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아미앵 전투 Battle of Amiens Schlacht bei Amiens Bataille d'Amiens | |||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nopad> 진격하는 영국 육군 | |||
기간 | |||
1918년 8월 8일 ~ 1918년 8월 12일 | |||
장소 | |||
프랑스 아미앵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프랑스 제3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미국| ]]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더글러스 헤이그| ]] | ]][[틀:깃발| ]][[페르디낭 포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에리히 루덴도르프| ]] | ]][[틀:깃발| ]][[빌헬름 2세| ]]|
병력 | [[틀:깃발|[1] 12개 사단, 항공기 1104대 [[틀:깃발| ]][[틀:깃발| ]][[미군| ]] 1개 사단 | ]][[틀:깃발| ]][[영국군| ]] 19개 사단, 항공기 800대, 전차 532대[[틀:깃발| | ]][[틀:깃발| ]][[독일 제국군| ]] 현역 10개 사단, 예비역 4개 사단, 항공기 365대|
사상자 | 사상자 및 실종자: 44,000명 | 사상자 및 실종자: 75,000명 | |
결과 | |||
협상국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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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미앵 전투, 혹은 제3차 피카르디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국을 패배시킨 백일 공세의 시작을 알린 전투다. 협상국은 첫째 날에 11km를 전군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최대 규모였다.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일컬어 독일군 암흑의 날이라고 일컬었다. 아미앵 전투는 첫 대규모 기갑 전투들 중 하나였다.2. 배경
1918년 제2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마른 강 북쪽의 거대한 돌출부들로 후퇴하고 6차 춘계 공세를 준비하는 한편,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독일군이 그동안 춘계 공세로 점령한 지역을 재수복하려 하였다. 포슈는 더글러스 헤이그에게 영프연합군의 공세를 위해 프랑스 제 1군을 영국 원정군 총사령부 휘하에 배치시키고,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헤이그에게 공세 작전을 구성할 전권을 위임하였다.2.1. 독일군
제2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무리한 공세의 연속으로 전투 가능한 병력의 수가 제한적이었고, 협상국의 반격으로 수십만의 사상자를 낳은 춘계 공세에서 점령한 지역 대부분을 상실했다. 게다가 협상국 입장에서 최대의 변수였던 돌출부의 남쪽까지 보급품을 공급할 수 있는 교통망은 수아송-사토 티에리를 연결하는 대로가 유일했는데, 제2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해 결국 이마저도 끊기게 되어 보급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결국 독일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임시 철도를 까는데 투입해야 했다. 또한 협상국이 아미앵 돌출부 전선을 약화 시키기 위해 랭스 지역 동쪽의 생미이엘에 지속적인 포격을 가했기에 독일군은 협상국이 생미이엘 전선을 공격할 것이라 믿고 병력 일부를 생미이엘 전선으로 보내버리며 아미앵 돌출부 전선은 더 약화된다.[2]2.2. 협상국
춘계 공세를 저지하며 독일군의 사기와 공격은 크게 저하되었고, 이에 협상국의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대규모 공세인 백일 공세를 준비하였다. 제2차 마른 전투에서 마른 강 돌출부를 수복한 협상국은 이제 아미앵 지역의 돌출부를 수복하려 하였다. 춘계 공세에서 아미앵은 사수했지만 또 언제 독일군이 공세를 펼칠지 알 수 없었기에 아미앵 지역의 돌출부를 수복해 변수 창출을 막으려 한 것이다[3]. 4월 영국군의 퇴각이 끝나고 롤린슨 장군 휘하의 영국군 제4군이 솜 강 전선을 장악해 아미앵 돌출부를 공격하기 더 수월해지자 독일군이 마른 돌출부에서 완전히 퇴각하기 전에 아미앵 돌출부를 공격하기 위해 기존 공격 일자였던 8월 10일에서 2일 앞당긴 8월 8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독일군 몰래 캐나다 4개 보병사단을 아미앵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3. 전개
3.1. 8월 8일
8월 8일 오전 4시 20분, 롤린슨 장군 휘하 영국군 제4군의 지휘 하에 있는 영국 제3군단은 솜 강 북쪽, 남쪽에는 존 모나쉬 장군 휘하의 호주 군단[4], 제4군 전선 중앙에 대기하던 캐나다 군단[5]은 드베니 장군 휘하 프랑스 제1군단의 포격과 동시에 전차를 앞세워 진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협상국이 아미앵을 공격할 것이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공격이 시작된지 5분이 지나서야 반격을 시작했고,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가스를 이용한 화학전을 준비하지 못했다. 선두에 선 7개 사단[6]은 7시 30분에 3.7km를 진격해 첫 번째 독일군 진지를 점령했다. 한편 중앙에서는 호주 제3,4사단, 캐나다 제4사단이 3.2km 더 떨어진 첫 번째 목표를 공격했다. 이때 독일군은 후방에 지원 요청을 하려 했지만 프랑스군이 포격으로 통신선을 죄다 끊어놓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전 8시 20분, 아미앵 돌출부 최후방 전선 중앙이 돌파당함과 동시에 돌파한 호주와 캐나다군이 장갑차를 이용해 독일 제2군의 후방으로 빠르게 침투하며 후퇴하는 독일군을 후방과 측면에서 공격하였고, RAF 또한 후퇴하는 독일군에게 폭격을 가해 독일 제2군이 재집결하는 것을 방해했다. 