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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2:35:35

4대 군사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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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전 인민의 무장화2.2. 전 국토의 요새화2.3. 전 군의 간부화2.4. 전 군의 현대화
3. 한계와 문제점: 붉은 여왕 가설

1. 개요

국가는 군대와 인민을 정치사상적으로 무장시키는 기초우에서 전군간부화, 전군현대화,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자위적군사로선을 관철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4장 국방 제60조(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서 채택, 1962년 10월 18일)
1962년 12월 조선로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국방에서의 자위」 원칙으로 채택된 북한의 국방/군사 정책이자 조선인민군의 군사 전략.

2. 내용

4대 군사노선은 총 네 개의 주요한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정책은 별오리회의 이후 6.25 전쟁 때의 전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1]

2.1. 전 인민의 무장화

6.25 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은 15만 명 정도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추가로 징집했지만 다 긁어모아도 총합 26만명 선에 그쳤다. 60만명 넘게 동원한 대한민국 국군에 비하면 심각하게 인적자원에서 밀렸던 셈이다. 이는 남북 분단 시점에서 북한 인구가 약 900만 명이였던 데 비해 남한 인구는 약 2,100만 명이나 되었던 데다 대량의 월남민들까지 발생한 것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비교적 정예고 훈련도가 높았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초반에는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속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손실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북한이 6.25 전쟁 때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예비대 부족이었다. 춘천-홍천 전투 초전에 춘천을 통해서 조공인 인민군 2군단이 경기도 한강 이남으로 우회기동하여 퇴로 차단, 포위 섬멸전을 펼치려고 했지만 한국군 제6보병사단의 분전으로 인민군 2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전투력 40% 손실)을 받자 순조롭게 공격 중이던 7사단을 돌려서 춘천 공격에 투입한다. 덕분에 한국군 6사단에 주력이 몽땅 묶인 인민군 2군단은 계획대로 공세에 나서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때는 팔로군 출신의 방호산이 지휘하는 정예부대인 인민군 6사단이 미군의 정찰을 피해서 순조롭게 기동하였다. 당시 미군은 마땅하게 방어에 투입할 병력이 없어서 그냥 패닉 상태였고 방호산은 그대로 마산 방면으로 진격했으면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항구로 부대를 분산시켜서 재보급을 받아야 했고 그동안 병력을 추스린 미군은 인민군 6사단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춘천-홍천 전투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민군 6사단의 공세는 마땅하게 공세에 투입할 사단 하나가 부족해서 실패한 경우였다. 사단 하나만 더 있었어도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해서 부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는데 그게 안 된 것이다.

예비대 부족은 전방에 병력의 손실과 피로도 심각하게 누적시켰다. 계속된 전투로 정예병이 손실되었고 휴식이 없이 계속된 공격으로 이미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는 조선인민군도 지친 상태였고 공세종말점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예비대가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전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쏟아부었고 후방에 방호나 안정화 작전은 꿈도 못 꾸었다. 인민재판이나 강제적 징집이 이루어진 건 역으로 보면 북한이 제대로 후방에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하거나 남한 사람을 징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병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병력이 부족해서 인천은 커녕 이북지역도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예비대가 없었고 그나마 있는 병력은 낙동강 방어선을 어떻게 해 보겠다고 몽땅 부산으로 어택땅 찍은 상태였으니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자 마땅한 방어 병력이 없던 인천과 서울은 그냥 털렸고 모든 주력이 낙동강에 있던 북한은 낙동강의 주력이 무너지자 한방에 쓸려 버린다. 거기다 이후에 미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 가능성 때문에 대규모 인민을 동원한 방어준비에 나서는 등 예비대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 결과로 북한군은 정규군을 꾸준하게 증강시켰다. 그냥 증강시키는 것도 아니고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전투인원 숫자 불리기에만 치중하고 있다. 보다 보면 병력 부족으로 남한을 밀어버리지 못했던 6.25 전쟁 때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선 예비대를 증강시켜 제파식 전술을 바탕으로 꾸준하게 끊임없는 공세를 지속하겠다는 의미였다. 대규모 병력을 초반에 투입해서 전쟁 초반에 한국군을 섬멸하여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목적도 있다. 즉, 초반의 대규모 전력투사로 국군 섬멸 혹은 중대한 타격을 입히고 대량의 예비대를 이용해서 후방을 방호, 안정화 작전을 실시하고 차후에 미군의 상륙 등에 대비하여 방어전을 펼칠 때 종심을 유지한다.

