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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센트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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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퍼센트합의.jpg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간의 비밀 합의 노트. 남동유럽 유수 국가들의 미래가 단 2명과 하나의 메모지에서 정해졌다.

1. 개요2. 배경
2.1. 영국의 배경2.2. 1944년의 유럽
3. 합의 내용
3.1. 불가리아3.2. 그리스3.3. 헝가리3.4. 루마니아3.5. 유고슬라비아3.6. 기타
4. 영향5. 여담

1. 개요

영어: Percemtages Agreement
러시아어: Соглашение о процентах

1944년 10월 제4차 모스크바 회담 중에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사이에 맺어진 비밀 비공식 합의. 남동유럽(발칸반도) 국가들을 서방과 소련의 영향권을 정하면서 각 국가들마다 퍼센트로 분할하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 합의의 당사자는 아니었으나 모스크바 회담에서 본인을 대리하기 위해 주소 미국 대사인 애버럴 해리먼을 보냈지만 하리만은 퍼센트 합의에서는 지속적으로 배재당하였고 추후 루즈벨트가 이 합의에 대해서 전해듣고서 합의안을 수용하였다.

이 비밀 합의 내용은 1953년 처칠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개되었다. 다만 소련은 1958년에야 이 합의가 존재하였음을 인정하였다가 다시 부정했다. 수많은 국가들의 미래가 두 사람이 메모를 두고 나눈 회담에서 결정되었다고 하면 이를 좋게 볼 일은 없었으니...

2. 배경

2.1. 영국의 배경

윈스턴 처칠은 극렬한 반공주의자이면서도 현실주의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더 강력해지고 동유럽에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주장할 것을 직시하였으며 이 전쟁으로 영국은 약해지고 미국에 더 종속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처칠은 미국이 2차대전 이전처럼 고립주의로 회귀할 것을 우려했고 이에 보험 삼아 소련으로부터 영국과 서방을 위해 남동유럽에서 최소한의 이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더불어 인도를 비롯한 동방 식민지의 안정을 위해서는 영국이 수에즈 운하와 그곳으로 가는 항로의 안전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그리스가 공산화되지 않는 것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었다.[1]

2.2. 1944년의 유럽

1944년 7월 22일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면서 중부집단군을 분쇄했고 루마니아로 진격하면서 발칸반도에 진입했다. 이에 루마니아 왕국의 왕 미하이 1세이온 안토네스쿠를 해임한 후 소련과 강화를 맺고 독일과 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독일군은 헝가리로 진주하여 소련과 단독 강화협상을 시도한 호르티 미클로시를 납치하고 살러시 페렌츠화살십자당을 옹립했으며 불가리아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급변하는 발칸의 상황에 따라 동유럽의 미래에 대한 합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이러한 합의로 이어졌다.

3. 합의 내용

국가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영향력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영향력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75% → 80% 25% → 20%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10% 90%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50% → 80% 50% → 20%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90% → 100% 10% → 0%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50% 50%
회담 중 처칠이 메모에 영향권 분할을 숫자로 써서 스탈린에게 넘겼는데 스탈린은 그 숫자들 중 동의하는 것들에는 ✓를, 그 외에는 자신히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분할 숫자를 덧쓰고 돌려줬다. 위의 표는 이를 나타낸다.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들은 처칠이 쓴 숫자에 스탈린이 동의한 경우, 화살표로 숫자의 변동이 있는 경우는 스탈린이 숫자를 바꾼 경우다.

3.1. 불가리아

4차 모스크바 회담 자체가 불가리아 문제에 관하여 성사되었기 때문에 불가리아 문제에 대해서 영국과 소련 간 어느정도 충돌이 존재하였다.

첫째로 영국은 불가리아의 국경이 1941년 이전[2]으로 환원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소련이 친러 성향이 있는[3] 불가리아의 확장을 용인할 것을 우려했다. 4차 모스크바 회담 직전까지 소련은 그리스에 거주하는 불가리아인들의 체류를 용인했는데 이는 처칠에게는 소련이 불가리아의 구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유지시키고 에게 해[4]로 진출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5] 따라서 소련은 불가리아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로의 확장은 되돌려질 것이라고 합의했다.

