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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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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ed11e> 북한 독재정권의 시작, 김일성 그는 누구인가?
(2023년 7월 29일 방송분)
1. 유년 시절 (1912 ~ 1930)2. 청년 시절 (1931 ~ 1945)
2.1. 왕청 유격대2.2. 동북항일연군(1936~1941)
2.2.1. 민생단 사건2.2.2. 날조된 북만원정
2.3. 날조된 조선인민혁명군2.4. 날조된 조국광복회2.5. 보천보 전투2.6. 고난의 행군2.7. 훙치허 전투2.8. 제88국제여단
3. 해방 정국 (1945 ~ 1950)4. 6.25 전쟁 (1950 ~ 1953)5. 전후재건과 천리마 운동6. 절대 권력자 (1953~1970년대)7. 남조선 혁명론과 군사 모험주의의 발호 (1960년대)8.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와의 외교관계 그리고 연대 (1960~1970년대)9. 김정일에 점차적인 왕위승계 (1974 ~ 1994)10. 동구권의 해체와 남북회담 그리고 북미수교 시도(1991~1993)11. 사망 (1994년 7월 8일)12.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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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시절 (1912 ~ 193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Il-sung_in_1927.jpg
1927년의 김일성

1912년 4월 15일[1][2][3] 김형직강반석[4]장남으로 당시 외가였던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에서 출생했다.

초명은 김성주로, 고순화면 남동에 위치한 만경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1916년 남동생 김철주, 1920년 남동생 김영주가 태어났다.

3.1 운동이 있던 1919년 8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했다. 1923~1925년에는 잠시 평양으로 와서 창덕학교에 다녔으며 이후에는 중국인 소학교를 다녔다.[5] # 무면허 한의사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공산주의자는 치료도 안해주던 강성 반공주의자라 공산주의자의 미움을 사서 1926년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다. 이후 조부모 슬하에서 지내며 1927년 지금의 지린성 송화강 강변에 있는 위원(毓文, Yùwén, 육문) 중학교를 다녔다. 이곳의 중국인 선생 상웨(尙鉞)에게서 공산주의를 배우게 된다. #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조직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위원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경 출소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리며 그는 공산주의로 기울었고, 1930년에는 이종락이 새로운 지휘부를 만들자 김일성은 그 대원이 되었다. # 어쨌든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을 한 것은 맞지만, 이런 항일운동을 두고 아버지의 성격을 왜곡하는 등의 행적이 이어지고 있다.
김일성의 출생, 김일성의 어린 시절, 김일성이 태어날 당시 김일성의 집안 배경 등은 북한 언론이나 북한 교과서에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으나 우상화를 목적으로 그렇게 창작한 것들이 많아 대다수는 그대로 믿을 것이 못 된다. 다만 증조할아버지 김응우 대부터 만경대에서 쭉 살아왔고 아버지 김형직 대에 경제적으로 안정화되었다고 하니, 경제적으로는 유복하고 안정적이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은 확실하다.

김일성과 같이 창덕학교를 다녔던 월남민들은 김일성에 대해 가끔씩 마고자 같은 중국옷을 입고 다니기도 하여 '되놈'이라고 종종 놀림받기도 했고, 키도 크고 제법 덩치도 있었지만 씨름이나 힘겨루기를 하면 대체로 지는 편이었으며, 성경 수업 시간에는 늘 빠지기 일쑤였다고 전한다.[6]

2. 청년 시절 (1931 ~ 1945)

역시 북한에서의 우상화를 위한 역사왜곡이 매우 끈질겨 북한 교과서에서도 이것이 실릴 정도며, 김일성 본인의 과장된 주장도 심하다. # 이 시절에 대한 역사왜곡이 북한에서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책을 출판하고자 하면 북한의 협박은 물론이거니와 보수 진보 양쪽에서 “국가보안법 때문에”, “보수단체가 고소하면 변호사비로 큰돈을 날릴 것”이라는 출판사의 거부가 있을 정도다. # 항일 운동을 한 것 자체는 그에 대한 평전을 펴낸 조선족 유순호 씨나 김일성 가짜설을 믿는 김형덕 씨마저 믿는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공적을 도둑질한 것이 심해 중국의 조선족이 된 당사자들도 이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개하는 경우가 있었을 정도며,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도 거짓 주장이 심하다고 평가 받는다.

1930년 일제의 감시를 피할 겸 만주에 퍼진 김일성 신화를 이용하기 위해[7] 김일성(金日星)으로 개명하고, 1935년 지금의 이름 김일성(金日成)으로 음은 같지만 한자는 한번 더 개명했다.

2.1. 왕청 유격대

1931년 9월 일본 제국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같은 해 10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 병사공작지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항일 유격대를 건설할 것과 이 유격대를 농촌으로 확대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는 각 지역별로 공산유격대가 형성됐다. 남만유격대, 동만유격대, 그리고 동북인민혁명군 등이 그것이다. 김일성, 최현 등은 모두 동만유격대 소속으로 분류된다. 김일성은 1931년부터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했으며, 항일독립운동도 사실상 이 시점부터 시작했다.

김일성을 비롯하여 최광, 오진우 등은 왕청유격대 소속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왕청유격대의 대장이 아니었다. 1933년 9월에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대는 중국구국군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동녕현성 전투의 주도자는 오의성부대의 오의성이었다. 그는 원래 마적 출신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왕청유격대의 일개 소대장으로 처음 항일운동에 참가했다. #

김일성의 상관[8]인 오의성이 한때 마적 두목이었던 왕덕림과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마적이라는 것을 규정하지는 않지만,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유격대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2.2. 동북항일연군(1936~1941)

중국공산당만주에서 운영하던 다민족 부대. 김일성은 이 부대가 와해되어 소련으로 피신하고, 거기서 소련군 휘하 제88국제여단 소속이 되기 전까지 여기서 복무했다. 김일성과 같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출신이던 여영준은 "‘김 정위,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일제와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언젠가 왜놈을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나는 안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해 왔는데, 최소한 안도현장 쯤이야 시켜주겠지’"라는 언급을 한다. # 이 당시에도 항일운동으로 출세를 하고자 하는 욕망은 있었으나, 중국인이 된다 하더라도 중국공산당의 눈에 들어서 중국의 안도현장 자리를 얻는 정도를 원했지, 아예 북한의 국가수반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1942년 망명한 소련에서 창설된 88여단에 들어간 것이 출세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다.

