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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22:23:40

쿠바 미사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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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Cuban Missile Crisis, Missile Scare (영어)
Карибский кризис[1] (러시아어)
La crisis de los misiles en Cuba, Crisis de Octubre (스페인어)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cuban_missille.gif

1. 개요2. 배경
2.1. 힘의 불균형2.2. 쿠바의 상황
3. 전개
3.1. 아나디르 계획과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3.2. 발각과 미국의 대응3.3. 치킨 게임3.4. 검은 토요일3.5. 미사일 철수
4. 후일담5. 가정
5.1. 미군이 쿠바에 상륙했을 경우5.2.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5.2.1. 유럽5.2.2. 아시아
6. 미디어

1. 개요

"회의를 끝내고 백악관을 나오면서 노을이 드리운 가을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음주 토요일이 오기 전에 다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공포에 휩싸였다."
로버트 맥나마라(당시 미합중국 국방장관)[2]

"우리는 전쟁 직전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군사적 긴장 상태를 창출했고, 그런 후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미친 니키타가 우리들을 엄청난 혼란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
페트로 셸레스트(당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겸 키예프 시장), 1962년 11월.
소련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1962년 10월 16일부터 28일까지 대립한 군사 위기. 냉전 중 세기의 대립 사건이자 냉전의 절정이라고도 평가된다. 청중비용 이론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2. 배경

2.1. 힘의 불균형

당시 미군이 보유한 소련에 투발 가능한 핵전력은 미 본토에서만 탄도탄 170여 기에 B-52 전략폭격기 555대였다. 투발 가능한 전략핵탄두만 총 1,830기. 여기에 서유럽에는 중거리 핵전력까지 배치되며 소련 영토를 사거리에 두고 있었다.

반면에 소련군이 가진 건 고작 66기의 ICBMSLBM 뿐. TU-95 전략폭격기를 동원해도 차이가 커도 너무 커서 선제 핵공격을 통해 미국을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실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소련은 얼마 안 되는 핵무기를 다 사용하고 나서는 미국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냥 맞아줄 수밖에 없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당시의 핵전력 비율은 17:1

게다가 미국은 터키이탈리아에도 주피터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터키에서는 모스크바를 사거리 안에 두고 있었다. 반면 소련으로선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 타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소련 정부와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니키타 흐루쇼프 이하 소련 지도부는, 이러한 전략적 불균형 상황에서는 소련에게 무조건 항복과 저항 말고 그 어떠한 중간 선택지도 없다고 여겼고, 미국에 대한 매우 도발적이고 공세적인 외교 전략으로 나가게 되었다. 마침 새로 당선된 케네디를 애송이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와의 첫 회담에서 그를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위협했고, 소련의 미사일과 핵 공격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마치 한 판 붙을 것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는 흐루쇼프가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을 통해 미국 역시 핵전쟁을 두려워하므로 이를 빌미로 협박하면 물러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소련의 정보를 잘 알지 못했고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소련에 대한 공포로 미국은 정작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었다.[3] 하지만 미국은 소련이 설마 소련 바깥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도발적인 전략을 취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이미 소련이 동독에 준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를 배치했던 전례를 볼 때 이는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니키타 흐루쇼프는 즉흥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련 군부는 흐루쇼프의 핵만능주의와 미사일 올빵에 불만을 품었지만 미국에 대한 도발은 지지했고, 소련군 총참모장 세르게이 비류조프 육군 원수쿠바의 야자수 나무들로 핵미사일을 완벽히 숨길 수 있다는 보고까지 올렸다. 결국 소련은 쿠바에 5만 명의 육군 병력과 전략로켓군 ICBM 기지, 해군 기지 설치 계획을 승인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요약하면, 50년대말 실제 핵전력은 미국이 우월했지만, 소련은 스푸트니크 쇼크[4] + 가가린의 유인 우주비행 + 루나 탐사선의 달 명중과 같은 발사체 홍보효과 + 철의 장막으로 정보 은폐에 성공해 소련이 미국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뻥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와중에 소련은 뻥이 아니라 실제적인 타격능력을 가지기 위해 쿠바를 주목했고, 안 그래도 자국이 전력상 동등 이하라 생각한 미국은 크나큰 위기감에 빠졌다.

2.2. 쿠바의 상황

"쿠바를 보호하는 것 외에 우리 미사일은 서방이 '힘의 균형'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것을 대등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적의 미사일이 당신을 겨냥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간부회에서 발언.
쿠바 혁명 정부의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혁명 성공 이후 유나이티드 후르츠로 대표되던 여러 서방계 자본을 추방하고 토지를 국유화하는 등, 미국이 중남미에 다져놓은 정책적 기반을 흔들었다. 그 결과 미국정부는 CIA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 제거를 시도했고, 피그만 침공을 진행하는 등 쿠바에 대한 미국 정부의 물리적 경제적 압박이 이어졌다. 쿠바 정부는 피그만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미국에 제대로 한방을 먹이긴 했으나, 세계 최강국 미국의 앞마당에 있는 현실상 미국을 혼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카스트로는 대놓고 밀어들어오려는 미국의 위협에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바깥 기둥을 마련하고자 소련에 협력을 요청했다.

한편 소련의 흐루쇼프도 서방 압박용으로 시도했던 1961년 베를린 위기와 장벽설치가 오히려 서방국가들을 단합시키는 결과만 가져왔고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엄청난 투자를 했던 핵미사일 사업도 생각보다 효과가 적어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장거리 탄도미사일 생산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재래식 무기에 대한 투자 감소로 인하여 소련 군부의 불만까지 사고 있었다.

이러던 와중에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카리브 해의 긴장이 강화되자 흐루쇼프는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였고,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공산주의 확산이란 세계적 목표를 바탕으로 쿠바를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쿠바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여겼다. 거기에 소련 지도부, 엘리트,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고, 이들 제3세계 혁명가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까지 있었다.

3. 전개

3.1. 아나디르 계획과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나는 존 F. 케네디불알을 움켜쥘 거요."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7월 소련을 방문한 라울 카스트로에게 말하길.

