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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소련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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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소련군은 북한 전역에 진주하여 일제를 패망시킴과 동시에 소련의 영향력 확산을 노렸는데 그 중에는 상당수의 조선계 소련 공민, 즉 고려인 실무자들도 있었고 훗날 김씨조선의 시조가 될 김일성도 동행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소련군정은 차츰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와 인공기의 제정에도 소련의 강한 입김이 작용했다.

북한의 최고권력자가 된 김일성모스크바로 날아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필요하다며 남침을 위한 무장 지원을 절실히 요청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처음에는 미국과 충돌해서 좋을 게 없다고 보류하였지만 김일성이 무려 48번이나 남침을 조르자 결국 승인하고 북한에 무기와 군사고문을 지원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남한의 풍부한 농수산물과 북한의 풍부한 광물을 소련에 바치겠다고 장담했다고 한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록에서도 이와 같은 증언이 나왔다. 6.25 전쟁 이틀 전에 스탈린이 '남조선 작전'을 소련에게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전쟁에서 김일성의 그런 야욕이 저지된 데다 6.25 전쟁 이후 소련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다소 옅어졌지만 여전히 북한과 소련과의 우호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1]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북한과 소련이 서로에게 밉보이기 시작하고 기묘한 독자노선을 수립해가는 데다 노골적인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손만 벌리는 북한을 소련은 차츰 좋지 않게 보게 되었다. 1959년까지 북한은 8.15 광복위대한 쏘볘트 군대에 의한 8.15 조선 해방이라고 규정했지만 1960년부터 '위대한 쏘베트 군대'라는 표현을 삭제하며 소련의 역할을 축소하기 시작했으며 북소 친선 기관들의 활동도 점차 중지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날조하여 8.15 해방을 김일성의 공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마찰도 양국의 우호를 근본적으로 해칠 정도는 아니였고 되려 1961년에는 유사시 소련군의 자동 개입을 규정한 조소동맹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2][3] 1960년대 이후 북한이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치던 중국과 관계가 멀어지면서 다시 소련과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4]

한편 경제적으로 소련은 북한을 계속 지원했고 인적교류[5]도 꽤 잦았다. 소련은 북한에게 수차례 차관을 제공하고 수시로 채무를 변제해 주었으며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경제상호 원조회의에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던 북한에게 원자재 생산국의 역할을 맡기되 일부 공업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6]1960년대 이후 흐루쇼프 집권기 때 즈음 중국이 소련을 수정주의라며 비판하면서 중소관계가 냉각되고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가는 동안 북한은 등거리 외교를 하며 이익을 잘 챙겼다. 중간에 중국과 친하게 지낸다고 1962년에 경제보복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7][8] 2017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3년부터 1984년 말까지 소련의 대북한 군사원조 규모는 16억 달러(약 1조 8,260억원)에 달했다고 나왔다.#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계속 북한을 지원·지지했다.

