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브루실로프 공세 Brusilov offensive Брусиловский прорыв Brussilow-Offensive | |||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 |||
브루실로프 공세 전(좌) | 브루실로프 공세 후(우) | |||
날짜 | |||
1916년 6월 4일 ~ 1916년 9월 20일 | |||
장소 | |||
오스트리아-헝가리 갈리치아 일대 | |||
결과 | |||
러시아 제국의 승리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더 폰 린징겐| ]] [[틀:깃발| ]][[틀:깃발|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 ]] | ]][[틀:깃발|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
병력 | 러시아 남서집단군 650,000명 이상(초기) 3,000,000명 내외(누적) | 500,000명 이상(초기) 1,500,000명 내외(누적) | |
피해 규모 | 사상 및 포로 500,000~1,000,000명 | 사상 및 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600,000~975,000명 독일 제국 350,000명 총합950,000~1,325,000명 | |
결과 | |||
러시아 제국의 승리 | |||
영향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사력 급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독자적 전쟁 수행 능력 상실 및 사실상의 독일 제국의 위성국으로 전락 러시아 제국 전쟁수행능력 급감 동맹국의 서부전선/이탈리아 전선 공세계획 중단 루마니아 왕국, 협상국으로 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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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6년 6월부터 9월까지 전개된 브루실로프 공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에 대해 감행한 대규모 공세작전이다. 공세를 주도한 러시아 남서부전선군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이 브루실로프 공세는 러시아군이 전쟁 발발 이래 가장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다만 전투 과정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이후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3개월간 지속된 브루실로프 공세의 인명 피해는 베르됭 전투나 솜 전투 등 당시 유명했던 전투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전투 기간 동안 러시아군과 동맹군 양측에서 최소 140만 명에서 최대 23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1]
한편 브루실로프 공세는 뚜렷한 전략적 목표가 부재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적 전력의 특정 부분을 격파한다거나 렘베르크같은 주요 거점을 점령하는 등의 뚜렷한 목표가 설정되지 않은 채, 될 수 있는 대로 공세를 펼쳐 진격하면서 적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 작전의 기본 개념이었다.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러시아 제국은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개전 초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대패한 이래 러시아군은 독일군에 맞서 줄곧 수세에 몰렸고, 진격과 후퇴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남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선전하며 적 영토 깊숙이 진격하기도 했으나,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대반격을 맞아 러시아군은 막대한 병력 손실과 함께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 등 광활한 영토를 상실하는 대참패를 겪었다. 이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대규모 반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한편 서부전선에서는 1916년 초 베르됭 전투가 한창이었다. 독일의 맹공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독일군의 압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분산시키기 위해 러시아군의 공세를 요청했다. 영국과 이탈리아 등 협상국은 당초 1916년에 서부전선에 주력하면서 러시아군은 현상유지에 그치자는 입장이었으나, 프랑스의 간곡한 요청에 마침 이에 동조하는 내부 여론도 들끓어오르자, 러시아군도 전면적인 공세에 나서기로 했다. 당시 프랑스로서는 러시아군의 공세 자체가 독일 병력을 동부전선에 묶어두는 효과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듯 브루실로프 공세는 전략적 필요에 따라 촉발된 것이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브루실로프의 전술적 혁신이 돋보였다. 브루실로프는 기존의 집중 공격 방식을 탈피해 광정면 기습 공격으로 적의 예비대 투입을 어렵게 만드는 전략을 구상했다. 또한 항공정찰로 적진을 촘촘히 분석하고 참호를 최전방까지 구축해 보병의 신속한 돌파를 도모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이탈리아 전선에 주력하느라 동부전선 방어에는 다소 소홀했다.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의 성과로 러시아가 재침공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역시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어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세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이처럼 동맹국 간의 전략적 엇박자도 브루실로프 공세의 배경이 되었다.