소련과 쿠바 사이에는 긴밀한 비밀 연락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 결과 쿠바는 자신들 영토 내에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쿠바는 미국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쿠바의 요청은 소련의 치명적인 핵전력 열세를 일거에 평형 상태로 바꿀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이미 대량 생산된 중거리 탄도탄을 쿠바에 배치해 미국에 대한 추가적 공격 수단을 갖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흐루쇼프는 1962년 5월 21일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결정하였고, 간부회는 이 결정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카스트로와 흐루쇼프는 1962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합의한다. 이 계획은 서방을 속이기 위해 마치 시베리아에서 벌어지는 작전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시베리아의 아나디르 강의 이름을 따서 아나디르 계획이라 불렀다. 이 아나디르 계획은 5만명의 소련군과 해군기지의 쿠바 배치 역시 포함하고 있었으며, 소련 군부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쿠바에 사정거리가 워싱턴 D.C.를 비롯한 미국 동남부에 달하는 R-12 미사일과 여기에 탑재할 핵탄두를 9월 8일과 16일에 나누어서 보내주고, 이후 당연히 미사일 기지를 만들 전문 인력과 장비를 배달한다. 이 미사일 기지는 총 9개의 사일로를 가졌는데, 이 중 6개는 R-12를 위한 사일로이고 나머지 3개는 이후 설치될 R-14용 사일로였다. R-14는 미국 본토의 워싱턴 주를[5] 제외한 미 본토 전역에 핵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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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4 미사일

9월 말, 미국 신문들은 소련 선박이 쿠바로 무기를 이송 중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그 발표가 맞다고 절대적인 보장을 해주었다. 케네디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3.2. 발각과 미국의 대응

그렇게 기지가 건설되던 중 1962년 10월 14일,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U-2가 찍은 항공사진이 펜타곤백악관에 전달됐다.[6] 이전에도 CIA의 첩보 활동으로 쿠바에 핵무기가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는 이전부터 파악되고 있었지만, 케네디는 증거가 없다며 이를 믿지 않았다.

쿠바에 미사일이 들어갈 때는 소련 총참모부 특별팀과 정보 기관이 집행했기 때문에 완벽한 보안을 유지했다. 하지만 들어가고 난 뒤에는 보안이 형편없어졌는데, 이 일을 쿠바 주둔군 사령부에서 인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둔군 사령관은 육군 포병 출신의 이사 플리예프 장군이었다. 흐루쇼프의 총애를 받는 플리예프는 가짜 여권으로 입국했지만 정체가 들켜도 전략로켓군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로켓과는 관계없다고 판단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하던 사령관 자리는 못얻었어도 부사령관과 참모들은 전부 전략로켓군 출신이 차출되었다. 서로 출신이 다른 부대들은 융화되지 못했고 쿠바에서 각자 하던대로 임무를 수행하다 모순된 행동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기밀 임무였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환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 임무만 수행하게 되어 더더욱 조율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따로 쿠바에서의 미사일 설치 지침이나 은폐와 공사 기간 상의 우선 순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로켓군은 하던대로 전형적인 소련식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위장을 하지 않았다.[7]

촬영된 것은 소련이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 및 관련 시설. 이후 반나절 안에 모든 미군 병력에 비상경계가 발령되며,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미 의회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가 그린 가상 전황도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앤틸러스 열도 - 쿠바가 중심이 된 붉은 원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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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지도. 중간 크기의 원은 쿠바에 이미 배치했던 R-12의 사정거리고, 가장 큰 원은 그 다음 배치하려던 R-14의 사정거리다. 이미 배치된 R-12로도 수도인 워싱턴 D.C. 타격이 가능한 데다 R-14로는 워싱턴 주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부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가 있다. 여기에 소련 극동 지방의 미사일도 고려하면 사실상 태평양의 섬들을 제외한 미국 전 영토가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를 소집했다. NSC 멤버 중에서도 핵심 참모들이 집행위원회(EXCOMM; Executive Committee)에 참여했는데, 린든 B. 존슨 부통령,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8],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 존 맥콘 CIA 국장, 미합중국 육군대장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9]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시어도어 소렌슨 특별보좌역[10], 케네시 오도넬 보좌관 등의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

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 시설을 날려버리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외쳤다. 특히 미합중국 공군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EXCOMM 구성원이 아니었음에도 여러 루트를 통해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과 쿠바를 초토화하자고 주장했다. 후술되는 케네디의 비밀 녹음에 의하면 르메이는 회의에서 뮌헨 협정을 거론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비판했다.

문제는 바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 대사로 활동하면서 뮌헨 협정 등 히틀러에 대한 유화책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이다. 즉 르메이는 "니 애비가 한 잘못을 너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면박한 거다. 군 장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단순히 아버지의 흑역사를 지적한 것만으로도 심각한 모욕인데, 애초에 케네디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 조지프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인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 당연히 알고 한 이야기. 다시 말해 "당신도 나이드니 아버지를 닮아갑니까"라고 깐 셈. 케네디 대통령은 르메이의 이런 공박에도 일단 참고 넘어가는데, 르메이는 이후 대통령이 자리를 떠난 이후에도 자신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 미합중국 해병대사령관 데이비드 슈프 장군 등 다른 군 장성들과 실컷 대통령 뒷담화를 한 것이 비밀 녹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 이를 듣고 케네디는 자기 보좌관에게 "이마에 별 단 작자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점이 있지. 이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가는 나중에 살아남아서 잘못을 지적해 줄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남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케네디는 태평양 전쟁 시기 미합중국 해군 장교(최종 계급 대위)로 참전, 어뢰정 정장으로 복무하였는데, 하급 장교 시절 정부의 명령과 군에서 그 명령을 실행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데 대해 놀랐고, 군이 모든 것을 망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케네디의 민간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 국민들이 놀랄 만큼 핵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호 시설은 도시들에만 존재할 뿐이고, 시골에는 약간의 혹은 거의 아무런 보호 시설도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골 지역에 5천만명이 살고 있고, 도시 거주자들도 2~3백만 톤의 TNT의 파괴적인 위력에 직면해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더 유리했다. 미국 민방위청이 예산부족으로 지지부진할 동안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앞선 인민 핵방호 태세를 갖췄다.

물론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는 다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케네디는 이 때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그 배경을 연구한 바버라 터크먼(1912~1988)의 역사서 8월의 포성을 읽은 터라,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쉽게 대규모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아울러 테일러 장군이 논의 초반, 미사일 전면 제거는 어렵다는 조언을 한 것도 케네디 대통령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 장군은 쿠바 공습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정적 순간에 정확한 조언을 했다.