재집결한 중앙의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오전 11시에는 전선을 4.8km까지 미는데 성공하였다.[7] 프랑스 제1군단도 공격을 시작해 오전 9시 30분까지 모회이유[8]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3시간 20분 동안 포격을 가해 지원했고, 오후 9시에는 프레즈누아[9]을 점령하며 협상국은 하루만에 평균 약 11km을 전진하고,[10]솜 강 남쪽 독일군 전선에 24km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을 내는데 성공하는데, 이날 독일 제2군은 협상국의 포위 섬멸로 말 그대로 갈려버리며 하루에만 3만의 병력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이날 독일군 참모총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협상국이 기습 공격과 동시에 독일 통신선을 파괴하여 지휘부를 고립시킴으로써 잠재적인 독일의 반격을 방해했다고 말하며 독일군의 통신 시스템을 지적했다. 또한 독일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아미앵 전투 첫날을 " Schwarzer Tag des deutschen Heeres ("독일군의 암울한 날")로 묘사했는데, 이는 전진하는 협상국에 의해서 점령지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3.2. 8월 9일~12일
이제 격전지는 솜 강 북쪽과 남쪽까지 크게 확대되었고, 협상국의 진격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미앵 전투를 시작할때는 500대였던 전차가 불과 6대밖에 남지 않았고, 캐나다군은 혼잡한 도로와 통신 문제로 선두인 영국 제32사단의 진격 속도를 맞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치필리[11]는 여전히 독일군의 손에 있었기에 이곳을 점령해야 했다. 문제는 치필리가 하멜 강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산을 끼고있어 재정비를 마친 독일군이 능선에서 중기관총으로 화망을 형성해 호주군의 하멜 강 도하를 방해했기에, 미국 제33보병사단 3개 대대가 궤멸 직전에 고지를 점령하며 치필리 능선을 점령하게 되면서 협상국은 8월 13일 자정까지 19km을 더 진격하게 된다. 이로써 독일군의 4차 춘계 공세로 얻은 아미앵 돌출부는 함락 당하며 본격적으로 백일 공세가 시작된다.4. 영향
독일 제국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 시키는 백일 공세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투로, 아미앵 전투를 시작으로 협상국이 생미이엘 공세, 뫼즈-아르곤 공세에서 차례차례 독일군을 패배 시키고 힌덴부르크 선을 함락 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5. 매체에서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주인공 유진 킴이 프랑스군 휘하에 배속돼 흑인 부대인 93사단을 이끌고 함정을 파서 이틀만에 독일군 1개 사단을 갈아버리는 어마무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일군이 몽골리안과 깜둥이가 뭘 얼마나 싸우겠냐고 방심했고, 유진이 그걸 간파하고 이용한 것도 있다. 유진이 마을 하나를 일부러 내주고 밀빵과 고기, 술, 담배 등을 마을에 잔뜩 남겨둬서 몇 년이나 이어진 순무의 겨울에 지친 독일군 장병들이 죄다 눈이 돌아가 진격을 멈추고 허겁지겁 먹다가 죄다 배탈이 나 주저앉는 장면이 압권이다. 사단 하나가 통째로 증발한 참사라서 루덴도르프가 당시 사단장이었던 그로덱을 저주하며 물건을 죄다 때려부수는 모습도 나온다.[12]
유진 킴이 1차대전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게 만든 전투이며, 이 때문에 독일군 병사들은 유진 킴과 93사단을 '마이앵의 악마들'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다.[13] 이후 제2차 아미앵 전투도 있었지만 여기서도 독일군이 패배했다는 서술이 있다.
2차대전 파트에서는 원 역사보다 심하게 말아먹은 마켓 가든 작전 이후 독일군 주력이 파리로 남하하자 유진 킴이[14] 아미앵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재림으로 만들어 버려 본작의 대전기 때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1] 영국 본토 10개 사단, 호주 5개 사단, 캐나다 4개 사단[2] 이후 생미이엘 전선도 생미이엘 공세를 통해 아미앵 전투가 끝난 지 한 달 만에 돌파당한다.[3] 만약 독일군이 돌출부를 이용해 공세를 감행한다면 협상국은 그대로 포위될 수 있었다.[4] 호주 제1,2,3,4,5 사단[5] 캐나다 제1,2,3,4사단, 제4전차여단[6] 영국 제3군단 소속 영국 제18,54사단, 호주 제2,3사단, 캐나다 제1,2,3사단[7] 어찌나 빠르게 전진했던지 일부 독일 장교들은 아침식사를 하다가 포로로 잡힐 정도였다고....[8] 아미앵에서 동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9] 아미앵에서 북쪽으로 약 7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10] 캐나다군은 13km, 호주군은 11km, 프랑스군은 8km, 영국군은 3.2km을 전진했다.[11] 아미앵에서 동쪽으로 30km정도 떨어진 마을[12] 이 건에 수치심을 갖고 있던 히틀러는 집권한 뒤 원 역사에서 잘 살다 죽었던 그로덱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기도 했다.[13] 정작 미군 상부에서는 몽골리안과 깜둥이의 전공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개소리를 하다 분노한 유진 킴이 해당 장교를 두들겨패기도 했으며, 이를 알게 된 프랑스군이 영국과 미국을 골려주기 위해 93사단에게 파리 행진을 시켜주고 훈장도 뿌려주는 해프닝도 있었다.[14] 이때는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아이젠하워는 대신 태평양 육군으로 빠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