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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2:15:22

맥마흔 선언

1. 개요2. 상세3. 참고문헌4. 관련 문서

1. 개요

McMahon Decla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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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프 후세인과 맥마흔

1차 세계대전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 헨리 맥마흔[1]이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빈 알리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아랍 봉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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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튀르키예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튀르키예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튀르키예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벅차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이자 하심 가문 아미르인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영국은 후세인 빈 알리에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후세인 빈 알리를 도왔다.[2]

그러나 영국과 후세인의 약속은 애초에 지켜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실효성이 전혀 없었다. 전쟁중의 독립 약속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고작 무장반란을 일으킨다고 해서 중동 전역의 군주로 인정한다는건 전혀 별개의 일이며, 무엇보다 영국 자신도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없었다. 1차대전 전후협상에서 절반은 프랑스의 몫으로 돌아가는데 영국이 현지인들에게 무슨 약속을 했건 프랑스의 입장에선 알바아닌 문제 였으며 대 오스만 전쟁에서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갈아넣은 프랑스의 전후 요구를 막을 명분도 힘도 없었다. 이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3]

한국에선 맥마흔 선언 vs 밸푸어 선언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후세인- 맥마흔 서한이 무시된 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아랍인들의 입장과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외교전이었지만, 사실 이후 중동전쟁에서 이 문제를 탓하는건 사실이 아니다. 이 맥마흔 선언 자체부터 후세인 빈 알리 사병과 아랍인들의 비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공작일 뿐, 정작 아랍인들 스스로 메카의 군주에 불과한 후세인 빈 알리의 치하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중동 종교관상 무함마드의 직계후손이 칼리프를 자칭할 경우 자연스레 시아파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름마저 하필 후세인 빈 알리인 사람이 칼리프를 자칭하는건 순니파 종교학자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와하브파의 반감을 사 메카의 군주자리까지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라크를 통치하러 갔던 후세인 빈 알리의 아들은 공개처형된다. 요르단만이 하심가문의 몫으로 남았는데, 이는 요르단이 아랍인 주류에게 차별받던 베두인들의 집단이었던지라 왕국을 형성한 이후에도 다른 아랍국가들에게 국가로서 인정받을 권위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마침 축출된 하심가문의 권위를 이용해 다른 중동 아랍인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받아들인 것 때문이다. 하심가문이 중동 전체의 칼리프가 되겠다고 해서 어그로가 쏠려 아랍인의 공적이 되고 본거지까지 털렸지만, 그렇다고 멸문하기에는 메카의 수호자를 세습했던 가문의 타이틀,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여, 마지막 봉지까지 쳐들어가서 멸문하는건 그 역시 종교적, 정치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90쪽.

3. 참고문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은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터키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터키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터키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중략) 영국의 제안은 당시 메카의 군주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애드워드 로렌스가 그를 도왔다.
13쪽, 15쪽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13쪽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실망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은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5쪽

4. 관련 문서



[1] 맥마흔 라인도 이 양반 작품이다.[2]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15쪽[3]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