만주 항일빨치산과 88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25명 정도의 김일성 직계 빨치산은 훗날 북한을 장악하는 핵심 인물이 된다. 김일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학, 소학교 중퇴 정도의 학력을 지녀 김일성에 비해 훨씬 학력이 낮았기에 그에게 충성하는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었다. 김일성 본인도 다른 사회주의자에 비해 군인으로써 보인 충성을 소련에 보여주어 신임을 얻게 되었다. # 북한 정권이 세워지자 김일성은 빨치산에게 특혜를 베풀었고, 이들은 안 그래도 앞뒤를 재지 않는 인물들이었으나 김일성이 파격적인 대가를 주어 김일성이 북한을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2.2.1. 민생단 사건

이 당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정치위원이었는데, 민생단 사건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에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활동중이었고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소환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일성은 자칫하면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중국인 왕윤성[9]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다.

김일성은 중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했고, 민생단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을 유창한 중국어를 이용해 왕윤성을 설득시켜 사형을 당할 위기에서 빠져나가고 그 대신 정치위원에서 해제되어 평대원이 되었다. 군대로 따지면 영관급 장교에서 현역병으로 강등된 셈이다.

이때 김일성은 정치위원 자리에서 이미 직위 해제됐고, 후임으로 남창익이라는 사람이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동년현성 전투도 중국구국군 오의성부대의 지휘를 받은 것이다. 김일성은 민생단 감투를 쓰고 평대원으로 강등돼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민생단 혐의를 벗기 위해서 작탄대 대원이 되었다.

2.2.2. 날조된 북만원정

북만원정이란 북만주 지역의 원정이라는 뜻으로, 북한 공식 역사관에서는 김일성의 리더십을 드러내는 것으로 우상화되어 일반 주민까지 교육받는 내용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북만원정을 일본군의 토벌 위기에 처한 저우바오중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이 벌인 원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제는 민생단 사건으로 몰려서 총살위기에 처한 김일성이 중국인 빨치산 간부의 도움으로 한밤중에 저우바오중 부대로 도망친 사건이다.

또한 "일본군에 투항한 유격대 길강성 지휘부 사령인 이종락이 김일성에게 처형됐다."라는 김일성 회고록 내용도 거짓말이다. 이종락을 처형한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항일1로군 총지휘관 양정우였기 때문. 오히려 김일성은 일본군으로 투항을 권고하는 옛 상사였던 이종락의 손을 (일본군에 투항하기 위해)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항일1로군 총지휘관 양정우는 이를 저지했고, 송무선 항일1로군 조직과장을 파견해서 이종락을 압송한 후 직접 처형했다. 당시 일본군에 투항하려고 고민하던 김일성을 항일 유격부대 총지휘관이 만류했다는 것.날조된 김일성의 회고록

다만 이때도 정치적 지능은 천재적인 편이라서, 조선인 중 수준급의 중국어 능력과 뛰어난 말재주를 통해 중국인 간부들의 신임을 얻고, 민생단 혐의를 벗기 위해 위험한 전투에 자원하는 계산된 행동을 하고는 했다. 빨치산 간부가 괜히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 특히 근거지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북만으로 이동했다고 보고해달라고 입을 맞추는 식의 적절한 변명을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2.3. 날조된 조선인민혁명군

북한은 "1934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동만주의 반일 인민유격대와 남만주 반일유격대를 통합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35년 5월에는 반일 민족 통일전선 본보인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회의 회장으로 추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만주 각지의 혁명적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신박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0년대 만주지방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군'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소비에트 홍군이라는 명칭을 취소하고 다시 성립할 것을 지시했던 코민테른의 '1월 서한'에 따라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의 명칭을 조합해서 고안해낸 가공의 조직이다.김일성이 가공해 만들어낸 군사조직
김일성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 가며 활동했다." 라고 되어 있다. 즉,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다.[10]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는 전혀 다른 실존했던 군사조직이었다. 심지어 북한이 '혈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중국조차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부인했다. 예컨대 1962년 4월 25일 평양에서는 항일유격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를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 초청된 중국공산당 수뇌급 간부 팽진(彭眞)은 이 점을 피력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중국은 "김일성이 주도하여 조직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은 날조된 것이며,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일개 지방당의 말단 조직원으로서 당의 지도 하에 행동했던 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2017년까지 4월 25일을 조선인민군 창건기념일로 선정하고 2020년부터 4월 25일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로 기리며[11] 매해마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북한의 날조된 역사가 우리 백과사전에까지도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2

특히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내용 중에는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을 김일성이 흡수해서 대규모 부대로 거듭나게 되었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이다. 조선혁명군의 일부 대원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12]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에서 주장하는 조선 혁명군과 실제 사료에 등장하는 조선 혁명군이 다르다. 해당항목 참조.

2.4. 날조된 조국광복회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73년에 펴낸 '정치사전'에서 조국광복회를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시기 주체사상을 구현하여 창건한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조국광복회라는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이 날조하여 만들어낸 조국광복회의 실제 모델은, 웨이청민이 만든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이다.

조국광복회 설립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중국인 웨이청민(魏極民, 위극민)이다. 웨이청민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책임비서 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정치위원이었다. 웨이청민이 1936년 5월에 제1로군 간부회의를 소집해서 반일통일전선체를 조직하도록 지시했고, 이 지시를 1936년 6월에 실행한 사람이 오성륜(吳成崙)이다. 조국광복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김일성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날조했다.

첫째,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 엄수명, 이상준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도 자신이 이동백, 여운형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고 조작하였다. 둘째,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채택된 ‘중국내 제민족 반파쇼 인민전선과 반일민족통일전선 구성에 관한 테제’에 근거해 창설된 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통일전선전략전술에 따라 조직한 것이라고 날조하였다. 셋째, 오성륜(별명 全光)이 작성한 창립선언과 10대 강령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날조하였다. 넷째, 조직 창립일을 6월 10에서 5월 5일로 조작하였고, 조직 결성 장소도 장백현과 국내의 혜산, 갑산이 유일했는데도 서울, 평양, 제주를 비롯한 전국에 결성했으며, 회원도 수십만에 달한다고 조작하였다.조작으로 만들어진 조국광복회

