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FC 1909 소속 축구 선수에 대한 내용은 슈테판 포슈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fff><colcolor=#002395> 초대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Ferdinand Foch | |||
출생 | 1851년 10월 2일 | ||
프랑스 제2공화국 타르브 (現 프랑스 오트피레네 타르브) | |||
사망 | 1929년 3월 20일 (향년 77세) |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 |||
묘소 | 앵발리드 | ||
재임기간 | 제26대 육군참모총장 | ||
1917년 5월 16일 ~ 1918년 12월 29일 | |||
초대 연합군 총사령관 | |||
1918년 3월 26일 ~ 1920년 1월 1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colcolor=#002395> 학력 | 에콜 폴리테크니크 | |
배우자 | |||
자녀 | 4명 | ||
복무 | 프랑스 육군 | ||
1870년 ~ 1923년 | |||
병과 | 포병 | ||
최종 계급 | 원수 (프랑스 육군) 원수 (영국 육군) 원수 (폴란드 육군) | ||
주요 참전 |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 |
1. 개요2. 상세3. 생애4. 1차 세계대전
4.1. 1914년
5. 여담6. 매체에서4.1.1. 알자스-로렌 진공4.1.2. 순조로운 시작4.1.3. 루프레히트의 역공, 그리고 제2군을 지탱하다4.1.4. 1차 마른 전투4.1.5. 1차 마른 전투에서 포슈의 공에 대해서4.1.6. 조프르의 부관이 되다4.1.7. 당시 북부전선의 상황4.1.8. 바다로의 질주4.1.9. 위기의 제2군4.1.10. 존 프렌치와의 갈등4.1.11. 릴(Lille) 지역 공략4.1.12. 1차 이프르 전투
4.2. 1915년4.2.1. 오늘도 포병을 외친다4.2.2. 비미 능선 장악 계획과 문제
4.3. 1916년4.4. 1918년4.4.1. 연합군 대원수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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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불타오르는 인간의 영혼이다." "L'arme la plus puissante sur Terre est l'âme humaine qui s'enflamme." |
제1차 세계 대전 때 활약한 프랑스 육군의 군사 사상가이자 장군.
조제프 조프르, 필리프 페탱이 전쟁 초/중반에 프랑스-영국 연합국을 패배의 위험에서 구해낸 '방어의 영웅'이었다면, 이쪽은 연합국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준 '결전의 주인공'이었다.
2. 상세
근본은 19세기 인물로 인생의 49년을 19세기에 보내고 남은 29년을 20세기에 보낸 만큼 인생의 거의 5/8는 19세기에 국한되어 있다. 19세기의 포슈는 지휘관보다는 군사 사상가로 유명했으며 특히 그의 선임이었던 앙리 보날의 기동전 이론에 기반한 군사 이론은 한국에서 엘랑 비탈 교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포슈의 이론이 정신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알려져있으나, 오히려 그는 1강에서부터 정신이 필연적으로 미결되고 변화한다는 점을 지적한 후 추상적인 정신적 작용과 한낱 논증 과정으로 완벽한 이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정신력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는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전임자인 마이야르와 보날의 나폴레옹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연구를 계승했고 독자적으로는 보오전쟁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냈다. 기동전을 현대전으로 여겼던 그의 이론은 결국 결정적 전투 혹은 결정적 공격을 성공시키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그가 이를 위해 제시한 원칙은 병력의 절약, 행동의 자유, 경계다. 보날이 자기 이론에서 제시한 병력의 절약, 의지 강요, 행동의 자유를 수정한 것이다. 현대 프랑스군은 포슈가 제시한 원칙 중 당대에는 논란거리였으나 지금은 당연시되는 경계를 빼고 병력의 절약의 하위 개념으로 설명되었던 노력의 집중을 상위로 분리해 원칙으로 삼고있다. 포슈의 논문 내용의 2/3 정도가 이 원칙들을 지키는데 필요한 개념인 아방가르드, 즉 전위대에 관한 설명이다. 이것은 보날이 나폴레옹 전쟁을 연구한 후 나폴레옹의 분견대 운용에서 영감을 얻어 고안해낸 개념으로, 제병협동 능력을 갖추었기에 매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 지휘관이 3가지 원칙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도록 편조된 경계부대다.[1] 포슈의 이론에서 핵심은 보날에게 계승받은 아방가르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리델 하트의 비판을 필두로 논란이 있는 군사이론가로서의 행적과 별개로,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에서 명장으로 맹활약한다. 특별한 군 지휘 경험이 없던 제20군단장부터 활약했으며, 제9군 사령관으로서 1차 마른 전투에서 맹활약한 공로를 기반으로 명성이 치솟았다. 이후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하면서 1차 이프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승승장구하지만 1915년부터는 공세에 연이어 실패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전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작전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참호전에 제일 빠르게 적응한 군인으로 여겨진다. 1916년엔 조프르와 정치권의 갈등이 격화되어 가던 중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코인을 걸었다가 신임투표에서 살아남은 아리스티드 브리앙 수상에 의해 솜 전투 이후 기습적으로 해임당했다.[2] 그러나 1917년에 프랑스 참모총장으로 복귀하고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의 춘계 공세로 인해 연합군이 위기에 빠진 후, 수상이 된 클레망소의 정치적 지원을 받으며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서 분열되어 있는 연합군을 뛰어난 외교 능력과 넓은 전략적 안목으로 결합해 독일 제국을 좌절시키고 백일 공세로 상징되는 연합군의 대반격을 개시해서 대대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그 외 특이점이라면 연합군 총사령관(Généralissime of the Allied Armies), 프랑스 육군 원수(Maréchal de France), 영국 육군 명예원수(British Field Marshal)[3], 폴란드 육군 명예원수(Marszałek Polski)등 삼국 원수에 도달하고, 후술하겠지만 1차 대전을 종결한 공을 바탕으로 수많은 메달, 상, 명예 학위 등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가장 별을 많이 단 군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폴란드군과 영국군 원수는 계급장에 별을 사용하지 않기에 실제 달았던 별은 프랑스군 원수의 별 7개뿐이다.
3. 생애
3.1. 유년기
포슈가 태어난 방. |
1851년 10월 2일 오트피레네 주[4]에 위치한 타르브(Tarbes)라는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비범한 나폴레옹 포슈(Napoleon Foch)[5]였고, 모친의 이름은 조피 뒤프레(Sophie Dupre)였다. 포슈의 외할아버지는 나폴레옹을 따라서 이탈리아 전역, 스페인 전역, 아우스터리츠 전투도 참여해서 나폴레옹이 직접 용맹하다고 평가한 것과 동시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포슈의 삼촌 중 한명은 나폴레옹 휘하에서 북 치는 소년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6]. 이러한 나폴레옹의 영향은 포슈 집안에 팽배했고, 어린 시절의 포슈는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삼으며 성장했다. 포슈의 고모의 경우에는 포슈와 포슈의 형제들을 "작은 나폴레옹들"(little Napoleons)이란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남부는 보수적인 데다가 가톨릭의 영향이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포슈의 형제 제르멩 포슈(Germain Foch)는 예수회에 들어갔으며, 포슈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게 된다.[7]
어린 시절의 포슈(가운데) |
이후 10대 중후반에 접어든 포슈는 알자스-로렌에 위치한 메스(Metz)의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한다. 그러던 와중 프랑스 제2제정을 붕괴시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고, 포슈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예비대로 지원하지만 전쟁 자체가 초고속으로 끝난 터라 활약 없이 해산된다.[8] 메츠가 위치한 알자스-로렌이 독일에게 넘어갔지만, 포슈는 여전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생활해야 하는 데다가 매일마다 독일 군악대가 프랑스인들의 사기를 떨구기 위해서 연주하는 후퇴곡을 들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걸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지 않았던 포슈는 훗날 1918년 메츠가 탈환되자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프랑스 군악대에게 프랑스의 애국적인 노래를 연주하게 한 것이었다.
조국의 수모를 복수하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포슈는 가톨릭 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에 위치한 명문대 에꼴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한다.[9][10] [11] [12] [13] [14] [15] [16] [17] [18]
입학 후 포병 병과를 택한 포슈는 특이하게도 독일만을 프랑스의 주적으로 생각한 탓에 조제프 갈리에니나 조제프 조프르등 1차 대전 프랑스의 명장들과 달리 식민지 복무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의 출생지인 타르브나 브루티뉴 반도 등 프랑스 내에서 복무한다. 브리티뉴에서 9살 연하의 부유한 집안의 딸 줄리 비엥베뉴(Julie Bienvenüe)를 만나서 결혼한다. 둘의 금슬은 대단한 편으로 전쟁 중에도 서로 편지를 꾸준히 보냈으며 1914년에 연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가 파리조차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서 도망갔음에도 남편이 독일군을 자신이 막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가족과 함께 파리에 남았다. 1919년에 포슈 전기를 출간한 A.H. Atteridge의 경우에는 빠른 진급이 확정되는 식민지 복무를 거부한 것을 성실성으로 해석해서 포슈를 매우 극찬했다.