2.1. 양군의 준비
브루실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남서부전선군(Юго-Западный фронт)은 루츠크와 코벨 공격을 맡은 제8군사령관 알렉세이 칼레딘, 브로디 공격을 맡은 제11군 사령관 블라디미르 사하로프, 갈리치아 공격을 맡은 제7군 사령관 드미트리 셰르바체프, 체르노비치와 콜로메아 공격을 맡은 제9군 사령관 플라톤 레치츠키로 구성되었다. 각 군 사령관에게는 돌파구 선정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브루실로프는 예비대를 일선에 최대한 가깝게 배치해 적의 방어선이 돌파되면 즉각 증원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공격 예정 지점에서는 참호를 최전방인 오스트리아군 참호 100m 앞까지 구축했고, 철조망 아래로는 터널을 파 공격로를 확보했다. 항공정찰로 수집된 오스트리아군 진지 정보는 포격 계획에 반영되었다.오스트리아군의 경우, 북부전선에서부터 제4군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 제1군 사령관 푸할로, 제2군 사령관 뵘에르몰리, 독일 남부군, 제7군 사령관 플란처발틴 순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력이 전방 두 개의 선에, 예비대가 대형 벙커가 있는 3번째 선에 주둔하는 종심 2km의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지나친 자신감으로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환 배치했고, 러시아군의 공세 조짐을 감청한 정보마저 무시했다. 결국 공세 당시 현지에는 39개 보병사단과 10개 기병사단 등 50만 명 정도의 병력만이 배치된 상태였다.
3. 과정
▲ 독일 연방군이 제작해 배포한 전황 지도.# 좌측은 6월 4일에서 23일까지 러시아군 공세 시기의 전황이며 우측은 전투 종료 시점인 9월 15일의 전황이다. 적색은 러시아 제국군, 회색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청색은 독일 제국군이며 녹색은 증원군으로 파견된 오스만 제국군 제15군단이다.[2] 개별 사각형은 군단 또는 군집단(Armeegruppe)을 의미하며[3] 작은 사각형은 사단이다.[4] 한편 Armee는 야전군을, Heeresgruppe는 집단군을 뜻한다. 러시아측의 Front는 전선군을 의미하며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측의 집단군과 동격의 제대이다. 전투 초기 북부에서는 칼레딘이 이끄는 러시아군 제8군이 페르디난트 대공의 오스트리아 제4군, 그리고 푸할로의 오스트리아 제1군을 격파하고 코벨(Kowel)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으며, 남부에서는 레히츠키가 이끄는 러시아 제9군이 플란처발틴의 오스트리아 제7군을 밀어붙이며 부코비나로 쇄도하고 있다. 그나마 뵘에르몰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2군과 보트머의 독일 남부군이 중앙부를 사수하여 전 전선에서의 붕괴는 막았다. 졸전을 벌인 제4군의 페르디난트 대공과 제7군 플란처발틴은 테르스찬스키와 키르히바흐로 교체되었다. 브루실로프는 오스트리아 제4군이 패퇴하며 동맹국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자 사하로프의 11군, 베소브라소프의 근위군과 구르코의 특수군, 그리고 서부전선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제3군까지 투입하며 전선의 구멍을 더욱 크게 찢어발겼다. 이에 린징겐은 서부전선에서 수많은 독일군 제대들을 증원받아 러시아의 북부전선 진격을 차단했다. 남부에서는 티롤에 있던 쾨베시의 오스트리아 3군이 급히 달려와 키르히바흐가 지휘하는 7군 좌측면에 증원으로 투입, 레히츠키의 진격을 간신히 저지했다. |
6.4 ~ 6.23 각 군 배치
- 러시아군
- 서부전선군 - 사령관 알렉세이 에베르트
- 제3군 - 사령관 레오니트 레쉬
- 남서전선군 -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 제8군 - 사령관 알렉세이 칼레딘
- 제11군 - 사령관 블라디미르 사하로프
- 제7군 - 사령관 드미트리 셰르바체프
- 제9군 - 사령관 플라톤 레히츠키
- 동맹군
- 독일 린징겐 집단군 - 사령관 알렉산더 폰 린징겐
- 오스트리아 제4군 -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5]
- 독일 그로나우 군집단 - 사령관 한스 폰 그로나우
- 독일 마르비츠 군집단[증원] - 사령관 게오르크 폰 데어 마르비츠
- 독일 베른하르디 군집단[증원] - 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베른하르디
- 오스트리아 뵘에르몰리 집단군 - 사령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오스트리아 제1군 - 사령관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
- 오스트리아 제2군 - 사령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독일 남부군 - 사령관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
- 오스트리아 제7군 - 사령관 카를 폰 플란처발틴
9월 15일 배치
- 러시아군