특히 김일성이 여운형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는 것은 완전한 날조다. 무엇보다 1936년 당시 김일성은 만주에 있었고 여운형은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만난 사실조차 없었다. 여운형과 관련된 기록에도 1936년 김일성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1936년 당시 여운형은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조선일보,중앙일보가 폐간돼 사장직에서 물러나 경황이 없던 때였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광복회의 지방조직이 만주는 물론 국내 각처에 결성됐으며 전국적으로 회원이 수십 만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국내 각처란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대전, 제주까지 조직이 결성됐다는 뜻이다. 이정도 규모이면 대형 조직인데 북한은 조직의 편제나 간부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만약 전국적으로 광복회 회원이 수십만이라면 최소한 어림잡아도 20만명이라고 할 수 있고 당시 조선 인구가 2,500여 만이므로 125명에 한 사람꼴로 회원이 있는 셈이다. 이를 다시 20세 이상의 성인 인구에 적용하면 70-80명에 한 사람 꼴로 회원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시나 해방 후 38선 이남 지역에 조국광복회 회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2.5. 보천보 전투

항목 참조

2.6. 고난의 행군[13]

토벌작전은 겨울철 눈 내리는 시기를 이용하고 미리 목표 공비를 정한다. 눈 위의 발자국을 더듬어가고, 험준한 산속에서 밥 짓는 연기를 발견하면 추격해 박멸한다. 적의 모습을 발견하면 단숨에 섬멸하도록 하며, 나머지 잔당은 추격, 또 추격하여 적에게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으며,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투항 또는 귀순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의 토벌방법, 만주국사 각론, 1971
보천보 전투 1달 이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일제의 중일전쟁은 만주의 항일세력 전체를 분기시켰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동북항일연군은 동만주와 남만주 그리고 북만주 각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당시 일본은 소위 집단부락[14]을 설치하여 이들을 분쇄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적잖은 성과를 봤다. 일본군은 이들에 대한 대토벌에 나섰으며, 김일성은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100여일에 걸친 눈속에서의 행군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1990년대 북한이 자신들의 처지를 빗대어 표현한 고난의 행군이다.

와다 하루키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식량부족이 김일성 부대를 괴롭혔다고 한다. 일본군 항공기 정찰에 발견될 것을 두려워하여 불도 피우지 못해 말고기를 날 것으로 며칠씩 계속해서 먹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였다. 대략 영하 30도 이상의 추위속에서 추격해오는 일본군들을 상대하며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을 지속했다. 생 말고기 뿐만 아니라 강냉이 몇알을 입안에 넣거나 배추잎을 삶아서 끼니를 해결했을 정도였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았던 김일성의 부대는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이었는데, 김일성을 포함한 제2방면군 지휘부는 장백현에서 세 방향으로 나뉘어 추적자를 혼란시키로 결정했다. 김일성은 오백룡의 경위련 및 기관총반과 함께 가재수 방면으로 향하기로 하고, 오중흡은 혹할지구 방면으로, 손장상과 김일의 부대는 무송현 동강 방면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들을 장백현 내를 작전 행동하며 돌아다니다가 1939년 3월 북대정자에 진을 치며, 고난의 행군은 마무리 된다.

이후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동만저우 무산 지역으로 이동했고, 동만을 배경으로 적극적인 유격전을 재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들이 동만에서 활동하자 일제는 또다시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대응해왔으며,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대로 구성된 75,000명의 병력이 이들을 대상으로 유례없는 긴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계산이었던 것. 이후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이 작전에 참여한 경찰 토벌대를 상대로 큰 전투를 치르게 된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도 일본군과 싸워서 추격을 피한 것이 아니고 경찰 토벌대를 만나 따돌린 것이라고 북한 당국까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2.7. 훙치허 전투

홍기하 전투라고도 불린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2.8. 제88국제여단

파일:FB_IMG_1474741801443.jpg
제88국제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진다. 김일성, 최용건 등 동북항일연군 대원 중 일부는 일본군을 피해 연해주, 하바롭스크 소련 영내로 이동한다. 아때 김일성이 작성해서 소련 당국에 제출한 자신의 이력서가 2019년에 국내 언론에 공개되었다.(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1940년 훙치허 전투 이후 김일성의 유격대는 대략 340명의 규모로 늘어났고, 최현, 최춘국, 김동규, 안길 등과 함께 긴밀히 활동했다. 일본군의 노조에 소장이 이끄는 토벌대를 피해 그해 8월부터는 소부대 작전으로 이행하게 됐다.[15] 그해 10월부터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 김일성과 그의 일행들은 만주의 훈춘을 떠나 10월 23일 소련으로 들어갔으며, 동행한 조선인 대원으로는 전문섭, 강위룡, 최인덕, 이두익, 김정숙 등이 있다. 김정일이 어머니인 김정숙이 김일성과 결혼한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16] 그리고 이 시점에 김일성은 첫 아내 김정숙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김정일이다.

1940년 12월하순부터 1941년 1월상순까지 항일연군 각 부대 지도자들은 하바롭스크에서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것이 제2차 하바롭스크회의며, 회의에는 주보중, 최용건, 계청, 왕효명, 시세영, 김책, 김일성, 서철, 리조린, 풍중운, 안길 등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전 만주를 통일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는 것과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롭스크에 설치한다는데 대한 그리고 "통일적최고군사령도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할데 대한" 의안을 내놓고 토의결정했다.[17] 소련으로 간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히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원동경내에 남북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롭스크회의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 11월초부터 선후로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간 것으로 확인된다.[18]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들은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만주로 들어가 전개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소만 국경지대에서 사실상 야영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본격적으로 반파시즘 전쟁을 치르게 됐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대일전에 대해 고려하게 됐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88 국제여단이다.

