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프셰미실 요새의 1번 요새 입구 |
러시아어: Перемышльская крепость (페레미슐스카야 크레포스트)
독일어: Festung Przemyśl (페스퉁 프셰미실)
폴란드어: Twierdza Przemyśl (트비에르자 프셰미실)
1. 개요
프셰미실 요새는 현재 폴란드 포트카르파츠키에 주 프셰미실에 위치한 대규모 요새지역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건설을 진행했으며, 당시 유럽에서 앤트워프, 베르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를 가졌다.프셰미실 요새는 전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중 세 차례의 포위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특히 조국의 최전선과 단절되어 적군의 후방 깊숙한 곳에 포위된 상태에서 173일간의 공성전을 버티면서 저항을 길게 이어나갔다. 이는 프랑스의 베르됭 요새와 러시아 제국의 오소비에츠 요새(203일)에 이어 가장 긴 포위 기간이었으나, 다른 두 요새와 달리 프셰미실 요새는 완전 포위 상태에서 1차 포위는 끝까지 견디고 2차 포위도 장시간 견뎌냈다는 점에서 비록 함락되었으나 역사적 의의가 크다.
2. 건설
18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빈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제국의 동부 국경, 특히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속하는 갈리치아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요새 건설 위원회를 설립한 것이다. 해당 위원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물색했고, 프셰미실이 최적의 장소로 선정되었다.프셰미실이 선택된 주된 이유는 전략적 가치의 측면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북쪽의 갈리치아에서 남쪽의 카르파티아 산맥의 고개들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또한 빈에서 크라쿠프를 거져 렘베르크로 이어지는 갈리치아 카를 루트비치 철도와, 프셰미실에서 부다페스트로 연결되는 제1헝가리-갈리치아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했다. 이러한 철도망의 통제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특히 동유럽 방면에서 중부유럽으로 이어지는 적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프셰미실을 둘러싼 구릉지대는 천연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초기의 건설 계획은 프셰미실 요새를 2등급 요새지대로 만들며 1818년에 41개소의 요새를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실제 건설은 크림 전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사이가 나빠지는 1854년까지 전혀 진행되지 않았고 19개소의 요새가 완성될 무렵인 1855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관계가 다시 좋아지면서 건설이 중단되고 1878년까지 방치되었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계획이 수정되었다. 프셰미실과 크라쿠프의 요새들은 1등급으로 승격되었고, 건설 계획도 대폭적으로 수정되었다. 1878년에 완성된 중기의 건설 계획은 2,400만 길더의 예산을 동원해서 24년의 기간동안 프셰미실 요새를 1등급 요새지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프셰미실 요새의 건설은 도시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수천 명의 숙련공과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군대의 주둔 규모도 대폭 확대되었다. 고위급 장교들과 행정 관료들이 이주해왔고, 1910년에 이르러서는 군인만 8,524명에 달했다. 이러한 대규모 건설 사업과 군사 시설의 확장은 프셰미실의 인구 구조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1860년 10,140명에 불과하던 도시 인구는 1910년까지 54,692명으로 급증했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교도가 25,455명으로 가장 많았고, 유대인이 16,034명, 우크라이나계 그리스 가톨릭교도가 12,300명을 차지했다. 이는 프셰미실이 단순한 군사 요새를 넘어 다문화, 다종교 도시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도 프셰미실 요새의 상당부분은 완성이 안된 상태였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부 요새의 위치를 변동시켜야 했기에 1892년에서 1896년까지 벌어진 요새선 조정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1881년부터 임시적으로 추가했던 요새 구조물을 영구적인 강화 구조물로 변경하는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910년에는 현대적인 보병용 벙커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셰미실 요새의 완성도는 아직 높지 않았고 요새 건설 작업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 규모
프셰미실 요새의 배치도 |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을 맞이한 프셰미실 요새는 아직 미완성 상태였고 보완할 점이 많았지만 정교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외곽 방어선은 총 둘레 45km에 달했으며, 15개의 주요 포병 요새(I번부터 XV번까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주요 요새를 보완하기 위해 27개의 보병용 소형 요새와 25개의 독립 중화기용 진지가 배치되었다. 방어 체계는 6개의 독립적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구역은 자체 지휘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보급소와 병원을 운영했다. 이러한 분권화된 체계는 어느 한 구역이 적의 공격을 받더라도 다른 구역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내부 방어선은 2개의 독립적인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구시가지 방벽을 따라 현대식 콘크리트 요새들로 보강되었다. 특히 즈네시니아 언덕에 건설된 대규모 성채는 내부 방어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무선 통신 시설을 갖추었고, 모든 요새는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빠른 병력 이동과 보급이 가능했다.