CIA의 보고 직후에는 EXCOMM 내부에서 폭격밖에 답이 없지 않느냐는 매파가 우위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CIA가 찍어온 사진이 EXCOMM에 전달되었을 때,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첫 반응은 "이런 개XX들이"였고, 이후에도 공습을 강하게 주장했다.[11] 이러한 매파의 강경책은 쿠바에 소련의 전술핵이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세게 나가더라도 최소한 쿠바만 피해를 본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쿠바에는 R-12 미사일(사정거리 - 위 지도의 중간원)과 함께 핵탄두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12], 쿠바는 공격받을 경우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에 핵미사일을 날릴 능력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도 보복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엑스콤 회의에서는 수도를 시애틀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후 묵인, 전면 침공, 공습, 회유 등의 수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케네디는 봉쇄를 선택하게 된다. 소련에 미국의 단호한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사일을 철수하여 평화적으로 위기를 해결할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13]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하기로 생각을 정한 계기는 공군에서 "90% 이상의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레이저 유도, GPS 등을 이용한 정밀유도무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공습을 한다면 정확성이 보장되지 않는 일반 재래식 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미사일 모두를 제거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컸고, 그 과정에서 소련 군인들까지 살상될 경우에도 미소 양국의 정면 충돌로 비화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여기에 문제의 미사일에 관한 CIA 등 정보당국의 분석에서 '소련의 핵미사일이 실전배치 완료되기까지는 약 10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 케네디는 좀 더 차분한 대응에 나설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때 회의 내용을 몰래 녹음했다. 녹음 파일이 담기는 장치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고, 엑스콤 회의가 열리는 탁자 밑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케네디는 자신만이 아는 버튼을 통해 녹음을 키고 끌 수 있었다. 주로 연필꽂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케네디가 이렇게 비밀 녹음 장치를 둔 이유는 이전 피그만 침공 당시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참모들이 막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들 말을 바꾸는 것에 대해 열이 뻗쳤기 때문이었다. 닉슨도 있었던 걸 보면 그것은 닉슨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발언 취지를 바꾸어 증언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위에 언급된 로버트 케네디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는 엑스콤 회의 당시 비둘기파보다는 매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녹음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버트 케네디는 처음 사진을 받아왔을 때 불 같이 욕을 했다. 로버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도 자신이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미국 대중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로버트의 증언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케네디가 형제들이 비둘기파였고, 나머지 관료들이 매파인 것처럼 인식이 됐다. 이는 후술하는 D-13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실제 녹음본에서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비둘기파였다. 협상을 하던 폭격을 하던 미사일 선박이 쿠바로 들어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사일이 쿠바 본토 내에 배치가 완료되면 협상은 힘들어지고, 폭격을 한다 해도 100% 완전히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소련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야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도 처음 쿠바 미사일 배치 정보를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다. "흐루쇼프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순 없어!"[14]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미국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전 세계에 알렸다. # 전 세계의 정부와 언론들은 쿠바에 시선을 모았다. 미국은 소련에게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설의 철거를 요청했지만 누구도 흐루쇼프 서기장이 순순히 물러서리라 보지 않았다.

3.3. 치킨 게임

22일의 케네디의 비난 성명에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쿠바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련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거래를 할 것이라고 여겼고, 10월 21일까지 소련 지도부는 이 환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10월 21일,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소련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나설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당황하였다. 흐루쇼프는 상황이 '비극적'이 되었다고 하였다. 소련 군부는 미국이 핵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고, 흐루쇼프는 핵 없이는 쿠바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소련 군부는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전술핵무기 차원의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전술핵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동요한 흐루쇼프는 플리예프 장군에게 어떠한 핵무기도 사용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로디온 말리놉스키의 주장으로, 소련 해군은 핵탄두를 장착한 4척의 잠수함을 쿠바 해안에 접근시키기로 하였다. 10월 23일에 흐루쇼프는 케네디 형제가 겁에 질려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 3를 발령했다. 아울러 미합중국 해군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 해로 미사일기지 건설 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만약 전략 물자가 발견된다면 압수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둔다. 또한 미합중국 공군은 플로리다 공군기지에 140대 였던 전투기를 511대로, 40기의 공중급유기를 파견해서 증강 시켰으며 중앙 방공 사령부는 520여기의 추가 항공기를 언제든지 출격 시키게끔 하기도 했다.[15]#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공해상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제법 위반이자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미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핵잠수함 6척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미 해군은 P-3 대잠초계기순양함을 급파했고, 동시에 즉시 보유한 모든 핵전력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 주요 전략폭격기에 핵탄두 탑재 준비를 마쳤으며, 탄도미사일들은 발사 준비 절차에 돌입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NATO에 서로 비상이 걸리고, 동독서독은 물론이며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위험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상황. 모든 인류가 두려워했던 제3차 세계 대전이 바로 눈 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초강경한 입장은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라고 명령했다.[16] 명령에 불응하거나 무기가 발견된 선박은 격침보다 나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도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이 봉쇄를 뚫고 지나간 선박들도 많았고, 흐루쇼프가 되돌린 선박들도 상당수 있었다. 미 해군과 마주치기 직전 방향을 돌린 선박들 중 상당수가 미사일을 탑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무력 충돌은 피하고 싶었거니와 자국의 최신 무기 체제인 핵미사일을 적의 수중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 당시 소련 선박들은 잠수함의 근접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실제 격침은 고사하고 소련 선박에 사격이라도 했다간 바로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만한 상황이었다. 이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대서양에서 자칫하면 무력 충돌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대규모 핵잠수함 추적을 벌인 앤더슨 제독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위기 종결 이후 앤더슨 제독은 2차대전 이후 미 해군의 대잠 능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최적의 기회였다고 진술했다.

