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국경 전투 Battle of the Frontiers Bataille des Frontières Grenzschlachten Slag der Grenzen |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일부 | |||
<nopad> 돌격하는 프랑스군 병사들[1] | |||
날짜 | |||
1914년 8월 7일 ~ 1914년 9월 13일 | |||
장소 | |||
프랑스 로렌, 아르덴 및 벨기에 전역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프랑스 제3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프랑스군 [[틀:깃발| ]][[틀:깃발| ]][[조제프 조프르| ]][2]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오귀스트 뒤바이[3]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노엘 드 카스텔노[4]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피에르 루페이[5]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페르낭 랑글 드 카리[6]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샤를 랑레자크(9. 3)[7]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9. 3)[8]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폴 포(8. 118. 26)[9]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미셸 모누리 (8. 20 )[10] 영국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존 프렌치[11] 벨기에군 [[틀:깃발| ]][[틀:깃발| ]][[알베르 1세| ]] | 독일 제국군 [[틀:깃발| ]][[틀:깃발|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 [[틀:깃발| ]][[틀:깃발| ]][[헬무트 폰 몰트케| ]][12]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더 폰 클루크| ]][13] [[틀:깃발| ]][[틀:깃발| ]][[카를 폰 뷜로| ]][14] [[틀:깃발| ]][[틀:깃발| ]][[막스 폰 하우젠| ]][15] [[틀:깃발| ]][[틀:깃발| ]][[알브레히트 폰 뷔르템베르크| ]][16]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폰 프로이센| ]][17]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콘스탄틴 폰 크노벨스도르프[18] [[틀:깃발| ]][[틀:깃발|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19] [[틀:깃발| ]][[틀:깃발| ]][[요시아스 폰 헤링겐| ]][20] | |
병력 | 프랑스 육군: 약 1,250,000명 영국 육군: 약 70,000명 벨기에 육군: 약 117,000명 | 독일 육군: 약 1,300,000명 | |
피해 규모 | 프랑스 육군: 약 329,000명 영국 육군: 29,597명 벨기에 육군: 약 4,500명 | 8월 독일 육군: 약 206,515명 9월 ~ 10월 독일 육군: 약 99,079명 | |
결과 | |||
협상국의 삼로공세 실패. 독일 제국의 전술적 승리. | |||
영향 | |||
벨기에, 독일 제국에게 본토 대부분 상실 독일 제국, 서부전선의 우위 점유. 제1차 마른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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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 초기 최대 규모의 전투로 로렌에서 벨기에까지 광대한 영토에서 전개되었다. 수년간 프랑스와 독일 제국에서 각각 준비한 제17계획과 슐리펜 계획이 서로를 향해 시행된 희대의 결전이자 참호전이 개발되기 전인만큼 어찌보면 나폴레옹 전쟁의 전통이 이어진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다. 1917-18년에 비하면 구식 전술이 당연시되어서 본문에서도 언급하지만 화려한 군복에 나팔을 불고 대규모의 기병전력이 동원되는 전형적인 나폴레옹 전쟁의 모습을 초반에 연출한다. 이러한 전통은 압도적인 화력을 위시하는 1차대전의 특성상 순식간에 말살되고 국경 전투는 이후 등장하는 서부전선의 전투들과 뭔가 동떨어져 있다.2. 배경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왕국 선전포고를 기점으로 1차대전이 터졌다.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Wilhelm II)는 직접 차르 니콜라이 2세(Nicholas II)를 연락해 총동원령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가 이를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삼국 동맹에 의거해 8월 1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24일날 이같은 상황을 우려한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터질 경우 러시아와의 동맹을 준수할지 고민했는데 프랑스 국방장관 아돌프 메시미(Adolph Messimy)는 참모총장 조제프 조프르(Joseph Joffre)를 소환해 독일과의 전쟁에 러시아와 함께 참전할 경우 프랑스군이 과연 승산이 있는지 질문했다. 1911년의 2차 모로코 위기[21]가 터졌을 때 당시 총리 조제프 카요(Joseph Cailloux)가 동일한 질문을 물어봤을 때 부인해서 카요가 전쟁을 회피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 조프르는 메시미에게 "장관님, 만약에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싸울 수 있습니다"("Well, monsieur le ministre, if we have to make war we will do so")라 답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대결을 풍자한 만평[22] |
이로써 프랑스는 8월 2일에 총동원령을 선포해 독일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3일날 독일 제국의 툴즈(Toules) 요새와 베르됭(Verdun) 요새 요구를 거부함으로 선전포고당했다.[23] 이로써 당대 강대국들인 독일 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두 다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각국은 수십년의 평화 속에 갈고 닦은 전쟁 계획들을 서로를 향해 시행하게 되었다.
3.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계획
3.1. 독일의 슐리펜 계획
슐리펜 계획의 지도. 실제 1차 마른 전투까지의 독일군의 행진도를 보면 이 지도는 대단히 현실성이 떨어진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천재적인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헬무트 폰 몰트케(大)의 뛰어난 전략으로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는 신생 독일 제국의 황제를 선포했으며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제동맹(Three Emperor's Alliance)를 체결했다. 그러나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삼제동맹은 1879년에 붕괴했고, 1888년 새로 즉위한 빌헬름 2세는 러-독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이틈에 비집고 들어온 프랑스는 1892년에 러시아와 러불동맹을 체결했으며. 이로써 독일은 양면전쟁을 각오해야 하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명장이자 독일군 참모본부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大)와 그의 후임자 알프레트 폰 발더제는 당연히 이 새로운 전황을 경계했다. 만약 러불동맹과 전쟁이 터진다면 프랑스를 단기에 꺾을 수 없을 것이므로 서부전선은 소수의 병력을 수세로 일관하고 주력을 동부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트케(大)의 경우에는 1879년에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교훈삼아서 프리비슬린스키를 공략할지언정 러시아 내부까지 진격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적었다.
발더제의 후임으로 1891년에서 1906년까지 독일의 참모총장을 역임한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낀 양면전쟁의 약점을 타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슐리펜은 전임자 두 명과 달리 주력을 동부전선이 아닌 서부전선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강력한 중포마저 프랑스의 요새를 파쇄하는데 역부족이었으므로, 슐리펜은 요새를 파괴하기보다는 우회하는데 노력했다. 슐리펜은 "브뤼셀(Brussels)과 파리(Paris)사이에 위치한 프랑스의 심장"을 향한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중립국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향해 독일의 전력의 2분의 3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슐리펜 계획을 세웠다. 1899년과 1904년 사이에 슐리펜은 여러 차례의 워게임과 전적지 답사를 통해 계획을 보완했으며 1905년 12월, 은퇴직전에 완성했다.[25]
슐리펜 계획의 성립을 위해 벨기에를 협박하는 독일을 풍자한 만평 |
완성된 슐리펜 계획에 의하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진 독일 제국군은 돌아가는 바퀴(wheeling movement)마냥 먼저 벨기에를 통과해 브뤼셀을 점령, 22일에 프랑스 국경에 도달하고, 31일에 솜(Meuse)강에 도착한 순간 우회해 서부로부터 파리를 포위해야 했다. 이로써 파리를 상실한 프랑스는 전의를 잃고 항복할 것이고, 양면전쟁을 타개한 독일은 전군을 러시아에 집중하면 이긴다는 슐리펜의 계산이었다. 최대 400마일을 주파하며 200마일을 포위하는 대담하다 못해 겁없는 이 거대한 도박이 성공하려면 경직된 시간표를 딱딱 맞춰야 했으며 여러 여건들이 기적적으로 맞아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슐리펜이 이러한 무모한 작전을 계획한 건 미쳤거나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다. 슐리펜이 슐리펜 계획을 완성시킬 무렵(1905년)에는 러시아 제국군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해 위상이 제대로 추락한 상태에 전쟁이 터지면 혁명으로 패망하리라는 관측이 우세했으며 프랑스군 또한 현대화가 덜된 상태였다.
1906년에 슐리펜이 은퇴하면서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음울한 성향으로 유명한 몰트케(大)의 조카 헬무트 폰 몰트케(小)가 독일군 참모총장으로써 슐리펜 계획을 총괄했다.
3.2. 프랑스의 제17계획
제17계획 |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게 참패당해 표현할 수 없는 굴욕을 맛봤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유럽 최강의 육군을 자부했던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3세가 생포당한 채 변변찮은 전투 끝에 괴멸당한 것도 모자라 독일군은 파리의 샹젤리제(Champ Elysee)거리를 당당히 행진했으며, 알자스-로렌이 뜯겨나가고, 50억 프랑을 전쟁배상금으로 물어줘야 했다. 제2 제정의 잔해 속에 탄생한 공화국은 3년만에 배상금을 모조리 다 물어줬으며 과거의 영광(le gloire)을 위한 재건에 착수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악몽으로 자리잡은 프랑스군에게는 이전 전쟁에서의 문제를 타개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이들이 주목한 첫번째 문제는 독일군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한 프랑스군의 동원력이었다. 유사시 예비군을 자유자재로 동원해 수를 늘리는 데 능한 독일은 이미 인구가 6000만을 돌파한 것에 비해 프랑스는 여전히 4000만에서 맴돌고 있었다. 1870년의 프랑스의 동원체계는 명백히 실패했으며 1898년의 지휘부는 여전히 동원체계를 믿지 못한 나머지 1898년에 세워진 제14계획은 강력한 요새와 지형 뒤에 우주방어가 목적이었다.
프랑스군 참모총장 빅토르 미셸 |
슐리펜 계획의 독일군은 동원된 병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비좁은 벨기에 국경을 넘어 이동시키는데 주목했다면 프랑스군은 어떻게 해야 최대한 효율적으로 병력을 모을 수 있을지 강구했다. 1905년에 확정된 징병제는 2년간 프랑스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변모시킴으로 오히려 독일군이 벨기에에 전개시킬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평시에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예비대를 어떻게 동원할지에 대해 전혀 해법이 되지 못했다. 1903-07년의 제15계획에서 남부 벨기에까지 다수의 프랑스군을 어떻게 동원할지 해법을 마련했으며, 1909년의 제16계획에서는 이 규모를 더욱 높였다.
1911년에 독일과의 전쟁위협으로 새로운 프랑스 참모총장 빅토르 미셸(Victor Michel)은 제14-제16계획으로부터 탈피해 예비대를 현역부대에 병합해 모든 부대를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배치하고, 벨기에에 병력을 집중해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이였다. 이는 슐리펜 계획의 강력한 우익기동을 거의 상쇄하는 병력배치였다. 만약에 미셸 계획과 슐리펜 계획이 맞붙었다면 그 결과는 가늠하긴 어렵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아는 국경전투보다 프랑스군 입장에선 더 나았을 것이란게 역사가 존 키건(John Keegan)[26]의 의견이다.