- 남서전선군 -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 제3군 - 사령관 레오니트 레쉬
- 특수군 - 사령관 바실리 구르코
- 제8군 - 사령관 알렉세이 칼레딘
- 근위군 - 사령관 블라디미르 베소브라소프
- 제11군 - 사령관 블라디미르 사하로프
- 제7군 - 사령관 드미트리 셰르바체프
- 제9군 - 사령관 플라톤 레히츠키
- 동맹군
- 독일 린징겐 집단군[8] - 사령관 알렉산더 폰 린징겐
- 오스트리아 제4군 - 사령관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 독일 그로나우 군집단 - 사령관 한스 폰 그로나우
- 독일 베른하르디 군집단 - 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베른하르디
- 오스트리아 하우어 기병군단 - 사령관 레오폴트 폰 하우어
- 독일 클라우지우스 군집단 - 사령관 막스 클라우지우스
- 오스트리아 파스 군집단 - 사령관 하인리히 파스
- 독일 크뇌슬 군집단 - 사령관 파울 폰 크뇌슬
- 오스트리아 제2군단
- 독일 루셰 군집단 - 사령관 루돌프 루셰
- 독일 팔켄하인 군집단 - 사령관 오이겐 폰 팔켄하인
- 독일 리츠만 군집단 - 사령관 카를 리츠만
- 독일 디펜바흐 군집단 - 사령관 카를 디펜바흐
- 오스트리아 카를 대공 집단군 - 사령관 카를 대공
- 오스트리아 제2군 - 사령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독일 남부군 - 사령관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
- 오스트리아 제3군 - 사령관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 오스트리아 제7군 - 사령관 카를 폰 키르히바흐
3.1. 공세 전기
브루실로프 공세는 1916년 6월 4일 자정, 러시아군 포병의 정밀 타격으로 막을 올렸다. 항공정찰로 파악된 오스트리아군 진지의 화력점과 취약지점이 집중 포격되었고, 이는 적 방어선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냈다. 브루실로프는 준비된 충격 부대(Shock Troops)라 불리는 특임대를 투입해 이 틈새를 확대했다. 최대 전과를 거둔 것은 루츠크 쪽에서 공격한 칼레딘의 제8군이었다. 칼레딘은 6월 7일까지 적 4만 5천여 명을 사로잡고 야포 66문을 노획했으며, 전선을 종심 65km, 정면 80km나 돌파했다. 맞닥뜨린 오스트리아 제4군은 병력이 11만 7천에서 2만 7천으로 급감했다. 한편 레치츠키의 제9군도 격전 끝에 50km를 진격하며 적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6월 18일에는 체르노비치를 함락시키고 부코비나 지역 점령을 완료했다. 이후 이 소식을 듣게된 빈의 오스트리아 정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한창 이탈리아 전선에서 고전중이던[9] 오스트리아는 공세 다음날인 6월 5일에 독일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독일은 베르됭에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각각 사단 단위 부대를 긴급 차출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제4군 사령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해임도 관철시켰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권은 사실상 독일군 수중에 넘어갔다. 린징겐을 중심으로 독일군 지휘부가 전선 재건에 착수했으나, 러시아군의 진격을 완전히 저지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3.2. 공세 후기
브루실로프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매듭짓기 위해 코벨 탈환에 주력했다. 러시아는 동원 가능한 병력은 많았지만, 산업화가 덜 진행되어 철도 총연장거리나 노선 접근성이 안 좋아 예비병력의 전선동원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철도 요충지인 코벨만 확보하면 이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독일군의 증원까지 저지하여 승기를 굳힐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그러나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이어진 코벨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병력에서는 러시아군이 2배나 우세했지만,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지연전을 펼쳤다. 여기에 제공권마저 상실한 러시아군은 브루실로프 특유의 정밀 포격과 충격군 운용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비록 전선 자체는 여전히 러시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진격 템포가 현저히 둔화된 것이 문제였다. 더욱이 코벨 탈환에 실패하자 8월 초 사하로프의 11군이 브로디와 타르노폴 사이에서 렘베르크 탈환을 시도했으나, 독일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추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베르됭 전투가 일단락되면서 독일군의 동부전선 증원은 더욱 수월해졌다.