그러나 미완성된 부분도 많고 건설 기간이 너무 늘어지는 바람에 너무 오래 전에 건설되었으므로 현대전에 버틸 수 없는 요새도 많은 편이었다. 총 41개의 요새 중 단 12개만이 "모든 종류의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되었고, 나머지는 포탄 1발이나 몇 발 수준의 직접 타격만을 견딜 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프셰미실 요새는 3중 방어선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그 중에서 제대로 완성된 것은 외곽방어선 뿐이므로 외곽이 돌파당하면 요새지역 자체의 완전 함락이 시간문제가 된다.
개전 당시까지 프셰미실 요새에 배치된 화포는 가동 불가능한 것까지 모두 합쳐서 1,022문에 도달하였으나 이 중에서 305mm 박격포 4문처럼 630kg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수준의 성능이 좋고 적은 숫자의 화포를 뺀 나머지는 1차대전 시기에는 이미 구식으로 전락한 무기였다. 당장 개전 당시 프셰미실 요새는 988문의 화포를 가동이 가능한 상태로 보유했으나 그중 단 28문만이 당시 기준으로 현대적 수준의 무기였다. 그래서 프셰미실 요새의 개전 당시 전투 준비 태세는 계획된 수준의 75% 정도에 그쳤었다.
4.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5월, 헤르만 쿠스마네크 장군이 요새의 군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당시 프셰미실 요새에는 25,000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포병 부대는 1,05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776명이 요새 진지에 고정 배치되었다.프셰미실 요새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약점이 많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19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약 27,000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긴급 보강 공사를 실시했다. 이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요새의 방어력은 대폭 강화되었다. 714문의 야포, 52문의 곡사포, 95문의 박격포, 72정의 기관총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병력도 증강되어 최종적으로는 131,000명의 군인과 21,000마리의 군마가 요새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이 점차 프셰미실에 가까워지자, 사령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요새 주변 15km 반경 내의 모든 민간 건물과 과수원, 숲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이는 포병대가 주변 지역을 완벽하게 관측하고 사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프셰미실 요새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세 차례의 대규모 포위전을 겪었다. 각각의 포위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투였다. 첫 번째 포위전(1914년 9월 17일 - 10월 10일)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승리했고, 두 번째 포위전(1914년 11월 5일 - 1915년 3월 22일)에서는 러시아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마지막 세 번째 포위전(1915년 5월 18일 - 6월 3일)에서는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요새를 탈환했다.
1차 포위전 후에는 요새의 외곽 방위선 앞에 추가적인 방어선이 건설되었으며 3차 포위전 당시에는 함락된 프셰미실 요새의 온전한 일부 구획을 활용해서 러시아 제국군이 방어전을 진행하였다.
5. 이후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중 프셰미실 요새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구사틴 부대에 소속된 18명의 우크라이나 갈리치아 군(UHA) 병사들이 전사했다.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포위를 받았다. 1940년에는 소련이 몰로토프 선의 일부분으로 현대식 벙커들을 프셰미실 요새의 근처에 건설했으나, 이는 원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요새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1968년 폴란드 정부는 파괴되고 황폐화된 요새들을 보호 군사건축물로 지정했다. 1997년에는 폴란드 군사건축물 보호·보존 국가 프로그램에 포함되었으며, 2018년 12월 10일에는 폴란드 역사기념물로 정식 지정되었다. 현재 요새 단지를 따라 검은색으로 표시된 도보 관광로와 녹색으로 표시된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자전거 도로는 북부와 남부 순환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길이는 87km에 달한다.