프랑스군이 주목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부터의 두번째 문제는 공세의 중요성이다. 유명한 프랑스의 군사상가이자 훗날 명장으로 맹활약하는 페르디낭 포슈는 몰트케(大)의 실수로 빈틈을 보이던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지 않고 느린 증원으로 공방 모두 실패한 프랑스 지휘부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했다. 포슈는 공격의 중요성, 목표의 명확성, 사고의 유연함, 변화하는 전장에 대한 경각심등과 함께 그 유명한 엘랑 비탈(Élan vital)을 곁들여 설명했는데 이에 포슈의 제자들은 포슈의 군사상에서 공세주의와 엘랑 비탈에만 집중하게 된다.[27] 공세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장교들에게는 미셸 계획은 나약하고 수세적일 뿐이었다. 미셸은 얼마 못가 조프르에게 교체당하고 참모부를 장악한 조프르는 포슈의 제자 루이 그랑메종과 함께 공세주의에 입각한 교범을 1913년에 출범하고 부관 노엘 드 카스텔노와 함께 알자스-로렌 공세을 중점으로 둔 제17계획을 작성한다.
8월 3일, 전쟁에 돌입한 유럽의 두 거인은 수년간 갈고 닦은 전쟁계획을 서로를 향해 시행하기 시작했다.
4. 시행되는 슐리펜 계획과 제17계획
4.1.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벨기에 침공 항목 참고.▲독일군을 피해 피난가는 벨기에의 민간인
4.2. 성공적인 프랑스의 동원체계
프랑스의 모병선언서 |
전장으로 나서는 프랑스의 병사들 |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한 전쟁위협이 달아오르자 8월 1일에 장관의회에서 총동원령을 승인하고 2일부터 국민을 모병소에 모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전역에 울려펴진 북소리, 교회 경종과 여러군데 붙여진 모병선언서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널리 퍼뜨렸다. 모병소에서 무장된 현역병과 예비병은 각각 군용으로 전환된 철도를 통해 지정된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후방의 병력이 전방으로 옮겨지는 동안 이미 전방에 배치된 병력은 서서히 도착해오는 후방군을 보호했다.
프랑스군의 총동원령은 8월 18일후, 즉 16일만에 완성되었다. 프랑스군은 모든 후방군을 옮기기 위해 14개의 지정된 철도에서 매일마다 평균의 56대의 열차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활용한 4,278대의 열차 중 겨우 20대만이 늦었을 뿐이었다. 프랑스군의 엄청난 조직력을 선보이는 위업은 프랑스 수뇌부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에 단순히 놀고 먹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곧바로 1,865,000명을 전투병으로 모집하는데 성공한 프랑스군은 이를 21개의 군단과 25개의 예비사단으로 분산했는데, 이는 서부전선에 22개의 군단밖에 배치할 수 없어서[28] 예비병마저 정규군에 활용해야 했던 독일군과 비교해 살짝 열세지만 비등한 숫자였다. 이런 숫자빨은 프랑스군이 수없는 전술적 패배를 겪는 와중에 막판에 반격을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작용한다.
젊은 병사들의 멋모른 객기에 대해 널리 퍼졌지만 프랑스의 역사가 장자크 베커스(Jean-Jacques Beckers)가 당시 교사들이 교육부에 제출한 개전 시 여론조사를 연구한 결과,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갑작스러운 전쟁에 당혹스러워했으며 여성들은 슬픔을 표했다고 한다. 전쟁을 동경하는 객기보다 독일에 공격당한 조국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동원령에 응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29] 그 결과, 좌익과 노동조합의 반발을 우려해 헌병을 배치했음에도 이들 모두 반발 없이 순순히 군에 지원해 헌병들이 필요없는 꼴이 되었다.
5. 프랑스군의 대공세
5.1. 로렌 공세
연합![30] |
8월 6일, 프랑스의 동맹국 러시아의 총사령관 니콜라이 대공은 8월 14일에 공세를 펼칠 테니 프랑스에게 이를 호응하기를 요청했다. 조프르는 이에 흔쾌히 응해 8월 14일에 제7군단, 제8군단, 제13군단, 제14군단, 제21군단과 제6기병사단과 제8기병사단으로 구성된 오귀스트 뒤바이(Auguste Dubail)의 제1군과 제9군단, 제15군단, 제16군단, 제18군단, 제20군단과 제2기병사단과 제10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노엘 드 카스텔노(Noël de Castelnau)의 제2군에게 알자스-로렌[31]을 향해 공세를 펼치도록 했다.[32]
5.1.1. 왜 프랑스군이 거기로 갔나?
[33] |
제17계획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제17계획하 프랑스군의 주공은 알자스-로렌을 향하는 공세였다. 그러나 중립국 벨기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독일과 프랑스 모두 주공 지역은 알자스-로렌밖에 남지 않았고, 그 덕에 알자스-로렌은 양국 모두 요새화가 잘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알자스-로렌은 언덕이 많고, 숲이 우거진 데다가 수로가 많아서 공세하기에 버거운 지역이었다. 그 결과, 앞서 언급했듯이 벨기에 침공을 고려하지 않은 독일의 폰 몰트케(大)는 프랑스를 짧은 전면전으로 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는 프랑스군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공할 것이란 예상은 1914년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육군대학의 교장 페르디낭 포슈와 그의 영국인 친구이자 캠벌리 참모대학의 교장 헨리 윌슨은 이미 벨기에 침공을 기정사실로 두고 영·불합동작전을 논했다.
즉, 언뜻 보기에는 로렌 공세는 적의 주공이 빤히 약점을 향해 돌격하는 상황에서 요새화 잘된 지형을 향해 주력을 보내는 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프랑스군 수뇌부는 무뇌만 가득찬 집단이 아니고 앞서 언급한 약점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17계획의 입안자 노엘 드 카스텔노는 릴(Lille)[34]의 요새화를 포기하겠다는 결정에 항의하는 릴의 군정장관 레브하(Lebras)에게 지도를 펼쳐서 벨기에에서부터 릴까지의 거리를 손수를 자를 대서 측정해 보인 후 "그렇다면 끊어버리면 된다!"(We'll cut them in half!)라 답했다. 즉, 카스텔노의 제17계획은 독일의 거대한 우익기동을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충분히 고려해서 도출해낸 전쟁계획이었다.
카스텔노의 의도는:
- 만약에 독일군이 거대한 우익기동을 기획했다면 중부와 좌익은 비교적 약할 것이다.
- 게다가 동맹군 러시아군 덕에 독일군은 전력이 분산될 수 밖에 없다.
- 프랑스군이 아르덴과 로렌을 공격한다면 독일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약점이 공격당한 독일군은 당연히 우익기동을 포기할 수 밖에 없고 전력을 나머지 전선에 배분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 프랑스군은 이제 혼란에 빠진 독일군을 쭈욱 밀고 들어가서 러시아와 함께 베를린까지 점령하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맺는다.
- 그리고 알자스-로렌을 전초에 점령하는데 성공한다면 프랑스의 국민들과 병사들 모두 사기가 높아질 것이라는 점은 덤.
이런 요점들과 만약에 독일군이 예비대를 활용하지 않고 오직 정규군만 일선에 투입한다는 가정을 덧붙인다면 우익에 전력을 집중하는 순간 너머지 전선은 너무 늘어나게 되므로 카스텔노의 계산은 그다지 헛된 게 아니게 된다. 요약하자면 제17계획은 단순히 알자스-로렌 회복이 아닌 우익에 편중된 독일군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그대로 밀어버린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들어간 전략이다.
프랑스 제2군의 사령관 노엘 드 카스텔노[35][36] |
그러나 프랑스군 수뇌부에서 무슨 생각을 하건 이는 사실상 작전의 의도라기보다 이미 있는 작전 내용을 어거지로 정당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적의 의도를 알면서도 적의 의표를 찌른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프랑스군의 약점이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독일군의 주력은 프랑스군의 약점을 공격하고 프랑스군의 주력은 방어에 적합한 지역에 있는 요새화된 독일군을 공격한다는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거창한 의도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우리가 먼저 공세를 성공시키면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새화된 지역을 공격하는 프랑스군이 어떻게 개활지로 공격하는 독일군보다 먼저 공세를 성공시켜서 독일군이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로 돌아서게 만들 것인지, 독일군이 먼저 공세를 성공시킬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전무했다.
더구나 예비대를 활용하는데 매우 부정적이었던 프랑스군과 달리 독일군은 예비대를 일선에 쓰는데 별 거부감이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을 향해 공세를 펼칠 것을 충분히 예상했기에 요새, 기관총, 야포 등을 충분히 준비해 최대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효율적으로 방비하는데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 이에 한술 떠서 독일군은 프랑스의 공격을 격퇴하는 것을 넘어 아예 깊숙히 유도하는 전략을 세웠다. 1906년에 폰 몰트케(小)가 독일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면서 우익의 전력을 배분하면서까지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 좌익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은 로렌을 향하면서 독일군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으로 독일군이 놓은 함정에 그대로 걸어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5.1.2. 제7군단의 단독공세
뮐루즈 전경 |
8월 7일, 조프르는 총공세를 펼치기 전에 알자스-로렌의 일부 도시를 되찾을 수 있다면 매우 좋은 선전소재가 될 것이라 생각해 독일군이 전무하다 판단한 알자스 지방으로 제7군단을 단독으로 파견보냈다. 제7군단은 미미한 저항끝에 중요한 도시인 뮐루즈(Mulhouse)를 점령했는데, 1870년 이래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주민들로 인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 작은 성공은 계획대로 프랑스군의 전의를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지만 8일의 독일군의 역공으로 실패로 돌변했다. 1차 뮐루즈 전투에서 순식간에 개털린 7군단은 뮐루즈를 상실하고 탠(Thann)만 보존한 채로 그간 점령했던 영토를 죄다 토해냈다.
조프르는 여의치 않게 복귀한 제7군단을 새로 형성한 폴 포(Paul Pau)를 지휘관으로 임명한 알자스군(Army of Alsace)휘하에 배치했다. 제1군 우익에 배치된 알자스 군은 스위스 부근의 전선을 담당해서 제1군의 부담을 덜었다.
5.1.3. 그나마 순조로운 시작
파리에서 로렌 전선으로 이동하는 프랑스 흉갑기병대[37] |
8월 14일 아침, 상실한 영토를 되찾는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프랑스 제1군과 제2군은 제7군단의 실패에 개의치 않고 독일-프랑스 국경경계를 알리는 표지물을 박살 내면서 깊숙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공세에 나선 프랑스군은 일시적으로 좋은 성과를 냈다. 제13보병사단은 도농산(Mont Donon)을 장악했으며, 제13군단과 제8군단은 바이에른 제1군단을 밀어내 자르부르(Sarrebourg)로 부터 12km 반경까지 진격했다. 유일하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 군세는 제26보병사단으로 시레이(Cirey)를 탈취하기 위해 엄폐물 없는 평지를 향해 돌격하다 기관총과 포격으로 인해 산산조각났다.
