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케렌스키 공세 Kerensky Offensive Июнь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Kerenski-Offensive | |||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 전투 중 하나 | |||
날짜 | |||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9일 | |||
장소 | |||
동부전선 갈리치아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루마니아 왕국| ]] | ]][[틀:깃발| ]][[러시아 공화국| ]]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렉세이 구토르 | ]][[틀:깃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틀:깃발| ]][[틀:깃발| ]][[막스 호프만| ]] | ]][[틀:깃발| ]][[틀:깃발| ]]펠릭스 폰 보트머|
전력 | 러시아 제7군, 제8군, 제11군 루마니아 제1군 | 독일-오스트리아 남부집단군 오스트리아 제7군, 제3군 | |
피해 규모 | 러시아: 약 60,000명 전사 | 독일: 약 38,000명 전사 | |
결과 | |||
동맹국의 승리 | |||
영향 | |||
러시아 제국의 전선 이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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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렌스키 공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전선 중 일부로, 러시아군의 마지막 공세였다. 하지만 동맹국의 승리로 끝났다.2. 배경
우선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공세는 러시아의 전쟁 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지시한 공세로 러시아의 명장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지휘하였다. 케렌스키 공세가 시작된 당시 러시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혁명으로 인해 기존의 제국 질서가 무너져버린 상황이라 귀족 출신인 장교들이 종종 사병들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는 등 혼란이 계속 확산되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큰 전투에서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브루실로프에게 이 공세를 제안하였다.3. 전투
케렌스키 공세의 시작은 매우 좋았다. 독일 제국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3개의 참호를 점령하였고, 12,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뒤를 이은 두 번째 공세에서도 6,300명의 포로를 잡으며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이런 성공에 고무되어 러시아군은 적 전선에 굉장히 깊게 파고드는 공세를 계속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간단하게 무너지면서 러시아군은 공세를 성공하였다고 생각하였다.당시 동맹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이유는 역시나 국가 내부가 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사적으로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고, 독일 제국도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당시 수상이었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가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반대를 보였다가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후 교황이 되는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는 전쟁을 중지시키려고 하면서 독일 제국은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던 것이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나라가 뒤집혔을 정도로 막장이었으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갈 리도 없었다. 물자는 부족했고 당장 먹을 것도 없어 탈영하는 병사들이 계속 늘어났다. 초반 러시아의 승리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상태가 똑같이 좋지 않다 보니 제대로 방어하지 않아서 얻은 승리에 불과하여 보급만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공세는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보급이 되지 않으니 피해는 커져만 갔고 손실이 커질 때마다 장교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나중에는 병사들이 장교의 말에 복종하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더이상 공세를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7월 20일부터 7월 23일까지 오히려 후퇴를 하기에 이른다. 머지 않아 독일 제국군의 원군이 투입되기 시작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집혀 버렸고 이렇게 러시아군의 마지막 공세는 끝이 났다. 그리고 이는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붕괴로 이어진다.
4. 여담
케렌스키가 직접 전투에서 장병들을 격려하였다고 한다.케렌스키가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실패한 도박수 정도로 평가받는다. 다만 케렌스키 측에서도 할 말이 없지 않다. 당시 시점에서 임시정부 측은 볼셰비키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체제로 불완전한 권력을 쥐고 있던 상태였고, 이대로 간다면 볼셰비키에게 밀려난다는 건 필연임은 케렌스키를 비롯한 임시정부 측 인사들도 잘 알고 있었다. 지지 기반도 약하고 명분마저 빈약한 임시정부 측에선 이 케렌스키 공세와 같은 도박수가 아니면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막장 상태인 러시아는 이 도박수를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임시정부의 붕괴와 볼셰비키 집권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