6. 장점
프셰미실 요새가 악조건 하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 것은 요새사령관 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과 휘하 병력들의 노력과 분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6.1. 전투 태세 유지
1차 대전 개전 당시 아직 미완성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긴급 조치와 추가적인 방어 구조물 설치 및 병력 동원을 통해 2차례나 포위당하고 장시간의 공성전 끝에 러시아 제국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프셰미실 요새는 자신의 능력을 잃지 않았다.같은 시기에 벨기에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놓은 안트베르펜 요새지대, 리에주 요새지대, 나뮈르 요새지대는 벨기에 침공당시 장비가 좋고 숫자도 압도적인 독일 제국군이 공격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수비병력의 부족과 요새지대 설계의 근본적 실수로 인해 제대로 적을 막지 못하고 격전 끝에 1주일 정도의 저항을 끝으로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돈 들어간 만큼의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벨기에는 약소국이지만 당시에는 세계 경제력 순위 6위의 경제대국이라서 재정상황은 좋으므로 요새지대를 튼튼하게 만들어놓고 현대식 최신예 중화기도 배치해놓았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의 베르됭은 더 심각하여 야전군에 쓸 무기가 부족하다고 베르됭 요새에 배치된 화기를 철거하고 병력을 빼내가서 그냥 빈 건물만 남겨놓는 통에 독일 제국군의 기습으로 상당수의 요새가 함락당하고 그걸 되찾으려고 대혈전급인 베르됭 전투를 진행한 것을 본다면 프셰미실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전투 태세를 제대로 유지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6.2. 적 병력의 유인
러시아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갈리치아를 점령했으나 프셰미실 요새가 살 속에 박힌 가시처럼 버티고 있고 내부 병력도 138,000명이나 있기 때문에 요새를 포위하는데만 1차 포위전에서 91,800명이 필요햇고 2차 포위전에서 300,000명이 필요했다. 이렇게 요새가 러시아 제국군을 붙잡아두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된다.그리고 1차 포위전에서 공성전을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제국군에 40,00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면서도 프세미실 요새가 튼튼하게 버티자 2차 포위전에서는 포위해놓고 식량, 연료등의 보급품을 고갈시키는 방식의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작전을 러시아 제국이 시행하는 수 밖에 없었으며 포위전 막바지의 최후의 공격을 포함해서 러시아 제국군에게 요새 함락시까지 총 115,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킴으로서 적군의 소모를 크게 만들어주었다.
요새지대가 상당히 큰 편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요새 1개가 이렇게 많은 수의 적군 병력을 붙잡아두고 소모도 어느 정도 시켰다는 점에서 프셰미실 요새는 나름대로 활약을 제대로 했다.
6.3. 시간을 벌어줌
1차대전 개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침공을 통해 세르비아 왕국을 속전속결로 처리한 후 러시아에 대응한다는 전쟁 계획을 세웠는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졸전한 것만 믿고 안일한 계획을 세운 것에 불과하였다.그래서 원래대로라며 프셰미실 요새가 있는 갈리치아 지역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주력이 주둔하면서 방어전을 펼쳐서 러시아 제국군을 막아야 하는데 세르비아를 친답시고 대부분의 군대를 세르비아에 투입하면서 프셰미실 요새 빼고는 무주공산에 가깝게 방어선이 텅 비어버렸다.