수많은 여러 준군사조직도 이를 위한 것인데 유사시 군을 지원해서 후방을 방호하거나 미군의 직접적인 북한 공격시 방어시설 건설과 민방위 개념으로 지역을 방어하고 예비대로써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서 점령지를 방어하는 등 다양하게 임무를 수행 가능하고 유사시에는 이들도 조공으로 공세에 투입될 수 있다.

2.2. 전 국토의 요새화

북한은 세계 최고인 미군의 상륙전 능력과 미칠 듯한 미군의 화력을 온몸으로 겪은 후 우주방어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 국토의 요새화는 단순한 방어 시설 건설을 넘어서 전시생산 체계 자체를 정립했다. 6.25 전쟁 때 후방 방호가 전무한 상태로 인천 상륙 작전 한방에 훅 가버린 경험은 상륙전에 대한 대비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양면이 바다인 북한 입장에서 세계 최강의 미 해군을 배경으로 제해권을 잡고서 자유롭게 공격 지점을 택할 수 있는 미군에 대한 공포는 어마어마했다. 당장 평안남도에만 상륙하면 수도 평양시가 코앞이다. 평양은 서해라서 중국이 있으니 좀 낫지만 북한 제2의 도시이자 평양과 직통으로 연결된 원산시는 동해안의 대표 항구도시다. 당연히 언제든지 역으로 상륙전을 통해서 2전선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미군에 대한 대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다 6.25 전쟁 당시 부랴부랴 상륙전에 대비할 방어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해야 할 노동자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군수품 생산도 차질을 빚었던 전적이 있으므로 나중에 또 그리 당할 바에 미리 준비해서 대규모 동원으로 전시 경제에 차질이 없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방호시설은 전시 생산시설의 요새화와 지하화까지 포함한 대규모 전시체제 정비의 일부다. 덕분에 북한의 군수공장과 군사시설은 지하에 요새화한 경우가 많다. 미 공군의 폭격을 전쟁 내내 당하면서 그야말로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안 남은 상태에서 북한은 전쟁은 커녕 일상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었다. 매일 폭탄 비가 내리는데 무슨 수로 공장을 돌리고 군수품을 만들어서 보급할 수 있나? 덕분에 후방의 군사시설과 군대는 아작나고 북한의 전시경제는 박살났고 전방의 병참 수준도 최악으로 변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북한은 미군의 제공권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면 어떻게든 맷집을 키워서 몸빵하며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동시에 우주방어를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중저고도 방공망을 만들었다.

2.3. 전 군의 간부화

북한6.25 전쟁 직전까지 대규모 군대를 양성해서 훈련을 시켰고 사단급까지 작전 수준을 향상시켰다. 당시 대대급 수준이었던 한국군보다는 대단하지만 실전과 훈련은 다른 법인 데다 조선인민군도 창군된지 얼마 안된 신생 군대였고 당연히 대부분의 간부가 급하게 양성된 상황이었다. 고위 지휘관이야 화려한 경력자가 많지만 중하급 지휘관은 한국군이나 조선인민군이나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조선인민군도 군단급 훈련은 안 한 상태였다. 사단급까지 작정하고 훈련한 게 아니라 간신히 사단급까지만 훈련을 해냈다는 것에 가까운 편이다.