3.2. 군인 복무
1885년, 포슈는 육군대학에서 2년간 공부해서 반 4등으로 졸업했다. 인생의 전환기라 평가될 정도로 포슈는 넘치는 열정과 에너지를 통해 많은 동급생들과 강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클라우제비츠의 군사학, 독일의 사회 등을 공부하면서 미래의 독일과의 결전을 준비해 왔다.준수한 성적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한 포슈는 꽤 안정적인 출세 가도를 펼쳤다. 1887년에는 육군대학의 보조 교수로 돌아와서 자신이 형성한 공세지향주의와 '의지'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군사 이론을 가르쳤다.[19]
포슈의 젊은 시절. 제35포병연대의 지휘관이었다. |
다만 19세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독실한 신앙심과 예수회에 형제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1901년때는 대령으로의 진급이 늦춰지고 육군대학에서도 해임되고, 좌천직으로 별볼일 없는 라온과 반의 군부대에서 복무하는 고초를 겪었다.[20]포슈는 개의치 않고 충실히 군복무를 이어가며 그의 대표 군사 사상 저작 <Des Principes de la Guerre> (전쟁의 원칙)과 <De Conduite de la Guerre> (전쟁지휘론)을 출간했다.
그러던 와중, 1907년에 들어서 준장으로 진급되고 의외로 반교권주의로 유명한 당시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와 직접 대면해서 육군대학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의아한 포슈는 형제 중 한 명이 예수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강조했지만 포슈의 능력을 신뢰한 클레망소는 반대로 그의 신앙심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음을 역설하고 여전히 육군대학의 감독으로 삼았다. 이때 대면한 무명의 군사상가와 평화기의 총리는 10년 후 국가의 위기 속에 참모총장과 전시 수상으로 다시 대면해 군민 관계의 모범 사례로 남을 정도로 환상적인 협동을 보여준다.
1907에서 1911년까지 육군대학 감독[21]으로 활동하는데, 이때 포슈는 그동안 자신이 형성한 군사 이론을 마음껏 가르친다. 다만 이 경력 때문에 리델 하트나 콘월 등 영국 쪽 학자들에게 무분별적인 공세주의(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엘랑 비탈"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욕 먹지만 일전에 출간한 <전쟁의 원칙>이나 <전쟁운영론>을 보면 포슈가 공세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훗날 포슈의 제자였던 루이 그랑메종이 창안하는 공세유일주의와 궤를 달리한다.[22] 애초에 당대의 시점에서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 수준의 개념이었고, 발달된 화력 때문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수반될 것이라는 점은 1차 대전식 참호전의 전조로 칭해지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조차도 누구도 상정하지 않던 일이었다. 러일전쟁의 전훈을 비교적 잘 반영했던 독일군조차도 러일전쟁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극동에서의 특수한 상황이다라고 평가한 게 당대의 현실이었다.
포슈(左)와 윌슨(右). |
훗날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간에, 포슈는 이로써 프랑스의 대표 군사사상가로 이름을 날린다. 이때 영국의 캠벌리 참모 대학의 협력과정에서 캠벌리 대학의 친프랑스파 교장 헨리 윌슨[23]과 친해지게 된다. 훗날 1차 대전 때 이 우정은 윌슨이 영국 원정군의 계획을 포슈에게 귀띔해 주는 등 두 군대의 협동에 있어서 꽤 중요하게 적용된다. 참고로 윌슨은 포슈의 막내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적도 있다! [24] 이 시절 러시아 제국군의 기동 연습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러시아군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윌슨과의 영국-프랑스 협동을 더욱 중시하게 된다.
1911년 이후로는 소장으로 진급해서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1913년부터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낭시(Nancy)에서 노엘 드 카스텔노 장군이 담당하는 제2군(Second Army)휘하의 제17계획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을 일명 "강철 군단"[25] 제20군단(XX Corps)을 지휘한다.
좋은 친구 포슈와 조프르. |
이때만 해도 50대가 넘었던 노장 포슈를 바로 은퇴시키지 않고 꾸준히 기용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 장군의 지지가 한몫을 했다. 같은 지역 출신인 데다가 에콜 폴리테크니크 시절부터 포슈를 알던 조프르는 포슈의 능력에 대해서 높게 평가했다. 아예 부사령관으로 두려고 했었지만 포슈의 신앙심을 꺼렸던 당시 프랑스의 국방장관 아돌프 메시미의 반대에 의해서 카스텔노를 대신 기용하게 된다
4. 1차 세계대전
4.1. 1914년
4.1.1. 알자스-로렌 진공
그렇게 거의 40년이 넘는 군인 인생을 기나긴 평화에 젖은 벨 에포크 때 복무하면서 포슈는 꿈에서 그리던 독일에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은퇴 연령이 65세였음을 고려하면 62세의 포슈는 얼마 못 가 은퇴하고 역사적으로도 명장으로서의 광휘 대신 한때 유명했던 군사 사상가 정도의 평가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슈에게 복수의 대한 기회와 일생일대의 명성을 가져다주지만 개인에게 최악의 상처를 안겨준 제1차 세계 대전이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면서 전 유럽은 순식간에 전쟁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휴가 내서 가족 파티를 즐기던 포슈는 급히 전선으로 돌아와야 했다.
1914년 8월부터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개입하고 독일 제국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을 준수하면서 자동으로 프랑스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동부의 제정 러시아군과 동시에 독일 제국을 공격하기로 약속한 8월 14일, 포슈가 소속된 카스텔노의 제2군은 제17계획 하에 제1군과 함께 알자스-로렌을 향해 진군했다.
4.1.2. 순조로운 시작
프랑스군은 기세등등하게 진격했으나 독일 휘하의 알자스-로렌 지역은 요새화가 잘 되었으며, 공세 측에 불리한 지형[29]인데다가 독일군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 헬무트 폰 몰트케(小)도 알자스-로렌이 침공당할 줄 알고 해당 지역을 방어하는 좌익에다가 8개의 사단을 배치해 놨다. 프랑스 첩보부의 무능으로 프랑스군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덤. 그래도 그럭저럭 제1군과 제2군은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을 북부에서 막고 있던 조제프 조프르는 독일군 좌익이 묶여 있길 원해서 제2군에서 정규군단 2개를 빼는 것과 동시에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강조했다.포슈의 제20군단은 5일 만에 10km를 주파하며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었지만 모르주(Morhange)를 향한 공세는 이웃 군단들한테 맡기고 제20군단은 자리를 지키라는 카스텔노의 명령과 반대로 이웃 군단들과 함께 공세를 참여하는 명령을 내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카스텔노는 이 사실을 알고 연락병을 동원해서 바로 잡으려 했으나 수정하는 데 실패하고 전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30]
4.1.3. 루프레히트의 역공, 그리고 제2군을 지탱하다
독일군 제6군의 사령관 루프레히트. |
8월 20일, 안개가 너무 극심해서 카스텔노는 공군 정찰 후 공세에 나서기로 했으나 독일군 제6군의 사령관이자 바이에른 왕세자인 루프레히트(Rupprecht)는 아침 5:15에 선공을 펼쳐서 한창 준비중이었던 포슈의 제20군단의 왼쪽 방면을 밀어내고 샤토-살랭스(Chateau-Salins)에 위치한 제39사단에 극심한 피해를 입혀서 23일날 제39사단은 예비군으로 재편성된다. 밀려나긴 했으나 다행히 샤토-살랭스 지역을 사수해서 제2군의 총체적 붕괴는 저지했고 군단을 지원할 예비군도 보존했다.
