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송 전투는 1918년 7월 독일 제국군의 제2차 마른 전투 공세 이후 연합군의 대응으로 벌어졌다. 독일군은 제2차 마른 전투를 통해 파리 방면으로 진출했으나, 측면이 노출되는 취약점이 있었다. 이에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독일군 측면을 공격해 독일군을 포위하고 마른강 돌출부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6월 중순, 포슈는 수아송 남쪽에서 독일군 측면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제10군 사령관 샤를 망쟁(Charles Mangin) 장군은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제10군이 주공을, 제6군과 제5군이 조공을 담당하기로 했다. 제10군에는 미국 제1사단과 제2사단 등 미군 3개 사단과 프랑스군 16개 사단, 그리고 478대의 전차가 배속되었다.
7월 18일 새벽, 제10군은 독일 제9군의 우익을 기습 공격했다. 미 제1사단과 모로코 제1사단은 독일군 진지 중앙을 뚫고 빠르게 진격했다. 미 제2사단도 오르크 계곡(Ourcq valley)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독일 제241사단의 저항으로 점차 속도가 늦춰졌다. 남쪽의 제6군과 제5군도 샤토티에리와 랭스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해 독일군의 보급로를 위협했다. 19일에는 독일군이 예비대를 투입해 반격에 나섰다. 오르크 계곡 등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연합군은 격전 끝에 진격을 계속했고, 20일에는 수아송 남쪽의 베르질르섹(Berzy-le-Sec) 등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이에 독일 제7군은 마른강 이남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연합군은 추격 작전으로 전환했다. 21일, 미 제1사단은 치열한 교전 끝에 베르질르섹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로써 수아송 남쪽 방면 독일군 방어선이 무너졌다. 22일까지 독일군은 수아송 북쪽, 베슬강(vesle) 너머로 철수를 마쳤다. 연합군은 수일에 걸쳐 독일군이 버리고 간 진지를 인수했다.
수아송 전투는 5일 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독일군은 마른 돌출부에서 밀려났고, 랑스 요새에 대한 위협도 제거되었다. 협상국 연합군은 1918년 봄 독일군 공세 이전 선으로 전선을 회복했다. 독일군은 16만 8천 명의 사상자와 함께, 야포 600여 문, 기관총 3,000여 정 등 다수 장비를 잃었다. 반면 연합군도 프랑스군 9만 5천여 명, 미군 1만 2천여 명, 영국군 1만 3천여 명 등 총 12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수아송 전투는 서부전선 정세를 연합군 우위로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군 측면이 크게 노출되어, 연합군의 대반격이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연합군은 계속해서 백일 공세를 펼쳐 독일군을 밀어붙였다. 8월 초에는 독일군이 베슬강-엔강(Aisne) 선으로 철수하며 전선이 교착되었지만, 연합군의 우세는 지속되었다. 수아송 전투는 1918년 하반기 전세가 역전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독일군의 패배로 인해 독일 내 전쟁 의지가 크게 떨어졌고, 종전이 앞당겨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