그러나 15-17일에 공세를 재개한 프랑스군은 심각한 호우 속에 독일군의 저항을 맞이했다. 나폴레옹 전쟁마냥 군기를 꼬나들고, 군악대와 함께 행진해 완벽한 표적으로 변모한 프랑스군은 훨씬 더 강화된 화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게다가 독일군의 중포는 프랑스의 야포[38]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는데다가 독일군은 미리 준비된 엄폐물에서 방어전을 수행했기에 프랑스군의 큰 피해에 일조했다. 15일에는 제2군은 아침 9시부터 한큐에 1000명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근성있게 세유(Seille) 저지대까지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프랑스군은 코트드델메(Côte de Delme)와 모르주-디외즈(Morhang-Dieuze)의 이중요새에 위치한 독일 중포의 강력한 포격세례에 큰 피해를 입었다.
애초에 지금껏 프랑스군이 진격이 가능했던 것 자체도 독일군 좌익을 담당하는 제6군 사령관 루프레히트 왕세자의 제6군과 폰 헤링겐의 제7군이 강력한 우익이 벨기에를 침공하는 동안 프랑스군 주력을 유인하기 위해 계획대로 자르(Saar)강까지 철수중이었기 때문이다. 제6군은 1068대의 화기를 동원해 프랑스군의 진격을 늦추며 점진적인 저항을 계속할 뿐, 전력으로 프랑스군을 막아세우려고 한 적이 없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병돌격을 중시하는 교리를 갖춘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중포와 기관총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제2군 사령관 드 카스텔노는 공세 이전에 강력한 포격을 퍼붓는게 중요하다는 점과 포탄과 총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호시설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나 조프르는 프랑스군의 보병교리를 바꾸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조프르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지라 프랑스군의 진군을 하루마다 5km로 제한해 독일군의 유인을 극심하게 경계했다. 조프르는 드 카스텔노와 뒤바이에게 양군의 접촉유지를 중시히라고 명령함과 동시에 남부의 알자스군에게 강행군을 명령해 전체적인 성과를 조율하는데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17-19일의 공세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보였다. 17일에 포슈의 제20군단은 샤토-살랭스(Chateau-Salins)를 점령해 마티니(Martini)의 바이에른 제2군단이 장악한 모르주(Morhange) 언덕을 향해 진군하고 에스피나스(Espinasse)의 제15군단은 디외즈(Dieuz)를 점령했다. 제8군단 소속의 제16보병사단은 바이에른 제2사단를 밀어내 자르부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제6군은 계획대로 자르부르를 아예 불태워버리며 철수를 진행했다.
19일에는 제7군단과 독일군이 2차 뮐루즈 전투에서 다시 한번 격돌했다. 언덕을 장악한 프랑스군은 밀집된 독일 보병대열에 기관총을 퍼부은 결과, 독일군은 마치 "낫이 벼를 베듯이"(like a scythe does stalks of grains) 썰렸다.
8월 7-20일간의 로렌 공세의 지도[40] |
조프르는 꾸준한 성과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르부르 너머에 함정을 의심한 나머지 제2군의 방향을 북방으로 수정했다. 북방의 독일군의 움직임 또한 의심하던 조프르는 제1군으로부터 제19군단을 몰수하고 제17군단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랑레자크의 제5군 휘하에 배치해 조금씩 병력을 북쪽으로 이송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폰 몰트케(小)는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 못해 계획대로 프랑스군을 묶어두겠다는 의도와 반대로 독일군이 과도하게 많은 병력을 알자스-로렌에 배치한 반면 오히려 프랑스군이 좌익을 보강하고 있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국경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독일군의 허를 찌른 순간이라 할 수 있겠으나 단기적으로는 로렌 공세의 전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8월 20일, 조프르는 국방장관 메시미에게 "전체적으로 상황이 좋아보입니다"(Overall, the situation appears to me as favorable)라 보고했다.
5.1.4. 루프레히트의 반격
독일 제6군 사령관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41] | 독일 제6군과 제7군의 참모장 크라프트[42] |
독일군의 최초 의도는 프랑스군을 메츠(Metz)와 낭시(Nancy)의 동쪽 부근에 묶어두는 것이었지만 몰트케(大)의 명언 "어떤 계획이더라도 적군과의 접촉 후 살아남을 수 없다"(No plan survives contact with the enemy)라는 말답게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진행될수록 기존 계획은 점점 폐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제6군이 너무 빡빡하게 제1군과 제2군의 진군을 저항하는 바람에 전황은 본래대로 자루처럼 고립시키는 계획과 점점 멀어진데다가 제6군 사령관 루프레히트가 슈바르츠발트(Black Forest)로 프랑스군을 유인하는데 별 거부감이 없던 반면[43] 독일군 총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줄여서 OHL)는 프랑스군에게 독일 영토를 내주는데 큰 거부감을 보였다.[44]
독일군은 프랑스의 22개의 현역 군단 중 무려 18개 군단이 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오판했는데, 루프레히트는 교전을 통해 실제로는 그 절반 가량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헬리머(Helimer)에 새로이 사령부를 차린 루프레히트와 제6군 참모장 크라프트는 적군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방어가 아닌 강력한 반격을 퍼붓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루프레히트는 반격작전에 대해 지지를 받기 위해 제7군의 폰 헤링겐에게 폰 질렌더(von Xylander) 중령을 파견 보냈으나 폰 헤링겐은 냉담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45] 이에 굴하지 않고 루프레히트는 독일 총사령부에도 반격작전에 대해 알렸으나 총사령부도 딱히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루프레히트는 OHL의 주요 장교들과 통화 및 회담을 통해 반격작전을 강력히 주장했고, 임무형지휘로 상징되듯이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하는 독일군답게,[46] 8월 18일 오후, 크라프트는 총사령부의 병참감인 폰슈타인으로부터 OHL은 공격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6군은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야 한다. 그에 대한 책임은 당신들에게 있다는 대답을 받아내었다. 제6군과 제7군은 8월 20일에 반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의 반격 끝에 제대로 밀려나가는 제2군과 제1군 |
8월 20일[47] 4:30AM, 프랑스군의 공세에 빡빡한 저항 끝에 후퇴하던 전날과 달리 제6군은 강렬한 포격세례와 함께 반격을 취해 100km 넓이 전선에서 제2군과 격돌해 일명 모르주 전투(Battle of Morhang, 혹은 자르 전투-Battle of the Saar)가 터졌다. 보주(Vosges)산맥에서 격돌한 두 군의 치열한 교전은 난전으로 발전했다. 야포마저 경시해 보병돌격 위주의 교리를 자랑하는 프랑스군과 달리 강력한 중포를 동원한 제6군은 기습당한 프랑스군에 끔찍한 피해를 입히며 우위를 점했다. 제2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격한 포슈의 제20군단은 아예 모르주를 향해 냅다 찔렀는데 이는 전날에 공세를 이웃군단에게 맡기고 방어를 굳건히 하라는 드 카스텔노의 명령를 어기는 행위였다.[48] 강력한 적에게 공세를 퍼붓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제20군단이 너무 많이 진격한 나머지, 제2군의 중앙 군단들의 측면을 노출해버렸다. 바이에른 제8군단은 중포를 동원해 이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제20군단 또한 독일 제3군단의 기관총 세례에 큰 피해를 입었다.
오후에 접어들자, 교전에서 독일군이 확연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중포를 정밀히 조준해 프랑스 야포를 제거한 후 보병돌격을 명했는데, 이로써 카스텔노는 전투에서 아들[49]뿐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야포를 상실했다. 이로써 독일군의 맹공에 제15군단과 제16군단은 패퇴했으며, 제20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패전을 목격한 한 장교에 의하면:
"이는 감탄할 만한(sublime) 혼란이었다. 보병, 포병과 그들 특유의 느릿느릿 마차, 군수물, 물품 보관소, 우리 매우 뛰어난(brilliant) 참모단의 매우 깔끔한(brilliant) 자동차는 서로 격돌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프랑스 제20군단의 사령관 페르디낭 포슈[50] | 프랑스 제1군의 사령관 오귀스트 뒤바이[51] |
제2군 입장에선 끔찍한 상황이라 할 수 있으나, 유일하게 교전이 가능할 정도의 전력과 예비대를 보존한 포슈의 제20군단은 샤토-살랭스를 사수해 타군단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제6군의 공세를 일시적으로 막아 세워 제2군이 잠시나마 후퇴할 만한 시간을 벌었다.[52] 간혹 언급되는 듯이 기적이라 할만한 성과가 아닐지여도, 붕괴하던 제2군이 그나마 후퇴할 시간을 벌어준 포슈의 지휘력과 판단력은 상당한 편이다.
그리고 제2군이 패퇴당한 바람에 제1군의 측면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제1군의 성과에 제동을 걸었다. 뒤늦게 참전한[53] 헤링겐의 제7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데다가 공격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뒤바이는 제2군의 패배에 개의치 않고 공세를 지속하려 했으나 조프르는 제2군이 완전히 후퇴할 시에는 제1군이 우회당할 위협이 있다고 경고했다. 어쩔 수 없이 뒤바이는 제8군단과 제13군단을 파견보내 제2군의 측면을 보호하면서 제1군의 후퇴를 명했다.
로렌 공세 과정에서 죽은 프랑스 병사의 무덤 |
21일에 공세를 재개한 제6군은 후퇴하는 제2군에 강력한 포격세례로 맞이했다. 포슈의 제39보병사단은 샤토살랭스로 밀려나갔으며 제11보병사단은 아예 패퇴당했다. 제6군은 이미 후퇴하던 제15군단과 제16군단을 또 다시 공격했는데, 이로써 두 군단은 완전히 붕괴했다. 더욱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던 카스텔노는 또 다시 전면후퇴를 명했으며, 제1군의 뒤바이 또한 뫼르트(Meurthe)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조프르는 이 패배를 최대한 축소하려 노력했지만 모르주 전투에서 제15군단의 사상자를 끝없는 마차로 나르는 꼴을 똑똑히 목격한 민간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널리 퍼진 바람에 별 소용이 없었다.
20일에 터진 모르주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피해는 매우 끔찍한 수준이였다.
- 바이에른 제1군단은 1,900명의 포로를 보고했다.
- 바이에른 제2군단은 800명의 포로를 보고했다.
- 바이에른 제3군단은 1,300명의 포로를 보고했다.
- 독일군의 매장 기록에 의하면 1,200명의 프랑스군을 묻었다.
