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CD0000><tablebgcolor=#CD0000>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D0000> 일생 | 생애 | |
외교 |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 ||
전쟁 | 겨울전쟁 · 계속전쟁 | ||
기타 | 몰로토프 칵테일 · 몰로토프 선 · 몰로토프는 안돼 |
몰로토프 선 배치도 출처 |
[clearfix]
1. 개요
몰로토프 선은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를 독일과 동서로 분할 점령한 소련이 독일과의 경계선에 건설하던 방어선이다. 1940년 ~ 1941년에 지어졌다.2. 명칭
'몰로토프 선'이라는 명칭은 당대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1980년대에나 가서야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용어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한 당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서 따왔다. 몰로토프 선이라는 용어를 퍼뜨린 사람은 빅토르 수보로프[1]로, 소련 정보총국(GRU) 소속이었으나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이다.3. 배경
기존 소련은 폴란드 분할 점령 이전에 몰로토프 선보다 동쪽에 구축해 놓은 방어선인 스탈린 선이 있었다. 수보로프는 스탈린이 스탈린 선 대신 몰로토프 선을 신축한 이유를 1941년 독일 침공을 위한 준비라고 주장했으며, 나치 독일의 소련 침략은 독일의 예방전쟁이었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수보로프의 주장에는 정황 근거를 바탕으로한 추정밖에 없지 이렇다 할 유의미한 근거가 없다는 점, 소련이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현대인의 시각으로서는 미련해보일만한 신중론과 유화책을 편 점, 독소전 초기 소련군의 졸전은 전혀 전쟁 대비가 안 되어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독일군의 기록에서도 소련군은 방어적 태세로 일관했다는 내용이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전혀 성립할 수 없는 논리라는 반박을 받고 있다. 소련이 2차대전을 유발했다는 주장으로 정치권에서나 가끔 나오는 논리다.그렇기에 몰로토프 선은 폴란드 침공으로 점령한 벨라루스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 그리고 새로 복속된 리투아니아 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그리고 스탈린 선은 애초부터 소련이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던 기존의 국경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선인지라, 소련이 기존 국경선을 넘어 서쪽으로 크게 확장한 이상 스탈린 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새로 확보한 영토를 요새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소련의 국력을 감안하고 빠른 시간 안에 몰로토프 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어선에서 시설을 뜯어오는 방법이 좋게 보였기에 스탈린 선의 물자를 몰로토프 선을 신축하는 데 사용하였다.
물론 스탈린 선과 몰로토프 선을 둘 다 유지하는 안은 독소전쟁 이전 소련군의 교리와 충돌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면피용 수준의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였고 일부 장성들은 스탈린 선의 약화를 매우 근심하였으나 스탈린이 밀어붙여서 스탈린 선을 약화시키면서 몰로토프 선을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개전까지 소련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기에 몰로토프 선은 빛을 보지 못했고, 소련은 1941년 6월 22일에 몰로토프 선이 미완성된 상태로 독일의 침공을 맞는다.
4. 건설
몰로토프 선 건설은 대략적으로 1,050km 거리에 걸쳐서 5,807개의 현대식 방어 거점을 만드는 공사로 1940년부터 1941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공사를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담당자로는 드미트리 카르비셰프 (Dmitry Karbyshev) 중장이 담당했고 스탈린 선을 건설할 때 일했던 공병부대가 배속되었다. 그러나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 현대식 요새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소련은 그대로 밀어붙였다.1940년 6월 26일에 몰로토프 선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전에 방어선 공사 지대로 설정된 곳에서 지역 주민들이 쫒겨났으며 1940년 1월부터 토목공사 전문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지에 주둔한 군대의 본부에 건설을 전담하는 5개의 위원회가 설치되고 건설공사지역 주변에 콘크리트 제조 공장이 만들어졌으며 우크라이나에서 재료를 조달했다. 건설현장 인근에서도 목재를 조달했으며 폴란드군이 이전에 사용했던 요새에서 시설을 뜯어오고 건설자재를 획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에서 나치 독일이 승리하면서 공사를 재촉하는 명령이 내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형벌 부대가 공사 노동력의 중심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9월에 세묜 티모셴코가 명령을 내려서 공사진척도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공사진척도가 너무 느리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더해서 세묜 티모센코가 키릴 메레츠코프와 같이 1940년 9월 18일에 중앙에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의 가장 큰 적은 나치 독일이라고 말하고 서부 국경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인해 1940년에는 4개 지역에서 계획한 326개소를 능가하는 340개소의 방어 거점을 건설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방어 거점은 땅을 굴착하는 1단계부터 무기를 장착하는 7단계까지의 공사진행을 해야 하므로 겨울에는 공사가 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는 등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1940년 11월에 겨울이 와서 공사가 중단될 때까지 계획 대비 16.8% 정도만 완공되었고 내부 시설이 장착된 것까지 합치면 24.5%에 불과하였다.