공세가 순조로울 때는 이런 면이 잘 안 드러났지만 낙동강 방어선에서 심각한 상황에 마주치자 간부들의 질적 문제가 나타났다. 융통성 없는 공격, 지휘없는 퇴각,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동, 지휘관의 지휘소 방기 등등. 이런 상황에서 간부가 능력이 안 되니 제대로 지휘와 통제가 될 리가 없었다. 거기다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까 점령지에서 징집한 병력이 섞이고 신병들을 그대로 전장에 투입하면서 병력의 질적하락도 같이 대두되었다. 전장에서 임무 대리 및 현지 진급, 부대 확장 등으로 간부화된 인원이 즉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후에 대규모로 군을 증강시키는 것과 더불어서 준군사조직도 대거 증설되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준군사조직을 예비군 개념으로 정규군 작전에 맞춰서 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간부 확보와 교육은 필수적이었다. 한마디로 간부를 넘어서 전군의 교육훈련을 통한 정예화가 목표였다.

2.4. 전 군의 현대화

6.25 전쟁 초반에 조선인민군의 무장은 대한민국 국군의 장비보다 질적으로 우세했고 숙련도도 높았다. 그런데 장비가 낙후된 것도 아니면서 왜 현대화를 부르짖었냐면 전투용 무기만이 아니라 군 전반의 기계화를 목표로 한 것이다.

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당연히 T-34-85였다. 문제는 이 탱크가 전투력을 발휘하는데 제한 사항이 많았다는 점이다. 산악 지형에 도로도 좁고 하천이 많은 한반도에서 탱크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공병의 지원, 그 중에서도 도하장비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원래 보병 중심의 군대였던 조선인민군이 기계화부대에 필요한 전투지원까지 세심하게 준비할 시간은 없었고 평탄한 의정부 방면, 도로가 정비된 수도권 일대를 벗어나자 당연히 기계화 부대의 기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당장 한강방어선 전투를 보면 인민군의 도강시도는 중장비를 죄다 날려먹고 말 그대로 맨몸뚱이만 남았던 수준의 국군에게도 속절없이 털렸고, 결국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던 한강철교를 긴급복구해 전차 한대를 넘겨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돌파에 성공했다. 실제로 저런 지형 문제 때문에 6.25 전쟁 발발 전까지 미군은 한반도에 탱크는 필요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기계화 부대뿐만 아니라 일반 보병부대도 하천과 제한된 도로 사정, 장애물 거부 제한으로 기동이 중단되거나 우회해야 하는 등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서울에서 3일이 지체되었다지만 그 후로도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추격전에서 한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허용했다. 전반적인 군의 기동력 제한으로 작전지속이 이어지지 않았고 추격 및 포위섬멸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점을 반영해서 조선인민군은 공병을 대단히 중시한다. 총참모부 직속으로 공병국이 있어서 공병부대를 보유하고 있고 각 군단, 사단에도 공병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단순 숫자로만 보면 국군보다 많은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도하장비 역시 다량 보유하고 있어서 교량전차의 종류도 여럿 된다. 또한 꾸준히 기계화를 추진해서 보병 중심에서 장갑 차량 중심의 기계화부대로 군을 편성한다.

3. 한계와 문제점: 붉은 여왕 가설

4대 군사노선은 전훈의 분석과 문제점 인식 및 그 대응이라는 점에서 방향을 올바르게 잡았다. 세부적인 문제점까지 잘 확인했고 그것을 네 개의 큰 분야로 묶어서 전반적인 군사 전략과 결합해서 군사력을 건설하는 체계도 잘 잡혔다. 그러나 4대 군사노선은 당시 소련중국대립 상황에 있었던 국제 정세 속에서 국방에서 자위를 내세우며 자력갱생이라는 정치적인 목표를 세우고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4대 군사노선은 그 자체가 군사 전략이자 군사 전략에 맞춘 군사 정책이지 종합적인 국방(防) 정책과는 거리가 한참 있었다. 목표부터가 무력적화통일을 위한 구상의 현실화로 당장의 공세적인 군사 작전에 맞춰서 국가의 국방 정책이 따라가는 형태였다. 당연하지만 조선인민군 육군에 집중되는 형태였지 조선인민군 해군조선인민군 공군을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군을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없었다. 심지어는 제대로 된 방어계획조차도.