이는 전세를 뒤집기에 충분했다. 러시아군은 6월에 비해 100km가 넘는 진출을 이룬 상태였지만, 돌출부 양측에서 독일군의 압박을 받아 점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북부전선의 예비대마저 투입하며 공세 지속을 지시했다. 그러나 코벨을 못먹은 이상,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으로는 대규모 병력을 효과적으로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브루실로프 역시 공세 지속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계속 상부를 설득하여 9월 20일부로 작전 종료를 결정했다. 러시아군은 초기 성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병사들의 전의는 크게 떨어졌다. 병력 보충도 여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브루실로프 공세는 러시아군의 최후 발악으로 끝나고 말았다.
4. 결과
4.1. 동맹국
브루실로프 공세 종료 직후 독일은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형편없는 전투력에 절망해야 했다. 브루실로프 공세 기간 동안 동맹국 병력 피해는 약 95만에서 132만명 정도였는데,이 중 적게는 60만, 많게는 97만명 정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입은 피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독일 제국군의 피해는 35만명 정도로, 역시 적은 피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대로 따지면 거의 1백만이 갈린 오스트리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결국 엄청난 피해로 빌빌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지휘권은 이때부터 독일이 장악하기 시작한다.동시에 동맹국은 서부전선 및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모든 공세를 포기해야 했다. 병력피해가 누적되던 베르됭 전투 같은 경우 독일도 손을 놓아야 했다지만 베르됭 전투의 지속 가능성을 날리고 서부전선에서 1916년의 남은 반년을 방어로 전환해야 했던 것은 브루실로프 공세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콘라트의 트렌티노 공세 계획도 브루실로프 공세로 많은 병사들이 갈리면서 여력이 부족해진 탓에 취소되었다.
그 밖에도, 오스트리아군 병력 중 슬라브인들 상당수가 러시아에 투항하는 일이 있었다. 마치 대전 종식 후 제국의 해체를 예고하는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친동맹국 폴란드 여단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가담하여 코스티우흐누프카(Kostiuchnówka, 현 우크라이나의 코스튜흐니우카)에서 2~3배에 이르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선전했지만, 폴란드와 협력하던 헝가리군이 졸전하면서 단 3일 만에 거의 1/3에 이르는 대 피해를 입으며 결국 패배했다. 이 폴란드 여단은 후에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신생 폴란드군의 주축이 된다.
4.1.1. 낭설에 대한 반박
'공세 방어 이후 동부전선의 군사력 90%를 독일이 전담하되 오스트리아는 10%만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으나 이는 대표적인 나무위키발 왜곡 정보다. 공세 종료 후에도 독일군은 격화되고 있던 솜 전투로 인해 서부에 군대를 집중시켜야만 했으며 이듬해 벌어졌던 케렌스키 공세 당시에도 동맹군의 주력을 담당한 것은 뵘에르몰리 집단군을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5개 야전군으로, 독일의 남야전군과 제9군 및 10군의 두 배에 달했다. 벨라루스와 발트 일대까지 전부 포함한 전체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 제대가 담당하는 부분은 적어도 절반은 되었다.[10]이듬해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동부전선 전부를 독일이 맡아 주는 대신 자신들이 이탈리아 방면에 집중하겠다'고 제안한 것 역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동부전선 10%조차도 담당하지 못하는 약체여서가 아니며, 오히려 널찍한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을 동시에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각지에서 협상국의 공세를 저지했고 그 전투력 역시 크게 뒤지지 않았다. 가령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제7군 사령관 카를 폰 플란처발틴의 경우 휘하 독일군 제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에서 벌어진 양군 간의 갈등으로 인해 사실상 강제 퇴역당했지만, 이 한 번의 패전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장이다. 그는 1915년에는 대러시아 전선에서 효과적인 병력 운용으로 브루실로프의 공격을 잘 막아내어 러시아군의 부코비나 진입을 저지한 바 있었다. 반강제적인 은퇴 후에도 그 재능을 아까워한 황제에 의해 재기용되었으며, 이때부터는 발칸 전선에 부임하여 프랑스군과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잘 방어하고 반격까지 가했다. 다만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 오스트리아가 군사적 독립성을 점차 상실하고 독일군 총참모부의 통제에 예속되어 간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2. 협상국