1942년 소련 극동군은 이들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편성하였으며 얼마 후 ‘88독립보병여단’로 정식 편성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보임된다. 이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오랜 동지애, 성실성,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당시 붉은군대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은 한편으로는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고발했다는 내용이다. 이 고발은 조선인 대대는 중국 길림성에서 현지 도둑과 짜고 민중에 대한 약탈행위를 반복했으며 중국공산당원도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 보도는 러시아 언론이 자체적으로 자국에 보도한 것이지 서방 언론과 인터뷰한 것이 아니다.[19]

제88특별여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참이던 1942년 8월 1일 창설됐다. 제88특별여단의 병력은 초기에 1,500명 정도로 이 중 항일연군 인사는 1,000명 정도였고, 김일성도 이중 한 사람이었다. 제88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소련장교의 지도에 의해 행해졌으며, 총검술·실탄사격·전술진공·방수훈련·행군연습·동계 야외 노영훈련·낙하산강하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 1,500명 이상이나 되는 제88특별여단에는 항일연군 병사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이 중 조선인은 최소 120명에서 많게는 4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군 작전국장으로 활동하다가, 숙청을 피하여 타슈켄트로 간 유성철 씨에 따르면 김일성은 두뇌가 뛰어나고 지도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마르고 몸이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정찰활동을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88여단에서 한반도로 진공하는 전투소식을 들으며 부대원들도 하루빨리 전투에 투입되기를 갈망했으나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채 해방을 맞고 말았다고 하였다. ## 하지만 그는 88여단에서 김일성의 인자로운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여단장 저우바오중이나 소련인 장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다정다감했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격하고 차가웠다고 한다. 김일성은 자신과 좋지않은 일이 있었던 사람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뒤에 반드시 보복을 하는 옹졸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88여단에서 금지된 개인적 심부름을 거부한 자신에게 두고두고 원한을 품어서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 이를 갚고는 했다는 것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뜻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김일성과의 기억은 유쾌하지 못했다고 한다. #

3. 해방 정국 (1945 ~ 1950)

김일성이 자신의 막대한 권력을 갖추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북한의 철권적인 통치 시스템은 이 시대에 그 기반이 구축되고 반대파 숙청의 기반도 이 시대에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옹립한 소련이 김일성의 구상을 지지했다기 보다는, 소련을 김일성이 설득시키고 권한 내에서 최대한 정책을 실현하고 자신의 기반을 마련한 것에 가깝다. 김일성은 권력기반을 마련하는 능력은 대단히 뛰어났다. 심지어 소련의 반대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의식하여 공산당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을 정도다.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91658313.jpg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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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다. 광복 직후 '선구'의 설문조사에서 김일성이 군무부장 부문에 조사된 이유로 8.15 해방정국 당시 지금의 김일성이 유명세가 있었다고 한홍구(성공회대학교 교수) 등 일부 측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김일성이 처음 공개활동을 한 것은 1945년 10월 14일이다. 하지만, 이 여론 조사 자체는 사실이며, 김일성이 유명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일단 저 여론조사는 '군무부장'에 적합한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지, '지도자'에 적합한 내용을 조사한 것이 아니다.

저 여론조사는 19일에 보도된 내용이며, 구체적으로 서울에는 누가 평양에 왔는지 알려지지 않을 시기였다. #[20] 이 사람들은 북한의 국가수반이 된 김일성이 아니라, 전설 속 김일성 장군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니까 30대 젊은이가 아닌 을지문덕 같이 나이가 있는 노련한 장군, 일본군을 물리치고 축지법을 쓴다고 알려져 있던 김일성을 지지한 것이다. 만약 그의 실제 행적을 알았다면 지지가 더 줄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공개활동을 했을 때는 자신이 알던 김일성이 아니었으므로 해방 정국 초창기의 북한 주민들은 이런 조사가 있고 나서 김일성 가짜설을 믿기도 하였다. 김일성 가짜설 문서에서 보다시피 남한의 조선공산당에서도 이런 소문을 믿을 정도였다. 사실은 김일성이 소문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나 아예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파일:김일성해방.jpg
하오(오후) 1시 양복차림에 가슴에는 소련군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단에 나타나자 군중들은 운동장이 떠나갈듯이 「김일성 장군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10분간 대중연설을 했는데 사실 그 연설문은 25군 정치부에서 작성하고 시인 전동혁(소련파로 군정사령부의 조선어신문 발행에 관계)이 번역한 것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했던 나는 김일성의 인기를 보고 내심 크게 놀랐으며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의 연설이 계속되면서 군중들 사이에 「가짜 김일성」이란 쑤군거림이 들렸고 심지어 「로스께 앞잡이」라고 욕설을 하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중들의 동요는 내가 지난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연단의 김일성이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워낙 오래전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적 투쟁을 들어왔기 때문에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몸도 지금처럼 건장하지 않았고 짧은머리 탓인지 33세의 실제나이보다도 더욱 어려보이는 새파란 청년모습이었다. 나는 내옆에 있던 한 여인이 『저거 아이아냐. 무슨 김일성 장군이 저래』라고 말하는 것도 직접 들었다.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한국일보, 1990년 11월 7일 #

서울에도 언론의 보도로 이런 주장이 퍼진 것은 1946년부터다. 보천보 전투 항목에서 보듯 실제보다 전공을 부풀린 주장을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 믿었고 나이가 지긋한 장군이 있다는 식의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김형석 씨처럼 그 현장에 있던 실향민은 '김성주'라는 인물이 김일성을 참칭한 것으로 믿고 있다. 다만 김형석 씨는 그가 어떤 항일운동까지는 했다고 여긴다. 물론 김일성 가짜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일성 가짜설은 학계에서 논파당했다. 아래의 인용문은 연세대학교 김성보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날 수많은 관련 문헌 자료가 공개되어 더 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북한의 주장대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21]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 확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일성 스스로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의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 한인들이 펼친 활동을 한국의 민족운동사 전체의 흐름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36

이 당시에는 남한에서도 좌파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던 시절이라[22] 여론조사에서 우파에 근접할 정도로 좌파도 인식이 좋기도 하였다. 물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신탁통치 찬성으로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락했고, 이는 6.25 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나중에 박헌영이 숙청되는 데에 이르는 계기가 되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그랬다는 얘기이다. 지도자로써의 지지는 전설속의 김일성과 비교해도 박헌영에 대한 지지가 더 높았다는 것을 이 설문조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혁명가로써도 박헌영이 같은 조사에서 더 지지 여론이 높았다. 왜 박헌영이 권력투쟁에서 밀렸는가 하면, 소련과의 친밀도가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에 밀렸기 때문이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한다.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평양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1945년 8월 미국일본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따라 8월 9일부터 소련군한반도로 진격하게 됐고, 치스차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 제25군은 소련 극동태평양 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함경북도 웅기, 나진, 청진 그리고 나남을 점령했다. 해방 이후 6일 뒤인 8월 21일 소련군 상륙 부대는 군항 원산항을 점령했고, 8월 24일과 25일 소련의 공수부대들은 산업 중심지인 함흥평양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치스차코프 휘하 제25군의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 그리고 일본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경기도 개성에 도달했고, 38도선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진격하여 38도선 이북의 전 지역을 접수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이 서울까지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한반도 이남까지 확산되기도 했었다. 어쨌든 소련군의 북한지역 접수는 이렇게 마무리 됐다.