1941년 3월에 겨울이 지나가면서 몰로토프 선 건설공사가 재개되었다. 여기서부터는 군인도 동원하기 시작해서 약 14만명의 군인을 투입했고 건설 전문가도 1만8천명에 육박할 수준으로 동원되었다. 건설현장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도 수천명 단위로 강제노동에 종사했으며 1941년 5월이 되면 건설노동자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하지만 시간도 부족했고 마구잡이식 동원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가라도 흔해서 실속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1940년에 완성되었다던 방어 거점도 무기 제작이 늦어져서 무기를 실제로 장착하지 못한 경우가 발생했고 현장 점검에서는 설계도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제멋대로 임기응변으로 땜질처리하거나 자재가 도난당하거나 건설중이던 구조물이 파괴되는 등 건설공사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개판상황이 모두 나타난 총체적 난국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몰로토프 선을 1942년 봄까지 완전하게 건설하고 현역으로 가동시킨다는 목표가 만들어졌으니 실제로는 전혀 달성이 불가능했다.
결국 1941년 4월 14일에 게오르기 주코프가 몰로토프 선 건설공사의 작업속도를 비판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단 작업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판한 후 세묜 티모셴코의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소련 육군 건설 국장이 직접 방어 거점에 무기를 장착하는 작업 지침을 준비 및 배포할 것이며 모든 군사 시설물과 장갑 셔터를 설치하고 기관총을 거치한 후 군대를 전투준비 상태로 만들 것을 권장했다. 이것만 봐도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941년 5월 16일에 세묜 티모셴코가 건설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요청해서 분석한 결과 완성된 방어 거점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방어전이 불가능한 수준인 것을 알게 되고 이에 따라서 건설 작업속도를 크게 올리고 완성된 방어 거점에 무장을 장착하는 것을 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 선의 무기와 시설과 장비를 탈거해서 몰로토프 선으로 이동시킴으로서 스탈린 선이 크게 약화되게 되는 사태를 만들어낸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41년 6월 1일까지 1,649개의 방어 거점을 건설했다고 서류가 올라갔다. 하지만 현실은 가라상태라서 실제로 1941년 6월 22일에 독소전쟁이 터진 후에 몰로토프 선을 함락한 나치 독일군이 조사한 것에 따르면 지휘용 벙커 43개, 대전차 벙커 460개, 포병 벙커 68개, 기관총 벙커 542개 등 1,113개의 방어 거점을 발견했고 건설 중인 방어 거점은 약 800개임을 확인했다. 그나마 1,113개의 방어 거점도 완벽한 전투준비상태가 아니라서 건물만 완성된 후 비어있거나 무장을 포함한 일부 시설이 없는 등 전투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전투준비가 된 방어 거점은 약 880개로 추산한다.
그리고 구간 별로 미완성 정도가 달라서 특히 제대로 공사가 안된 지역은 임시로 대전차 방벽을 만들고 MS-1같은 구식 경전차를 보내서 차체를 땅 속에 파묻고 포탑만 땅 위로 올리는 방식인 간이 벙커를 만드는 임시 대책을 추가했다.