- 독일군 총사령부에 보고된 바로는 포로 14,000 명, 화기 13 개를 노획했다.
프랑스군은 전후 한 5,000명의 사상자를 실토했지만 역사가들은 거의 2배의 10,000명의 사상자를 추정한다고 한다. 빌헬름 2세는 이 승리를 두고 매우 기뻐해 "군사역사상 최고의 승리"(The greatest victory in the history of warfare)라 칭송했다.
이로써 로렌 공세는 프랑스군의 총 3개의 공세중 불명예스러운 1패를 기록했다. 이제 나머지 2패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5.1.5. 외전: 에피날을 향해서!
독일 제7군의 사령관 요시아스 폰 헤링겐[54] |
그러나 모르주 전투는 루프레히트가 의도했던 위대한 기동공세로 발전하지 못했다. 폰 헤링겐의 제7군은 제6군에 비해 6시간이나 늦게 참전해 버려서 기습의 효과를 완전히 상실한 데다가 제7군의 란트베어[55] 부대가 보주산맥에서 프랑스 알프스 산악병의 활약에 완전히 막혀버렸다.[56]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산맥에 안개까지 드리워 혼란 속에 아군끼리 죽이기도 하는 난전이 난무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선 다행히도 제6군과 제7군은 치열한 교전에 지친 나머지 다시 추격하는데까지 3일이 걸렸다. 조프르는 이 귀중한 시간을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을 재정비하는데 활용했다. 드 카스텔노의 붕괴한 제2군을 재건해 낭시 방어선을 준비하고, 새로운 로렌군(Army of Lorraine)을 새로 형성해 미셸 모누리(Michel Maunoury)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수세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26일, 포의 알자스군이 모르주 전투에 별 도움이 안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조프르는 알자스군을 해체하고 상당수의 병력을 파리에 위치한 제7군단으로 이송했다.[57] 사실 이 패배는 불행 중 다행으로 만약에 더욱 깊숙히 진격했다가 퇴로가 끊겼다면 후퇴는 커녕 아예 괴멸당해 군단 단위로 포로가 속출하고 훗날 지휘관으로 활약하는 포슈 등이 적어도 4년간 포로로 썩었을 가능성마저 있다. 역사가 G.J. Meyer는 이런 가능성을 들어서 루프레히트의 성급한 반격은 "중대한 실수"(a serious mistake)라 평가한다.[58]
이런 아쉬운 점을 무시한 독일 총사령부는 상술했듯이 승리에 매우 만족했다. 이미 루프레히트에게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한 폰 몰트케(小)는 아예 전략의 수정을 고민했다. 애초에 반격을 결정한 루프레히트는 제2군과 제1군을 격퇴한 후 좋은 방어선을 취한 후 잉여병력을 죄다 우익으로 보낼 생각이었으나 루프레히트의 갑작스러운 성공에 폰 몰트케(小)는 갑자기 프랑스 동부의 요새 에피날(Epinal)과 툴루즈(Toules)를 탐내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 제2군이 완전히 전력을 소진했다고 판단한 폰 몰트케(小)는 우익에 집중하기 보다는 동부에도 에피날 요새를 향한 또 하나의 공세를 펼쳐서 단독 우익기동이 아닌 양익기동을 구상했다. 루프레히트와 크라프트는 낭시가 아닌 에피날을 향한 새로운 전략적 목표에 의아해 했다.
루프레히트와 크라피트의 항의에 폰 몰트케(小)는 프랑스군이 지속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만약에 "병사들과 전마의 마지막 숨"(the last breath of man and horse)마저 소진한다면 충분히 툴루즈와 에피날을 돌파할 수 있으며 아예 뇌프샤토(Neufchâteau)마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폰 몰트케(小)의 구상에 의하면 조프르의 프랑스군을 아르덴에서 붙잡고 있는 동안 제1군, 제2군, 제3군이 프랑스 좌익을 강타하고 제6군, 제7군이 프랑스 우익을 강타한다면 그대로 찌그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小)의 에피날 공세 |
그러나 몰트케(小)의 위대하다 못해 허망한 계획은 24시간만에 박살났다. 루프레히트의 제6군이 샤름(Charmes)를 향해 진군하고 헤링겐의 제7군이 프랑스군을 우회하려는 동안 이미 재조직한 제1군과 제2군은 8월 25일 8AM에 뫼르트강 북부로 반격을 펼쳤다. 트뤼드샤름(trouée de Charmes) 전투(혹은 Battle of Mortagne-모르타뉴 전투)는 사이사이에 3개의 강(샤름, 뫼르트, 모젤-Moselle)이 배치된 언덕에서 벌어졌다. 당연하지만 이는 방어자에게 매우 유리한 지형으로 특히 프랑스군은 평시에 인근에서 수번이나 훈련해 왔다.
카스텔노는 제16군단, 제15군단, 제20군단을 예봉으로 삼아 독일 제6군의 우익을 강타하고 뒤바이는 제1군 좌익의 두 군단으로 바이에른 제1군단과 프로이센 제21군단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순식간에 3면에서 공격당한 제6군은 포위당할 위기에 처했다. 제6군의 우익을 맡은 루트비히 폰 겝자텔(Ludwig von Gebsattel)의 바이에른 제3군단은 제5보병사단, 제4보충사단, 제8보충사단을 몸빵삼아 우회하려는 프랑스군을 막고자 했으나, 되려 큰 피해만 입고 격퇴당했다.
트뤼드샤름(trouée de Charmes) 전투의 지도 |
제6군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 바이에른 제2군단장 마티니의 보고에 의하면 휘하 중대는 본래 250명에서 30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데다가 제2군의 몇몇 보병부대는 75%의 전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 막시밀리언 폰 몬트겔라스(Maxilian von Montgellas)의 바이에른 제4보병사단은 로렌에서의 교전으로 거의 9,000명의 병력을 상실해 불과 3,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 바이에른 제1보병사단은 이틀만에 1,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제6군 입장에선 다행히도 26일에 심한 호우가 쏟아진데다가 프랑스 포병부대들이 1-3PM동안 점심을 위해 휴식을 취한 덕에 그나마의 병력을 보존했다.
교전중인 프랑스 병사들 |
8월 28일, 트뤼드샤름 전투는 양군에 큰 피해를 입은 채 무승부로 종결되었다.[59] 이후 로렌 전선은 거의 일주일간 큰 교전없이 대치를 지속했는데, 조프르는 이 시간을 활용해 로렌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파리로 이송했다. 제6군의 실패에 격분한 폰 몰트케(小)는 제6군의 바이에른인의 낮은 전의를 비난하고 전략을 수정해 무모하게 에피날을 노리기보다는 낭시 방어선을 강타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제6군과 프랑스 제2군간의 낭시 공방전은 1차 마른 전투가 터졌을 때쯤에 재개한다.
5.2. 아르덴 공세
아르덴의 지형 |
한동안 꾸역꾸역 진군하던 제1군과 제2군이 20일에 터진 모르주 전투에서 개털렸지만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강철멘탈을 자랑하는 조프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렌 공세가 처참한 실패로 남고, 벨기에의 독일군이 심상찮다는 보고에 불구하고 조프르는 제17계획에 의거한 두번째 공세, 독일군 중앙이 위치한 아르덴 숲을 향한 아르덴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제5군 사령관 샤를 랑레자크(Charles Lanrezac)는 벨기에 내에 매우 강력한 독일군이 주둔 중이라는 점을 파악하자 8월 14일에 프랑스 총사령부(Grand Quartier Général-줄여서 GQG)를 방문해 조프르에게 제5군이 이미 파악된 독일군의 공세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별 의미없을 아르덴 공세에 제5군을 동원하지 말라고 역설했으나 조프르는 랑레자크의 애원을 묵살했다. 파리 군정장관 조제프 갈리에니(Joseph Gallieni)도 같은 날 조프르를 방문해 강력한 독일 우익을 경고했으나 조프르는 이 또한 무시했다.
그러나 리에주 요새는 독일군이 매우 강력한 각각 305mm와 420mm의 구경을 자랑하는 곡사포를 동원하면서 8월 13일에 격파당하고 15일에는 10,000명의 독일 기병대가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의 제1군단과 벨기에의 디낭(Dinant)에서 교전을 벌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전까지 기병대의 보고에 매우 만족하며 강력한 독일 우익에 대한 랑레자크와 갈리에니의 경고를 무시하던 조프르는 독일군이 이미 벨기에 북부에 진출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약간이라도 굴복했다.
프랑스 제3군의 사령관 피에르 루페이[60] |
조프르는 제5군을 랑레자크의 충고대로 아르덴 공세에서 배제하고 대신 북부로 보냈다. 물론 여전히 벨기에 내에 주둔한 독일군의 수를 얕본 조프르는 계획대로 제3군과 제4군을 활용해 아르덴 공세를 속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8월 18일에 이미 특별명령13호(Instruction particuliére No. 13)를 선포해 아르덴을 향한 거대한 공세를 예고한 조프르는 21일에 특별명령15호를 선포해 제3군, 제4군과 로레인군의 아르덴 공세를 명했다. 각 군마다 임무가 달랐는데, 제4군단, 제5군단, 제6군단, 제7기병사단과 3개의 예비사단으로 구성된 피에르 루페이(Pierre Ruffey)의 제3군과 철저히 예비사단로 구성된 모누리의 로렌군을 독일군을 격파한다는 의도보다는 독일과의 대치로 위협받고 있던 프랑스의 중요 철강공장과 철광 생산지가 다수 포진한 롱위(Longwy), 브리이(Briey), 하양지(Hayange)등을 보호하기 위해 선공에 나섰다.[61] 기존에 제12군단, 제17군단, 식민군단(Colonial Corps)과 제9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던 페르낭 랑글 드 카리(Fernand Langle de Cary)의 제4군은 본래 각각 제5군과 제2군에 배치되었던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의 제1군단, 피에르 뒤부아(Pierre Dubois)의 제9군단을 재배치해 총 16만명의 병력으로 보강된 후 공세의 예봉을 맡겼다. 수세적인 목적을 가진 제3군과 로레인군과 달리 제4군의 임무는 철저히 공격적이었다. 제3군, 제4군, 로레인군으로 총 377개의 대대와 1,540개의 화기를 동원한 아르덴 공세는 40km 전선에서 최소한 12km를 돌파할 것을 예상했다.
더불어, 기습 효과를 노리기 위해 조프르는 정찰및 보급부대마저 배제했다.
5.2.1. 여기는 또 왜 갔는가?
"만약에 아르덴의 죽음의 덫에 걸린다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If you go into the death trap of the Ardennes, you will never come out."
-1914년, 어느 한 프랑스 장교
그리고..."If you go into the death trap of the Ardennes, you will never come out."