김일성이 귀국해서 처음 한 교시는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 씨등에게 자신의 나이, 입국 등을 숨길 것이다. 특히 소련군 사령부를 처음 찾아서 인사 뒤에 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장군에게 곧바로 한 말은 자신의 부대를 해방전에 참전했다고 간주해달라는 우상화를 위한 역사 왜곡이었다. #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을 해서라도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레베데프 장군은 진지한 주장이 아니라 단지 애교에 불과한 말이라고 여겼으나 훗날 실제로 가상의 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조해내며 자신들이 일본군을 격퇴하여 해방했다는 주장이 북한에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런 역사왜곡은 북한에서 아이들까지 교육받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죽하면 대북방송에서 미국에 의해서도 일본이 항복한 내용을 알려줄 정도다. #

김일성의 귀국에 대해선 2006년 평양출판사가 펴낸 <김일성 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선, '김일성 주석께서는 9월에야 배편으로 쏘련을 떠나시게 되였고 9월 19일 원산항에 개선하시였으며 9월 22일 오전에는 평양에 도착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 개선으로 민족사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라고 하며, 김일성이 북한으로 귀국한 날짜와 항구를 북한도 아예 밝히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교과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북한 주민이 배우는 것은 '김일성이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저 서적도 '개선'을 했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소련의 북한 해방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는 듯하다가 그 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심해졌다. 김일성 회고록을 제외하고 1980년대 이후의 문헌에 김일성이 조국해방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는 문헌 자체가 없으며, 2005년 발간된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의 《항일무장투쟁사》 같은 전문 서적에서 135페이지가 김일성이 웅기에 상륙하고 배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에 소련군에 대한 언급 자체가 단 한 줄이다. pdf 한국의 역사왜곡에서도 공교육이 잘못되고 그 밖에서 제대로 된 주장도 나온다고 한국의 역사왜곡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듯,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서술한 북한의 서적 중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도 있고, 허황된 내용도 섞여 있는데 북한 일반인이 배우는 내용을 무시하고 가장 정상적인 것만 주장하는 것은 심한 김일성에 대한 미화다.

김일성은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철저하게 숙이고 아부하는 쇼와, 자신의 무력을 갖추는 행위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일성과 어울리던 빨치산 출신들은 오진우가 평양시 보안서장, 최용건은 임시인민위 보안국장 등 주로 치안책임자로 임명되고 일부는 김일성의 호위병으로 남았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은 심복들을 소련인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통역으로 박아놓고 한편으로 치안조직을 장악함으로써 권력도전에서 쉽게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었다. 그는 중요한 책임자 자리에 심복을 배치하지 못할 때에는 부책임자로라도 심어 놓았다. 소련은 조만식, 박헌영 등의 인물을 김일성보다 먼저 북한의 지도자로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소련에 따르지 않거나 사회주의에 충실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마침 소련파보다도 더 소련군의 라인을 열심히 타려고 들던 김일성이 눈에 든 것이다. 자신의 88여단 시절 심복 중 하나인 이동화를 동원해서 평양 기생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치스차코프, 슈티코프, 레베데프 같은 38선 이북 진주 소련군 중 최고위 인물과 함께하며 아부를 떨면서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소련에서는 처음에는 김일성 우상화에 도움을 주는 등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를 김일성에게 속아서 하고, 그의 철권통치를 위한 토지개혁 같은 정책을 그 심각성을 모른 채 방관하기에 이르렀다.

9월 말 김일성은 삼팔선 이북에 새로운 공산당 지도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9월 11일 박헌영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북한 지역의 지방 조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해 소련군정과 교감한 후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주류였던 국내파는 1국1당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10월 초 김일성은 한발 물러서 서울의 조선공산당 산하에 이북 5개 도당을 총괄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국내파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변화에 부정적이었다. 10월 8일 김일성은 개성시 인근에서 박헌영과 북조선분국 설치를 두고 담판을 맺었다. 소련군은 이 자리에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이때 소련군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둘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실제 소련군은 주둔후 지역에 있는 치안조직을 모조리 해산한 뒤 보안대를 편성하고 김일성이 수장인 조직 휘하에 두었으며, 김일성과 반대되는 옌안파 세력인 조선의용군이 입북하려하자 이를 막았다.[23] 박헌영도 고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10월 10일부터 10월 13일까지 '북부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했다.[24] 김일성이 평양의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대회 석상이었다. 훗날 '김일성 장군 조국개선 평양시 환영대회' 또는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 시민대회'로 불리는 이 대회에는 7만여 명의 군중이 참가했다. 김일성은 이 날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라는 구호가 나온 연설이었다. 즉 전 민족이 건국 사업에 참여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 대회는 김일성 가짜설을 만들어낸 시초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이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 젊어 보여서였다.[25]

얼마 후 북조선분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려 책임비서로 친 김일성계였던 김용범이, 제2비서로 박헌영파였던 오기섭이 선출됐다. 이후 북조선분국에서는 김일성 세력이 점점 우세해지다 1945년 말 아예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한다. 1945년 11월에는 신의주에서 시위도 있었으나 소련군의 지원을 기반으로 탱크와 비행기로 진압당했다. 이때부터 우익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다. 평양 같은 곳은 조만식 같은 우익이 먼저 세력을 자리잡았던 곳이나 소련군의 지지를 업은 김일성의 방해에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자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1945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군정은 군정의 얼굴마담으로 조만식을 내세웠으나 신탁통치 문제 등에서 소련의 뜻을 따르지 않자 대신 김일성을 전면에 세우기 시작했다. 3월 23일 김일성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전후하여 '20개조 정강'을 발표해 무상몰수-무상분배를 뼈대로 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등 '민주적인'[26]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의 구상을 밝힌다. 이 구상에 따라 3월부터 8월까지 이른바 '민주개혁'이 진행됐다. 이 20개조 정강에는 소유물의 보장이나 종교·언론의 자유도# 포함이 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이것은 기만으로 밝혀진다. 가령 평양에 있던 관후리 성당은 되돌려 받는다는 협의가 있고 난 후 바로 다음날 그 대화를 이끌었던 홍용호 주교의 비서 강창희는 암살 당한다. # 홍용호 주교도 1949년 항의 차원에서 북한 정부 인사를 찾으러 가다가 체포되었고, 행방불명 된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반대파의 가혹성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빈농과 머슴 등을 농민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출세욕과 토지를 받았다는 물욕을 이용하며 계급의식을 조장하여 충성파로 만들었다. 이들의 수하가 잔혹한 행위도 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눈 앞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서 가능했던 면이 있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를 반대하므로 지지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토지개혁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길을 열고' 공업 등을 발전시킨다는 공산주의자가 하기 힘든 해괴한 선전까지 공산당에서 했었다. 지난날에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했다는 선전[27]을 통해 피해의식을 부추기는 것 정도로 사회주의를 흉내냈을 뿐이다. # 이와 유사한 수법은 6.25 전쟁 때도 38선 이남에서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작권은 6.25전쟁이 끝난 후 완전히 정부로 넘어가고,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무력을 이미 구축했으므로 유의미한 저항은 없었다. 남한에서도 혹하는 경우가 생겨 농지개혁법으로 이것을 어느 정도 방지하였으나 6.25 전쟁 당시 머슴까지 땅을 받지는 못해 어떻게든 이들을 이용하여 소작인을 많이 부리는 지주를 찾기 힘든 대신 '반동분자'의 땅이라도 뺏어 이들에게 넘겨주려고도 했다. #