그래서 북한은 무기도입과 군사력 증강, 군사시설의 건설 등으로 군사력을 통한 국방력은 일시적으로 강화했지만 장기적인 국방 정책의 부재로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가 드러난다. 무기도입 면에서도 자위권을 강조한 것과 반대로 공산권에서 넘겨받은 무기의 면허 생산, 복제, 개량에서 멈추었지 핵무기나 장거리 미사일을 제외하면 재래식 무기 개발 등의 계획은 전무했다. 그래도 북한은 군비 증강으로 남한을 압도하고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일설에 따르면 김일성은 10일 안에 항구 도시를 모조리 점령하여 미국의 증원을 막아서 전쟁을 막거나 서울을 신속하게 점령해서 지연전 후 수도권 일대를 점령한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협상을 하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6.25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군이 최소한 3일 안에는 무너진다고 가정하고 미군의 증원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보다 군비를 더 증강하면 더 빠르고 손 쉬울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군의 수준을 얕보고 주한미군을 주적으로 본 채 준비[2]했는데 남한도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북한에 대응할 군비를 꾸준히 증강시켜 미국을 비롯해서 외국에서 무기를 도입했고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전투력이 증대되어 사실상 남북한의 군사력 격차는 북한의 우위에서 일정한 수준을 계속 유지하여 당장의 군사력은 북한이 우세하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의 격차는 안 나게 되는 붉은 여왕 효과가 적용이 된 것이다.

실제로 북한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전면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1970년대는 한국도 이미 어느 정도 경제 수준이 올라와 있었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신무기 개발에 나선다. 즉, 북한이 전면전에 대한 준비가 된 시점에서 한국도 그에 맞춰서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군의 이런 투자는 1980년대부터 성과를 보이면서 군사력 격차를 크게 줄인다.

대한민국 국군은 M48 패튼 시리즈를 1960년대에 도입했고 1968년부터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면서 M16 소총을 도입하였으며 포병전력도 베트남 전쟁에서 실전을 치렀던 M107, M110 자주포와 M109 자주포를 면허생산한 K55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후 닉슨 독트린의 발표로 미국에 의존한 국방에 한계를 느끼고 1970년대부터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율곡사업 등 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면서 1970년대부터는 M101 105mm 곡사포M16 소총, 발칸포 등의 각종 무기를 면허생산하면서 동시에 K1 기관단총, K2 소총, K-1 전차, K200 장갑차 등의 국산 무기들이 개발되기 시작한 시기도 1970년대이다. 물론 K1 기관단총이나 K-1 전차 등이 제식 무기로 선정되고 실전배치가 된 것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반대로 북한은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는 원동력인 경제력이 1970년대부터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에는 아예 정체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군비 증강만큼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그래도 1980년대에는 북한이 경제력도 충분했고 공산권 우호국도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투자와 더불어서 격차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군사적인 우위는 일정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1980년대에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하향곡선을 그리던 경제가 1993년에 고난의 행군이 터지면서 한방에 훅 가 버린다. 군사력 경쟁의 원천인 경제가 무너지고 거기다 무기 도입선이었던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몰락하자 더 이상의 무기 도입도 불가능해지면서 군비 증강이 원천 차단된다.

하지만 한국은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의 2차 석유 파동과 그 영향으로 약간의 위기는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이 지속되어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3저 호황이라는 이름의 호황기를 맞이하고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이후부터는 해군과 공군이 기어링급F-4, F-5 등의 구식 무기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KFP 사업, 1~2차 FX 사업, KDX-1, KDX-2 등의 사업을 진행하여 공군과 해군을 증강했다. 게다가 육군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아서 K1A1 전차, K-9 자주포 등의 신무기 개발 및 실전배치를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노태우 정부 때 차관으로 빌려준 것을 회수하고자 시작한 불곰사업 등의 신무기 도입과 개발을 진행하여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1차 불곰사업으로 T-80U 전차 33대와 BMP-3 장갑차 33대, 그리고 Metis-M 대전차미사일 발사기 70문, 탄약 1250발과 이글라 휴대용 대공미사일 발사기 50문, 탄약 700발을 도입하였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진행된 2차 불곰사업으로는 T-80U 2대, 포수조준경에 열영상 장비가 장착되어 야간 교전능력이 강화된 BMP-3, Metis-M 발사기 156문, 탄약 11500발 등이 추가 도입되었으며 무레나 공기부양정 3척, Il-103, Ka-32A 등이 도입되었다.