4차 모스크바 회담 당시는 소련군이 불가리아로 진주하고 있던 상황인데 이에 따라 불가리아와 연합국간 맺어질 강화 협정도 논의에 올랐다. 소련은 루마니아와 맺어진 강화협정과 같이 불가리아에 세워질 연합국 관리 위원회(Allied Control Commission - ACC)는 소련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였으나 미국은 이에 반대하여 불가리아의 ACC는 미국, 영국과 소련의 합치된 명령에 따라 행동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스탈린은 영국이 소련의 강화안에 동의한다면 소련은 20%까지는 영국의 영향력을 보장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추후 불가리아의 ACC는 소련 참모부의 명령을 받되 명령 프로세스에 미국과 영국 정부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3.2. 그리스

처칠은 유고슬라비아까지는 일부 양보가 가능해도 그리스만큼은 영국의 지중해 패권 유지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독점적 영향권 하에 놓기를 원한다고 스탈린에게 전했다. 스탈린은 처칠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했고 특히 영국이 2차대전 당시 지중해 재해 재공권을 잃으면서 겪은 애로 사항에 공감하여 처칠의 90:10 분할을 동의했다.

다만 스탈린은 처칠이 지중해 이권을 주장하여 그리스에서의 독점적 영향권을 주장한 것에 맞받아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영국지중해 이권이 중요한 만큼 러시아흑해 이권이 중요하다.
여기에 이어 스탈린은 1936년 몽트뢰 협약이 소련에 불리하게 맺어졌으며 소련은 터키 해협[6]에 독점적인 권한을 원한다고 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영국이 이집트의 의사에 반해 수에즈 운하를 점유하고 있는 것과 미국파나마의 의사와 상관없이 파나마 운하점유하니 소련이 터키 해협에 권한을 얻는 것이 공평하다 덧붙였다.

이러한 스탈린의 주장에 처칠은 동의하였으나 터키를 즉각 압박하여 이러한 권한을 얻어내는 것에는 우려를 표하였고 소련이 터키에 점진적인 압박을 가해 권한을 얻어내는 것은 묵인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스탈린도 소련군은 그리스에 진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거기에 더해 영국은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7]이 전후 그리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소련이 EAM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8] 소련은 이미 EAM에 영국 군정에 협조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EAM은 이에 불복종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탈린은 이 요구도 문제 없이 수용했다.

3.3. 헝가리

3.4. 루마니아

처칠은 루마니아를 "러시아의 문제"(A Russian affair)라고 지칭하여 소련에 90% 영향력을 보장하였으며 소련이 루마니아와 맺은 강화 협정을 두둔했다. 루마니아는 그리스와 함께 퍼센트 합의에서 가장 잡음 없이 합의가 이뤄진 사례였다.

3.5. 유고슬라비아

3.6. 기타

부차적으로 미국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이 얻은 영토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합의에서 스탈린과 처칠은 처칠이 소련의 팽창을 인정하는 한편 홍콩을 비롯한 동방 식민지의 유지에 소련의 지지를 얻어냈다.

4. 영향

훗날 얄타 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퍼센트 합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창설될 국제연합에서 다시, 더 상세하게 다루자고 주장했고 이후 냉전의 개전으로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국가들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퍼센트 합의에서 논의된 국가들의 운명은 퍼센트 합의안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었다. 영국 영향력이 다수를 점한 그리스는 제1세계의 일부가 된 한편 영국-소련 영향력이 50:50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냉전에서 중립을 취하게 되었고 소련 영향력이 다수를 점한 나머지 국가들은 그대로 동구권의 일부가 되었다.

처칠은 퍼센트 합의가 소련이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고 전략적 가치가 덜한 발칸 내륙국가들을 내주고 그리스가 서방 세계에 남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합의가 드러난 후 미국에서는 처칠이 국가들의 의사 없이 "권력정치"를 행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5. 여담



[1] 이는 테헤란 회담에서 영국이 제2전선 개전 위치로 이탈리아 상륙을 주장한 이유기도 하다.[2]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전[3] 불가리아는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4] 지중해의 일부[5] 영국이 영향력을 원한 유고슬라비아그리스로의 불가리아 확장을 경계했기 때문에 처칠은 불가리아가 루마니아로부터 얻은 남도브루자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새우지 않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지못미...[6] Turkish Straits. 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일컫는 명칭이다.[7] 그리스 공산당이 이끌던 그리스의 좌익 파르티잔 단체로 당대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세력이 큰 무장조직이었다.[8] 소련은 이때까지도 그리스 공산당에 대해 물적, 인적 지원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