북한이 지주가 적어 저항이 적었다는 주장도 존재하나, 큰 차이가 아니었다. 아마 양반이 적다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신분은 경제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한은 농지개혁법으로 6.25 전쟁 당시 땅을 대규모로 가진 사람이 적어 애를 먹은 것이다. 남한에서는 인구 70%가 농민, 농민 80%가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인구 75%가 농민, 농가 72%가 소작농과 영세빈농#이었다고 한다. '지주'의 비중은 42년말 남북한이 3.3%였으며 북한은 해방직후 4%였다는 주장도 있다. # 김일성은 처음에는 지주가 30%는 가져가게 한다고 주장하다 준군사조직인 '농촌자위대' 등을 조직하여 세를 불린 뒤 '무상분배 무상몰수'를 주장한 것이다. #

1947년에는 화폐개혁까지 감행했는데, 국영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화폐를 교환해주었는데[28], 상공업자들은 화폐를 교환해주지 않고 그냥 절반 이상의 돈을 빼앗았다. 특히 종교인들은 가진 돈의 8%만 교환하여 92%를 빼앗았다. 김일성은 "모리간상배[29]들만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은 여기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상인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면서 자신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해가 없다면서, 주민들을 이간질시키며 혜택을 몰아준 계층들에게 신분상승을 시켜주는 척하면서 이런 상황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

한국의 민주화운동가인 함석헌은 "이북은 오히려 계급대립이 적어 타 지역에 비해 갈등 요소가 적었다"고 하였다. 그는 "사실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우리의 역사적 단계에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상적인 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계급적 대립이 심치 않았던 이북, 이북 중에서도 평안도 지방은 그렇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공산군대가 들어왔다. 권력에 대해 야심 있는 분자가 거기 달라붙었다. 이리해서 일종의 어거지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세력을 소련 세력에 등을 대고 하는 비양심적인 무리라고 칭했다. 동리 안에서도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 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가진 악감정을 불어넣어 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30]을 조직해서 평지풍파[31]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데마다 사회를 분열시켜 파괴시켰다고 한다. #

아울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남북 동수로 내각을 구성하고 저변의 지지를 얻고 있는 조선공산당이 남한 몫의 반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공산주의 세력이 임시정부의 3/4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위해 여운형을 평양으로 소환해 좌우 합작 운동 중단을 종용하기도 했다.

소련과 그 대리자 김일성은 남한 정치에 깊게 관여했는데, 다음과 같이 여운형의 남로당, 근로인민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해방정국 시기는 강경 우익인 김구도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원한다며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남로당 창당 과정)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근로인민당 창당 과정)

1946년 4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한다. 박헌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조선민전)을 조직해 각 사회단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그 해 8월에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신민당을 흡수해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한다. 11월 3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됐다. 북조선민전이 추천한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투표였다. 소련군정은 인민위원이 다시 대의원을 뽑아 북한의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도록 했다. 2월 21일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해댔다. 집권 초기에는 아예 사회주의라는 말도 안 쓰고 숙청에 전념하였다. 이 때문에 북한의 토호들은 죄다 남쪽으로 도망쳤고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 모여서 만든 학교가 오늘날의 대광고등학교이다.

이에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가 통치했던 북한을 도저히 살지 못할 곳으로 묘사한다. 해방 다음 해부터 너무 많이 가져가 기근이 닥쳤다. 평안북도 용천군에서는 김일성 장군을 죽만 먹이는 '죽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평양에서 2년간 살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와 같으면 되고, 우리와 다르면 안 되는 세상이었다. 거기에는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은 있어도, 미소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회로 묘사한다. 그는 "솔직히 일제강점기 같으면 내가 북한의 고향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를 못해요. ‘대학까지 나온 저놈이 산속에서 조용히 사는데 수상하다’, 그러면 다 잡아다 (사상) 교육을 시키든지 해요."라고 언급했다. 이미 이때부터 탈북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도 했다. ##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은 기회를 잃은 북한은 권력욕에 찌든 사람들이 김일성이 소련에 아부하여 얻은 권력을 만끽하고 아랫 사람들을 옥죄어 잇속을 챙기는 흉흉한 사회가 된 것이다.

1946년 5월, 김일성과 소련 점령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배격하고 김일성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공산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박헌영이 보냈다. 특히 '김일성의 무력통일 노선으로는 남한 혁명을 달성할 수 없으며 평화적 방법으로 남한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을 스탈린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다시금 확정된다. 1948년 9월 9일에는 북한의 내각 수상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소련군 레베데프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비록 과장된 소문에 의해 지명도가 높아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는 사람마저 존재했지만, 어쨌든 그를 항일영웅으로 만들 수는 있었다.

한편, 박헌영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풍부했지만 스탈린이 싫어하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에 관여한 경력이 있고, 3차례나 투옥됐기 때문에 일본과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38선 이북에서는 김일성보다 덜 알려졌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스탈린의 시각이고 스티코프 대장이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미소공위)와 함께 신탁통치를 협의할 남북 전역의 임시정부 "수상에 여운형, 부수상에 박헌영과 김규식, 내무상에 김일성"을 고려하는 방안도 고려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그러나, 공고한 권력을 얻자마자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등거리 외교로 소련과 중국을 괴롭혔고, 이들 말고도 빨치산파가 아닌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8월 종파 사건 무렵에도 특유의 고집으로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받던 反 김일성 파벌을 제거한다.