다른 군단들은 더욱 일찍 새벽 4시에 기습당해서 완전히 밀려난 나머지 처음에 제20군단한테 두 군단을 지원하기로 명령한 카스텔노는 전면 후퇴를 명해서 제20군에게 샤토-살랭스 지역을 유지해 후위를 맡도록 하였다. 포병 종렬로 인해 난잡해진 도로와 포슈 우익의 제15군단의 절망적인 상태로 인해 난이도 극악의 임무였으나 초반에 성급한 마음과 지휘경험 부족으로 여러 번 실수를 저질렀던 반면 이번에는 침착하게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큰 공을 세운다. 카스텔노는 뫼르트 강까지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2일, 프랑스군은 제17계획의 알자스-로렌 탈환을 실패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포슈의 제20군단은 4-5000명의 전사자가 속출했으며 독일군 제6군은 8000명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21날 보고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루프헤르트가 너무 일찍 공세를 개시하는 덕에 너무 깊숙히 진격했다가 퇴로가 끊겨서 괴멸당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예상 못한 이점으로 폰 몰트케(小)가 이 승리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슐리펜 계획의 핵심인 강력한 우익의 군사력을 좌익에도 분배해서 루프레히트의 제6군에게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요충지 에피날(Epinal)을 정복하도록 하였다.
폰 몰트케(小)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상태가 양호했던 프랑스군은 제1군에게 침공해오는 독일군을 반격하도록 하고 포슈의 제20군단에게 요새화된 낭시(Nancy) 지역의 독일군을 공격해 묶어 놓도록 했다. 일명 모르주 전투(Battle of Morhange)에서 포슈는 얻은 땅은 별로 없으나 상당수의 독일군을 묶어 놓아서 승리에 크게 기여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원래의 목표였던 모르주를 탈환했으나 이후 28일에 벌어진 전투는 양쪽의 피로로 인해 영 지지부진했다.
전투 이후 포슈의 제20군단의 지휘권은 조프르의 명령 하에 모리스 발푸리에르(Maurice Balfourier) 장군에게 넘어가고 포슈는 프랑스군 본부(Grand Quartier Général, GOG)로 소환되었다. 훗날 명참모로 활약하는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도 함께 소환 명령을 받고 포슈의 참모장으로 배치되었다. 이로써 명콤비로 활약하는 포슈-베이강 콤비가 결성되었다.[31]
4.1.4. 1차 마른 전투
1차 마른 전투의 지도.[32]
카스텔노와 포슈가 모르주 전투에서 상당수의 독일군을 묶어 두는 데 성공함을 확인한 조프르는 독일군의 우익이 보고대로 강력하다면 중심 부분은 약할 것이라는 계산 하에 8월 21일 제3군과 제4군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보냈다. 나름 합리적으로 내린 결정이지만 독일군 우익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약했고, 그 결과 철저히 발려서(...) 시간을 벌기 위한 연합군의 후퇴전과 파리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전이 돋보이는 '국경 전투'(Battle of the Frontiers)가 벌어진다.
이때의 프랑스군의 피해가 매우 극심했는데 8월말에 프랑스군은 20만 6,000명의 인적 손실을 겪었고, 그중 12만 8,000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 12만 8,000명중 포슈의 사위 폴 베코트(Paul Becourt)와 포슈의 유일한 아들 제르멩 포슈(Germain Foch)도 있었다.[33]
이러한 엄청난 피해와 영토 상실을 겪음에도 조프르는 놀라울 수준의 침착함을 선보이고 있었다. 조프르는 동부의 병력을 차출해서 제6군을 새로 재편해서 파리 동북부에 배치했고, 제6군을 필두로 영국원정군-제5군-제4군-제3군-제2군-제1군을 순서대로 이어서 파리에서 스위스까지 긴 S자가 연상되는 전선을 형성해 독일군의 진격전을 막아냈다.
4.1.4.1. 남하하는 포슈의 파견대
이 긴 S자의 제4군과 제5군 사이에 위험한 빈틈이 벌어졌는데, 조프르는 제4군의 병력을 일부 차출해서 포슈 휘하에 파견대로서 배치해 빈틈을 매꾸고 제4군을 보조하도록 했다.[34]포슈가 차출받은 병력은 모두 사기와 규율이 형편없는 상태였으며 일부는 아예 위치 확인조차 안 되는 상황이였다. 포슈는 이 패잔병들을 이끌고 강력한 독일의 진군을 막아야 했다.
포슈의 첫 번째 명령은 8월 30일 아침 6시에 공세를 펼쳐서 제4군의 측면을 보호한다는 것이였다(...). 당연하지만 지친 패잔병들에게 이런 명령은 씨알도 안 먹혔다. 이 명령이 병력 모두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독일군의 강력한 진군하 에 포슈는 퇴각전을 재개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려서 포슈군은 공세 대신 엔(Aisne)강을 건너서 후퇴했다.
이때 조프르는 제4군의 우측면으로 독일군에 반격하는 동안 포슈군이 제4군의 좌측면을 보호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포슈의 답은 그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데, 포슈는 정면으로 강력한 독일군과 격돌하면 2,3일밖에 못 버틸 테지만[35] 후퇴하며 독일군에 저항한다면 제4군의 좌측면을 보호할 수 있다고 답했다. 조프르는 포슈의 말에 수긍하고 후퇴전을 지속하라고 명령했다.
9월 1일에서 4일까지 제4군과 포슈의 파견대는 지속적으로 남하해서 3일에는 랭스(Reims)를 지나가고 마른(Marne)강을 건넜다[36]. 조프르는 독일군이 포위를 포기할 때까지 남하를 명령했고 4일 퇴각을 그만두고 적군과 대치하도록 명령받은 동시에 포슈 휘하의 병력은 햄버트 장군의 모로코 사단을 더해 정식적으로 제9군으로 재편되었다.[37]
4.1.4.2. 당시 전장의 상황
제9군 사령관으로 승격된 포슈가 독일군의 폰 뷜로(von Bülow)의 제2군과 폰 하우젠(von Hausen)의 제3군[38]과 대치하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마른까지 행진으로 진군해 온 독일군은 보급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군수품, 식량, 마초 모두 부족한 데다가 현지 조달만으로 버틸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56개의 보병사단과 9개의 기병사단을 긁어 모아서 대치한 반면 독일군은 44개의 보병사단에 7개의 기병사단밖에 없었다. 게다가 폰 클루크의 제1군이 파리 포위를 포기하고 동남부로 방향 전환해 파리 동부를 지나가는 것이 공군 정찰로 확인되자 미셸 모누리(Michel Maunoury)의 제6군은 제1군의 측면을 습격했다.
무리한 진군 끝에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지만 연합군의 역포위가 성공하려면 제5군과 제4군의 틈새를 메운 포슈의 제9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4.1.4.3. 최후의 일각까지 버티다[39]
1차 마른 전투에서의 제9군의 지도.[40]
포슈는 명령대로 9월 6일과 7일에 좌익의 제5군과 함께 공세에 참여했지만 결과가 애매했다. 제5군과 함께 진격한 제42사단은 성공했으나 중부와 우익은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반격을 취하려던 9월 8일에 폰 하우젠의 제3군이 아침에 착검돌격을 통한 기습을 펼쳐서 포슈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제11군단을 혼란에 빠뜨려 12km의 거리를 후퇴시켰다. 거의 무모한 공세를 펼친 제3군도 피해가 상당했지만[41] 제11군단은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42] 그리고 후퇴과정에서 제11군단은 20~30개의 대포, 몇 정의 기관총과 수천 명의 포로를 상실했다.
그러나 포슈는 재빨리 제11군단의 지휘관 에이두에게 반격 명령을 내렸다.[43] 상당한 우려 속에 진행된 반격이었지만, 다행히도 제3군도 너무 성급하게 착검돌격을 진행했기에 보급 곤란에 빠졌다. 혼란 속에 공격받은 독일군은 격퇴당했고 제11군단은 위치를 유지했다.
이때쯤 포슈의 매우 유명한 명언,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 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포슈가 해당 발언을 했다는 증거는 적다. 무엇보다 1차 마른 전투 때 포슈를 보좌하던 막심 베이강은 위의 발언을 완강히 부정했는 데다가 레몽 푸앵카레 또한 전후에 포슈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전장에서 그렇게 활동했다고 부정했다. 애초에 이 발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전의를 잃지 않고 싸움에 임하는 맹장 포슈의 모습을 부각하고자 프랑스 언론에서 유명화시킨 것이지 모든 상황에서 공세만 펼치는 공세주의자로서의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해라 할 수 있다. 막심 베이강조차 저 발언에 대해서 "사실은 아니지만 포슈의 에너지를 보여 주니 적절하다"라 평했다.
