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9:58:12
1. 배경2. 전투3. 러시아군의 참패 원인4. 영향
[clearfix]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동맹국은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의 사이에 끼여 양면 전선을 강요받았다. 당초 슐리펜 계획에 따른 독일 제국군의 전쟁계획은 러시아의 빠른 총동원령과 마른 전투를 비롯한 서부 전선에서의 실패로 수포가 되어버렸다. 러시아 제국은 독일의 예상을 깨고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었으며 동부 전선을 담당해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갈리치아 전투에서 참패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러시아 제국군의 공세를 겨우 막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 경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괴멸시키며 한숨 돌렸지만 동프로이센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은 유효했고 이를 없애기 위해 2차례에 걸쳐 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가했으나(우치 전투)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군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독일 제국에 러시아에 대한 합동공세를 요구했다. 독일은 이 제안에 서부 전선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난색을 표했으나 오스트리아의 끈질긴 요구와 러시아와의 단독 강화로 전쟁에서 이탈하겠다는 협박에 1915년 5월, 갈리치아와 폴란드 일대 사이의 러시아군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였다.
5월 1일, 공세가 시작되자 독일 제국군은 러시아군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포병전력을 이용하여 러시아군 방어선에 맹폭을 퍼부었고 뒤이어 보병들이 러시아군의 참호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5월 2일에는 독일군이 염소가스를 이용하여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방어선 유지를 위해 2개 사단을 증원하려 했으나 양일에 걸친 독일군의 공세에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붕괴되어버렸고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독일군의 돌파를 허용했다. 독일군은 공세 초반에만 14km를 전진하여 타르누프를 점령하는 한편 17,000명이 넘는 러시아군 포로를 잡았다. 러시아군은 독일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비츨로카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였다. 러시아군은 병력들이 산개되면서 밀집도가 떨어졌고 갑작스러운 공세에 미처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했으나 러시아군 수뇌부에서는 후퇴 절대 불가를 내세워 반격작전을 요구했다. 독일군 일부가 이미 두클라에 다다라 후방을 위협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5월 7일 러시아군은 반격을 시작했으나 러시아군 제48사단은 두클라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고 나머지 러시아군도 독일군의 역공에 참패하여 질서없이 패주하였다. 5월 11일 러시아군은 산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강을 향해 진격하는 독일군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5월 12일 독일군이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5월 17일 산 강을 도하하여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5월 28일 독일군이 프셰미실 요새 북쪽의 주요거점들을 점령하자 러시아군은 요새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요새를 점령한 독일군은 6월 3일까지 별다른 저항없이 계속 진군했으며 러시아군은 타뉴강과 렘베르크 서북쪽 그로텍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렘베르크 서북쪽 30km 지점 마헤리브(Maheriv)에 교두보를 확보한 동맹군은 교두보 동쪽으로 진군하여 아직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러시아군을 양분시켜 버리고 최종적으로 렘베르크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북부측면은 독일, 남부측면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맡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공세를 위하여 12개 사단을 포함한 4개군단을 준비하여 이들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북쪽 측면의 독일군과 함께 삼면에서 공세를 계획했다. 6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를 시작하였고 오스트리아군 좌익은 러시아군의 철로와 주요 도로들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러시아군의 저항에 고전했지만 렘베르크 서쪽까지 러시아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격 우려에 오헝군은 진격을 중지하고 전선을 가다듬었으며 6월 20일 독일제국 프로이센군이 마지에로프의 러시아 방어선을 돌파하자 러시아군은 렘베르크로 후퇴하였다.
6월 21일 동맹군의 공세에 결국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갈리치아 포기를 명령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6월 22일 렘베르크를 재탈환하였다.
3. 러시아군의 참패 원인
공세 초기 러시아군과 동맹국의 병력은 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러시아군에 비해 동맹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중포 4문, 야포 600여문을 보유한데 비해 동맹군은 공세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여 중포 334문, 야포 1272문을 준비하여 러시아군을 압도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포탄부족에 시달렸는데 동맹군 역시 포탄수급의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공세를 위해 포탄을 구비해놓았고 포병지원을 위해 비행기 100여대를 동원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동유럽의 열악한 도로환경을 극복하고자 마차를 이용하여 보급문제를 수월하게 했으나 러시아의 경우 고질적인 물자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군 수뇌부는 동맹국의 동부전선에 대한 공세의 규모를 오판하고 있었으며 병력을 넓은 구역에 산개시켜 놓아 방어전을 실시하기도 전에 개전하자마자 각개격파당하고 남은 병력들마저도 어설픈 반격작전과 후퇴금지 명령으로 인해 포위섬멸되고 말았다.
러시아군이 갈리치아 지역을 내어주면서 폴란드는 동부전선에서 독일쪽으로 돌출된 거대 돌출부가 되었다. 러시아는 포위위협을 제거하고 전선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폴란드에서 대후퇴를 결정하였다. 한편 동맹국의 경우 러시아의 공세로 잃어버렸던 영토들을 대부분 탈환하였고 일시적으로 러시아군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면서 다른 전선에서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발칸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맹국은 그해 겨울 세르비아에 대한 총공세를 퍼부어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전선을 안정시킨 러시아는 해당 지역에 대해 브루실로프 공세를 퍼부어 복수에 성공한다. 그리고 거기서 입은 피해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