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피아베강 전투 제2차 피아베강 전투 Second Battle of the Piave River Battaglia del solstizio Zweite Schlacht am Piave | |||
시기 | |||
1918년 6월 15일 ~ 6월 23일 | |||
장소 | |||
이탈리아 왕국 피아베강 | |||
동맹국 | 협상국 | ||
교전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제3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 | ]][[틀:깃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아르만도 디아츠|
전력 | 946,000명 야포 6,833문 항공기 540기 | 965,000명 야포 5,650문 항공기 676기 | |
피해 | 118,042명 | 87,181명 | |
결과 | |||
이탈리아 왕국의 결정적 승리 | |||
영향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의 급감 |
강 너머로 포격을 가하는 이탈리아군 |
전투를 준비하는 이탈리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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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피아베강 전투와 구분되어 제2차 피아베강 전투로 불리지만 솔스티스 전투(Battaglia del Solstizio)' 또는 '6월 방어 전투(Battaglia difensiva del giugno)'로도 불리고, 독일어로는 제2차 피아베강 전투(Zweite Schlacht am Piave)나 제2차 피아베강 공세(Zweite Piaveschlacht)로도 불린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의 결과를 사실상 결정지은 전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참패하였다.2. 배경
1915년 이탈리아 전선 개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양측은 험준한 알프스산맥에 틀어박혀 큰 전선의 이동 없이 수만~수십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이손초 전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의 하드캐리를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이탈리아가 참패하면서 12차례에 걸친 이손초 전투가 종결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탈리아 영토 내로 진격하였다. 카포레토 전투의 참패 이후 이탈리아군은 일시적으로 붕괴해버렸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역시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면서 이탈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그리파 전투에서 간신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1918년이 되면서 동맹국은 사실상 한계에 다다랐으나 동부전선의 러시아가 사실상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여유가 생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번에야말로 이탈리아를 끝장내어 이탈리아 전선을 종결하고자 하였고 마지막 남은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국가의 운명을 건 공세를 기획하였다.
한편 카포레토 전투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가 점령되고 시칠리아로 밀려나도 항복은 없다면서 항전의사를 불태웠고 국가의 호소에 청년들의 자원입대 역시 줄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목표는 베네치아 지역을 점령하여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였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선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베네치아 사이의 유일한 자연적 방어선인 피아베강에서 양측의 운명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3. 전투
6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공격을 시도했는데, 역 ~자 모양의 피아베강 중 회첸도르프의 군대는 돌출된 중류 지역을, 보로예비치의 군대는 남쪽으로 꺾인 강 하류 지역을 돌파하여 이탈리아군을 포위하려 했다.보로예비치의 군대는 강을 따라 늘어선 이탈리아군 참호에 포격을 가하고 도하를 시도했다. 이탈리아군의 저항으로 일시 후퇴했으나 이내 재차 공세를 펼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협상국 항공기와 포병의 맹공으로 다리가 파괴되어 보급이 어려워졌다. 이탈리아군은 고립된 채 강 건너에 발이 묶인 보로예비치 군을 집중 공격했다. 결국 6월 19일, 보로예비치는 교두보를 포기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조직적으로 물러서는 대신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혼란에 빠졌다. 이를 이용한 이탈리아군이 측면을 공격하며 오스트리아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포격과 백병전, 익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회첸도르프 휘하 부대 역시 제2차 그라파산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에게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22일까지 10만 명 이상의 손실을 기록한 오스트리아군은 카를 1세 황제의 철수 명령에 따라 공세를 멈추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4. 영향
이탈리아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처음에는 이 전투의 의미를 트렌티노 공세처럼 단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좀 큰 규모의 공세를 방어해낸 전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공세는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쥐어짜낸 것이었으며 전투의 패배로 안그래도 삐걱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모든 역량을 소진하며 사실상 멸망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이 전투의 패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넘어 동맹국 전체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는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 전투의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패전을 직감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해당 전투를 패전의 위기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전투로 평가하며 신이 승리를 도왔다는 식의 선전화가 쏟아져 나왔고 피아베 강의 전설과 같은 노래가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