우익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재빠른 지원이 절실했지만 포슈는 예비대를 모두 소모했다. 제12군단은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지만 여전히 밀리고 있던지라 포슈는 제5군의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Louis Franchet d'Esperey)에게 양도받은 제10군단에게 제9군의 좌익을 맡겼다. 기존에 좌익에 배치되어 있던 제42사단을 16km를 행진 후 곧바로 투입해 프로이센 근위군단의 가세로 밀려나던 제11군단의 반격에 보태도록 했다.[44] 9월 9일, 저녁에 도착했던 제42군단은 오후 6시부터 제3군에 대한 반격에 참여했으나 그 시점에서 독일군은 이미 퇴각한 지 40분이나 지난 이후였다. 독일군의 후퇴로 아슬아슬했던 제1차 마른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맺었다.
포슈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고자 했으나 병사들의 피로에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10일에 다시 재개했으나 이때는 후위대의 강력한 저항을 맞이했다. 75mm 야포를 위한 포탄이 고갈되기 시작했으며 참호를 파기 시작한 독일군을 밀어내기 위해 필요한 중포 또한 얼마 없었다. 프랑스군 좌익에 병력을 집중하기 시작한 조프르에게 휘하 군단 중 하나를 파견보냈고 이에 제9군의 추격은 더욱 더뎌졌다. 9월 23일에는 중요 전선이 북해 지역으로 옮겨 가는 것을 깨닫고는 조프르에게 제9군의 공세를 미뤄 두자고 건의하기까지 한다[45]
조프르는 포슈에게 제9군의 "용기(valour), 활력(vigour), 끈기(tenacity)"를 칭찬하는 메세지를 보냈다. 그와 더불어 전투 이후 포슈에게 포슈의 외할아버지 또한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선사했다.
4.1.5. 1차 마른 전투에서 포슈의 공에 대해서
1차 마른 전투 이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포슈 |
1차 마른 전투를 기점으로 포슈는 전설로 등극했다. 프랑스의 구원자로 칭해진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나 파리 군정장관 갈리에니에 비하면 덜할지 몰라도 포슈의 끈기 있는 저항은 상당한 유명세를 탔고 명언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니 그야말로 상황은 최고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 "전투에 이기는 것은 결코 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는 제9군의 저항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간혹 국내의 1차 마른 전투에 대한 글에서는 마치 포슈가 당시 총사령관인 것처럼 묘사하거나 포슈에 대해 설명하면서 진정한 리즈 시절인 백일전투 대신 '마른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포슈 띄우기는 포슈의 반격으로 인해 제2군이 퇴각했다거나 포슈의 반격으로 독일군이 생 공(Saint Gond) 늪에 빠트렸다던지 하는 사실과 맞지 않는 전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포슈의 활약은 제한된 구역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제9군의 지휘관으로서 포슈의 임무는 제4군과 제5군의 간격에 맹공을 퍼붓는 독일군을 막아내는 것으로 총 전선을 지휘해야하는 조프르보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공세보다 중요한 상황에 공세를 버리지 못해 우주방어보다 자주 반격을 꾀해 불필요한 피해와 더욱 일찍 전력을 소진해 위험에 빠졌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데스페레의 제5군에 도움을 요청해 제5군이 독일 제1군과 제2군의 간격을 공략하는 대신 제10군단을 제9군에 양도하도록 유도해 더욱 일찍 전투를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날렸다는 비판도 듣는다.
반대로 공을 언급하자면 포슈는 패잔병을 이끌고 성공적인 퇴각전과 방어전을 수행해 제4군과 제5군의 간격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그간 포슈는 야전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한 적이 없음에도 앞서 서술한 대로 짧은 시각 내에 빠른 판단과 지칠 줄 모르는 전의를 보이며 아슬아슬하게라도 방어선을 유지하는 모습은 매우 호평을 받는다.
총평을 하자면 포슈의 제9군은 결과적으로 패잔병을 이끌고 어려운 상황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버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며 포슈의 공로를 부정하기 어렵다. 과정에서 (경력상 당연히) 지휘하는 데 미숙함을 보이고 공세주의를 버리지 못해 불필요한 피해와 위기를 불렀다는 점이 부각되는 이유는 그간 포슈의 역할이 과대평가받아서 그런 면이 크다.
4.1.6. 조프르의 부관이 되다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
1차 마른 전투가 프랑스의 승리로 끝맺었으나 당연히도 이는 1차 대전의 종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독일군을 뒤로 물린 폰 몰트케(小)는 제1군과 제2군의 간격을 메꾸고 고지를 점하자 참호 시설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폰 몰트케(小)는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본인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함으로 실각당하고 대신 국방장관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폰 팔켄하인은 최대한 빨리 공세를 재개하도록 노력했다.
1차 마른 전투의 승리를 이끈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는 포슈의 성과에 감탄한 것과 동시에 승리의 영광이 점차 갈리에니에게 옮겨가는 것을 경계했다. 이에 조프르는 포슈를 중용하고 갈리에니를 견제하기 위해 포슈를 후계자로써 갈리에니를 교체하기를 꾀했다. 조프르는 포슈를 두고
"포슈 장군은 인격과 군사 사상을 고려했을 때 타 군 지휘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Among the army commanders, General Foch has shown an unquestioned superiority, from the point of view of character and of military thought.")
("Among the army commanders, General Foch has shown an unquestioned superiority, from the point of view of character and of military thought.")
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국방장관 알렉산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은 갈리에니의 심기를 고려해 이번 군사 작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고 설득했다. 조프르는 이후 수 차례나 동일한 내용을 건의했으며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 또한 포슈의 잠재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조프르에게 부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포슈는 조프르가 자신을 본부로 부를 것을 직감했다. 조프르의 부관이 되는 것이 본부에서 서류 작업이나 할 것이라 생각했던 포슈는 왜 자신에게 일선 지휘가 더 맞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쪽지를 정치인 출신 연락장교 앙드레 타르디외(André Tardieu)에게 맡기고 본부로 보냈다. 그러나 타르디외가 도착했을 시점에선 조프르의 부관이 된다는 뜻은 단순히 서류 작업 전담이 아닌 벨기에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벌어진 전선 중 북부를 담당하는 막중한 임무가 되었다. 조프르의 참모 모리스 가믈랭은 푸앵카레에게 이 임무에 포슈를 추천했다.
10월 4일, 포슈를 본부로 불러들인 조프르는 포슈를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임명해 북부전선을 총괄하도록 했다. 포슈의 집단군에 조프르는 로레인 전선에서 북부로 재배치한 카스텔노의 제2군, 얼마 안 있어 제10군으로 재편되는 루이 모쥬이(Louis Maud'huy)군과 73세의 노장 조제프 부제르(Joseph Brugère)가 이끄는 병력을 배치했다.
4.1.7. 당시 북부전선의 상황
안트베르펜(Antwerpen) 요새에서 항전하는 벨기에군 |
1차 마른 전투에서 포슈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한들 아직 경력이 후달림에도 북부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유는 북부 전선의 복잡한 상황이 한몫을 했다. 순수 프랑스군으로 구성된 중부와 달리 북부는 벨기에군과 영국군 등 타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국경 전투에서 제5군의 지휘관 샤를 랑르작(Charles Lanrezac)이 번번히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존 프렌치와 격돌했던 것과 달리 포슈는 헨리 윌슨과의 인연으로 대표되듯이 프랑스군 지휘부에서 영국군을 가장 많이 경험해 봤다. 프랑스군 본부의 영국대표 시드니 클라이브(Sidney Clive)만 해도 포슈를 프랑스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했다.