이 틈을 러시아 제국군이 노리자마자 갈리치아는 대부분 러시아의 손에 떨어져버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 방면에서도 졸전을 하는 상태에서 병력의 대부분을 다시 카르파티아 산맥에 배치해놓고 갈리치아를 재탈환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만일 프셰미실 요새가 버티지 못했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에 방어선을 만드는 것도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러시아 제국군에게 대응할 시간을 벌어준 것만으로도 프셰미실 요새는 열악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대로 활약한 것이 맞다.
7. 한계점
용전분투했으나 결국 프셰미실 공방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대타격을 입은 이유가 있다.7.1. 총체적인 준비 부실
프세미실 요새는 위치 선정부터 1차대전 개전 직전까지 총체적으로 준비가 부실했다.우선 요새의 위치선정부터가 정치적인 압박에 의한 것이 커서 이상적인 위치가 아니었으며 영구적으로 버틸 요새를 건설할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프셰미실은 교통의 요지일 뿐 관문과 같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곳이 아니며 지형조건상 우회로를 건설할 수도 있어서 적을 견제하거나 방해할 수준의 소형 요새 정도만 건설할 지역이지 대규모 요새지대를 만들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갈리치아 확보에 지나치게 집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뇌부들 때문에 프셰미실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렇게 되자 카르파티아 산맥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서 구릉과 평야지대에 있는 도시를 수비하므로 유사시에 자동적으로 포위당할 위험성이 높아서 요새지대를 대규모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버리는 점입가경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요새를 만든다고 하면 빠르게 건설할 필요가 있다. 일단 요새를 완성하고 가동을 해봐야 약점도 찾고 개선도 하고 현대화 공사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1818년에서 1914년까지 거의 백년에 가까운 96년의 세월을 들여서도 미완성 상태였고 실질적인 계획과 공사가 들어간 1878년 기준으로 봐도 36년이라는 어이없는 기간을 공사기간으로 두면서 계획변경과 공사중지가 반복되는 바람에 요새가 기술발전에 뒤쳐져버린 것이다.
일례만 들어봐도 프셰미실 요새의 상당한 부분은 적색 벽돌로 건설되었다. 적색 벽돌은 1818년의 시점에서는 1급 건축자재로 매우 튼튼한 물건이지만 1878년 시절이 되면 이미 콘크리트가 시험적으로 요새에 쓰이고 있고 1914년이 되면 철근 콘크리트도 요새에 도입되는 시기인데 이런 시기까지 적벽돌로 건축되고 방어력 높인다고 살짝 흙을 위에 덮어놓은 구조물을 요새라고 배치해놓으니 당대의 1급 화기만 가지고 와도 순식간에 요새가 개박살나기 딱 좋았다. 게다가 요새마다 완성시점이 다르니 적색 벽돌 요새 옆에 콘크리트 요새가 있고 그 옆에 야전 축성 요새가 있는 등 중구난방이라 운용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개전 후에 긴급하게 요새를 강화했으나 시간, 인력, 돈, 자재, 기술력등의 부족으로 인해 철조망, 지뢰, 기관총 설치같은 야전용 참호 증설과 기존 요새 위에 흙을 덮어서 포격에 대응한 대비를 한다던지 하는 수준으로만 강화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정도로는 충분한 수준의 강화가 안된 상황이었다.
프셰미실 요새에게는 다행히도 러시아 제국군의 상황도 안좋아서 공성포를 비롯한 공성 병기를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므로 장기간의 포위전을 버텼지만 결국 러시아 제국군이 약간이라도 공성포를 비롯한 장비를 투입하자 공성전 말기에는 일부 요새가 함락되거나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7.2. 국력에 비해 거대한 요새 규모와 보급의 극심한 부족
적군 화포가 시가지 중심부와 시타델을 타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새 외곽 방어선을 크게 확장한 것 자체는 시대의 변화에 맞춘 것이었으나 댓가가 매우 심각하였다.외곽방어선만 따져봐도 45km에 육박하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방어력은 약한데 수비병은 많이 필요한 구식 요새까지 있으니 요새 전체를 수비하는 병력이 138,000명에다가 21,000마리의 군마 및 4,000대의 수송용 마차가 배치될 정도로 매우 거대하게 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뇌부는 프셰미실 요새에 수비병력은 50,000명만 배치할 계획이었으나 요새 방어선이 너무 길어서 사실상 불가능한 조치였다.