한편 24일 전략공군사령부의 토머스 S. 파워(Thomas S. Power)[17] 공군대장은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아래 데프콘2를 발령했다. 준전시태세가 선포된 것이다. 이에 따라 1,400대가 넘는 전략폭격기와 134기의 ICBM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전시 작계에 따라 공군기지에 배치된 전략폭격기 부대가 핵공격에 대비해 미 본토 각지의 민간공항에 분산전개하기 시작했으며, B-52가 하루 평균 75소티 출격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나머지 미군은 데프콘3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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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18]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탄도미사일의 정찰 사진을 공개하면서, 소련 측 대사 조린에게 "귀하는 쿠바에 귀국의 탄도미사일이 배치 중임을 인정하시오? 통역 기다릴 것 없이, 예/아니오로 대답하시오(Yes or no? Don't wait for the translation: yes or no?)"라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에 조린은 "여기는 미국 법정이 아니오. 검사범죄자를 취조하는 듯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소"라고 응수했다. 이에 스티븐슨도 지지 않고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귀하의 대답을 기다리겠소(I am prepared to wait for my answer until Hell freezes over)"라고 다시 맞섰다.

한편 흐루쇼프도 전략 핵미사일이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교착 상황에서 10월 27일, 흐루쇼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터키에서 '유사한 무기'를 제거한다면 자신들도 쿠바에서 무기를 제거하겠다고 제안했으며, 미국과 소련이 UN 안보리에 터키와 쿠바 양국의 국경과 주권의 보전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제안했다. 이런 흐루쇼프의 제안에 소련 외무기관들은 물론 소련 시민들도 안도했다. 빅토르 이스라옐란을 비롯한 고위 외무 관리들도 이를 상호 수용 가능한 타협 조건으로 환영했다.

3.4. 검은 토요일

10월 27일, 로버트 케네디와 아나폴리 도브리닌이 만나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과, 터키의 미사일 철수를 쿠바에서의 미사일 철수와 교환하자고 합의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거래가 공개되면 미국 국내와 나토의 동요와 분열이 있을 것이므로 비공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이를 수용 가능한 주장으로 보았고 상황이 정리되는 듯 하였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10월 26일에서 27일을 거치는 새벽,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소련 대사관에 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고 흐루쇼프에게 알렸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스트로는 이것이 1941년 독소전쟁의 재림을 막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다. 즉 카스트로는 위기를 통제하고자 했던 흐루쇼프와 생각이 달랐다. 여기에 미국 군부가 민간 도시들이 아니라 군사 시설에만 핵공격을 퍼부어서 전쟁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핵전쟁 교리를 들고 오자, 흐루쇼프는 자신의 핵 벼랑 끝 전술이 더는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미국이 핵전쟁을 군사 시설만 타격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었다. 흐루쇼프는 간부회에서 미국의 목표가 사람들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핵전쟁이란 것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플리예프의 명령으로 핵탄두가 무기고에서 나와 트럭에 실리자 전략 핵무기는 물론, 긴급 전보로 비행기에 장착된 핵무기나 전술무기도 모두 금지한다는 방침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모스크바와의 통신은 원활하지 않았고, 현장의 실전 심리는 부풀어올라 있었다.

미국에는 흐루쇼프의 두 번째, 그리고 공개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 국가안보회의 참석자들은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것이 공개적 메시지인 이상 흐루쇼프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적인 거래는 NATO 동맹국들의 걷잡을 수 없는 반발을 초래할 것이며,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굴복으로 비쳐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EXCOMM 구성원들은 흐루쇼프가 비밀 전문을 보내면 될 것을 공연히 공개 메시지로 보내서 일을 망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편 26일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미리 예정되었던 아틀라스 로켓 ICBM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다. 데프콘 3이 발령된 상황에서 주변 ICBM에는 핵탄두가 장착되고 있었다. 태평양으로 발사될 예정이었던 이 미사일에는 핵탄두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소련이 이 발사를 포착하여 핵공격으로 간주했다면...[19] 심지어 쿠바의 미사일 동향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던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지도부는 자국 내에서 중국과 소련 방향으로 ICBM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침내 소련 시각 28일, 미국 시각 27일 오후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 양측 전투기들이 비통상탄두 미사일(일반 폭약 탄두가 아닌 탄두, 즉 핵무기를 뜻한다)을 탑재하고 날아올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20] 다행히 U-2가 소련 영공을 벗어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쿠바 영공의 다른 U-2 정찰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고, 같은 날 쿠바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미군 전투기는 대공포 사격을 받았다.

이 때 양측 수뇌부는 이 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U-2 정찰비행은 위 ICBM 시험발사와 같이 위기 발생 직전에 잡은 일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뒤늦게 이를 안 맥나마라 국방장관[21]은 노발대발하며 모든 비행 일정을 취소시켰다.[22] 양측 전투기가 수칙에 따라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이륙하여 대치했다는 사실은 양측 수뇌부 모두 상황 종식 이후에나 알았다. 또 다른 U-2 격추는 크렘린이 아닌 소련군 일선 지휘관의 결정이었으며, 크렘린 역시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막장의 절정.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최고지도부들이 최일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쿠바 상공에서 U-2가 격추된 순간 미 수뇌부는 당장 쿠바를 침공해야 한다며 격노했으나, '24시간 동안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용케 참았다. 같은 날 카리브해에서는 소련 핵잠수함이 훈련용 폭뢰를 통한 강제부상 시도를 실제 폭뢰 공격으로 오인, 부상하지 못하고 산소 고갈 상태에 빠졌다. 해당 잠수함 함장은 이를 전쟁 발발 상황으로 간주, 정치장교의 동의를 받아 탑재한 핵어뢰를 발사하려고 했다. 다행히 부함장이자 K-19호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반대하여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23]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날 저녁을 기억한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 공포에 질린 것은 미국 수뇌부 뿐만 아니었다. 소련 역시 공포에 질렸다. 모스크바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모스크바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본 지방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알게 되자 경악하였다. 소련 곳곳에서 미친 니키타가 엄청난 혼란 속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0월 28일, '소련이 선제 핵공격을 했다!'는 경보가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 울려 퍼졌다. 플로리다로 핵미사일이 온다는 경고가 울린 것이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다들 한방 맞았구나 싶어 대통령에게 보복 핵공격을 건의하려는데, 이미 핵폭발로 사라졌어야 할 도시에서 "이상 없다."라는 보고가 올라와서 조사했더니 핵공격을 대비한 자체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한 오보였다. 사태 파악이 늦었으면 어처구니 없는 핵전쟁이 터질 뻔했다.