5. 규모
몰로토프 선은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나치 독일과의 국경선에 13개 요새 지역으로 구성된 일렬로 된 방어선이다.지형지물에도 신경을 써서 부크강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하기도 했고 새롭게 얻은 소련의 서부 영토를 수비하기 위해 국경선에 최대한 가깝게 건설되었다.
요새 지역들의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번호를 붙여서 지정되었고 비공식적으로 방어선 지역의 중요 도시의 명칭을 사용했다.
번호 | 요새지역 명칭 | 방어선 전면 (km) | 종심 (km) | 중요 요새 | 벙커 | ||
현역 가동 | 건설 완료 | 건설중 | |||||
1 | 텔샤이 (Telšiai) | 75 | 5 - 16 | 8 | 0 | 23 | 366 |
2 | 샤울리아이 (Šiauliai) | 90 | 5 - 16 | 6 | 0 | 27 | 403 |
3 | 카우나스 (Kaunas) | 106 | 5 - 16 | 10 | 0 | 31 | 599 |
4 | 알리투스 (Alytus) | 57 | 5 - 16 | 5 | 0 | 20 | 273 |
5 | 그로드노 (Grodno) | 80 | 5 - 6 | 9 | 42 | 98 | 606 |
6 | 오소비에츠 (Osowiec) | 60 | 5 - 6 | 8 | 35 | 59 | 594 |
7 | 잠브로프 (Zambrów) | 70 | 5 - 6 | 10 | 30 | 53 | 550 |
8 | 브레스트 (Brest) | 120 | 5 - 6 | 10 | 49 | 128 | 380 |
9 | 코벨 (Kovel) | 80 | 5 - 6 | 9 | 0 | 0 | 138 |
10 | 볼로디미르 (Volodymyr) | 60 | 5 - 6 | 7 | 97 | 97 | 141 |
11 | 카미안카-부즈카 (Kamyanka-Buzka) | 45 | 5 - 6 | 5 | 84 | 84 | 180 |
12 | 라와 루스카 (Rawa Ruska) | 90 | 5 - 6 | 13 | 95 | 95 | 306 |
13 | 프셰미실 (Przemyśl) | 120 | 4 - 5 | 7 | 99 | 99 | 186 |
기본적으로 요새 지역들은 전투지경선이 서로 붙은 형태로 일렬로 연결된 구조이며 요새 지역 내부에는 중요 요새를 저항 거점으로 해서 벙커들이 서로 엄호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튼튼한 방어 거점의 경우 보통 3층으로 구성되며 내부 면적은 최대 160m²수준이고 중요 요새처럼 더 큰 방어 거점은 1개 층 이상을 기계실과 작업실로 사용해서 내부에서 수리, 보수, 교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외벽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며 최대 두께는 2300mm 였다. 콘크리트의 강도는 외부 벽체는 550kg/cm²수준이고 내부 격벽은 400kg/cm²정도며 적어도 1달 정도 경화과정을 거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방어 거점 외부에 자갈같은 쇄석층을 깔아놓아서 나치 독일군의 포탄이 명중시 신관을 작동시켜서 외부에서 폭발하도록 만듬으로서 방어 거점에 미치는 타격을 줄이려고 했다.
그래서 튼튼한 방어 거점은 203mm 야포의 사격을 견디는 것이 가능하며 작은 방어 거점도 105mm 야포 사격이나 50kg 항공 폭탄의 폭격을 막아낼 수준의 방어력을 가졌다. 내부 시설도 현대적 요새 시설의 기본은 갖추어서 자체적으로 전력, 조명, 환기, 난방 시설이 존재하며 아주 큰 시설은 수도 시설도 존재하며 발전기는 거점 내부에 저장된 연료로 60시간 정도 정상적인 동작도 가능했다.