-1914년, 어느 한 프랑스 장교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돌파해 프랑스군을 단숨에 굴복시킬 때까지 우거진 아르덴 숲은 뚫을 수 없다는 불멸의 명성을 지녔다. 그나마 2차대전의 독일군은 1940년의 기술적 발전으로 돌파한 것으로 이마저도 연합군이 충분한 병력을 주둔시켰거나 공습을 가했다면 손쉽게 격파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3] 이런
그러나 왜 조프르가 벨기에 내에 독일군의 활동이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딱 봐도 악수로 보이는 아르덴 공세를 결심한 이유는 상당히 간단하다:
- 벨기에를 공격 중인 독일군은 강력한 우익에 상당한 병력을 집중하고 있다.
- 로렌 공세를 격퇴해낸 독일군의 좌익으로 판단했을 때, 나머지 독일의 전력은 좌익에 집중되어 있다.
- 고로 독일군의 중앙은 빈약할 수 밖에 없다.
- 프랑스군은 빈약한 독일군의 중앙을 격퇴한다면 벨기에로 향하는 독일군의 후장에다 총알을 박아넣을수 있다
...라는 논리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17계획을 실행하고자하는 조프르의 강력한 의지도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
물론 이 논리도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닌, 근본적으로 잘못된 계획을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군의 공세가 독일군 우익보다 병력 집중이 덜하다면 그만큼 프랑스군이 공세를 성공시키기 어려워지는 것이고, 프랑스군이 공세에 독일군보다 더 병력을 집중시켰다면 독일군 우익이 그만큼 빨리 돌파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문제의 핵심은 독일군은 방어준비가 안 된 개활지를 공격하고 프랑스군은 방어준비도 끝나고 공세가 어려운 지역을 공격한다는 점인데, 조프르는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아예 생각하기를 그만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상술했듯이 독일군은 예비군을 활용하는 거부감이 없었고[64], 동일한 가정을 가지고 실행한 로렌 공세가 처참하게 실패한데다가 이런 가정과 상충하는 첩보부의 여러 보고가 산재했다. 조프르는 계속해서 변해가는 주변 정보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고위장군직에 오르면 빠지기 쉬운 과신의 함정에 빠져 억지로라도 제17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이는 정보에 민감해야 하는 총사령관으로써의 최악의 결점으로 조프르를 단순히 국경전투 초반만의 행적으로 평가한다면 한 마디로 말해서 졸장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프르에게나 프랑스군에게나 불운하게도 로렌 전선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2차대전의 연합군과 달리 프랑스군의 아르덴 공세를 충분히 예상한 상태에 충분한 병력 또한 배치했었다. 조프르는 제딴에 독일군의 허를 찌른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독일군의 손바닥 안에서 충실히 놀아나는 중이었다.
5.2.2. 헤매는 프랑스군, 준비하는 독일군
독일 제5군의 사령관 빌헬름 황태자[65] |
8월 21일, 조프르의 "언제 어디서든 적을 발견하면"(wherever encountered) 공격하라는 명령과 함께 아침 6시에 공세를 펼친 제3군, 제4군과 로렌군은 짙게 낀 안개와 호우 속에 혼란만 가중된 채로 서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공세를 펼친 지형을 전혀 연구하지 않았음에도 오직 몇몇 지휘관들만 지도를 소지했다. 어떤 이들은 아예 라인란트의 지도까지 준비해 놓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관광지도를 사용하는 것이 나은 수준이었다. 몇몇 지휘관은 아예 철도시간표에 달려있는 지도에 의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김칫국을 마시면서도 서로 뒤엉켜 삽질하는 동안,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기대와 달리 중앙에서도 제한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르덴 남부의 메츠-티옹빌(Metz-Thionville) 지역에 독일 제국의 후계자 빌헬름 황태자의 제5군이 주둔했고 제5군의 우익의 아르덴 중북부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왕세자 알브레히트(Albrecht) 공작의 제4군이 주둔했다. 빌헬름 황태자의 제5군은 롱위와 몽메디(Montmédy)의 요새방어선을 강타하고 최종적으로 베르됭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다면 알브레히트 공작은 최종적으로 뇌프샤토를[66] 노리고 진격하고 있었다. 총 236대대와 1,320정의 화기를 소유한 두 군은 독일군의 주공을 담당할 북부의 우익에 맞춰야 하므로 타군과 달리 그간 느긋하게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 황태자와 제5군의 참모장 콘스탄틴 슈미트 폰 크노벨스도르프(Konstantin Heinrich Schmidt von Knobelsdorf)는 지루한 수세전보다 재빨리 프랑스군에 공세를 펼치기를 염원했는데, 21일에 독일군이 리에주와 브뤼쉘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자 빌헬름 황태자는 군을 남서부 방향으로 이끌어, 진격해 오는 프랑스 제3군과 4군을 격파하고자 했다. 총사령관 폰 몰트케(小)는 빌헬름 황태자에게 수세적인 임무를 부여했다고 상기했으나 그냥 무시당하고 본인도 제5군의 공세를 철회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독일군의 소재를 예상 못했던 프랑스군과 달리 독일군은 충실히 제3군과 제4군의 진격에 대해 보고 받고 있었다. 미리 참호를 파고 후방에 중포마저 배치해 프랑스군과의 교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5.2.3. 붕괴하는 루페이의 제3군
프랑스군의 아르덴 공세의 주공루트.[67] |
8월 22일, 항공정찰과 장프랑수아 소르데(Jean-Francois Sordet)의 기병대의 보고에 따라서 제3군과 제4군은 아르덴 전선에서 독일군의 미약한 저항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반대로 10개의 군단을 맞이했다.
당시 제3군과 제4군은 마치 계단처럼 대각선을 그은 제차대형(echelon formation)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군이 동방과 북방으로 공세를 퍼부을 능력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각 군단의 우측면이 우익에 위치한 이웃군단에 완전히 의존한다는 약점을 소지했다. 만약에 우익의 이웃군단이 격파당할 시에 차례차례 각 군단의 측면이 노출당해 대형자체가 붕괴할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프랑스군과 독일군과의 교전에서 현실화된다.
로렌군의 사령관 미셸 모누리[68] |
22일 5-6AM, 루페이의 제3군은 샤를 브로상(Charles Brochin)의 제5군단에게 중앙을 맡기고 극심한 안개속에서 진격했다. 롱위로 진격하던 중이었던 제5군단은 곧 강력한 방어진지를 준비한 독일 제5군휘하의 막스 폰 파베크(Max von Fabeck)의 제13군단과 격돌했다. 곧 두 군단은 적과 아군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루페이는 독일군의 대열을 쓸어버리기 위해 75mm 야포를 동원했지만 곧 안개가 걷히자 오히려 독일의 105mm 곡사포와 150mm 곡사포에 의해 브로상의 야포는 모조리 파괴당했다. 프랑스군은 용감한 착검돌격으로 독일군 진지를 향해 달려갔으나 기관총에 의해 큰 피해만 입었다. 이런 패배 끝에 사단 중 하나는 붕괴해서 단독으로 후퇴했는데, 이는 제3군의 중앙에 큰 틈을 만들었다.
제3군 휘하의 빅토르르네 보엘레(Victor-René Boëlle)의 제4군단도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제4군단은 독일 제5군과의 교전끝에 보병사단중 하나가 붕괴해 후퇴했다. 그나마 추가로 3번째 보병사단을 소지하고 있던 모리스 사하일(Maurice Sarrail)의 제6군단의 경우에는 콘라트 폰 고슬러(Konrad von Goßler)의 제6예비사단의 공세를 버텼다. 그러나 제3군단과 제4군단의 패주로 인해 사하일의 제6군단마저도 우회당하지 않기 위해 후퇴했다.
22일 1:30PM이 돼서야 모누리의 로렌군에 대해 알림받은 루페이는 베르됭 근처에 위치했던 모누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누리는 곧바로 제54예비사단과 제67예비사단을 제3군을 향해 보냈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전황에 별 도움이 못 되었다.
5.2.4. 프랑스군의 패주
프랑스의 식민사단 소속 병사들.[69] | 프랑스 제3식민사단장 레옹 라프넬[70] |
루페이의 제3군이 빌헬름 황태자군과의 교전으로 인해 패퇴하고 제3군의 왼측에서 진격하던 제4군 또한 상술한 제차대형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4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오귀스틴 제라르(Augustin Gérard)의 제2군단은 22일 8AM에 독일 제4군휘하 제6군단의 강력한 포격과 기관총 세례로 인해 진격을 멈춰야 했다. 제2군단의 좌측을 담당하던 쥘 르페브르(Jules Lefevre)의 식민군단은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전쟁의 베테랑답게 꾸역꾸역 시니(Chiny)숲과 뇌프샤토 사이까지 진격했다. 때마침 아침의 안개와 비는 오후가 되면서 서서히 걷히고 이를 대신한 습하고 더운 날씨는 양국의 병사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베르트리(Bertrix)숲 인근에서 주둔하던 프랑스 제5식민여단과 제17군단은 숲 속에서 갑작스레 기습한 독일 창기병(uhlan)에 의해 크게 놀라고 곧바로 독일 제17예비군단과 제18군단에게 공격받는다. 기습당한 프랑스군은 처절히 저항했지만 제3군 휘하의 제6군단이 공격에 가담하자 동요한 프랑스 제17군단은 그대로 도주해버린다. 제3군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제17군단의 부재는 랑글 드 카리의 제4군에 큰 틈새를 만들었다.
뇌프샤토 남부로 15km에 위치한 로시놀(Rossignol)의 작은 마을 인근에서는 프랑스 제3식민사단은 독일 제12보병사단을 향해 착검돌격을 벌였다. 제12보병사단으로부터 600m의 거리를 돌격해야 함에도 제3식민사단은 식민전쟁의 베테랑답게 "앞으로!(En avant!)"를 외치며 용맹스럽게 독일군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제12보병사단은 기관총과 포격으로 제12식민사단을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며 박살냈다. 본래 15,000명의 병력을 자랑하던 제3식민사단은 11,000명의 병력을 그대로 사상자로 잃었고 사단장 레옹 라프넬(Léon Raffenel)은 전사했다.
이런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제5군 사령관 랑글 드 카리는 조프르에게 "전체적으로 성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On the whole results hardly satisfactory)라 보고했다. 그러나 랑글 드 카리도 바보가 아닌지라 다음 아침에 공세를 재개하라는 조프르의 명령을 무시하고 되려 뫼즈 강과 시에 강 뒤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했다. 제3군과 제4군의 패배로 당시 상브르(Sambre)에서 고전하고 있던 제5군은 그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교전을 경험하지 못한 모누리의 로렌군은 그대로 안전한 아미엥(Amien)을 향해 진군했다.