요새 수비병력이 13만여명 수준의 대군이므로 미리 프셰미실 요새에 엄청난 분량의 각종 보급품을 쌓아놓고 식량, 연료는 민간인이나 포로도 생각해서 더 많이 쌓아놓으며 유사시에 추가 보급도 대량을 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대비도 매우 미흡했다.
개전 당시에 프셰미실 요새의 보급품 상황도 별로 안좋은 상황에서 1차 포위전 후에 보급 열차 편성이 213대 도착했으나 소모한 보급품 보충에도 모자랐고 이 와중에 요새 내부에 남아있던 보급품의 일부를 근처에 주둔한 야전군에게도 배급했다. 덕분에 2차 포위전에 돌입하자 프셰미실 요새의 보급상황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나락으로 치닫고 특히 식량부족으로 인해 21,000마리의 군마 중에 13,000마리를 도살해 식량으로 사용했으며 요새 내부에 전염병까지 퍼지는 고난을 겪게 된다.
7.3.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
프셰미실 요새를 사실상 미완성에다가 구식인 거대한 방어시설로 전락시켜놓았고 보급이나 지원도 제대로 안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뇌부들은 프셰미실 요새를 난공불락급 요새라고 착각하고 계속 확보할 것을 주문하는 바람에 결국 프셰미실 요새는 함락당하고 대규모의 병력손실을 입게 된다.사실 요새사령관 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과 휘하 병력들의 노력과 분투가 없었다면 1차 포위전에서 이미 프셰미실 요새는 함락당하고 끝났다. 그런데 한번 요행으로 위기를 넘겼으면 다음번에는 빠른 판단으로 요새를 즉시 손절하고 병력을 안전지대로 빼내야 하는데 두번째도 버틸 수 있겠지 하고 프셰미실 요새의 수비병력을 그대로 놔두었으니 여기서 운명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대규모의 병력이 들어간 요새는 포위당하면 보급품 부족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스당 전투에서 130,000명의 부대를 스당 요새에 넣었다가 3일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던 일이 생생했고 벨기에의 현대식 요새 지대인 리에주 요새도 정원이 4만명에 불과할 정도였는데 프셰미실 요새에 138,000명을 집어넣으면 과연 얼마나 버틸 것이며 거기에 들어가는 보급품은 얼마나 많으며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 예상도 제대로 못한 것이다.
물론 러일전쟁의 뤼순 공방전에서 뤼순 요새가 9개월을 버티긴 했다. 하지만 뤼순은 항구 겸 군항이였고 해군기지였기에 대규모의 보급창과 시설을 보유하며 미리 보급품도 많이 확보해놓았고 러시아 제국의 태평양함대가 피신하면서 군함에 실린 보급품까지 추가된 상황이라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보급품을 운반해서 쌓아놓는 것은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력과 프세미실의 철도 및 도로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불가능했다.
덕분에 프셰미실 공방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44,000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했다. 여기에 더해서 2,500명이 넘는 장교들이 포로로 잡혀 숙련된 지휘관들을 잃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더 이상 독자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8. 문화적 유산
프셰미실 요새는 여러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의 대표적인 군가 "갈리치아의 들판"이 요새 포위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2014년에는 X D.O.K 프셰미실 역사재현협회가 "프셰미실 요새 탈환" 행사를 개최했다. 영국 역사가 알렉산더 왓슨의 저서 "요새: 프셰미실 포위전과 유럽 피로 물든 땅의 기원"은 더 타임스지로부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에는 XIII 요새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한 영화 "Fort 13"이 제작되었다.프셰미실 요새는 현재도 제1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유적지이자 폴란드의 군사 건축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