게다가 북부의 군사적 상황 또한 복잡했다. 영국군 총사령관 프렌치는 해협에 가까이 배치되길 요청했으며 벨기에군의 경우에는 점차 안트베르펜에 관심을 두는 독일군의 공세를 맞섰다. 조프르는 벨기에군이 안트베르펜 요새를 버리고 전선을 물리기를 요청했지만 정작 인근의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게 왼쪽 측면이 노출된 상황이었다. 이 복잡한 상황을 풀어내기 위해선 조프르와 가믈랭은 포슈 같이 타군과의 경험이 많으며 전의가 넘치는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슈는 프랑스 장군 중 국제적인 경험이 가장 많은 인물이었으며 전쟁 말기인 191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4.1.8. 바다로의 질주[46]
포슈가 조프르의 부관으로 임명된 10월 4일, 조프르는 포슈를 불러서 임무를 상세히 설명했다. 9월말부터 독일군은 솜(Somme)강 남부에서 제2군을 공격했으며 최근에는 솜 강 북부에 위치한 모쥬이군을 공격하고 있으며 모쥬이군 근처에는 연락 체계를 유지하는 데 요충지인 드웨(Douai)와 아라스(Arras)가 있었다. 포슈의 임무는 군을 규합해 우회하려는 독일군의 공세를 차단하고 최종적으로 독일군을 역우회하는 것이었다.4.1.9. 위기의 제2군
포슈는 5일 곧바로 제9군을 험버트에게 맡기고 밤중에 카스텔노의 지휘부로 이동해 6일 새벽 4:30분에 도착했다. 그러나 카스텔노는 2주간 독일군을 우회하도록 노력한 것에 비해 오히려 우회당하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노병으로 구성된 부제르군은 엘리트 프로이센 왕국군 근위군단과 싸우고 있었다. 모쥬이는 독일군의 공세가 버거운 나머지 즉시 후퇴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스당에서의 패배가 재현될 것이라 경고했다. 본부의 낙관적인 시각과 달리 일선에서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다.포슈와 카스텔노의 회의 또한 파토났다.[47] 카스텔노는 지원이 없다면 후퇴하지 않는 이상 전선이 뚫릴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비쳤으나 포슈는 이 의견을 무시했다. 곧 함성으로 이어진 격렬한 항의에 불구하고 포슈는 본부에서 곧 지원이 올 테니 어떻게든 버티라는 지시를 남긴 채 모쥬이의 지휘부로 이동했다. 포슈가 도착하기 전에 모쥬이는 제한적인 후퇴를 명했으나 포슈와의 대화 후 명령을 바꿔서 반대로 공세를 명했다. 얻은 영토는 그닥 보잘것없었으나 독일군의 기병 돌격을 격퇴해 독일군 지휘관 게오르크 폰 데어 마르비츠(Georg von der Marwitz)가 정면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빌헬름 2세에게 보고하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독일군의 맹공에 카스텔노가 우려했듯이 제2군이 약간 밀려나는 피해도 있었으나 조프르의 병력 지원 덕에 제2군은 위기를 이겨내고 팔켄하인은 릴 지역에 관심을 두고 제2군에 대한 공세를 중단했다.'[48]
10월 1일과 6일 사이에서 솜 강과 플랑드르 사이에서 적의 저항을 분쇄하는 임무를 맡았던 독일군 제6 군의 공세는 프랑스 제10 군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했다. 결정적인 전선에서 조프르의 대리로 활동했던 포슈는 "퇴각은 없다. 모두 나가 싸우라"라는 명령을 내리며 아군을 독려했다.
4.1.10. 존 프렌치와의 갈등
아르투아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한 뒤, 독일군과 연합군은 이제 북쪽 플랑드르 해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르투아에서의 저지 성공으로 한 숨 돌린 뒤, 영국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는 북상하여 전선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느린 행군속도로 인해 프랑스군 사령부와 마찰이 생기는 등 마냥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영국과의 인연이 꽤 깊은 포슈가 나서서 관계를 그럭저럭 회복했다고 한다.4.1.11. 릴(Lille) 지역 공략
포슈는 존 프렌치에게 릴 지역을 공략할 계획을 제안했으며, 존은 이에 동의하였다. 당시 릴 지역은 프랑스의 주요 산업도시 중 하나였으며, 면직물 생산지였기에 잃을경우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계획상 영국군이 도시의 북쪽을, 프랑스군이 도시의 남쪽을 공략하여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릴 지역에 제19 군단을 보강함으로서 공세는 저지되었다.4.1.12. 1차 이프르 전투
포슈는 수백 킬로미터를 돌아다니며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하기 싫어하는 사무직을 피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주요 전장을 북쪽으로 옮겨 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영국군과의 관계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카스텔노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10월 11일에 마침내 도시 이프르(Ypre) 지역에서 전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팔켄하인은 됭케르크 지역을 차지한 것을 바탕으로 예비군과 중포병으로 우익을 보강한 뒤, 연합군을 둘로 분리시키려 시도하였다. 이때 벨기에군은 안트베르펀에서 농성하다 빠져나온 뒤였으며, 프랑스 영토 내로 들어갈까 하다가 결국 이저르(Yser) 강에 남아 연합군과 합세하기로 결심했다. 참고로 이저르 강은 진흙밭으로 둘러쌓여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4.1.12.1. 좌익 수비전의 성공
포슈는 영국군 사령부와 벨기에군 사령부를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시키는 한편 연합을 공고히 했다. 전투 당시 북쪽에 있던 군대는 프랑스 제2 군, 제10 군, 롤린슨의 제4 예비군단, 헤이그의 제1 군단, 그리고 영프 기병대로 구성되었다.10월 17일, 독일군이 이저르 강 지역의 벨기에군을 공격하였으나 영국 제1 군단과 프랑스 제42 사단의 증강으로 수비하는데 성공하였다. 더불어 해안가 지역에서 영프 연합함대가 독일군을 향해 포격하였다. 그럼에도 연합군의 공격기회는 없어지고 독일군의 맹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독일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저르 강을 지키던 벨기에군은 뒤로 물러나서 니우포르트 지역을 침수시켜 독일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 이에 무리하게 도하를 시도하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측면공격에 그만 뒤로 밀려나버렸다. 따라서 연합군의 왼쪽 측면(이자 독일군의 오른쪽 측면)은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4.1.12.2. 가혹한 중앙의 싸움
좌익이 수비전에 성공했을때, 중앙에서는 연합군이 공세를 펼쳐 Roulers 지역과 Courtrai 지역으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이 진격은 독일군의 전력 보강에 의해 저지당한 채 그저 소모적인 공격만을 강요하였으며, 그 틈에 독일군은 연합군의 중앙 사이로 빠져나가 케멜(Kemmel) 지역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 곳은 연합군의 중앙 거점으로서 요충지였다.10월 29일부터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로 헤이그의 제1 군단은 몇몇 지역을 상실하였다. 포슈는 전선이 뚫려서 이프르가 남쪽에서 공격받는 상황을 경계하여 병력을 계속 증강시켰으나, 여전히 헤이그의 영국군 군단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와해되지 않고 전력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곧 제한적인 공격으로 귀결되었다. 독일군은 영국군을 완전히 격파하지는 못했다.
11월 2일, 비로소 독일군의 공세 약화와 연합군의 전력 증강이 겹치면서 이프르 전투는 끝이 났다. 포슈는 재차 공세를 하고자 하였으나, 조프르에 의해 거절당했다. 연합군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였으나, 전술적으로 형편없는 싸움을 치러야만 했다.
4.2. 1915년
4.2.1. 오늘도 포병을 외친다
1915년 초에 포슈는 승전 기념으로 초대받았다. 포슈는 잔치에서 군수품 확보와 포병의 압도적인 우위가 필요하다고 늘상 강조하였다. 압도적인 포격만이 적을 제압하고 승리로 이끌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병의 우위는 확보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산업 생산력의 문제[49]는 물론, 영국 수뇌부가 우회로 찾기에 집중하면서 서부전선으로 제공되는 지원이 수월치 않아졌기 때문이다.참호전이 본격화된 후 기동전으로 귀환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미래시를 가지지 못한 당대 장군들에게 큰 논쟁거리였다. 포슈는 현재로선 기동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했다. 그가 대전쟁 전까지 생애를 기동전 연구에 바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재학습이었다. 다만 그가 언제 돌파를 포기했는지는 불확실한데, 다음 어록들을 보아 1차 아르투아 전투 동안엔 돌파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우리가 새로운 수단(중포, 자동소총 등)을 공세에 대량으로 투입하지 않는 한 돌파가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140번 언덕(비미 능선)의 주인이 된다면 좋은 조건으로 추가적인 작전을 실행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점령에 실패한 이후부터 돌파가 실현 불가능해졌다.
140번 언덕(비미 능선)의 주인이 된다면 좋은 조건으로 추가적인 작전을 실행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점령에 실패한 이후부터 돌파가 실현 불가능해졌다.
포슈가 정확히 언제 돌파를 포기했든, 1차 아르투아 전투가 끝난 후엔 신속함 대신 체계적인 전투만을 주장한 것은 확실하다. 그는 1915년 봄부터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형을 하나하나 체계적이고 느리게 단계적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2.2. 비미 능선 장악 계획과 문제
포슈는 아르투아 지역의 주요 거점이자 고지인 비미 리지 지역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결코 쉽지 않을것이라 전망하였다. 비미 리지의 지형을 살펴보면I), 비미 능선은 길고 협소하며 북서-남동쪽으로 이어진다.
II), 비미 능선의 동쪽은 매우 가파르다.
III), 비미 능선의 고지는 독일군이 장악한 편평한 지역을 정찰할때 중요한 거점이다.
IV), Souchez 강이 비미 능선의 산등성이를 둘로 갈라놓았다.
