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플러머 관련 틀 | ||||||||||||||||||||||||||||||||||
|
이름 | Herbert Charles Onslow Plumer 허버트 찰스 온슬로우 플러머 |
출생 | 1857년 3월 13일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 |
사망 | 1932년 7월 16일 (향년 75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 |
국적 | 영국 |
복무 기간 | 1876년 ~ 1919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Field Marshal) |
지휘 | 북부 사령부 (Northern Command) 제5군단 (V Corps) 제2군 (Second Army) 이탈리아 주둔 영국군 (British Forces in Italy) 영국 라인 주둔군 (British Army of the Rhine) |
[clearfix]
1. 개요
영국 육군의 장군. 최종 계급은 원수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부하들에게 신망을 받아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메신 전투와 제2차 파스샹달 전투에서 훌륭한 지휘로 승리를 이끈 명장이다.2. 상세
플러머는 이튼 칼리지와 샌드허스트를 졸업하고 1876년에 중위로 임관해 제65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1882년에 대위로 진급한 플러머는 1884년 나일 강 원정에 참여했고, 전투에서 공을 세워 파견 보고서에 언급되었다. 1886년 참모대학에 입학한 플러머는 졸업 이후인 1890년에 저지 섬 부관감 부보좌를 맡았고, 1893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요크와 랭커스터 연대의 2대대에 배치되었다.1895년에는 케이프 식민지 주둔군 사령관의 차관보가 되었고, 남로디지아에서 경찰 업무를 맡고 제2차 마테벨레 전쟁에 참전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플러머는 앨더샷 부관감 부보좌가 되었고, 1897년에는 임시 중령으로 진급했다. 1899년 남로디지아로 돌아온 플러머는 기마 보병대를 모집했고, 정식 중령으로 진급했다. 플러머는 이 부대를 이끌고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보어 전쟁 중이던 1900년에 대령으로 진급한 플러머는 1902년에 허버트 키치너 장군의 찬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플러머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4여단장에 임명되었다. 플러머는 1903년에 제10사단장으로 영전했고, 1904년에는 병참감으로, 1906년에는 제7사단장으로, 1907년에는 제5사단장으로 이동했다. 1908년에 중장으로 진급한 플러머는 1911년에 북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후, 영국 원정군 소속 제2군단장이었던 제임스 그리어슨 장군이 프랑스에서 급사하자 플러머는 후임 군단장으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고, 플러머는 1915년에 프랑스로 파병되어 제5군단장에 취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으로 진급했다. 제2군사령관으로 영전한 플러머는 1917년 메신 전투에서 공병대를 동원해 지하에서 454t의 폭발물을 터뜨리는 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고, 제2차 파스샹달 전투에서는 보다 신중하고 유기적인 전술을 사용해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파스샹달 전투 직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리자, 플러머는 이탈리아 파병 영국군 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에 들어서면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플러머를 제국총참모장에 임명하려고 했지만, 플러머는 이를 고사했고 제2군사령관으로 복귀해 루덴도르프 공세와 백일 공세 당시에도 제2군을 이끌었다.
종전 이후 영국 라인 주둔군이 편성되었고, 플러머가 사령관이 되었다. 1919년 플러머는 몰타 총독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원수로 진급했으며, 10월에는 메신과 빌튼의 플러머 남작(Baron Plumer of Messines and of Bilton in the County of York)을 서임받았다. 1925년 플러머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고등판무관에 부임했다. 플러머는 이 직책에서 밸푸어 선언에 반발하는 아랍인과 유대인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양측의 지지를 받은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1929년 플러머는 메신과 요크 카운티의 빌튼의 플러머 자작(Viscount Plumer of Messines and of Bilton in the County of York)에 서임되었다. 그리고 1932년 플러머는 런던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플러머의 작위는 아들에게 이어졌으나, 아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서 작위가 끊어졌다.
[1] 자작 본인에 대한 경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