동부전선으로만 보면 브루실로프 공세는 대성공이었다. 성과를 보면 카르파티아산맥까지 전선을 움직여 안전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무력화시켜 이후 동부전선에서 사실상 손떼게 만들었고, 루마니아 왕국이 협상국 편에 가담하도록 자극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군에서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 참모총장이 해임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교체되기까지 한다.그러나 트란실바니아를 노리고 협상국으로 참전한 루마니아의 선택은 그해 겨울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간 루마니아군의 공격은 프란츠 로어 폰 덴타의 오스트리아군에 가로막혔다. 이후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의 강력한 반격과 남부에서 치고 올라온 오스만 제국 및 불가리아 왕국의 맹공에 그해가 가기도 전에 수도 부쿠레슈티를 포함해 왈라키아와 도브루자를 상실하고 몰다비아만 남은 상태에서 러시아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버티게 되었다. 결국 유일한 버팀목이던 러시아마저 러시아 혁명으로 전쟁에서 빠지자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진 루마니아는 협상을 요청했고, 굴욕적인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동맹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물론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는지, 전쟁 종반부에 들어서 동맹국이 패전 직전에 몰리자 루마니아는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협상국으로 참전, 종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는 물론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까지 확보하면서 루마니아의 협상국 참전은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 됐다.
뿐만 아니라, 서부전선에서 한참 위기에 몰려있던 프랑스는 영국이 솜 공세를 떠맡아 몸빵하는 동안, 독일이 동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면서 한시름을 놓았고, 그렇게 1916년의 나머지 기간을 재정비하며 1917년을 준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 역시 오스트리아를 향한 공세작전에 좀 더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창하게 평가한 것과 달리 이탈리아군의 성과는 미미했다.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러한 연유로 공세를 지휘한 브루실로프는 온갖 훈장을 수여받고 페트로그라드의 궁정으로부터 수많은 축하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막대한 병력 피해와 유의미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했다. 반면에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전쟁지도부는 여태까지 연패하던 전적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기에 드디어 서방에 체면치레를 했다며 매우 만족해했다. 실제로도 일반적으로 브루실로프 공세 자체는 러시아의 대승리이자 러시아 제국군의 절정기로 인정되며, 가장 나쁜 평가도 이 공세를 러시아의 상처뿐인 승리로 보는 정도다. 역사가 그레이던 턴스톨은 브루실로프 공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있어서 제1차 세계 대전 최악의 위기로 보며,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 협상에게 최대의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체면치레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브루실로프 공세는 2년에 걸친 대전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 제국의 모든 여력을 쏟아부은 공세였는데, 여기서 실패하여 러시아는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진해 버렸던 것이다. 이는 이미 한계 상태였던 러시아 제국에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고, 결국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입은 러시아는 또다시 러시아 내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고 영토를 얻기는 커녕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 등 서부의 광할한 영토를 상실했다. 결국 브루실로프 공세는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얻어야 할 몫의 이득까지 전부 영국과 프랑스에 들어바친 무의미한 승리였던 셈이다.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승전한 국가는 러시아도, 독일도, 오스트리아도 아닌 영국과 프랑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창작물
5.1. 게임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오퍼레이션 모드로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전투만을 다룬다. 원래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진행된 전투지만 게임에선 한겨울 배경으로 등장하는 고증 오류가 있다. 평가를 본다면 처음 시작맵인 갈리치아 맵 자체가 엄폐물이라고는 공격팀 쪽에는 수비팀 참호 점령 전에는 구덩이 밖에 없는 허허벌판이라 배필 유저들이 혐오하는 날틀이나 똥싸개들이 날뛰기 딱 좋은, 원역사랑 다르게 수비팀인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밸런스 붕괴 맵이라 그렇게 인기가 좋은 오퍼는 아니다. 거기다 차량도 전차는 아예 안주고 트럭류만 제공되기에 더욱 인기가 없다.
