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제3차 피아베강 전투 Battle of Vittorio Veneto Battaglia di Vittorio Veneto Schlacht von Vittorio Veneto | |||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 이탈리아 전선의 결정적 전투 | |||
날짜 | |||
1918년 10월 24일 ~ 1918년 11월 3일 | |||
장소 | |||
이탈리아 북동부 비토리오 베네토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아르만도 디아츠[[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로이스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 ]] [[틀:깃발| ]][[틀:깃발| ]][[벤젤 폰 부름| ]] | ]][[틀:깃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병력 | 57개 사단, 1,710,000명 (동맹군 183,000명 포함) 총포 7,700문 | 61개 사단, 1,830,000명 총포 6,145문 | |
피해 규모 | 전사 및 부상 37,461명 | 전사 및 부상 8만여 명 포로 448,000명 총 손실 528,000명 | |
결과 | |||
이탈리아의 대승 결정적인 협상국의 승리 | |||
영향 | |||
이탈리아 전선 종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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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attle of Vittorio Veneto제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 10월 24일~11월 3일까지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숨통을 끊은 전투다. 이탈리아 측은 자국을 주축으로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미국 등의 지원군을 포함한 57개 사단을 동원하였고 오스트리아군은 61개 사단을 동원한다.
이탈리아군은 1918년 10월 24일 그라파산 부근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고, 10월 27일부터는 피아베강 동안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탈리아군은 10월 30일 비토리오까지 진격하는 등 전장을 장악하였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 측에서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 동맹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피아베강에서 있었던 세 번째 큰 전투라는 의미로 '제3차 피아베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전개
이탈리아 전선이 개전된지 4년차를 맞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맹국에 불리해져갔다. 카포레토 전투의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의 총체적인 물자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1918년 초 서부전선에 루덴도르프 공세를 통해 마지막 대공세를 가했고, 이를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독일 제국군 병력은 모두 빠지게 되어, 이탈리아 전선은 전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도맡게 되었다. 그러나 오헝군 역시 3년간의 소모전으로 병력과 장비의 부족, 보급의 부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국지적 반격으로 인해 이미 오스트리아군의 개별 사단들은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고 지난해의 카포레토 공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이탈리아군은 유능한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 육군참모총장의 주도로 카포레토의 패전을 수습하고, 피아베강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을 편성했다. 또한 디아츠는 지휘 계통을 유연하게 개혁해, 보다 하급 제대에서도 전진 및 후퇴와 포병의 화력지원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유연한 방어 전술을 짰으며, 프랑스군 장교와 영국원정군 장교단의 도움으로 서부전선에서 활용된 종심 방어 전술을 훈련시켰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총참모장은 독일군의 춘계공세에 맞춰 오헝군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전투를 끝내기 위해, 마지막 대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가 이끄는 제5군과 제6군은 피아베 강 지역을 따라 6월 15일 총공격을 가했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제10군 제11군은 비젠차 지역에서 트렌티노 고원능선을 따라 양면공격을 시작하면서 피아베강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선제포격과 촘촘한 방어선으로 오헝군은 피아베강을 건너 교두보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다음날 보로예비치의 두 번째 공세 역시 전날 싸움에서 피아베강 다리는 완전히 파괴되어 실패했으며, 강변 소규모 교두보를 만든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만명이라는 대량의 전사자를 내고 있었다. 19일 디아츠는 반격을 명령해 강둑의 교두보를 탈환했고, 23일 오스트리아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트렌티노 공세도 4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으며, 이 패전으로 회첸도르프는 쥐트티롤 집단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1]
한편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직전 벌어졌던 이 피아베강 전투에서 이탈리아는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손초 전역에서의 막대한 손실과 카포레토 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트라우마인지 대규모 공격을 꺼리고 있었으나 협상군 총사령관을 맡은 포슈 장군의 명으로 결국 대규모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은 우선 피아베강을 건넌 뒤 비토리오 베네토로 진격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알프스 산맥 남단까지 진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디아츠는 10월 24일 그라파산 공격을 시작으로 공세를 명령했다. 그 전날 피아베강을 도하한 이탈리아군은 3일째가 되는 25일 제10군이 도하의 중요 거점인 파파도폴리를 점령하고, 공세 5일째에는 강안선을 따라 상륙 지점을 확보했다. 28일 보로예비치는 피아베강의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탈리아멘토를 향해 전군퇴각을 명령했다.
이탈리아 10군이 피아베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선을 무너트린 뒤인 30일, 비토리오 베네토가 탈환되었고 오스트리아 방어군 주력은 양분되어 이탈리아군에게 포위당했다. 더군다나 전투 도중인 31일 제국 주축이었던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여 공화정을 선포하는 악재가 터지면서 전황은 더 악화되었다.
11월 2일, 이탈리아군의 기세를 탄 공격에 오스트리아 탈리아멘토가 점령되었고, 완전히 싸울 의욕을 잃은 오스트리아는 이튿날 휴전을 제의해 전투가 끝났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2주 뒤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카를 1세가 퇴위하면서 제국은 멸망하게 되어 결국 길게는 645년, 짧게는 392년 정도 이어진[2]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동부유럽 지배도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전투의 지휘관인 아르만도 디아츠는 앞선 피아베강 전투 또한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고, 공적을 인정받아 '승리의 공작'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된다.
3. 분석
이탈리아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은 이탈리아군의 작전이 훌륭했던 것 외에도 오스트리아군의 상태가 개판이었던 등의 요인도 작용했다.- 독일의 지원 불가
독일도 오스트리아가 버텨줘야 그 병력이 자기네 남부 지방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가 침략당하면 기분이야 어쨌든 성의껏 도와주고 있었다. 하지만 1918년 10월이 되면 독일도 루덴도르프 공세 실패 이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총공격을 받고 전선 자체가 무너지는 중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항복이 11월 2일이었는데 독일의 항복은 11월 11일이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지원을 해줄 수가 없었다.
- 오스트리아의 병력 부족
이손초 전투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병력을 이탈리아군에게 갈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제 코가 석자인 독일이 지원을 포기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여러 적성국이 힘을 모은 협상군을 혼자서 상대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병력 우위는 불과 4개 사단 12만 명 더 많은 정도였는데, 공세를 취하는 협상국 측은 당연히 자국을 지킬 병력은 남겼을테니 이것은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근거가 된다.
- 오스트리아 내부 사정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는 이미 내전만 안 일어났지 내부적으로는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탈주는 기본이요 적전도주도 밥먹듯이 일어났고, 당장 위의 기록만 봐도 포로가 40만 명이 넘는다. 저게 진짜 기록대로라고 해도 전 병력의 25%나 되는 숫자가 그대로 포로로 넘어갔다는 것. 그 정도로 오스트리아 내부 사정은 좋지 못했고 꽤 전에 벌어진 10월 전쟁의 패전을 기점으로 오스트리아 멸망은 카운트다운만 재던 상황이었다. 당시 오헝제국의 기록만 봐도 독일계, 헝가리계 사람들도 전쟁에 지쳐서 학을 떼고 있었으며, 이 전투 도중 헝가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정을 선포하게 된다. 제국을 이끌어 나가던 독일계, 헝가리계 사람들이 이 정도였으니 슬라브계나 이탈리아계, 루마니아계 사람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상황이었다. 협상군이 진격하면 슬라브계 병사들은 그냥 대거 항복하는 경우도 많았다.
4. 대중매체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의 캠페인 미션 중 하나인 사보이아 만세!!와 오퍼레이션 모드 중 하나인 철벽이 이 전투를 배경으로 했다. 그 중에서 제3차 피아베강 전투를 배경으로 한 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