이로써 제4군은 독일군과의 교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 베트롱(Virtron)에 주둔했던 제8보병사단은 16,000명의 병력 중 5,500명을 사상자로 잃었다.
- 이데(Ethe)에 주둔했던 제7보병사단은 워낙 큰 피해를 입었는지 "짓밟혔다"(stomped)고 평가받았다.
- 오샹(Ochamps)에 주둔했던 제20보병연대는 1,300명을 사상자로 잃으며 전력의 반을 상실했다. 옆에 위치했던 제11보병연대는 총 3,300명중 2,700명을 사상자로 잃었다.
- 제5식민여단은 총 6,600명의 전력으로 아르덴 공세에 참여했으나 겨우 3,400명만이 살아남았다.
- 랑글 드 카리는 조프르에게 보고하면서 휘하 군단 중 하나는 본래 40,000명의 병력 중 오직 15,000명만이 전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제4군 사령관 페르낭 랑글 드 카리[71] | 독일 제4군의 사령관 알브레히트 공작 |
물론 기세등등한 독일군이라고 피해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 알브레히트 공작의 제4군은 8월 23-31일 사이에 7,540명 사망과 11,678명 부상을 보고했다.
- 제5군 휘하의 제18군단과 제6군단은 각 6,000명쯤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 빌헬름 황태자의 제5군은 제4군과 동일한 기간동안 7,488명 사망과 11,578명 부상을 보고했다.
이런 피해를 입었음에도 아들의 군공에 희희낙락한 빌헬름 2세는 루프레히트와 동일한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했다.
아르덴 공세의 실패는 로렌 공세보다 더욱 큰 피해를 남겼다. 22일만으로도 27,000명의 사상자를 남기는 등[72] 물질적인 피해도 그렇지만 제1군과 제2군과 더불어 주력인 제3군과 제4군마저 전투불능 상태로 빠뜨려 전투가능한 병력은 북면을 담당하는 제5군밖에 남지 않았다.[73] 이제 2패를 기록한 프랑스군은 마지막 1패전이 기다린다.[74]
5.3. 북진하는 랑레자크의 제5군
프랑스 제5군 사령관 샤를 랑레자크[75] |
프랑스군의 좌익을 담당해 벨기에 방면에 주둔한 제5군의 사령관 랑레자크는 그간 제17계획의 현실성을 상당히 의심스러워했다. 7월 31일[76] 랑레자크는 조프르에게 만약에 프랑스군이 공세를 감행하는 중에 프랑스군의 좌익을 담당하는 제5군이 공세에 참여하거나 벨기에 남부에 주둔할 시에는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낼 여력이 없다는 전언을 보냈다. 물론 조프르는 그냥 무시하고 답조차 안했다. 8월 7일, 벨기에군이 리에주 요새에서 고전하고 있음을 직감한 랑레자크는 또 다시 조프르에게 같은 설명의 전언을 보내 제5군의 북진을 요청했다. 독일군의 강력한 우익기동을 고려하면 랑레자크의 혜안이 돋보이는 올바른 대응이었지만,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을 기만작전이라 생각한 조프르는 랑레자크를 무시하고 계획대로 로렌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리에주 요새의 패배와 드낭에서의 제1군단과 독일 기병대의 교전 끝에 조프르는 약간이라도 생각을 바꿨다. 조프르는 독일군의 병력 상당수기 벨기에의 지베(Givet)를 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15일에 특별명령10호를 선포해 제5군을, 아르덴 공세 대신 벨기에의 뮤즈와 상브르강으로 단독 파견했다. 참고로 5일 내에 제5군은 해당 지점에 도달했어야 하는데 이는 하루마다 24km를 주파하는 강행군을 요한다.
5.3.1. 조프르의 고집
8월 15일이 돼서야 벨기에를 향해 진군하는 제5군은 소르데의 기병군단과 함께 진군했지만 여전히 아르덴 공세를 포기 못한 조프르는 제11군단을 제5군으로부터 랑글 드 카리의 제4군 휘하로 배치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향한다고 인지한 것과 달리 아르덴 공세를 여전히 속행하려는 조프르의 의지에 랑레자크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제5군의 활약에 따라서 승패가 갈린다고 굳게 믿었다.아니나다를까, 조프르는 독일군 주력이 벨기에에 집중되어 있다면 상술한 대로 중앙을 비워놓는 전략적 실책을 벌였을 것이라 굳게 믿고 아르덴 공세를 펼쳐 제17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특별명령 13호를 통해 아르덴 공세를 예고한 조프르는 북진하는 제5군에게 영국군과 벨기에군과 연계작전을 펼쳐 독일군의 우익기동을 막아내고 만약에 독일군의 우익이 예상보다 약할 경우에는 제3군과 제4군의 아르덴 공세를 지원하라고 명했다. 오직 3개의 군단과 7개의 사단으로 50km 전선을 담당하며 북진을 펼치던 제5군에게 이 명령은 단순히 불가능했다.
8월 21일, 조프르는 특별명령15호와 함께 아르덴 공세를 선포하고 랑레자크의 제5군에게 영국군과 벨기에군과 함께 카를 폰 뷜로(Karl von Bülow)의 제2군을 강타하도록 명했다. 조프르는 제2군의 병력을 겨우 18개의 사단으로 판단했으며 오히려 벨기에군과 영국군과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더 많은 병력이 주둔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프랑스 참모부장 앙리 베를틀로(Henri Berthelot)는 랑레자크에게 독일군이 더욱 많은 병력을 벨기에에 집중할수록 "우리 입장에선 적군의 중앙을 돌파하기 쉽지 않겠소?"(the easier it will be for us to break through their center.")라고 말했다고 한다...
5.3.2. 북상한 존 프렌치의 영국원정군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존 프렌치[77] | 영국 전쟁장관 호레이쇼 키치너[78] |
그나마 다행히도 8월 4일에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이유로 참전한 영국이 이제서야 헨리 윌슨등이 기획한 계획에 따라서 보어 전쟁의 영웅 존 프렌치(John French) 야전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영국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줄여서 BEF)을 파견보냈다.
이미 징병제를 도입해 열흘 좀 넘어서 한꺼번에 백만 명을 투입할 수 있는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모병제에 의존한 영국은 곧바로 각각 2개의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2개의 군단과 1개의 기병사단만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이미 독일과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져서 최소한 3년은 이어갈 것임을 간파한 영국 전쟁장관 호레이쇼 키치너(Horatio Kitchener)는 대규모 지원병을 모집하면서 숫적열세를 매꾸어갔지만 실제로 결실을 맺는 것은 1916년으로 1914년으로부터 오랜 시간 이후였다. 그러나 1914년의 영국 원정군은 영국이 "그간 투입한 전력중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훈련도 높고, 조직이 잘 되어 있으며, 장비마저 우월한"(incomparibly the best trained, the best organized, and the best equipped British Army ever put to war)만큼 적은 수에 비해 병사 개개인이 수많은 식민전쟁에서 쌓은 경험과 전투력은 무시못할 만큼 뛰어났다.
8월 14일에 아미엥(Amien)에 도착한 프렌치의 영국원정군은 곧바로 제5군을 향해 진군했다. 20일에 벨기에 남부로 도착한 프렌치군은 제5군과 합세했으나 프랑스군과의 합류는 마냥 순탄치 않았다. French라는 성씨와 달리 존 프렌치는 프랑스인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데다가 거만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에 켄트(Kent)의 귀족 출신으로서 초라한 피레네(Pyrenees)의 통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조프르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렌치가 놀랍게도 프랑스 총사령부에게 소르데의 기병군단과 2개의 보병사단을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조프르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제5군 사령관 랑레자크와의 회의도 마찬가지로 파탄났는데 존 프렌치가 랑레자크의 말을 두번이나 끊으면서까지 독일군이 왜 뫼즈(Meuse)까지 진군했는지와 거기서 또 뭘 할지에 대해서 묻자 신랄한 성격의 랑레자크는:
"거기 뭐하러 왔냐고? 물고기나 잡으러 왔겠지!"[79]
"Pourqui sont-ils arrivés? Mais pour pêcher dans la rivière!"
"Pourqui sont-ils arrivés? Mais pour pêcher dans la rivière!"
...라고 답하며 프렌치를 도발했지만 프렌치가 프랑스어를 전혀 못한데다가 통역담당인 영국원정군의 부참모장 헨리 윌슨[80]이 "랑레자크에 의하면 강가를 건너려고 한답니다"(He says they're going to cross the river, sir)라고 유도리 있게 번역하였기에 혈투로 이어지진 않았다.
사실 이런 프렌치의 거만한 태도는 프랑스군의 공격적인 전략에 아직 소수정예에 불과한 영국군을 순식간에 소모할 것을 염려한 키치너의 주의사항에 극대화된 감이 있다. 키치너는 프렌치에게 "자네의 지휘권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동맹군 지휘관에게서 명령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your command is an entirely independent one, and that you will in no case come in any ssense under the orders of any Allied General)라는 명령과 "피해를 최소화하라"(towards a minimum of losses and wastage)라 명령했으며 프렌치는 키치너의 주의사항을 최대한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키치너의 명령과 별개로 프렌치의 변덕스럽고 공격적인 성격은 충분히 프랑스 총사령부의 공분을 샀으며 프렌치와 협력해야 하는 제5군 사령관 랑레자크도 만만찮게 신랄한 성격을 가진 만큼 독일이란 공통된 적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지휘관은 협력 과정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5.3.3. 샤를루아 전투
8월 20일, 상브르뮤즈(Sambre-Muse)에 진형을 갖춘 프랑스 제5군은 북부로 뷜로의 독일 제2군과 동부로는 하우젠의 독일 제3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뫼즈에 위치한 데스페레의 제1군단은 제5군의 우익을 맡고, 질베르 드포지스(Gilbert Defforges)의 제10군단은 제1군의 좌익을 맡았다. 중앙은 앙리 소레(Henri Sauret)의 제3군단과 조제프 에이두(Joseph Eydoux)의 제11군단이 상브르 강을 시찰하며 제5군의 중앙을 방어했다.그날밤, 조프르는 제3군과 제4군을 활용한 아르덴 공세를 개시했으며 랑레자크의 제5군 또한 상브르 지역에 공세를 개시하도록 명했다. 조프르는 프렌치의 영국 원정군 또한 제5군의 좌익을 보호하며 공세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부참모장 헨리 윌슨은 수년간 기획했던 영불협력계획이 이제서야 열매를 맺은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지만 전체적인 영국군의 반응과는 매우 달랐다. 오히려 분노한 영국군은 곧바로 최소한 이틀간 진격이 어려움을 표했다.