V), 독일군은 Souchez강과 마을, 그리고 주변의 몇몇 도시들을 장악해놓은 상태였다.
이에 포슈는 정밀한 정찰로 독일군의 형세를 사진으로 찍어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특히 강한 지점은 비미 리지 공략 이전에 먼저 파괴하고자 하였다. 포슈의 공책에는 작전을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해 적혀있었으며, 포병의 역할에 대해 제안하였는데
I), 포격으로 참호 철조망을 파괴한다.
II), 포격으로 형성되는 탄막으로 공격군의 측면을 보호한다.
III), 야포의 공격으로 적군의 반격을 진압한다.
IV), 빠르게 두번째 참호를 점거하여 거점지역을 깊게 판 뒤 적군의 반격에 대응하게 한다.
이러한 계획과 더불어 포슈는 '속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은 충분한 무기를 확보하지 못해 이 전술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2차 아르투아 전투가 비미 고지 점령 실패로 끝난 후, 세 집단군 사령관(포슈, 카스텔노, 뒤바일)과 총사령관 조프르가 앞으로의 작전적 방법론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다. 포슈는 2차 아르투아 전투의 실패가 제10 야전군 사령관 뒤르발이 체계적 전투를 거부하고 대규모 맹공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이 전투를 체계적 전투가 필요하다는 근거로 내세웠다. 반면 카스텔노는 2차 아르투아 전투의 실패는 충분한 인력과 물자만 있다면 돌파가 가능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조프르는 카스텔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이렇게 결론내렸다.
(포슈의 체계적인 전투는) 1달 동안의 전투를 위한 최고치의 탄약 소모를 요구하는데, 그럼 언제쯤이 되어야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겠는가? 아마 내년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동맹들을 위해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의 교범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 뿐이다.'
4.3. 1916년
4.3.1. 솜 전투
1915년 12월 6일, 프랑스군과 동맹 군사 대표들이 조제프 조프르의 사령부에서 1916년 전략을 결정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 회의에서 서부전선 공세가 영국과 프랑스의 협동 공격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프랑스군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결론났다. 조프르는 다가올 공세를 계획하고 실행할 사람으로 포슈를 선택했는데, 특히 그가 쌓아온 영국 장군들과의 외교적 경험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포슈의 계획은 1915년에 제시했던 방법론을 원하는 대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솜 전투를 방어선 돌파를 목표로 한 결정적 전투로 계획하지 않았다. 반대로 파열을 목표로 한 체계적 전투로 계획했는데, 이것은 영국군과 함께 일관적인 공세로 독일군을 소모시켜 방어선이 유지되지 못하게끔 적군을 약화시킨다는 개념이었다. 조프르 또한 샹틸리 회의 때 협상국 대표들 앞에서 전략적 파열을 이야기했다.솜 전투가 포슈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방법은 없다. 독일군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2월에 시작된 베르됭 전투는 포슈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의 세 야전군은 베르됭 방어를 위해 조금씩 차출되었으며, 40km 대신 13km 전선에서 공격하게 된 포슈의 역할은 연합작전의 지휘자에서 영국군의 보조로 변했다. 전략 또한 변했다. 헤이그의 영국군은 돌파를 원했다. 포슈는 파열이 베르됭의 압력을 줄이는 방안으로서도 훨씬 낫다고 여겼으나, 보유한 전력이 크게 줄어든 만큼 그의 발언력도 줄어들어 있었다.
4.4. 1918년
4.4.1. 연합군 대원수 선임
1915, 1916년에 북부군을 지휘하고 있던 포슈는 별 성과도 없이 아르투아와 솜 지역에서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다. 1917년 5월 15일, 육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연합군의 조언자 역할을 했으나 조언이 지휘는 아니었다.한편 19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독일과의 협약으로 전쟁에 빠지면서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서부전선에 무려 192개의 사단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장비로만 보자면 연합군은 비축한 물자에서 우위를 보였는데 항공기 4,500대, 포 18,500문, 전차 800대에 비해 독일군은 각각 항공기 3,760대, 포 16,200문, 박격포 7,360문, 전차 20대를 보유했을 뿐이었고 이런 전력차는 곧 참전하는 미군이 보충하면 더더욱 더 커질 거라 생각했다.[50] 따라서 루덴도르프는 생캉탱 부근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작전명이름을 미카엘 작전이라고 붙였다. 최종적인 목표는 솜 강 전선을 바다 쪽으로 밀어버리고 영국군 전선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3월 21일 독일군은 대대적인 총공세를 단행했고 이때 독일군 사단은 염소 가스와 포스겐 최루탄으로 안개가 가득 찬 새벽에 기습 포격을 가하고 전진했다. 공세가 시작된 3월 24일부터 3월 26일까지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분리되어 참호선 전체가 북서쪽으로 해협의 항구들을 향해 이동할 가능성이 커졌고 이것은 루덴도르프가 의도한 포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마른 전투의 전선 붕괴의 악몽이 재현되리라는 생각이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덮쳤고 필리프 페탱은 헤이그에게 증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이틀 후 아미앵 근처 둘랑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프랑스 대통령 푸엥카레가 의장을 맡았고 패탱, 헤이그, 포슈, 클레망소 그리고 영국 전쟁장관 밀너 등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헤이그는 제5 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자 바로 패탱은 제5 군이 붕괴되었음을 말했고 특히 제5 군을 지휘한 허버트 고프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 제5 군을 카포레토 전투의 이탈리아군에 비교하였다.[51] 그리고 페탱은 능력껏 지원했으며 이제는 아미앵의 방어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패탱의 이 발언 끝에 포슈는 격하게 발언했다.
"우리는 아미앵 앞에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이제 한 치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포슈의 이 발언으로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어느 정도 대화가 오고 간 뒤 헤이그가 포슈의 명령을 받게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처방은 모두를 만족시켰으며 지휘권의 독립성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던 헤이그 역시 만족했다. 포슈의 권위는 4월 3일에 확장되어 "전략 작전의 지휘"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5월 8일 포슈는 결국 공식적인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바야흐로 독일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포슈의 의지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주도권을 쥐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그의 공세를 강화했다. 한편 포슈는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위해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절망적인 외침들을 묻어 둔 채 포슈는 부하 장병들에게 그들의 극한적인 인내심을 요구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빈약한 비축품을 절약했다. 그의 통찰력 있는 인내심은 결국 피카르디와 플랑드르에서 루덴도르프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그는 루덴도르프에 의해 해안까지 후퇴한 영국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프랑스 전선에서 주저 없이 철수시켰다. 루덴도르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여 5월 27일 프랑스 전선을 돌파했고, 독일군은 마른 지역까지 그 전선이 퍼져 있었다.
6월 9일 우아즈 지역에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났으나 포슈는 이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루덴도르프는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7월 15일 그는 샹파뉴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2일 후 그의 공격은 저지당했다. 그가 패배한 것이다. 이제 포슈의 의지력이 루덴도르프의 의지력보다 우세해졌으며 따라서 포슈가 일격을 가할 차례였다.
7월 18일과 8월 8일 2차례의 공격으로 포슈는 루덴도르프를 수세로 몰아갔다. 특히 2번째 공격을 루덴도르프는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8월 6일 프랑스군 원수로 진급한 포슈는 독일군뿐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강행하여 독일군 전선에 가차없는 타격을 주었다.
결국 독일 제국은 독일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제 독일은 르통트에서 1918년 11월 11일 포슈가 연합군의 이름으로 작성한 휴전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1월 26일 포슈는 메스로 돌아왔다. 영국과 폴란드의 명예원수 계급장을 받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최고전쟁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29년 3월 20일에 파리에서 생을 마쳤으며, 나폴레옹의 묘지가 있는 앵발리드 내부에 안장되었다. 나폴레옹 묘소를 찾아간다면, 포슈를 참배할 기회도 있다는 뜻이다.
5. 여담
- 프랑스 해군의 클레망소급 항공모함의 2번 함의 이름이 페르디낭 포슈이다. 이 함선은 퇴역 후 브라질군이 구입해 이름을 '상파울루'로 바꾸었다.
-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반대하며 "세상에 이런 조약이 어디있는가?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동안의 휴전협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통제하기엔 너무 허술하고 약하다고 생각해 한 말. 흔히 베르사유 조약이 너무 가혹해서 독일의 반발심을 불러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있지만 실제 베르사유 조약의 영향은 훨씬 더 복합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때 포슈 외에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비슷한 말을 했는데, 케인스는 포슈와는 정 반대로 조약이 너무 가혹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예견했다. 다만 둘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딱 20년 뒤에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키며 맞는 말이 되었기에 베르사유 조약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 수 있다.
