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협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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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등장한 포스터. 우유부단한 제스쳐의 프랑스(좌), 영국(우)과 달리 단호한 표정의 러시아(가운데)가 인상적이다.
1914년 당시의 유럽 세력도. 녹색이 삼국 협상 가입국이며 카키색이 삼국 동맹 가입국이다.
1. 개요
프랑스 제3공화국 | 러시아 제국 | 영국 |
Тройственная Антанта[2]
1907년 구성된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사이의 연합. 삼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성격이 짙었으며, 이러한 두 동맹 간의 세력 대결 구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2. 배경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로 독일 제국이 창설된 이후 유럽의 세력 구도는 천재적인 외교 수완을 자랑하는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20년 가까이 좌우된다. 이른바 비스마르크 체제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세력 구도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장 노력한 점은 바로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이 시기에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독일 제국을 향해 보복(Revanche)의 칼날을 벼르고 있음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과 삼제동맹을 체결했다. 삼제동맹은 발칸 반도를 둘러싼 오•헝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파기되기도 했지만, 독일 제국은 1887년 오•헝 제국 및 러시아 제국과 불가침조약의 하나인 재보장 조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3]하지만 '비스마르크 체제'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외교전략은 오로지 비스마르크 개인의 천재적인 외교 수완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젊은 빌헬름 2세에 의해 실각되자마자 비스마르크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젊고 혈기왕성했던 새 황제의 즉위 후, 독일은 세계 정책(Weltpolitilk)이라는 명목으로 비스마르크가 구상했던 모든 외교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단계가 러시아 제국과의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거부했던 것이다.[4][5]비스마르크는 1890년에 러시아와 조약이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독일 외교관들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과 모순되는 재보장 조약의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비스마르크의 독단적인 국정운영에도 질려 조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이는 1894년 전격적으로 러불동맹이 체결되면서 독일 입장에서는 양면전쟁이 불가피하게 만들게 된다.
3. 창설
하지만 1894년 러불동맹이 창설되던 시점에서 영국이 가담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고립주의를 준수해 왔던 데다가, 프랑스, 러시아 모두와 사이가 극악[6]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영국은 더 이상 19세기 중반과 같이 독보적인 국력의 소유자가 아니게 됐고, 이로 인해 영국 내부에서 '우리도 동맹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추파를 던진 것이 바로 독일. 당시 영국 왕실이 하노버 왕국 출신이었던데다가, 양국 모두 게르만 계통의 민족[7]이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호감이 어느 정도 존재[8]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측은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9]의 주도하에 1898년과 1901년 사이에 진지하게 동맹을 맺기 위해 3번이나 회담을 가졌으나 막판단계에서 결렬되고 만다.동맹 결렬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우선적으로 지목해야 할 점은 동맹으로 상대에게 지녀야 할 책무에 대해서 양 국가가 생각했던 차이가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유럽 내의 일에 (대륙 내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고립주의의 전통을 200년 가까이 지녀왔던 영국은 독일과의 동맹에서 군사적인 의무를 명기하기를 매우 꺼렸던 반면, 독일은 제3국과의 전쟁이 발발했을 시 영국이 독일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주기를 동맹의 조건에 반드시 포함시키기를 원했고 이러한 이견에서 양국은 끝끝내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10] 또한 민주주의가 약했던 독일 제국은 이 동맹을 비밀로 유지하길 원했던 반면, 영국은 공식적인 의회의 재가를 받기를 원했던 사실 역시 중요한 점이다. 만약의 의회의 재가를 받지 않고 동맹을 유지했을 경우에는 영국에서는 정권교체가 일어났을 때 언제든지 동맹이 파기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11]
비록 동맹 체결은 결렬됐지만, 최소한 영국을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남겨둬야 하는 상황에서 빌헬름 2세의 외교적 실책이 연달아 터져나온다. 당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를 사탄이라고 까지를 않나,[12] 대놓고 '대양함대 건설'을 부르짖으며 영국와 건함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13] 그리고 이는 또 하나의 엄청난 외교적 혁명을 가져온다. 영국이 오랜 원한을 잊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1904년 체결한 데 이어, 1907년에는 러시아 제국과도 영러협상을 체결한 것이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삼국 동맹과 자웅을 겨루는 또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 사이의 동맹체인 삼국 협상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시 영국을 자극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빌헬름 2세도 영국이 참전하는걸 극히 꺼려 간신히 영국과 협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기존에 세워놓은 슐리펜 계획 때문에 독일군은 벨기에를 침공, 영국이 보증한 벨기에 중립이 짓밟히자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4. 여담
- 1904년 영불협상 체결 당시,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원한이 쌓일 대로 쌓였던 터[14]라 자국 외무장관한테 '너 머리에 총맞았냐'라는 식의 비난이 쇄도했지만 워낙 공공의 적이었던 독일 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지라 생각보다 쉽게 여론의 반발을 무마했다고 한다.