폰 몰트케(小)가 지휘하는 독일 참모 본부는 바보라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믿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05년 탁월한 전략가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작성한 청사진에 기초한 이 작전 계획은 7개 군 병력을 투입하여 서부전선에 일대 공세를 취하도록 되어 있었다(나머지 1개 군은 요새화된 동부 프러시아에 배치, 러시아군의 침공을 저지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공격군의 우익을 맡은 5개 군은 메츠-티옹빌 지역을 축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서진하거나 남하하여 벨기에 혹은 프랑스로 들어가며 좌익을 맡은 2개 군은 메츠-티옹빌 남쪽의 프랑스군을 공격,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포위 섬멸하기로 되어 있었다. 최북단에 위치한 2개 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거쳐 방어가 취약한 프랑스-벨기에 국경선을 돌파, 프랑스 영내로 진격한 후 크게 서쪽으로 선회하여 파리 남쪽으로 돌아서 프랑스군의 배후를 찌른다는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된다면 프랑스는 6주일이면 패배한다는 계산이었다.
이 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독일군 총동원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 8월 5일 한 특수부대가 리에지에 있는 벨기에 국경 요새를 공격했다. 이틀 후 시와 내성은 함락되었지만, 벨기에 방어 부대는 외곽을 둘러싼 요새에서 항전하며 투항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거포를 동원한 포격으로 외곽 요새를 하나씩 하나씩 파괴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요새가 함락된 것은 8월 16일이었다.
그제야 리에지를 통과하는 도로가 뚫려 독일군은 벨기에로 밀고 들어갔다. 벨기에의 잔여 병력은 독일 공격군의 외곽선 밖으로 후퇴하여 안트베르펀 주위에 포진했다.
한편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 대장은 자신의 기본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모두 5개 군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중 4개 군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메츠-티옹빌 요새 진지의 북쪽과 남쪽에서 독일군에 대한 일대 공세를 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1개 군은 예비 병력으로 남겨 두었다. 공격이 성공하면 전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투입하고,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독일군이 벨기에로 침공해 올 경우에는 전선을 북쪽으로 연장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조프르 대장은 독일군의 주력부대가 알자스-로렌으로 쳐내려올 것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벨기에에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8월 15일 그는 제5군에게 명령을 내려 상브르 강과 뫼즈 강 사이의 벨기에 국경 지대에 포진하도록 했다. 그보다 북쪽에는 존 프렌치경 휘하의 소수정예 영국 원정군(BEF)이 8월 20일에 르카토 지역에 도착했다. 조프르는 진격해 오는 독일군에 대한 양국군의 협동 공격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우익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했다. 결국,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지 못했다.
5.3.4. 몽스 전투
랑레자크는 동맹군인 영국군이 자신의 왼쪽에서 8월 23일 내내 독일군과 싸우느라 붙들려 있었는데 그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상브르 강을 랑레자크의 부대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방어했다. 기병사단 1개와 보병사단 1개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은 11일 전에 르아브르와 볼로뉴, 루앙에 상륙했고 8월 22일 운하에 도착했다. 8월 23일 아침에 20마일의 전선에서 제2 군단은 서쪽에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이 이끄는 제1 군단은 동쪽에 산개했다. 독일군의 알렉산더 폰 클루크가 지휘하는 14개 사단 병력의 제1 군 자체가 북쪽에서부터 영국원정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은 랑레자크와 보조를 맞추길 기대했지만 이미 랑레자크가 패배하여 별다른 안내도 없이 도주했다고 보고받자 격분했다.[81]8월 22일 프랑스 제5 군 사령부로부터 지원요청이 오자 프렌치 경은 24시간 동안 운하를 방어하기로 한다. 그 요청은 사실상 폰클루크의 측면을 공격해 달라는 것이기에 이것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공세가 가진 측면을 잘못 판단했다는 사례라고 볼수 있는 것이다. [82]어쨌든 영국군은 몽스-콩데 운하를 사수하기로 하고 8월 23일 아침에는 전 구간에서 참호를 파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83]
6개사단 대 4개 사단으로 병력에서는 우세한 독일군은 영국군의 방어에 막혀 좀체 진격을 못했다. 10발 탄창을 장착한 영국군의 리엔필드 소총은 독일군의 마우저 소총보다 더 성능이 우수했고 영국군 사수들은 독일군 사수보다 더 우수했다. 영국의 모든 대대가 위치를 사수했고 제48 포대와 108포대의 60파운드 포를 포함한 지원 대포가 지속적으로 지원포격을 가해주었다. 이날 영국의 사상자는 1600명, 독일의 사상자는 5000여명에 육박했다. 독일군은 운하를 도강하기 위해서 다음날에도 공격했지만 고작 진지 하나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진지를 사수할 생각이었지만 8월 23일 저녁에 프랑스군이 샤를루아에서 패해 퇴각해야 한다는 전갈을 받고 8월 24일에 영국군은 결국 퇴각했다.
5.4. 결과
독일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150mm 곡사포. |
결국 독일 제국군이 승리하였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부터 불과 50여km까지 진격하게 된다. 사실상 수도 근처까지 진격한 셈.
프랑스와 영국으로써는 뼈아픈 패배였다. 이로써 프랑스-영국의 수세는 제1차 마른 전투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6. 대후퇴
이후 14일 동안 프랑스군과 영국원정군은 파리 외곽까지 물러갔다. 비트리르프랑수아의 조프르 사령부는 8월 21일에 포기되었고 바르쉬르오브에 임시로 위치했다가 9월 5일에 파리가 위치한 강인 센 강가의 샤틸롱쉬르센으로 옮겼다.6.1. 각성하는 조프르
베르됭을 필두로 한 큰 요새들은 아직 프랑스의 수중에 있었고 동쪽에서 독일의 프랑스 진입을 방해하는 지형인 보주산맥과 센 강 수계의 운하는 침범당하지 않았다. 평시에도 광적인 공격을 공언할 정도로 드높았던 프랑스군의 사기는 아직 괜찮았으며 수도로 퇴각하더라도 단결을 유지만 가능하다면 반격의 기회는 남았다고 조프르는 생각했다. 독일군은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라인 강가와 그 너머의 지원 기지에서 더 멀어졌지만 프랑스군에게는 어쨌든 거리는 더 짧아졌으며 연결은 더 강화되었다. 조프르는 8월 25일의 일반명령 2호에서 이렇게 발표했다."향후 작전의 목표는 우리의 좌익에서 공격을 재개할 수 있는 병력을 구상하는 것이다. 이 병력은 제4군과 제5군 그리고 영국군에 동부전선에서 모집한 새로운 부대로 구성되면서 그동안 나머지 부대는 적을 최대한 저지할 것이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독일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서 전투를 벌여야 했고 로카토에서 혈전을 벌여야 했다. 그나마 생캉탱에서는 프랑셰 데스페레의 탁월한 지휘로 시간을 벌어 프랑스군은 반격의 장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반격을 준비할 대규모 기동군을 준비했는데 새로 창설된 제6 군과 파리수비대 영국원정군, 제5 군, 그리고 페르디낭 포슈가 지휘하는 새로 창설된 제9군이었다. 9월 3일 조프르는 랑레자크의 사령부로 직접 가서 사령관이 프랑셰 데스페레로 교체되었음을 통보했다.[84]
9월 2일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겼고 8월 31일 조프르는 자신이 전권을 쥐고 통치한 군사지구에 수도를 통합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군정장관은 에펠탑 파괴를 준비했고[85] 파리의 모든 교량 밑에 폭약을 설치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철도차량을 전부 파리의 철도망 밖으로 내보내고 2,924문의 요새대포에 포탄을 공급하며 대포사계에서 나무와 주택을 제거했다.[86] 그동안 프랑스의 철도망은 조프르가 계획했던 반격에 투입할 병력을 차질없이 수송했다.