- 쉬프랑급 중순양함 3번함 이름이 포슈로 원래는 Lavois였던 것이 진수 한달 전 포슈가 사망하면서 이름을 바꿔서 포슈가 됐다.
5.1. 비행기 과소평가 발언 논란
"비행기는 스포츠용일뿐, 군사적인 가치는 없다"는 발언이 꽤 유명하다. 군사쪽에 아예 문외한이 아니라면 공군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과 관련해서 종종 회자되고 있으며, 군사 쪽에서는 '항공기와 공군의 잠재력을 몰라본 시대착오적 인간'이라고 까이기도 한다.하지만 이런 발언을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포슈가 이 발언을 한 것은 1910년으로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 1호를 띄운 것이 1903년이고 프랑스에 첫 동력 비행기 공장이 오픈할 때가 1908년이었다. 세계 열강들도 막 항공대를 창설할까 말까 하던 시기였을 만큼 항공기는 새로운 기술이었다.[52] 일반 공산품도 아니고 군사장비는 당연히 신뢰성과 안정성을 바탕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당대 기술 수준으로 효과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기술을 무턱대고 수용하기만 하고 장비의 생산 및 운용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는 군대치고 제대로 굴러가는 군대는 없다.
신무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군사학을 새로 만들다시피 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당시에 막 나온 기초적인 수준의 증기선, 어뢰, 잠수함, 열기구 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며 딱히 이런 신기술에 대해 집착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이런 장비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나폴레옹 시절까지는 그 어느 나라의 군대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행기를 깠던 포슈도 막상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실전에서 비행기의 효용을 인정하며 항공 정찰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따라서 포슈의 행적은 미처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가 실제 경험을 통해 기술 검증을 인정하고 생각을 바꾼 형태이니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 굳은 구시대적 인사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경험과 전훈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인 열려있는 인물에 가깝다.
6. 매체에서
6.1. 게임
6.1.1. 라스트오리진
아무래도 오타쿠 관련 서브컬처에는 나올 기회가 없었지만, 일본이 아닌 한국의 게임 라스트오리진에서 페르디낭 '마리' 포슈(와 엘랑 비탈을)를 소재로 삼은 캐릭터가 등장했다.6.1.2. 도미네이션즈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페르디낭 포슈(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6.1.3. 벽람항로
포슈(벽람항로), 포슈(META) 항목 참고.[1] 다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고안자인 보날은 사단, 군단, 야전군, 심지어 집단군이 상위제대에 의해 전위대로 지정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고 포슈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2] 프랑스 정부와 프랑스군 총사령부의 관계가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었기에 새로운 총사령관의 임명은 철저히 가십과 정치적 위기, 총사령관이 되고 싶어하는 장군들의 선거운동으로 진행되었다. 장성급 장교가 알고 지내는 정치인과 저녁식사를 하면 총사령관 후보가 1명 추가되는 식이었다. 그 결과 니벨 공세가 실패하기 전까지 정치군사 역사상 가장 특이한 일이 발생했다. 총사령관이 계획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이들이 총사령관의 면전에 대고 자기가 그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는 일종의 평의회가 탄생한 것이다.[3] 유일하게 프랑스군 원수와 영국군 원수를 겸임한 인물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런던에 동상이 배치되어 있는 프랑스인이기도하다.[4] 일명 "마른의 기적"으로 유명한 1차 대전 초반에 맹활약하는 조제프 조프르(Joseph Joffre) 장군과 훗날 포슈의 상관이 되는 노엘 드 카스텔노(Noel de Castelnau)도 배출했다.[5] 물론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것이다.[6] <Foch: Supreme Allied Commander in the Great War> pg.4-5[7]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들어서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경우에는 19세기 말부터 왕당파를 지지하고 정교 분리를 반대하는 가톨릭의 영향을 경계해서 극심한 반교권주의를 행사하게 되는데 예수회 일원이 형제인 데다가 독실한 신앙심으로 유명했던 포슈는 묘하게 차별을 받는다.[8] 그러나 잠시 징집된 사이에 조금이라도 훈련이 들어갔는데, 사병을 괴롭혀야 잘 싸우는 존재로 치부하는 무식한 지휘관들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다. 포슈는 이 시절에 대해서 노년에 접어든 60대에 언급했는데 당시 포슈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9] 참고로 당시 에꼴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 코뮨과의 전투로 여러 흔적과 핏자국이 남은 상태였다.[10] 포슈는 이전에도 군인의 길을 고려했지만 가족을 끔찍히도 사랑했던 나폴레옹 포슈의 반대 속에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포슈를 그의 아버지조차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즉,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없었더라면 명장 포슈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11] 이 학교는 MIT나 Caltech에 비견되는 학교로 이곳에 입학한 사람은 사관생도라기보다는 이공계 영재로 간주되었다.[12] 유명한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13] 군인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이 왜 이공계 영재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진학했는지는, 폴리테크닉의 역사를 알면 이해가 가능하다. 대혁명 초기에 개교한 에콜 폴리테크닉은 공학학교였지만 10년 후에 나폴레옹 황제가 이걸 사관학교로 만들어 버렸다. 교육비를 무료로 해주는 대신 졸업 후 장교로 복무할 의무를 지운 것이었다. (단, 교량도로기술단이나 광산기술단에 근무하면 군복무는 면제해 주고 공무원으로 장기 복무. 위에서 언급된 푸앵카레가 이 코스를 따라 장교 복무 대신 광산기술단에서 근무한 경우다.)[14] 왜 수학 물리 잘 하는 애들을 느닷없이 장교로 만들었냐 하면,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첨단기술의 각축장이어서 의외로 공학기술에 밝은 장교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대를 예로 들면, 당시 전쟁에서는 대포가 굉장히 중요한 무기였는데 우수한 대포의 제조나 운용에서 공학, 물리 지식이 많이 필요했다. 애초에 나폴레옹 본인이 포병장교 출신이고 수학 재능이 뛰어나서 군인으로 출세하는데 수학 물리 능력 덕을 많이 본 사람이다. 열역학의 창시자인 사디 카르노도 에콜 폴리테크닉을 졸업하고 장교로 대포 제작 업무를 수행하다가 포신을 깍는 동안 발생하는 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열역학을 연구하게 되었던 경우이다.[15] 그래서 에콜 폴리테크닉은 나폴레옹 이래 오랜 동안 사관학교였고, 기술관료 공무원이 되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은 (의무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포병, 공병, 군함(해군)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기술장교 임무를 맡았었다. (그 탓에 프랑스는 사디 카르노, 프레넬, 말루스, 퐁슬레 등 군인 과학자를 유난히 많이 배출했다.)[16] 군인이 되겠다는 포슈가 생시르 육사가 아닌 폴리테크닉에 진학한 데에는 프랑스 특유의 사관학교 분업 체제도 한몫 했을 것이다. 전투 병과, 공병 병과, 행정장교, 무기체계, 심지어 군의관까지 육해공 사관학교에서 모든 병과의 장교를 양성하는 한국, 미국, 일본과 다르게 프랑스는 사관학교가 분야별로 여러 개 있어서 생시르는 주로 전투지휘관 양성, 에콜 폴리테크닉은 주로 포병, 공병, 무기 병과의 기술 장교를 양성하는 식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군의관 학교, 행정보급장교 사관학교가 생시르 육사와는 별도로 존재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군인이 되고 싶은 수학 잘하는 학생이 (생시르 육사 대신에)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고 공병이나 포병으로 복무하는 것이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진로였다.[17] 더구나 당시에는 장교의 사회적 지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고, 폴리테크닉 출신은 군대 내에서도 생시르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엘리트 취급받아 위상이 아주 높았다. 일례로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부친이 폴리테크닉 출신의 해군 장교였다.[18] 에콜 폴리테크닉이 1970년대부터 졸업생에게 군 복무 의무를 지우지 않으면서 일반적인 이공계 영재 공과대학으로 성격이 변한 것이다. 그래도 오늘날까지 졸업 후 장교로 지원하는 학생들 비율이 꽤 높으며, 여전히 학교 생활이 사관학교 방식이고 (현역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학교 자체가 여전히 프랑스 국방부 산하에 있다.[19] 본문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걸 정신승리론으로 볼 여지가 없다. 