사회주의 국제분업 이탈 직후에도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소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에 경제상호 원조회의에 정식 가입하라는 소련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소련으로서 우호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련의 군사협조 거절은 북한이 “경제 발전에서 일부 제약을 받더라도 우선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4대 군사노선 방침을 결정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국제 분업 이탈과 더불어 자립적인 민족 경제를 구축하려던 북한은 이로써 소련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성을 키우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북한과 소련은 서로를 우호적으로 지지하였다. 특히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은 북한을 배려해 대한민국의 유엔가입에서 거부권을 행사해 종종 엿을 먹여 왔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까닭으로 제1세계가 보이콧한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 중국은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았으나 북한은 참가했으며 1980년의 보복+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을 까닭으로 제2세계가 보이콧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북한은 소련을 따라 기권했다. 중국과 달리 북한이 모스크바 올림픽에 나간 자체가 북소관계가 우호적이었단 증거다. 이런 우호관계는 김일성이 1984년 소련을 방문하여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과 회담을 갖고 소련 해·공군의 북한 영공과 항구 이용권 제공, 북한의 군사 원조 획득[9]과 군사 유학생 파견[10], 대규모 경제적 및 기술적 협력 등등을 골자로 하는 협정을 체결하면서 절정에 달하는 듯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관계이고 소련 민간에서 북한은 조소 대상일 뿐이었다. 일찍이 1960-80년대부터 소련인들은 북한의 선전물이나 출판물들을 유머모음집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러시아계 학자들인 박노자 교수와 안드레이 란코프[11] 교수 등이 직접 증언한 바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 소련이 1988 서울 올림픽에 공식 참가하여 선수단을 서울특별시에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대한올림픽위원회(KOC)에 통보하고 소련 정부도 1988 서울 올림픽 기간 동안 대한민국 국적 항공기의 소련 영공 통과를 승인함에 따라 양국간의 관계는 적대지간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반면 북소관계는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북한은 소련에 대한민국에서 열리고 미국이 참가하는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라고 간곡히 요청했지만 소련은 결국 서울에 선수단을 파견하여 1988 서울 올림픽에 미국과 한 자리에서 참가했다. 이 때는 한소, 한중 상호 간 수교를 위한 교섭이 열렸고 비공식적으로 프랑스일본을 통해 삼각무역도 했는데 여기에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990년 소련은 대한민국을 승인함과 동시에 양국 간의 국교가 수립되었고[12] 1년 후 소련 붕괴로 러시아 연방이 출범하면서 계속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남한을 친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나쁘게 인식된 적은 드물어서 남한과의 수교를 나쁘지 않게들 생각했던 눈치였다고 한다. 그렇게 1990년 대한민국과 소련이 외교 관계를 맺게 되자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는데 당시 한소 수교에 대한 문건과 증언을 살펴보면 북한이 얼마나 소련에 배신감을 느꼈는지 잘 나와 있다. 북한이 "이제 와서 두 개의 조선을 인정하는 소련이야말로 조국 통일을 방해하는 배신자"라는 말까지 하고 당시 방북 중이던 소련 외무상 셰바르드나제[13]가 이에 맞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 세습 국가"라고 응수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북한의 남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소련의 잡지가 비판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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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탈린 이후 권력을 잡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행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반대되는 행보가 평화 공존론이다. 권력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 진영을 적극적으로 비난했던 북한으로서는 흐루쇼프의 공존이라는 행보가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2] 이때까지 소련은 김일성에 신뢰를 가졌지만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대놓고 동맹을 맺으면 국제적 지위가 불리해지기 때문에 동맹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며칠 차이를 두고 북한은 중국과도 조중동맹조약을 체결하며 중·소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쳤다.[3]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395-396[4] 북한과 소련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1960년대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 확고해지고 자립 경제·자주 국방을 표방하면서 이는 얄팍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5] 고려인 중엔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데려간 좁은 의미의 고려인들, 사할린재일교포로 머물다가 소련령이 되면서 소련인이 된 사할린 한인들과 또 구별되는 제3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바로 소련에 송출노동자, 유학생, 외교관 등으로 갔다가 정착하거나 망명한 북한인들이다. (원래 고려인으로 북한에 갔다가 소련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다!) 현재 북한의 상태를 보면 러시아에 남은 게 백 번 잘 한 일이다.[6] 북한이 북한의 중공업 발전이 사회주의 국제 분업에 의거하였음을 강조한 바 있다. 조선 로동당 출판사, 『정치 경제학 참고 자료』, 로동 신문 출판 인쇄소, 1960, p.208[7] 1962년 북한은 중국과 함께 경제상호 원조회의를 탈퇴했다. 이는 단순히 중소갈등에서 중국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중공업 발전, 핵무기 개발 등에서 소련과 의견이 달랐던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소련에게는 중국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여 경제 및 국방 지원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8]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395-396[9] 북한 공군MiG-29도 이때 들어왔다고 한다.[10] 그런데 이때 파견된 유학생들이 훗날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에 연루되면서 크나큰 피바람을 보게 된다. 해당 사건 이후 북한은 절대 외국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11] (칼럼)북한을 불쌍하게 보던 소련사람들, (칼럼)북한을 조롱거리로 만든 조선화보.[12] 당시 아시아에서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나라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전부였다. 이 중 중화민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단교했고 지금까지도 외교 관계는 복원되고 있지 않다.[13] 훗날 조지아 대통령으로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