- 당연히 독일도 바보가 아니라서 삼국 협상을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를 여러번 했다. 러일전쟁 이후 금융위기에 빠진 러시아 제국에게 막대한 금융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러불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막대한 쇼미더머니에 밀리고 만다.[15] 가장 유명한 시도가, 러일전쟁으로 영국에 이를 갈던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가 1905년 7월 24일, 핀란드 만의 비외르쾨 섬에서 만나 독러 비밀 군사동맹을 합의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비외르쾨 밀약이라 부르는 것으로 실현되었다면 비스마르크 체제로의 복귀, 하다못해 동부국경을 안정시키고 프랑스에 올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러시아 두마에서 강력히 반발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 사실 독일은 1905년 1차 모로코 위기 때부터 자국이 실질적으로 왕따가 되었음을 실감해야만 했다.[16]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로코의 독립과 문호개방을 요구했는데 영국이 프랑스의 편을 들어줘서 망신만 당하고 만 것이다.
[1]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2] 러시아어[3] 상호불가침 조약은 아니었고, 제3국과 상대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지킬 것을 명시한 조약이었다. 그리고 이 제3국은 말이 좋아 제3국이지, 그냥 프랑스를 의미했다.[4] 당시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원했었고, 독일 입장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갱신할 것을 제안했다.[5] 영국과는 크림 전쟁 이후 발칸 반도 진출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던 사이였으며, 프랑스와는 프랑스 혁명 이후 퍼져나온 각종 자유주의 이념으로 인해 차르 독재체제를 고수하려던 러시아 제국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었다. 프랑스와도 크림 전쟁에서 한판 붙기도 했었다.[6] 프랑스와야 뭐, 모두가 알다시피 몇 백 년 동안 라이벌 관계였고 러시아와도 러시아 제국의 세력확장을 막느라고 크림 전쟁, 거문도 점령 사건 등등 전세계에서 머리채(...) 잡고 싸웠다.[7] 영국 앵글로색슨의 색슨이 바로 독일의 니더작센이다.[8] 대놓고 당시 독일 황실과 총리가 '우리 같은 튜튼족인데 친하게 지내요'하고 다녔다.[9]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네빌 체임벌린의 아버지이다.[10] 실제로 이후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영불협상에서도 군사적인 의무를 명기하지는 않아서, 사라예보 사건 이후 일련의 위기 사태에서 프랑스는 영국의 참전 확약을 받아내기 위해 전전긍긍해야했고,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이 1914년 8월에 즉각적으로 프랑스를 도와 1차대전에 참전했을지 여부는 오늘날까지도 외교학 분야와 역사 분야에서 꽤나 핫한 논쟁거리이다.[11] 대표적으로 이 회담이 열리기 바로 직전에 영국 총리를 지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경우에 상당한 혐독주의 성향으로 유명했다. 사석에서 비스마르크를 악의 화신으로 간주하는 발언도 수차례 남겼을 정도.[12] 사실 빌헬름 2세 입장에서는 에드워드 7세가 싫을 만 하기는 했다. 그가 삼국 협상을 성사시켜 독일을 견제했기 때문이다.[13] 영국은 섬나라고 자국의 안보는 해군에 많이 의존한다. 더욱이 이 시대엔 공군이란 게 없으니 더욱 그럴 테고. 그러니 영국 입장에서는 특정 국가의 해군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14] 당장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전이 터질뻔한 파쇼다 사건이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15] 물론 당시 독일이 프랑스보다 경제 규모도 크고 산업화도 잘 되어있었다. 이 당시 프랑스는 인구나 경제 규모에서 독일의 6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 비해 산업화만 뒤쳐졌을뿐 금융업, 농업, 등의 분야에서 프랑스는 당시의 독일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러한 저력을 통해 프랑스는 러시아에 대규모 차관을 지원했고,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들여온 차관들을 통해 철도와 같은 인프라 확충과 군비 확장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에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동원 능력을 보여주며 독일의 동부 전선에 군사적 압박을 가했고 이는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EU의 농업, 축산업 생산의 40%를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을 만큼 독일-오스트리아는 단 한번도 인구부양력에서 프랑스를 넘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 때만 해도 프랑스군이 독일에 쳐들어 갔을 때 "프로이센 왕국에는 왜 숲 밖에 없어?!" 라면서 불지르고 돌아 다녔을 정도.[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야 뭐 19세기 후반부터 내림세를 타던 국가였고, 국가의 구성 인종이 너무 다양한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 자체가 타 열강들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아예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통일과 산업화를 이뤄내며 일본과 함께 열강 말석을 간신히 차지하게 된 국가였기에 훨씬 이전부터 통일된 국가와 산업화를 이루고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통적인 열강들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국력이 매우 후달렸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인구라도 많았지만 이탈리아는 오스만과 함께 1차 세계대전 참전 열강 중 인구수가 4000만도 되지 않던 둘 뿐인 국가였다. 그것도 물론이거니와 전반적으로 동맹국 지원에 대해 무관심. 그리고 1차대전에서는 기어이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