소형 방어 시설은 인근의 방어 거점과 연결됨으로서 시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전투 블록과 피난 블록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며 외부 관측은 잠망경으로 하고 연락은 내부 전화선으로 받고 병력들이 담당된 전투실로 들어가서 총안구와 포곽에 설치된 무기를 사용해서 전투를 진행하는 구조다.
하지만 속성 공사와 날림과 가라 덕분에 완성된 거점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설계도와는 동떨어진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시설들도 대부분 설치되지 않았고 무장도 장착되지 못한 경우가 흔했다. 건설중인 거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상자라는 이야기도 나올 지경이었다.
요새 지역에는 스탈린 선과 동일한 수준으로 76mm 야포, 45mm 대전차포, 대전차 소총, 수랭식 중기관총, 경기관총들이 배치될 예정이었으며 요새 수비대가 배치되며 벙커의 크기에 따라서 각각의 벙커에 배치되는 병력이 8명에서 10명까지부터 30명에서 40명까지로 매우 다양했다. 요새 수비대를 지원할 기관총 부대와 야포 부대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유사시의 증원군은 소련의 야전군에서 충당될 예정이었다.
6. 문제점
몰로토프 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미완성일 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가동되는 시설이 매우 적었다는 점이다. 벙커만 살펴봐도 15% - 20% 정도만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완성되었더라도 서류상에서만 그럴 뿐 리투아니아 방면의 벙커처럼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나치 독일군이 손쉽게 벙커의 관측창이나 잠망경 설치 예정 부위에 수류탄을 집어넣어서 터뜨리거나 연료를 주입한 후 불을 지를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중요 요새 부위는 전혀 완성되지도 못했고 각종 화기도 제대로 설치되지 못했다.여기에 더해서 무리하게 속성공사를 강요한 탓에 설계도와는 달리 방어 거점의 벽과 천정이 얇아져서 방어력이 더 하락했다. 실제로 만들어진 방어 거점의 경우 내력벽은 600mm에서 800mm, 내부 격벽은 300mm, 바닥과 천정은 300mm에 불과하였다. 이래서는 거포나 중포의 포탄이 직격하면 쉽게 관통당할 뿐 아니라 내부에서 폭발이 발생하면 방어 거점 자체가 붕괴되면서 병력이 몰살할 수 있는 위험성이 높다. 덤으로 위장을 할 시간이 없어서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는 바람에 항공정찰등을 통해서 나치 독일군이 쉽게 위치를 파악하고 우회하거나 집중공격을 할 수 있다.
두번째의 문제점은 몰로토프 선에 배치할 무기와 장비, 설비는 부족한데 돈은 없고 새로 생산하려니 시간이 걸리므로 스탈린 선에서 필요한 것들을 뜯어오는 바람에 스탈린 선은 여기저기 뜯겨나간 폐허가 되버려서 예비 방어선으로 활동하기가 곤란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부 장성들이 스탈린에게 건의해서 오래된 무기나 장비는 기존 요새에 약간이라도 보관하게 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스탈린 선은 완전히 무쓸모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스탈린 선에서 뜯어온 무기와 장비, 설비들은 좀 더 발전된 형태인 몰로토프 선의 총안구나 포곽에 들어맞지가 않아서 개조작업을 수행해야 하므로 소련이 생각했던 것보다 비용도 줄어들지 않고 설치 시간도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스탈린 선에 배치된 무기들은 이미 개전 시점에서는 구식화하기 시작해서 성능이 탐탁치 않았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발상은 좋았으나 결과적으로는 해악을 가져온 셈이 되었다.
세번째의 문제점은 개전 당시에 충분한 병력이 몰로토프 선에 배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병력을 즉시 몰로토프 선에 배치하고 전투준비태세를 갖추라는 명령도 1941년 6월 21일에나 내려진 관계로 명령을 받고 실행할 시간이 매우 부족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명령 전달도 늦어서 전쟁이 터진 후에나 명령을 받는 일도 흔했다. 그래서 그나마 완성된 벙커를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했다. 여기에 더해서 병력 배분도 개판이라서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9세기에 건설되어 현대전에는 방어력 발휘가 불가능해서 전투에는 별로 소용이 없고 몰로토프 선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브레스트 요새에는 9천여명의 수비병력이 밀집한 반면에 브레스트 요새 지역은 병력이 부족해서 방치된 현대식 벙커가 발생하는 등 난장판이었다. 결국 빈 벙커는 순식간에 함락되고 브레스트 요새는 집중포격을 맞고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다.