그리하여 조프르는 참호 주둔지와 마른 강 사이에 영국에서 새로 파견한 4개 여단으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을 포함하여 36개 사단을 배치했다. 반면 독일군은 30개 사단에 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는 몰트케가 부하들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것과 조프르가 패배에 기죽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뚝심으로 밀고 나간 결과였다. 또한 독일의 보급선이 길어짐에 따라 병참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반대로 프랑스는 중심부로 후퇴하면서 병력증강과 보급의 문제를 덜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마른 전투에서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 선전용 그림이다.[2] 프랑스군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3] 프랑스 제1군 사령관[4] 프랑스군 제2군 사령관[5] 프랑스 제3군 사령관[6] 프랑스 제4군 사령관[7] 프랑스 제5군 사령관[8] 프랑스 제5군 사령관[9] 프랑스 알자스군 사령관[10] 프랑스 로렌군 사령관[11]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12] 독일군 참모총장[13] 독일 제1군 사령관[14] 독일 제2군 사령관[15] 독일 제3군 사령관[16] 독일 제4군 사령관이자 뷔르템베르크 왕국 왕세자[17] 독일 제5군 사령관이자 독일 제국 황태자, 프로이센 왕국 왕세자[18] 독일 제5군 참모장이자 실질적 5군 사령관[19] 독일 제6군 사령관이자 바이에른 왕국 왕세자[20] 독일 제7군 사령관[21] 1911년에 프랑스군이 모로코 술탄에 저항하는 반란 진압을 돕자 이를 1906년의 알헤시라스 협정의 위반으로 여긴 빌헬름 2세의 승부수. 모로코의 아가디르 해안에 독일 전함 판터(Panther)를 보내 독일 상인들의 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전유럽은 대규모의 전쟁이 터질 것을 우려했다.[22] 프랑스에서 그려진 만큼 프랑스가 유리하게 그려졌다,[23] 조금 더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독일 쪽에서 거부당할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툴즈와 베르됭 요새를 요구했다. 프랑스에서 거부하면 이를 꼬투리 잡아서 전쟁 명분으로 사용한 것이다.[24] 실제로 이후 기술이 발전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낫질 작전이 대성공해 연합군 주력군을 포위한 후 약 빨아가면서 파리까지 달려가 항복을 시키는데 6주가 걸렸지만 슐리펜 계획에서는 프랑스 전 지역 점령까지 6주면 충분할 것이라고 보고있었다...[25] 사실 완성이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슐리펜 본인부터 네덜란드 침공 외에는 벨기에의 리에주 외에는 돌파구를 찾지 못했기에 엄밀히 말해서 슐리펜 계획은 미완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서의 완성은 소 몰트케가 개입하기 전 슐리펜 본인만의 계획의 완성을 의미한다.[26] 한국에서도 번역된 <제1차 세계대전사>와 <제2차 세계대전사>의 저자[27] 좀 더 부연설명을 붙히자면, 엘랑 비탈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공세주의는 한국에서 알려진 것이나 해당 항목에서 설명되는 것처럼 프랑스의 독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오헝 제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당대 강대국이라면 최소한 기본적으로 공세와 착검돌격에 우호적이었다. 공세주의는 당대 군사상의 주류로 1차대전 초의 전개만 봐도 독일군은 착검돌격을 꽤 자주 했으며 이에 대한 피해도 자주 입었다. 문제는 프랑스군에 비해 독일군은 기관총 등을 더욱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프랑스군과 착검돌격에 대한 인식이 거의 비슷했음에도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거나 간혹 대박을 터뜨릴 때가 있었다. 즉, 엘랑 비탈이란 개념에 죄다 미쳐서 유독 프랑스군의 공세가 피해가 큰게 아니라 아니라 기관총이나 야포의 유무로 인해 프랑스군의 방어력이 독일군에 비해 약한 게 문제였다. 쉽게 말하자면 엘랑 비탈 교리라는 개념은 허구에 가깝다.[28] 나머지 3개 군단은 러시아 제국군에 맞서기 위해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29] 대규모 징병제를 도입하기 전까지 지원병에 의존해 상비군 규모가 작았던 영국과 달리 징병제를 이전부터 도입했던 프랑스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30] 러불동맹을 묘사한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의 만평[31] 당시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32] 제1군과 제2군의 병력은 얼추 400개의 대대와 16,000개의 화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군의 전력에서 3분의 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33]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참교육을 시전하고 있는 조프르[34]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만약에 독일이 벨기에를 가로지른다면 점령의 위협이 도사릴 정도로 벨기에와 가깝다. 참고로 1차대전중에 독일에게 점령당한 도시 중 하나다.[35] 귀족적인 성향으로 말이 많았지만, 1914년의 고위 장군 중 거의 유일하게 1918년까지 활약한다.[36] 1914년의 고위 장군 중 1918년에 현역으로 활약한 인물은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동방연합군(Allied Army of the Orient)의 사령관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Louis Franchet D'Esperey)와 동부집단군 지휘관 카스텔노뿐이다. 즉, 이 3명만이 1차대전의 막대한 전술과 기술변화속에 능력을 유지할 정도의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는 뜻이다. 게다가 데스페레의 경우에는 1918년 초에 구시대적인 전술만 고집하다가 대패당해 사실상 유배된 거라...[37] 곧 참혹한 현실을 깨달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암울하다.[38] 프랑스군은 이 당시 그 유명한 M1897 75mm 야포를 주력으로 활용했다.[39] 물론 제6군이 좀 빡빡하게 저항한 감이 없잖다. 후술하겠지만 이 때문에 루프레히트는 아예 유인작전이 실패했다는 비판마저 듣는다.[40] 모르주(Morhange)로 쭉 향한 제1군과 동부로 관심을 기울인 제2군이 인상적이다.[41] 위대한 모르주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전략적인 이득이 전무하다는 평을 듣는다.[42] 제6군과 제7군의 경우에는 같은 방면을 담당했기에 하나의 참모단 아래에 통일된 상황이었다.[43] Holger Herwig의 <The Marne, 1914>에 의하면 오히려 적극적(more than willing)이었다고 한다. 원문에는 추가설명이 없지만 루프레히트가 프로이센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인 만큼 프로이센의 영토를 포기하는데 별 거부감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44] 독일군의 철수계획을 보면 개소리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독일군이 포기한 영토는 어디까지나 알자스-로렌에 국한되었다. 그에 비해 슈바르츠발트는 독일 본토의 일부라 이를 포기한다는 뜻은 알자스-로렌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45] <Marne, 1914>에서는 폰 질렌더를 아예 외교 사절단(diplomatic mission)과 비유하며 서술한다. 제6군은 바이에른 왕국군으로 이루어져 있어 병사, 장교, 지휘관마저 바이에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크라프트는 폰 헤링겐의 냉담을 프로이센인의 바이에른인에 대한 차별로 해석해 격분했다.[46] 폰 몰트케(小)는 삼촌 폰 몰트케(大)의 느슨한 지휘 스타일을 벤치마킹했으나 군단 단위의 병력을 지휘했던 삼촌과 달리 몰트케(小)는 7개의 군을 동시에 지휘하는 만큼 난이도나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랐다.[47] 상술했듯이, 조프르가 메시미에게 성과가 좋다고 보고한 날이다.[48] 페르디낭 포슈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전후 상당한 논란으로 발전했다. 포슈는 드 카스텔노의 명령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한 반면, 드 카스텔노는 그럴 리가 없다며 포슈를 통렬히 비판했다.[49] 카스텔노는 국경전투로 인해 총 3명의 아들을 잃는다.[50] 전후 명장으로 칭송받지만 이때까지는 현대전을 학습하는 구시대의 지휘관이었다.[51] 본인은 그리 무능한 편이 아니지만 후일 베르됭 전투 등 온갖 역경을 맞이한다.[52] 일전까지 지휘에 미숙해 전후 명장으로의 명성과 달리 자주 사고치던 포슈의 첫번째 제대로 된 공로이자 포슈 신화의 첫번째 장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다. 로렌 공세에서 포슈의 공로에 대해 상당히 갈리는 편인데,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는 성급한 공세를 비판하고,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는 자력으로 제6군을 막아세운 공로를 찬양한다.[53] 20일 10AM에야 참전했다고 한다.[54] 프랑스 제2군을 손쉽게 격파한 루프레히트와 달리 너무 늦게 참전하여 프랑스 제1군을 격퇴하는데 실패했다.[55] 한국으로 치자면 예비군과 비슷한 군사력이다.[56] 프랑스와 달리 독일군은 특별히 훈련시킨 산악병이나 산악포가 전무했다.[57] 이로부터 사흘 후 독일군은 뮐루즈를 다시 재탈환했다.[58] <A World Undone: The Story of the Great War 1914 to 1918> pg. 119[59] 말이 무승부지 실상 공격해온 독일군을 프랑스군이 막아세웠기에 프랑스군의 승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 무승부라 표기한 것은 참고서적 <The Marne, 1914>에서 무승부라 표기했기에 이를 따른 것이다.[60] 당시의 고위장군 중 거의 유일하게 중포와 공군력 강화를 주장하는 거의 혁신적인 모습을 보였다.[61] 다만 제3군의 루페이는 로레인군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서 제대로 된 연계작전을 펼치지 못했다.[62] 위 3개의 인용문은 모두 <The Battle of the Bulge: Hitler's Ardennes Offensive, 1944-1945> pg.48에서 발췌했다.[63] 5월 10일 개전 당시에도 독일군은 선두 부대를 제외한 상당수의 A집단군이 바로 이 아르덴숲에서 교통체증으로 수일간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모습 역시 연합군이 항공정찰로 발견했으나 아르덴 숲을 과시한 연합군 사령부는 베네룩스 지방으로 쇄도하는 B집단군을 주공이라고 착각해 방치하였고 이로 인해 완벽히 패배한 것이다.[64] 모르주 전투만 해도 제7군은 란트베어를 동원했었다.[65] 당시 지휘관들에게는 햇병아리 취급받았지만 그럭저럭 유능한 모습을 보이며 훗날 존중받기까지 한다.[66] 상술한 폰 몰트케(小)의 에피날 공세에서 언급된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뇌프퍄토(Neufchâteau)와 지명이 동일하나 여기서 언급한 뇌프샤토는 벨기에 내에 위치한 지역으로 위치가 완전히 다르다.[67] 갈색 화살표는 프랑스군이 예상한 독일군의 움직임으로 보기좋게 틀려먹었다.[68] 1차 마른 전투에서 제6군을 지휘한 공로로 전후 원수로 추대받는다.[69] 사진의 병사들은 제1모로코사단 소속으로 아르덴 공세와 무관하다.[70] 크고 작은 식민전쟁에서 잔뼈굵은 장군이었으나 강력한 신무기의 화력 속에 허무하게 전사했다.[71] 공세를 중시하는데다가 열정적인 성향 덕에 조프르에게 매우 신임받았다.[72] 참고로 1914년 8월 22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군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날이다.[73] 사실 이마저도 제5군 사령관 랑레자크의 저항이 없었다면 조프르의 명령에 따라 아르덴 공세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에 그랬다가 역사와 동일하게 독일군에게 깨졌다면 1차 마른 전투도 없이 그냥 독일군의 승리로 남았을지도.[74] 정확히 말하자면 로렌 공세는 첫번째 패배에 아르덴 공세는 세번째 패배로 후술할 샤를루아 전투야말로 날짜상(8월 21일) 두번째 패배지만 사건의 흐름상 아르덴 공세를 제일 먼저 서술한다.[75] 신랄한 성격과 쉽사리 기분나빠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명석한 두뇌 덕에 "프랑스군의 사자"로 유명했다.[76] 즉,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77] 보어 전쟁에서 기병지휘관으로 명성을 쌓아 올리버 크롬웰 이후 최고의 기병대장이란 칭송마저 받았다.[78] 영국의 식민전쟁의 명장으로 냉철한 장기적 안목 덕에 연합군에서 "승리의 설계자"라는 별명을 얻는다.[79] 뫼즈는 프랑스 북동부 지역 이름인 동시에 그 곳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즉 우리 식으로는 북한군이 남침해서 춘천까지 왔는데, 미군 장군이 "북한군이 춘천에는 왜 왔고, 뭘 할 것 같냐?"라고 묻자, 한국군 장군이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낚시하러 왔나 보지!"라고 대답한 셈이다.[80] 랑레자크와는 전쟁 전부터 면식이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랑레자크는 "세계여행을 하는데 필요한 영어는 세 단어로 충분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고 한다. 그 세 단어는 '미녀', '빨리 키스해 줘', '소고기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랑레자크가 프렌치에게 영어로 대답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81] 그러나 전후 조사에 의해 랑레자크는 영국측에 미리 연락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82] 왜 그런가 하니 이미 독일군의 측면은 제5 군과 영국 원정군의 근거지를 지나쳐 확장된 상태였다.[83] 광산지역 한가운데에서 운하는 방어하기에 아주 훌륭했고 광산 건물은 좋은 방어거점을 제공했고 파낸 흙으로 관측점을 쌓아 지원포대에 진격하는 적의 방향을 알려줄 수 있었다.[84] 이후 랑레자크는 군에서 물러났는데, 결국 조프르가 프랑스 군의 사상자에 대한 책임으로 사실상 명예퇴직을 당한 직후인 1917년에 군에 복귀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했다. 게다가 자신의 장례식에 군에서 제공하는 예우를 거절할 것을 밝히고 사망한 것을 보면, 국경 전투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꽤나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85] 이당시 에펠탑은 참모본부의 무선통신 중계국이었다.[86] 하지만 26년후 프랑스는 이때와 달리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했고 독일군의 진입을 허용했다. 마찬가지로 훗날 연합군이 파리를 수복할 때도 히틀러의 파괴 명령을 생까고 독일군은 철수하면서 빛의도시 파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