포슈의 군사 이론 자체가 나폴레옹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바탕으로 한 1차 대전이 터지기 10년 전에 출간된 것을 감안하면 1차 대전의 급격한 전황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20] 이때 솜 강과 벨기에 국경 지역인 엔에서도 복무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 지역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데 이때의 경험이 꽤 유리하게 작용되었다.[21] 간혹 교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22] 포슈의 수제자였던 그랑메종은 1차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1년 만인 1915년에 전사했다. 사실 그랑메종도 전전 그의 군사사상이 진짜 무분별한 공세주의라고 비판받는 것에 반해 1차대전 당시 실전 부대지휘에서는 나름 성과를 낸 편이었다.[23] 프랑스인 유모의 영향으로 윌슨은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 프랑스를 동경하게 되었다고한다. 리델 하트는 윌슨이 하필이면 친프랑스파라서 포슈가 영국군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여지를 만들어 놨다고 통탄한 것은 덤.[24] 물론 그린할 교수는 이걸 너무 확대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의했지만 어쨌거나 딸의 결혼식에도 부를 정도면 꽤 친밀한 사이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1차 대전 말기에 가면 포슈-윌슨 사이도 좀 멀어진다(...).[25] 가끔 오해되는 게, 강철 군단이라는 별명은 1차 대전 당시 특별히 뛰어난 전과를 내서 얻은 별명이 아니다. 아마 사기 증진용으로 1914년 이전부터 쓰였다.[26] 별명부터 "싸우는 수사(Fighting Friar)"인 데다가 종교에 있어서 오히려 포슈의 비판을 산 적도 있다. 이런 성향인 카스텔노의 기용은 공화주의자가 참모총장이 된 일에 대해 우파에게 주는 보상책이었다. 그러다보니 좌파 정치권 내에서 카스텔노 승진길 열어주려고 조프르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냐는 불만이 나왔다. 다만 극좌파는 조프르를 이상적인 공화주의자로 보지는 않았고, 실제로 조프르가 문민통제에 가진 견해는 오늘날의 공화국 군인에게 기대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27] 제2차 세계 대전의 프랑스 침공 때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엄청난 삽질을 연거푸 벌이다가 막심 베이강으로 교체된 그 가믈랭이다.[28] 당시 포슈는 윌슨과의 후대 영국과 프랑스의 협동에 대한 논의에서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은 기정사실로 두고 있었다. 다만 이 침공이 전면전일지 아니면 기만전일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터크만 여사에 의하면 포슈가 삽질이나 마찬가지인 제17계획의 시초를 만들어놨다고 설명했지만 포슈 본인은 제17계획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수적 우위를 유지하며 진공해 나가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던 포슈는 거의 동수의 프랑스 침공군으로 독일군을 물리쳐서 알자스-로렌탈환을 시도하는 것은 삽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29] 언덕이 많고, 숲이 우거진데다가 수로마저 많았다. 수비자 측이 언덕 위, 숲속, 수로 뒤 등 요충지만 장악하고 버티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을 막아낼 수 있다.[30] 카스텔노는 포슈가 이전에도 명령을 무시한 전적이 있는 만큼 포슈가 그냥 무시했다고 주장하나 포슈는 아예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해서 같은 지역 출신이라서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를 유지하던 둘은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추가로 이전에 공군 정찰을 무시한 전적이 있는 제20군단의 참모총장 뒤센 대령이 씹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카스텔노의 전기를 작성한 이브 그라스는 포슈의 주장대로 못 본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31] 이때 포슈는 새로운 참모장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교체하리라 장담했는데 서로 만난 후 교체에 대한 말이 쏙 들어갔다는 일화도 있다.[32] <Foch in Command>에서 발췌 및 번역.[33] 베코트의 죽음은 몇 달 뒤 확인되었지만 제리멩 포슈의 죽음은 1915년 2월에야 확인되었다.[34] 포슈가 받은 병력은 뒤부아(Dubois) 장군의 제9군단, 에이두(Eydoux) 장군의 제11군단, 그로세티(Grossetti) 장군의 제42사단, 두개의 예비대 여단과 기병 몇몇 부대일 뿐이였다.[35] 벌써 독일군 군단 2개나 발견된 데다가 지형도 평지에 포병도 없어서 독일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36] 포슈군과 제4군은 땡볕 아래에 달궈지고 피난민으로 난잡해진 도로에서 행군해야 했다.[37] 즉, 포슈는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일개 군단장에서 카스텔노와 동격인 어엿한 군 사령관으로 진급했다는 뜻이다. 이만하면 오만해질 만도 했지만 포슈는 부인에게 이렇게 보냈다 "바뀐 것은 없다. 주님이 나에게 영감을 주시기를."[38] 순수 색슨인들로 구성된 군으로 유명하다.[39] 원문은 "'held to the last quarter hour"[40] Marshal-Conrwall의 <Foch as Military Commander>에서 발췌 및 번역. 지도가 매우 복잡함으로 다운받아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41] 서익만해도 4,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였다.[42] 6500명쯤의 사상자[43] 이때 보낸 메세지가 "이건 승리의 문제가 아니다. 승리는 내일의 것이지. 그러나 내일 승리를 탈취하려면 자네는 오늘만큼은 버텨야 한다네. 전군의 안전이 자네 군단의 명예와 균형에 달려 있다. 최대한 빨리 반격하도록."[44] 예비대를 벌써 소모해서 얼마 전까지 싸우던 병력을 10km가 넘는 거리를 도보 행진으로 옮긴 후 곧바로 전투에 투입시키는 상당히 무모한 작전을 시행하는 것을 보면 아직 포슈가 군 지휘에 미숙하다는 반증이다.[45] 이런 부분은 공세 변태인 양 묘사되는 비판과 상당히 괴리가 있는 모습이다.[46] 원래 명칭은 Race to the Sea로 간혹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March to the Sea("바다로의 진군")이나 "바다로의 행진"과 동일하게 번역되는데 race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질주"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 판단해 "바다로의 질주"로 번역한다.[47] 카스텔노와 포슈의 관계를 작살낸 모르주 사태로부터 2달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 당시 카스텔노가 포슈의 상관이었다면 이제는 포슈가 카스텔노의 상관으로 뒤바뀌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 외에도 카스텔노와 포슈는 둘 다 이른 새벽에 회의했기에 신체적으로 피로했다는 점과 두 명 모두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점 또한 회의의 파토에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48] 결국 바다로의 경주'의 요충지는 릴과 이프르가 되었고 특히 이프르에서는 제1차 이프르 전투가 벌어졌다.[49] 애시당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전 이후 프랑스의 인구와 경제력은 독일 대비 50~60%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물론 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프랑스의 산업 생산력은 가히 최고수준이었다.[50] 그러나, 당시 미국은 제대로 된 대포와 전차, 항공기를 생산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 프랑스에게서 상당수를 받아서 쓰는 상황이라 미군의 참전으로 벌어지는 것은 병력수 정도이다.[51] 하지만 허버트 고프의 실책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한계의 범위에 속했는데 1918년 영국군은 사단의 병력을 12개 대대에서 9개 대대로 축소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됨에 따라 병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이에 결국 영국군은 편법을 쓰기로 하는데 일부 기병대는 보병으로 쓰기로 하고 145개의 대대를 해체하여 나머지 대대의 증원 부대로 쓰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전체 대대의 4분의 1이 원래 자기 부대를 떠나 다른 부대에서 새롭게 적응해야 했고 하필이면 그 대부분이 고프의 제5 군에 소속되었다. 두 번째로는 방어선이 미숙했다는 것이었다. 헤이그는 1917년에 많은 붕괴가 된 프랑스군을 돕기 위해 프랑스군이 책임지던 전선을 일부 넘겨받기로 했는데 그곳은 정확히 루덴도르프가 춘계 대공세를 하기로 결정한 곳이었다. 결국 고프는 자신의 우익을 솜 강 너머 상태가 나쁘기로 유명한 프랑스군 참호 체계[53] 로 확장시켜야 했고 동시에 한해 전에 힌덴부르크 선으로 더 나아간 후 옛 솜 강 전역 앞에서 영국군이 임시로 급조한 방어선을 보강해야 했지만 문제는 고트의 사단이 노동력이 너무 부족해 철조망은 군데 군데 설치되었으며 기관총 진지는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방어선 정비가 미완성이었던 것이다.[52] 1909년에 오스만 제국이 세계 최초의 항공부대를 창설하였고, 이듬해인 1910년에 독일 제국이 육군 항공대를 설치하였으며 1912년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육군 항공대를 설치하였다. 이 시점에서 항공기는 어디까지나 병기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정도였으니 여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최초의 '공군'은 전쟁을 거치며 항공기가 그 유용성을 증명하고 양정인 팽창이 이루어진 1918년까지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