3.5. 미사일 철수

결국 핵전력은 물론 봉쇄를 돌파할 만한 재래식 해상전력조차 없었고, 끝까지 가면 국가 멸망을 피할 수 없던 소련의 현실로 인해 흐루쇼프가 먼저 GG를 쳤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공식 루트가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언론플레이로 의심했고, 또 동맹국 터키의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 제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미국의 의심과는 달리 흐루쇼프의 제안은 진짜였다.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을 한 이유는 양국간에 핫라인이 없어서 전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암호화하여 보내고 다시 이를 해독하고 또 통보하는 시간 등등을 합치면 거의 하루가 걸린다. 게다가 그 전보가 진짜로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서 온 건지도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흐루쇼프는 2번 전보를 보냈는데, 미국은 이게 정말 흐루쇼프가 보낸 건지 고민했다. 3차대전의 위기에서 양국 수뇌간 의사교류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라디오였다.

흐루쇼프는 10월 28일을 기하여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렇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종결되었다.

4. 후일담

소련은 약속대로 선단을 회항시키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했던 피델 카스트로는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인류가 절단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다. 대신 경제지원이 늘어났지만... 결국 쿠바는 냉전 내내 소련의 예산만 잔뜩 퍼먹으면서 내주는 것이라고는 설탕, 시가, 용병 정도가 고작인 애물단지가 된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하지 않을 것을 소련에 약속했으며, 흐루쇼프가 10월 27일에 제안한 대로 터키에서 자국의 핵미사일을 철수시켰다. 터키 역시 자국의 안전 보장이 흔들린다며 항의했으나, 역시 인류의 존망과 3차대전 앞에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대신에 터키를 위해서 지중해에 SLBM 탑재 잠수함이 배치되었다.

쿠바는 이 때 미국이 정말 대규모 폭격을 하고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이나 노스우즈 작전, 노스우즈 작전의 후속편 격이었던 몽구스 작전 같은 것을 보면 실제 관련 작전이 그때까지 존재했으므로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후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간에 핫라인을 개설했다. 피그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흐루쇼프는 미국에 너무 질질 끌려다녔다고 비판받았고,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위신이 실추되었다. 결국 흐루쇼프는 2년 뒤인 1964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투표를 통해서 쫓겨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당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이 사건은 미소 양국의 군비경쟁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경우, 핵전력 강화는 물론이고 재래식 해상전력의 필요성 또한 크게 대두되었다. 소련은 대륙 국가라는 특성상 해상전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때문에 수상함 전력은 미약한 대신 핵잠수함과 지상발진 폭격기의 장거리 대함미사일과 같은 해양거부 전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이러한 불균형적 구조로 인해 압도적인 미해군의 수상함대에 맞서 재래전으로 대응이 거의 불가능한 나머지 전면 핵전쟁 아니면 꼬리를 내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 이를 인식하고 당장 흐루쇼프부터 "우리는 더 발이 넓은 해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천명할 정도였고, 이후 소련 해군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의 지도 아래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하여, 냉전 후기에 이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초거대 해군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물론 배수량이 곧 질적인 우세는 아니고, 미국엔 10척이 넘는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할 대규모 수상함, 잠수함과 함재기들이 있는 이상 여전히 해군력은 미국이 약간 우위였다.

미국 또한 '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해서 결국 믿을 것은 힘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결국 당시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는 모두 매파라기 보다는 비둘기파였지만, 결과적으로 냉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을 뒤흔드는 핵전쟁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 일명 MAD 전략에 대한 믿음만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시점에서는 소련의 핵전력이 여러모로 미국에 한 수 뒤졌으나, 사실 이 사건 이후로 오히려 소련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 미소 핵전력 균형(parity)를 달성하게 된다.[24] 그리고 1979년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인해 긴장감은 높아져 가고, 핵전쟁에 대한 인류의 공포는 더해져만 갔다.

아울러 이 사건은 국제정치, 안보 연구에서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로 자리잡았고, 사건 발생 수년 후인 1970년대에는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이 <결정의 엣센스(Essence of Decision)>란 저서를 통해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대응 배경을 학문적, 이론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1) 합리적 행위자, 2) 조직행태, 3) 정부정치 등 3가지의 모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편. 예컨대 특정 국가의 대외정책 노선을 평가할 때 '주변국 안보 위협 증대에 따른 동맹 강화' 같은 국가를 단일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가정하는 해석은 합리적 행위자 모델, '부처 내 업무 절차 혹은 매뉴얼에 따른 행동'이라는 해석은 조직행태 모델, '정부 내의 온건파 대 강경파 경쟁'이라는 해석은 정부정치 모델에 해당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53년 후 미국과 쿠바가 국교정상화를 재개하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표가 2014년 12월 18일에 나왔다. 기사.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전역대상자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3~5개월 가량 전역이 미뤄졌었다.

5. 가정

5.1. 미군이 쿠바에 상륙했을 경우

구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당시 쿠바 주둔 소련군은 다수의 야전용 전술핵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야전 지휘관들에게 핵무기 사용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핵전쟁이 터졌다면 소련과 쿠바는 확실하게 멸망했겠지만, 미국 동부 지역도 초토화됐을 거라는 이야기. 유럽의 몰락을 통해 간신히 확립한 헤게모니가 다시 유럽, 특히 전쟁 피해를 복구한 뒤 잘 나가던 영국, 프랑스, 서독으로 넘어갈 것이 뻔했다. 게다가 재기불능 상태인 미국이 다시 유럽에 개입하는 걸 막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상대로 뭔가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소련이 멸망한 뒤 중국이 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에 나설 것까지 생각하면... 말 그대로 2차대전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물론 유럽에도 핵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소련이 보유한 핵전력 자체가 부족하니 대도시 몇 개 날아가고 끝날 것이고, 동부 지역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미국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물론 미국이 태평양 전쟁 때처럼 쿠바에 바로 상륙하지 않고, 먼저 폭격을 충분히 한 후 상륙 등의 다음 작전을 펼쳤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냥 폭격이 아닌 핵폭격이란 것이 태평양 전쟁과의 차이점이었겠지만. 그것도 그랬을 것이, 쿠바에 전술핵, 전략핵이 있다고 확신한다면 왜 재래식 상륙작전을 먼저 하겠는가? 미국이 핵무기를 가진 쿠바를 선제공격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쿠바섬을 다수의 전략핵을 사용해 폭격하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기에 정찰로 이미 알아낸 쿠바 주요 군사시설과 소련산 핵미사일을 미본토에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제거할 수 있었다. 당시는 태평양 환초에서 아무 생각없이 메가톤급 핵실험을 하고는 바다와 비바람이 씻어가기를 기대하던 시절이었으니 미 본토가 안전을 위해서라면 카리브해의 섬에 한 발이라도 전략핵을 더 쏟아붓는데 주저할 시대가 아니었다.

