1926년 비티는 캐나다 총독으로 고려되었으나, 식민지장관 레오 아메리에 의해 거부된다. 1927년 해군에서 퇴역한 비티는[13]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된다.

2.3. 퇴역 이후

비티는 퇴역 이후 레스터셔 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1935년 자신의 상관이었던 존 젤리코가 사망하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며[14] 이듬해인 1936년에는 주군이자 친구인 조지 5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이는 비티의 건강을 크게 해쳤고, 결국 그 해 3월 12일에 사망하였다. 비티는 자신을 아내 곁에 묻어달라고 하였으나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커리어

4. 기타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2] Earl Beatty, Viscount Borodale of Wexford in the County of Wexford, Baron Beatty of the North Sea and of Brooksby in the County of Leicester[3] 시카고 백화점의 창업주이자 시카고 대학교의 부지를 기증한 사람으로, 그의 재산을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600억 달러가 넘어간다![4]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이 당시 처칠의 사무실에 방문한 비티에게 처칠이 "제독이 되기에는 어려보이네요."라고 하자 비티는 처칠에게 "그리고 당신도 해군장관이 되기에는 어려보이네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5] Engage your opposite number.[6] Engage the enemy more closely.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사용했던 명령이라고 한다.[7] Keep nearer to the enemy.[8] 당시 비티의 신호장교였던 랠프 시모어 소령은 윈스턴 처칠과의 인맥을 통해 완전한 신호 전달 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비티에게 기용되었다. 비티는 전쟁 중과 전쟁 후에도 시모어를 신뢰했으나, 유틀란트 해전에서 비티의 행적이 논란이 되자 시모어와 비티의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9]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4척으로 편성. HMS 퀸 엘리자베스는 수리를 받느라 유틀란트 해전에 참여하지 못함.[10] "Chatfield, there seems to be something wrong with our bloody ships today." 여담으로 이 당시 비티의 기함인 HMS 라이온의 함장이었던 에른 체필드 대령은 72대 제1해군경을 지내게 된다.[11] 이 신호 미스는 나중에 비티와 에반-토마스 간의 책임을 두고 격렬한 공방이 있었으나, 두 번째 신호 미스의 경우에는 에반-토마스가 비티의 움직임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어야 한다는 견해가 좀 더 일반적이다.[12] 이 당시 비티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영국 해군은 후에 인버고든 반란과 같은 사건을 더욱 많이 겪었을 수도 있었다.[13] 최장수 제1해군경으로 1919년부터 1927년까지 무려 7년 271일 동안이나 재직했다. 두 번째로 장수한 제1해군경은 1820년부터 1827년까지 7년 50일 동안 재직한 윌리엄 호프 중장이다.[14] 의사에게 "내가 젤리코의 장례식에 불참하면 해군이 내게 뭐라고 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참석했다고 한다.[소위] [16]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의 기함이다.[중위] [18] HMS 엑설런트는 함선이 아니라 육상에 설치된 해군의 포술 학교다.[대위] [중령] [대령] [소장] [임시중장] [중장] [임시대장] [대장]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