4. 6.25 전쟁 (1950 ~ 1953)

1948년 대한민국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측의 분단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을 중심으로 충돌이 일어났다. 당시 북한에서는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 38선 전역에서 남한이 4만 9,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432회를 침범했고, 71회의 비행기 침습과 42회 함대 습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반면 남한에서는 “1949년 1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38선 전역에서 북한이 총 7만 625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563회나 침범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징조였다.[32] 1946년부터 38선 사이에서 양측의 긴장상태는 있었지만, 1948년을 시점으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이 발발했다.

정상진[33]에 따르면 1946년부터 소련의 지원을 이용하여 남침을 준비했다고 한다.[34] 권력을 잡고 얼마 있지 않아 평화통일은 안중에도 없이 적화통일부터 준비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1949년초부터 북한에서는 전쟁까지 고려하는 국토완정론이 대두되었으며, 진원지는 김일성과 군부였다. 중공군은 처음 남침 준비 당시 국공내전에서 만주에서 전열을 가다듬던 때라 여유가 없었으나, 이 이후 중공군이 대륙을 석권하고 소련도 안정화되어 팔로군 등 남침을 위한 지원을 받기 쉬워졌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을 위해 싸웠던 조선족 2개 사단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고, 스탈린이 지원해준 탱크와 야포 항공기 등으로 군대를 무장한 상태였다.[35] 여기에 박헌영의 '남로당원 20만 봉기설' 주장을 김일성이 직접 개전 당시 빨치산 토벌을 남진의 어려움을 언급하는 등 믿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다른 정치인의 지지는 얻어 하루에 10km씩 진격하면 50일 안에 대한민국 전체를 정복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36][37], 김일성은 1950년까지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소련에게 끈질기게 들이댔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의 대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38] 김일성의 요청을 묵살했지만, 미국애치슨 라인[39]을 설정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미군이 공여한 대한민국 국군의 각종 군용장비가 후방으로 빠지는 등 호재가 발생하자 스탈린이 이를 승낙했다. 김일성은 승낙받자마자 빠르게 남침 작전계획을 구상한 뒤 스탈린에게 비밀문서로 전달했다.[40]

그리고 스스로 인민군 총사령관이 된 김일성은 인민군을 앞세우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불법 남침을 개시한 그날 오후 "오늘 새벽 리승만 괴뢰도당이 우리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부하고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우리를 공격하였고 우리는 이에 대해 반격하여 개성, 옹진, 파주, 동두천, 장단을 해방하였다"고 선전해 댔다. 그 외에도 "리승만도당은 《북벌》을 단행하기에 앞서 후방의 《안전》을 위하여 남조선에서 활동하고있는 애국적민주주의력량과 유격대를 소멸하라는 미제의 지시에 따라 남조선의 모든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들의 활동을 비법화하고 애국적인민들과 진보적민주인사들을 닥치는대로 검거, 투옥, 학살하였으며 여러차례에 걸쳐 남조선유격대들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라고 하는 등 이승만 정부의 빨치산 토벌 등을 이러한 '반공격'의 어려움으로 지목하고, 자신의 군대가 경험도 적고 북침을 준비한 국군보다 적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으며, 중공의 국공내전의 승리에 따른 외세가 자신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을 유리한 점으로 지목하여 완전한 적화통일을 천명한다. 자신이 남침을 한다는 것도 10명 내외에만 알렸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41] 다수의 인민군 간부를 포함한 북한 사람들은 국군의 선제공격에 인민군이 반격한다고 속았다. # 미제의 침략에 대비한다면서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정교하게 군부 인사를 속였던 것이다.

그런데 6.25 전쟁 초반 대한민국 국군이 휴가를 통한 대규모 공백도 있으나 철저히 준비하고 훈련한 인민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전 경험과 전차와 전투기 장비가 전무했던 국군과는 달리 인민군에는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곡사포와 같은 포병전력은 물론 MiG-15 수십대와 T-34-85 전차가 240대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인민군의 뿌리격인 팔로군들이 참여하여 중일전쟁, 국공내전이라는 실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들이 많았다. 대략 10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했는데, 이 들 중 대략 3만 5천 명(많게는 5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이상이 1949년 7월부터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핵심 전력을 이루었다. 전쟁 직전 인민군이 대략 15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인민군 전력의 1/4 가까이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출처 : 김성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창비, 2004, p.77) 대표적으로 방호산의 6사단이 있다.

전차를 앞세워 대전차장비가 전무하던 국군은 힘을 쓰지 못했고, 하루 만에 개성, 의정부, 파주, 옹진, 동두천, 장단을 점령하였으며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데 이어 7월 13일에는 한강을 건너 20일 대전까지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7월 말에는 임시수도 부산의 코앞이나 다름없는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42] 이때 인민군은 정말 대구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대구에 간혹 박격포탄이나 포탄이 날아오는 일도 있었다. 이때는 승리가 목전인지라 지방을 돌면서 인민군을 독려하기도 했었다.[43]

UN군의 참전소식에도 그 전에 끝날 거라는 자신감과 선봉부대나 다름없던 월튼 워커 장군이 이끄는 미군마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필사적인 방어를 하는 등 인민군의 우세가 계속되자, 인민군에 "인민군은 8월 15일 해방절 전까지 전쟁을 끝마쳐라"고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명령을 내릴 정도로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는 김일성이 광복절8월 15일과 똑같이 한국 전쟁에 승리하면 진정한 광복을 이뤘다며 선전할 의도이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왜 하필이면 6월 25일에 일어난 건지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데, 위에서 김일성은 50일이면 대한민국을 완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8월 15일 해방절에 부산을 점령해 조국통일 선언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8월 15일에서 50일 전인 6월 25일을 전쟁 개시일로 잡은 것이다.