5.2.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당시 소련은 R-14를 아직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 가능한 범위는 미 동부 지역으로 한정돼 있었다. 따라서 미국을 재기불능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어도 아예 멸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케네디와 미 수뇌부가 전멸하고 수천만의 시민이 떼죽음을 당한다 쳐도 미국은 중서부 지역에 남은 기반을 바탕으로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고, 소련은 그 즉시 100% 멸망했을 것이다. 즉 케네디가 강하게 나가고 흐루쇼프가 물러선 데는, 그리고 이후 소련이 미국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핵전력을 갖추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25] 물론 쿠바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미국이 멸망을 피한다고 해서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부 지역은 미국 건국 이래 미국 사회의 기반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여기가 북한의 장사정포 공격도 아니고 핵미사일을 맞고 국민 수천만과 함께 증발한다면 결국 현지 재건도 아니고 다른 데 도시를 새로 세워야 할 정도의 타격을 받는데, 이건 미국이 국제 문제에 개입할 능력이 아예 없어짐을 의미한다. 후유증은 적어도 수십년을 갈 것이고, 그동안 미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피해를 복구한 미국이 1990년대 즈음 영향력을 회복하고 다시 국제 질서에 개입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국제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쿠바 전쟁으로 사실상 소멸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과정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먼로 독트린의 확인, 그리고 제한적인 개입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5.2.1. 유럽

유럽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벨 에포크 시절의 위상을 되찾으려 할 것이다. 이들 국가들의 경우 18세기~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시절 세계적 패권을 장악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패권을 상실하고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2류 강대국' 취급을 받게 된 상황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점에서, '미국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국제적 패권을 상실하고 소련은 멸망에 준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상황'을 가정한다면... 국력을 회복한 미국이 다시 패권국가로 부상하려는 것을 미소의 공백으로 다시 패권국가화 된 유럽 국가들이 견제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다만 미국까지 닿지 않는 핵전력이 서유럽에 떨어질 것은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적대적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을 적대한다'와 '미국의 패권 확장을 견제한다'는 전혀 다른 의미니까. 더구나 유럽 국가들이 미국 중심의 세력 구도를 받아들이게 된 최대의 원인인 소련의 위협이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럽 내부의 국가들은 개별 주권국가로써의 의식이 확고했고, 영국과 서독, 베네룩스 3국, 덴마크, 노르웨이 등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들은 친미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프랑스만이 반미에 가까웠는데 그마저도 그냥 독자노선 걷겠다는 주의지 미국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부재를 계기로 2차대전 당시의 부채 및 각종 지역 분쟁에 대해 자력구제를 하려는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식민지 상실의 타격이 있겠지만 애시당초 식민지는 유럽 국가들의 국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식민지가 넘쳐나던 프랑스가 식민지가 거의 없던 독일에 오히려 밀려 영국과 손잡고 나서야 겨우 견제한 1차대전으로 입증된 바 있다.

5.2.2. 아시아

미-소의 공백을 이용해 북한김일성적화통일을 시도했을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외부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부적으로 살아남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이 본격화하려면 적어도 5년 이상 더 기다려야 했으니 미국의 고립과 함께 한국 역시 아시아 패권국들에 눌려 질식해 사라진 수많은 신생국들의 하나로 기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핵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까지도 타겟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당장 위에서 미-소의 핵무기 투발 능력을 봤을 때 17대 1이라는 압도적인 수치에, 거기다 소련이 가지고 있는 1의 핵무기들마저 거의 대부분은 전쟁 중 서유럽에 집중적으로 투발되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은 비록 소련과 핵전쟁 중이라도 다른 적국에 투발할 핵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당시의 한반도에는 주한미군 하에 611기의 전술핵이 배치되어 있었다. 공산권과의 전면 핵전쟁 상황에서 이걸 쓰지 않을 리가 없다.[26] 한국전쟁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의 의견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소련을 자극해 3차대전으로 확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3차대전이 발발한 상황에선 억제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역시 타겟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나마 중국은 대약진 운동 이후 내부적으로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기에 외부 침략을 추진하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이 변수가 되는데, 1970년대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대해 미국이 큰 관심을 쏟지는 않았고, 중동 국가들의 후원자인 소련도 소멸되니 생존에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6. 미디어

워낙 충공깽한 사건이었고,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가장 가까웠던 몹시 위험했던 사건인지라[27] 종식 이후 여러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이 쓰여졌다. 그 중 상당수는 양국이 결국 양보하지 못해 막장 고고씽을 달리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6.1. 도서

영국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핵전쟁으로 확전되었고 세계대전으로 대충 망한[28] 미국을 그리고 있다. 주요 도시가 괴멸되고 영국의 신탁통치를 받고 있는 미국에서 쿠바 전쟁에 얽힌 비밀[29]을 풀어나가는 이야기.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마이클 돕스의 <1962>이라는 역사서도 있다. 쿠바 위기의 모든 것을 다룬 역사서이기 때문인지 640페이지에 육박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물론 분량 못지않게 내용도 충실해서 사건을 한 시점이 아닌 미국인, 소련인, 쿠바인의 시점으로 번갈아 보며 그때 일어났던 모든 해프닝들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연구하거나 관심 있어한다면 꼭 봐야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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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술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비밀 녹음 테이프는 이후 케네디 도서관에 보관되었는데, 여기서 근무했던 셀던 M. 스턴 박사는 녹음 테이프를 일일이 풀어 일의 전말을 기록하는 책 <결정적 실패 피하기>라는 책을 펴냈다. 스턴의 이 책은 이후 <존 F. 케네디의 13일>이라는 축약본으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는 2013년 번역, 출간됐다.

6.2. 영화

6.2.1. 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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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철저하게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로는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D-13>(2001년작, 원제 Thirteen Days)이 있다. 미국측 입장에서 만든 영화지만 상당한 수작.[30] 로버트 케네디가 쓴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된 U-2 격추나 소련과의 접촉 등이 영화에 추가되었다.