네번째의 문제점은 몰로토프 선이 사실상 적지에 건설된 방어선이라는 것이다. 소련이 강제로 점령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 위에다가 방어선을 깔아놓았으니 현지 주민의 협조 따위는 바랄 수도 없고 나치 독일에게 협력하는 내통자나 나올 가능성이 높다. 덤으로 유사시의 보급도 게릴라로 인해 힘들어질 수 있다. 실제로 소련에 거주하는 독일인 중 일부가 나치 독일 간첩으로 행동하면서 몰로토프 선에 대한 정보를 넘긴 일이 있었다.
마지막 문제점은 전략적으로 볼 때 딱 나치 독일과의 국경선만 막아놓아서 헝가리 왕국이나 루마니아 왕국같은 다른 추축국들이 방어선을 우회해서 공격할 길이 열려있었고 만일 나치 독일이 해당 통로를 이용한다면 순식간에 우회공격을 당하기 딱 좋았다. 여기에 더해서 헝가리 왕국은 고토 수복의 의지가 높았고 루마니아 왕국은 바로 얼마 전에 소련에게 몰도바를 빼앗긴 상황인지라 나치 독일과 함께 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들 의사가 충분했다.
이렇게 몰로토프 선이 가진 문제점이 많았기에 충분한 자금과 시간과 자재와 인력이 있어서 몰로토프 선이 완공되고 병력이 배치되더라도 투자한 것에 비해 성과를 뽑아내기가 곤란할 것으로 예측된다.
7. 실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몰로토프 선은 방어선의 의미로는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전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빈 벙커는 순식간에 점령당했고 그나마 수비병력이 들어간 벙커는 우회당한 후 포위된 뒤에 각개격파당했다. 그나마 남부 지역의 10번부터 13번 요새 지역이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서 나치 독일군의 진격을 며칠동안 방어 가능하였으며 고립된 벙커들은 최대 2주 정도 저항했다.8. 말로
독소전쟁이 진행되면서 후방지역이 된 몰로토프 선은 나치 독일군도 그냥 방치했으며 일부 벙커는 폴란드 지하국이 무기를 저장하는 장소로 사용했고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소련군이 전투 거점으로 일부 시설을 사용하기도 했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국경선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몰로토프 선은 국경선에서 멀어진 지역과 현대에도 국경선으로 사용되는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국경선이 아닌 곳은 쉽게 방문이 가능하지만 국경선 지역은 보안 문제로 인해 여전히 접근이 어렵다.
전후에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 거점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1948년에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자국 영토 내의 몰로토프 선 방어 시설을 점검하고 조사하고 시체를 치우고 불발탄 같은 위험한 물건을 제거했다. 1950년대에는 냉전시기의 군사용 시설 목적으로 재활용을 위해 리모델링도 진행했으나 곧 쓸모가 없어져서 버려졌으며 일부 시설은 침수되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도굴당하는 등 폐허로 전락했다.
그래도 몰로토프 선의 대부분은 전투가 없었거나 소규모 전투 후에 점령되었기에 많은 숫자의 벙커가 현대에도 잘 보존된 편이다. 현역으로 사용되는 벙커는 없으며 대부분이 방치상태다. 관광은 가능하지만 말 그대로 가능한 정도라서 안전 문제 때문에 야간 방문은 권장하지 않으며 주간에도 동반자와 같이 손전등을 들고 올 것을 권장할 정도다.
[1] 필명으로 본명은 블라디미르 보그다노비치 레준(Vladimir Bogdanovich Rezu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