재수 없으면 공격팀 수비팀 둘 다 박격 트럭을 뽑는 충격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11] 물론 갈리치아만 뚫는다면 그 다음 맵인 브루실로프 요새는 공격팀이 승리한 기세로 뚫어볼만하기에 사실상 갈리치아에서 승패가 결정된다는 평가도 있다.
5.2. 소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2부에서 메인으로 다뤄진다. 원역사와 달리 주인공이 이끄는 대한제국 군대가 합류해서 원역사보다 공세 규모가 커졌으며 시기도 조금 앞당겨졌다. 6주간의 공세 끝에 대승을 거두고 동맹군을 비스와강까지 퇴각시키는데 성공한다.
[1] 유럽 동부전선에서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또 한 번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도시 외곽에서의 대규모 전투와 도심에서의 시가전을 모두 포함하는데,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많은 병력이 밀집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비해 브루실로프 공세는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졌음에도 스탈린그라드에 버금가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냈다는 점에서 그 규모와 강도를 짐작케 한다.[2] 2개 사단으로 구성된 오스만 제국 육군 제15군단 약 25,000명이 세바트 파샤의 지휘 하에 갈리치아에 파견되어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싸웠다. 오스만 최고 정예병들 중 하나였던 15군단은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매우 믿을 만한 전우들로 평가받았다. 주오스만 독일 군사고문이었던 리만 폰 잔더스 원수는 15군단이 갈리치아에 가지 않고 중동전선에 투입되었다면 팔레스타인 방면 전선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들은 1917년에 철수하여 아나톨리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종전을 맞았으나 곧 튀르키예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아타튀르크의 국민의회 편으로 참전하였다.[3]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의 사각형 중 로마 숫자로 구분되는 것이 군단, 인명으로 구분되는 것은 군집단이다. 숫자와 함께 Kav.라 표시된 것은 기병군단, Res.라 표시된 것은 예비군단이다. 임시 제대인 군집단은 보통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반면 군집단 개념을 도입하지 않은 러시아군의 사각형은 모두 각종 군단들을 의미한다.[4] 사단 중에서는 왼편 지도의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가 이끄는 남부군(Südarmee) 소속 제48예비보병사단 단 한 개만이 표시되어 있다.[5] 6월 7일까지 임무수행 후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로 교체[증원] [증원] [8] 오스트리아 제4군의 붕괴로 인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서부에 있던 여러 군집단들이 급하게 증원으로 투입되었기에 예하 제대가 집단군-군-군단 및 군집단 식으로 일원적이지 못하다. 개별 군집단의 규모는 연대에서 군단 정도로 각양각색이었다.[9] 이탈리아 전선은 1917년 카포레토 전투 이전까지 줄곧 이탈리아가 근소하게 우세하였다.[10] 1917년 당시 발트 지역에는 아이히호른 집단군이, 그 아래 벨라루스 일대에는 보이르슈 집단군이 위치했다. 그 남쪽 폴란드 일대에 린징겐 집단군, 카르파티아 일대에 뵘에르몰리 집단군이, 그리고 루마니아 일대에 마켄젠 집단군이 배치되었다. 오스트리아군 제대들은 이 중 린징겐 집단군부터 마켄젠 집단군에 이르는 동부전선 남부 지역 곳곳에 분포했다.[11] 그 역대급 밸런스 똥망 오퍼인 붉은 물결도 시작맵인 볼가 강에서 공격팀에게 지상함 2대가 주어져 이걸 잘 쓰면 뚫을만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트럭만 주는 브루실로프 오퍼가 인기 없는 이유가 있다. 문제는 그 뒤가 보 요새랑 더불어 2대 공격팀 믹서기 맵이라 불리는 차리친이란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