6.2.2.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이 작품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는 헬파이어 클럽의 뮤턴트인 세바스찬 쇼가 양국 군 수뇌부 인사를 배후 조종해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이유는 미소 양국이 핵으로 박살난 혼란상을 틈타 헬파이어 클럽이 뮤턴트들을 규합해 인류 지배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또한 쇼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으로 뮤턴트가 많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갈 뻔했지만, 찰스 제이비어소련 해군스베르들로프급 순양함에 타고 있던 정치장교마인드 컨트롤해서 경계선을 넘어가려는 소련 화물선에 소련의 대함 미사일을 때려박는 엄청난 일을 성공시켜 교전 상황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다.[31] 그리고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른 정치장교에게 소련 해군 함대사령관이 하는 말이 백미.
"축하하네, 동무. 동무는 핵전쟁을 막았네. (부하들을 향해) 이 자를 끌어내!"
얼떨결에 핵전쟁을 막은 정치장교 동무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군을 상대로 공격했으니 수병들에게 끌려나간다.[32] 결국에는 쇼 본인이 직접 원자로를 가동해 핵폭발을 일으키려 들지만, 때마침 갑툭튀에릭 렌셔에게 저지당하고 결국 최후를 맞았다.

다만 이후 사건의 전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쇼를 죽인 에릭은 곧바로 두 강대국의 눈이 집중되어 있는 그 상황에서 뮤턴트의 존재를 공표한다. 그리고 뮤턴트란 존재와 그 강대한 힘을 인지하게 된 미국, 소련 각국 상부는 이를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하고 쿠바 연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자국 전력들에게 뮤턴트들이 있는 섬을 공격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미군, 소련군은 한 마음으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재래식 화기를 뮤턴트들에게 쏟아붓는다. 물론 이 시도는 자신들이 쏜 재래화기들을 에릭이 장악, 자기들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실패한다. 이후 뮤턴트의 위협이란 새로운 위협이 대두하자 두 나라는 지금까지 언제 싸웠냐는 듯이 이에 대응하고자 화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어찌 보면 왓치맨과 비슷한 결말.

6.3. 만화

이어진 80년대의 또 다른 핵전쟁 위기 속에서 쓰여졌던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결말에서는 끝은 평화로웠으나 양국을 더 핵 개발에 몰두하게 만든 이 사건을 비꼰 닥터 맨하탄의 대사가 있다.
그: "제가 좋은 일을 한 것 맞죠? 결국 끝에는 모든 일이 잘 됐잖아요."
닥터 맨하탄: "'끝에는'이라고요?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절대 끝나지 않아요"
저 너머의 아스트라 세계관에서는 쿠바 위기가 심회되어 결국 핵전쟁이 일어나 살아남은 후손들이 세계를 하나로 통일했다는 설정이다.[33]

6.4. 게임

팀 포트리스 2에서 헤비 수염 장식의 이름이 '쿠바 미수염 위기' 로 패러디되었다.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 1 멀티플래이어 맵에서 Crisis: 위기라는 맵이 있는데,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것인걸 맵을 돌아다니면 볼수 있다.
상대는 Op40 (미국에 협조중인 쿠바 반군) VS Tropas (카스트로 친위대, 쿠바 군대).

6.4.1.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패러디로 점철된 게임 레드얼럿 2에는 당연히 이 사건을 패러디한 미션도 있다.[34] 연합군 미션인데, 쿠바에 핵 사일로3기나 건설되어[35] 크로노스피어 건설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 물론 흐루쇼프와는 달리 게임 속의 소련 서기장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기꺼이 핵 사용을 불사한다.
"이 메세지는, 귀여운 척 하지만 썰렁하기만 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세지다. 이제 소련군이 최후의 승자가 될 시간이 왔다. 우리 핵무기의 맛을 보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게다."
-핵 사일로를 파괴하면-
"아, 이미 경고는 충분히 했다. 사령관. 이제 곧...뭐라구? (핵미사일 사일로가 사용불가합니다.) 하지만! (네!) 이런 젠장! 이제 장난은 끝이다 사령관. 끝장을 내주마, 지금 곧~!"

왠지 안습. 물론 그게 만만하진 않다.

3편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소련군은 대신 키로프에 대형폭탄을 장착해서 아바나에서 다이렉트로 미국 본토까지 시밤쾅을 시전하려 했으나, 우리의 먼치킨 플레이어 사령관에 의해서 망했어요.

6.4.2. 메탈기어 시리즈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는, 제로 소령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버츄어스 미션 브리핑을 하면서, 소련이 쿠바에 설치한 핵미사일을 철수시키면서 터키 쪽에 배치한 IRBM을 철수한 사실은 연막이고, 사실은 단지 소코로프를 돌려받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라는 꽤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준다.[36]

6.4.3. 마피아 3

마피아 3의 두 번째 DLC 옛 원한(Stones Unturned)에서는 이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소련에서 비밀 핵잠수함 기지를 폐쇄하고 쿠바 혁명정부에 러시아제 R-12 전구탄도유도탄 열핵탄두를 다시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단 내용이 나온다. 이 와중에 태풍을 만나 추락해 버린 쿠바 측 수송기에 실려 있던 핵탄두가 DLC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이 되는데, 변절한 CIA 요원 코너 알드리지가 용병들을 고용해 이 핵탄두를 전쟁 중인 북베트남에 팔아 넘기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때문.

폐쇄된 핵잠수함 기지도 DLC 후반부에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 존 도노반이 쿠바 미사일 위기가 미국의 판정승으로 끝난 덕에 기지가 폐쇄된 게 천만다행이라는 듯 "고마워요, 케네디!"라는 드립을 친다.