물론 1997년 외환 위기로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일부 계획이 취소되고 지연되거나 물량이 축소되는 사례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KDX-3, 독도함, FA-50, KUH-1 수리온 등의 무기 개발과 함께 F-15K, F-35, E-737, A330 MRTT, AH-64E 등의 신무기들도 도입되었거나 도입이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과 비교하면 양적으로는 열세이지만 질적으로는 우세라는 점을 알고 북한 따위와 전쟁하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차라리 일본이나 중국을 가지고 떡밥을 물고, 대양해군이니 항공모함이니 F-22 랩터, F-35 등의 이야기를 한다. 이미 북한군 이전에 북한이라는 나라 전체가 막장이 된 상황에서 남한이 전쟁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이제 아무도 안 한다.

그 결과 북한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지니고 싸울 생각이었지만 막상 현실은 북한이 군비를 증강하는 만큼 남한도 했기 때문에 북한은 오히려 남한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군비를 증강해야 했다. 그러다가 군비 경쟁의 원천인 경제력이 박살나자 역전되어 버림에 따라 이론적으로는 효율적이고 실리적이었던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은 각자 특유의 부작용을 매우 잘 드러내면서 완전히 막장이 되어 버린다.

정리하면 분석은 잘 했고 문제점 개선방향과 정책도 나쁘지 않았지만 약간 늦었고, 그 약간 늦은 게 붉은 여왕 효과를 불러일으켜서 시기가 너무 늦어버려 전쟁 개시를 차일피일 미루다 이 지경까지 왔으며 결정적으로 전쟁만 생각했지 국방을 생각하지 않은 결함이 있었던 정책이다. 즉, 단기결전을 염두에 둔 짧은 기간의 전략으로서는 효용이 있었겠지만 북한처럼 수십년씩이나 지키면서 묵혀둘 가치는 전혀 없었던 급조된 전략에 불과했다.


[1] 이기탁, '한반도의 정치와 군사: 이론과 실제', 일신사:서울, 1988, p.367-368[2] 그러나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입장에서는 한국군도 만만찮은 상대였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졸전기록을 많이 남기긴 했지만 북한군의 2배 넘는 물량을 선보이며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계속 손실을 입으면서도 UN군의 방패역할 하나는 확실히 해낸 군대였다.[3] 고도의 팽창 정책을 펼쳤던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60만명에 달하던 군대를 30만명으로 감축했음에도 더 이상 수익이 나는 전쟁이 없자 쇠퇴의 길을 걸었고, 군국주의 경제를 뒷바침하기 위해 세계대전까지 감수했던 나치 독일자신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자신들이 멸망했다.[4] 번개-5번개-7을 개발하는 등 나름대로 갖춰지고는 있지만 당초 목표로 삼은 남한+미국의 공습에 대응하기에는 정말로 턱없이 부족한 숫자일 뿐더러 대다수의 방공 시스템들은 S-75, S-125, S-200과 같은 구식 체계들이라 남한+미국의 스텔스기, 순항 미사일, 탄도탄, 전자전, 무인기이나 SEAD 작전으로 허무하게 파괴될 확률이 높다.[5] 저고도에서 활동하는 헬기에게는 유효한 상대이지만 그게 끝이다. 현대전에서 중요한 것은 고고도에서 활동하는 적 공군의 고정익기 편대, 특히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저지하는 것인데 중저고도 방공망은 이렇게 고고도에서 활동하는 적 공군을 절대 저지할 수 없다.[6] 왜 2세대 전차가 영 좋지 않은가 하면 이 때의 전차는 냉전이 한참일 때 개발된 터라 핵전쟁을 전제로 한 전차들이었고 그 결과 전차 자체의 방어력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핵 떨어지면 전차의 방어력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방어력이 영 별로인 전차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