[1] 로마자로는 Karibski(i) Krisis. 쿠바가 아니라 Karib가 보이듯이 카리브 해의 위기란 뜻. 러시아어에서 C 대신 K를 쓰는 것은 그리스어의 영향이다. 그리스어와 직접 상관은 없지만 독일어를 위시한 다른 게르만어 계열도(영어 제외) C는 외래어, 차용어 등에서 제한적으로 쓰고 K를 주로 쓴다. 반면 라틴(로망스)어 계열은 그 반대라서 C를 주로 쓰고 K를 제한적으로 쓴다.[2] 케네디 암살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인용. 맥나마라는 이 일을 겪은 것이 10월 27일이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때 백악관 회의는 오후 7시가 넘어 끝났다. 10월 말의 워싱턴은 7시면 이미 해가 진 뒤다. 맥나마라를 비롯한 당시 미 수뇌부가 가졌던 공포와 부담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3] 당시에 나온 표현으로 미사일 격차(Missile gap)가 있다.[4] 당시 사용한 로켓의 계보는 역사상 가장 경제적인 우주발사체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군용으로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생산했고, 열병식에 공개도 했고, 서방권은 믿었다. 코룔로프에게 우주개발비를 준 소련 군부의 목적은 이런 면에서 완벽하게 달성되었다.[5]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미국 태평양 연안 제일 북쪽에 위치한 주이다.[6] 재미있게도 U-2의 쿠바 정찰은 당시 정권이 사회주의에 너무 유약하다며 공세를 펼치던 공화당원들의 압력으로 빈도가 늘어난 것이었다.[7] 「결정의 본질」, 제4장, 소련의 미사일 배치, 그레이엄 앨리슨.[8] 대한민국 입장에선 악연이 꽤 있는 인물이다. 8.15 광복 당시 미군정의 점령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38선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초 일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러스크 서한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에 관한 일본 측의 논리를 보태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9] HBO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한 제101공중강습사단사단장이었던 그 테일러 장군이다.[10] Theodore Sorensen.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모든 의사 결정에 참여한 핵심 참모. 『자, 미국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自問해 보십시오』"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라는 구절로 유명한 대통령 취임사도 소렌슨의 작품이다.[11]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스페인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USS 메인 함 침몰과 비슷한 사건을 조작하자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쿠바 공습을 진주만 공습에 비교하며 미국에 영원히 불명예를 안기는 격이라며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기도 했다.[12] 1992년 쿠바 아바나 회의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리프코프는 1962년에 쿠바에 약 160개의 핵탄두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숫자는 블러프로 다소 의심되나 98개라는 말도 있는 등, 충분한 양이 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13] 봉쇄(Blockade)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전시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는 검역(Quarantine)으로 선택했다.[14] 케네디의 녹음 장치는 그의 사망 이후 폐기처리 되었지만, 이 장치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닉슨 대통령이다. 닉슨은 케네디의 녹음 장치를 더욱 개량해 다시 백악관 집무실에 녹음기를 설치했고, 이는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진다.[15] 항공모함 해군 항공대에 편제된 함재기는 빠진 숫자다.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항공기 였다는것.[16] 그렇다고 절대 소련에 굴할 심산은 아니었다. 시간을 계속 벌었던 것일 뿐.[17] 이 당시 르메이는 공군참모총장이었고, 파워 장군은 르메이의 후임 전략공군사령관이었다. 이 양반은 르메이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형용사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르메이식 일방적 강경론에는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마저도 이 사태 때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한 것.[18]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으로 당시 민주당에서 제법 비중 있는 중진 정치인이었고 1952,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두 선거 모두에서 아이젠하워한테 패배했다.[19] 소련이 이 발사를 감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0] 다음날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U-2가 핵공격으로 오인되었을 경우 자칫하면 핵전쟁으로 번질 뻔했다고 서술했다.[21]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장면에서 대표적인 온건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국방장관이 온건파라는 사실은 케네디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22] 이 소식을 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어딜 가나 못 따라오는 개새끼가 꼭 있지 (There's always some son of a bitch who doesn't get the word)"라고 냉소적으로 농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간단히 말해 넌씨눈.[23] 이 사건은 후에 영화 크림슨 타이드의 모티브가 된다.[24] 흐루쇼프의 무기력함에 실망한 브레즈네프와 그의 트로이카의 미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브레즈네프 또한 닉슨과 함께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한다.[25] 지금의 러시아도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미사일을 수천 발 보유하고 있다. 물론 미국 역시 러시아 본토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지만.[26] 1961년 기준. 62년에는 617기. 67년에는 949기로 정점을 찍었으며, 이후 줄어들다가 91년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전부 철수되었다. 61년 기준으로 극동에 배치된 총수는 1740기. 참조.[27] 이후에도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사건은 수 차례 있었지만, 이 사건만큼 위험한 경우는 없었다.[28] 쿠바는 방사능 오염지대가 돼서 법적으로는 스페인의 소유권이 된다.[29] 케네디는 실제 역사대로 비둘기파였는데, 매파 장군들이 명령불복종을 해서 확전이 되었다. 케네디와 참모들이 핵으로 전멸하자 매파에서는 책임을 모두 케네디에게 돌리는 역사 왜곡을 벌였다.[30] 참고로 주인공 역(케니스 오도넬 그 역시 실존인물이긴 한데 케빈 코스트너와는 안 닮았다)인 케빈 코스트너를 제외하고 나머지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 역이라 비슷한 인상을 가진 배우들로 캐스팅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배우 중에서 그렇다는 의미.[31] 해당 화물선의 선원들은 이미 세바스찬 쇼의 수하 아자젤에 의해 전원 끔살당하고 아자젤의 통제로 움직이고 있었다.[32] 사실 해당 장면이 나오기 전 소련 함대사령관과 정치장교가 서로 갈등을 나타내는 장면이 있었다. 정치장교가 미 해군의 봉쇄를 돌파하도록 제촉할 때, 함대 사령관은 "난 이미 전쟁을 겪어보았다. 또 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것. 동영상. 때문에 위의 대사를 말할 때도 일이 이렇게 되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다.[33] 사실 이는 지어낸 역사로, 실제로는 현실과 동일하게 쿠바 위기에 그쳤다. 그러나 핵전쟁에 비견되는 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을 맞는데...자세한 건 문서 참고.[34] 실제로 게임상의 시기적으로도 유사하다.[35] 전통적으로 C&C 시리즈에서 핵 사일로 등의 슈퍼무기는 하나만 건설할 수 있다. 제너럴은 제외.[36] 물론 소코로프가 개발하고 있던 병기해당 병기체계가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가진 병기체계의 개념을 따진다면 단지 소코로프를 돌려받기 위해서였다는 이유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판도 자체를 뒤엎는 전략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