김일성은 개전 초기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면 자신의 무기의 질도 좋고 좋은 부대를 들여왔기에 자연스럽게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렇게 자만했던 탓인지 실제로 인민군이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일성은 당시 한강 이북에 갇혀 있던 남한군 잔존병력을 소탕하는 대신 서울 중앙청 앞에서 대규모 점령식과 퍼레이드를 벌이고 이승만이 경무대에 남기고 간 미제 물건들을 챙기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소중한 골든타임을 날려버렸다. 서울 점령식을 마친 김일성은 경무대에서 휴식을 취했으며, 중앙청 지하실에 마련된 전선사령부에서 승리의 향연을 베풀고 축배를 들었다. 인민군은 사흘 동안 전승 축하회를 열고 반동 숙청에 나섰다. 병사와 장교들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시내 구경을 하는 등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처럼 행동했다.[44]

그러나 강원도 방면을 맡던 국군의 분투 덕에 강원도 방면의 북한군과의 합류하려던 계획이 어긋나 소련군의 교리대로 이들을 기다리느라 3일간 지체되었다는 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정론이다. 심지어 각종 6.25전쟁사를 왜곡하는 북한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

서울을 점령해도 대한민국의 후방은 김일성도 개전 초기에 언급했다시피 이승만 정부가 빨치산을 진작에 박멸한지라 매우 잠잠했고 애치슨 라인 밖인 한반도를 무시할 거라 예상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도전"이라며 "좌시하지 않겠다"는 반응과 함께 미군의 참전이 빠르게 결정되는 등 악재가 생겼다. 특히나 개전초기 미국은 공군을 동원하여 전략폭격에 나섰다. 여기에 동부전선에서 국군 6사단의 선전으로 한강 이북의 국군을 포위섬멸해야 할 2군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2군단이 가져와야 할 도하 장비를 이용하지 못하던 인민군 육군은 서울 점령 후 3일간 머물러야 하는 군사적 곤란을 강요당했다. 또한 대한해협 해전 패배로 인한 부산에 대한 사보타주 실패가 겹쳐,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 내 공산주의 세력은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 정책과 공산지도자 탄압 때문에 6.25 전쟁 직전 즈음에는 좌익세력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박헌영은 전쟁을 일으키면 대한민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고, 김일성은 자신이 이승만이 후방의 안전을 위해 빨치산 등을 토벌했다고 선전했기에 그 자신도 이승만 정부가 빨치산을 토벌하지 않았냐는 입장을 가졌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남로당 20만 명 총궐기” 소식을 기다렸지만, 남한 전역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반기는 남로당의 폭동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46]
마침 인민군은 50일만에 완료한다는 계획때문에 남침 당시 북에서 단 한톨의 식량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보급문제에 직면했다. 실제로 인민군에는 아예 보급부대가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 내전시대에 적군(赤軍)들이 식량을 전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민중에 의존하여 식량 수송을 하지 않고 부대 이동을 한 것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남한의 민중들은 러시아의 민중들과는 달리 인민군에게 자발적으로 식량을 갖다바치지 않았다.[47] 이에 따라 “남한에 무기만 갖고 내려가면 공짜로 공산혁명이 이룩된다”는 생각만 갖고 있던 인민군은 갑작스런 식량부족 문제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인민군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은 점령지 남한 민중들에게서 식량을 징발하도록 인민군에게 명령하였다. 예를 들어 인민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6월 29일 ‘자치대’라고 쓴 붉은 완장을 찬,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들이 총을 메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식량 보유량을 조사하고, 이를 빼앗아가며 수탈을 하였다. 이들은 “만고 역적 이승만 도당들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선량한 인민들이 많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으니 우선 가진 것을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인민공화국에서 1주일 안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줄 것이다”라며 모조리 강제로 빼앗아갔다.[48]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발한 식량은 인민군을 비롯한 당 기관, 정권 기관의 공무원에 한해 배급을 주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로동당원들은 급료 외에 같은 당원인 남한 출신 당원의 급료보다 3~4배가 넘는 출장비와 전시(戰時)수당을 받았다. 또 북한 화폐에 대한 교환비율을 8배로 높여 손목시계, 가죽구두, 피복류를 마구 사들였다. 이 모습을 본 서울시민들은 “북한 거지들이 서울을 지배하면 서울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불평했다. 한편 시민들에게는 일체의 식량 배급을 중단했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경우 150만 시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중단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국가반역자’, 즉 한국의 공무원, 우익인사, 자본가, 지주, 군인, 경찰관 등을 검거했는데, 체포된 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49] 체포한 국가반역자는 인민재판 현장으로 끌고 갔고, 거기서 수많은 시민이 보는 앞에 따발총으로 즉결처분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 점령지에서 유혈이 낭자한 공포정치를 자행하자, 인민군에 대한 남한 민심은 심각하게 이반되었다. 물론 인공 치하의 방송 또한 문제 투성이였다. 힘차기는 해도 같은 내용을 날마다 되풀이하여 듣는 사람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김일성은 백주 노상에서 남한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도망가지 못하도록 2인 3각처럼 다리에 쇠사슬로 채우고 이들을 최전선 총알받이로 내모는 반인륜적인 일들을 자행했다. 이런 식으로 점령지 주민의 자유를 말살하고 폭압적 독재를 밀어붙이자, 전쟁 전과 서울 점령 후까지만 해도 부산으로 몽진한 이승만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남한의 민심은 김일성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수많은 민중들이 인민군에게 군량을 바치긴커녕, 가진 식량을 모두 짊어지고 앞다퉈 피난을 떠나버렸다. 이로 인해 군량이 확보되지를 않으니, 낙동강 전선까지 기세좋게 진격했던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끝내라는 명령으로 8월 대공세가 시작되었으나, 인민군은 이미 보급의 한계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던데다가 다부동 전투 등 국군과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분전으로 인해 공세에 실패하여 더 이상 전진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실제로 남로당 고위 간부였던 박갑동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어도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버틸 힘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유는 당연히 식량문제에 있었다.

한편 북한에 파견된 소련군 장교들로부터 이러한 학살과 약탈 사실을 안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승리하기 위해서 민심을 얻어야 하는데 바보같은 짓만 하고 있다"면서 김일성의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화를 냈다. 김일성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화려한 학살 경력을 지닌 저 둘에게 비난받을 정도면 얼마나 민심을 수습하는데 안일했는지 알 수 있다.[50]

마침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인민군은 후방 퇴로와 보급로가 막히는 바람에, 김일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면서 국군과 UN군에게 포위 당하기 전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에게 군대를 파병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핵폭탄을 가지고 3차대전 발발이 될 수 있는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했던 스탈린은 지상군 파견을 거절한 대신 공군을 비밀리에 지원했고, 마오쩌둥 역시 국공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것과 예산문제로 전쟁 참전에 고민하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김일성은 10월 12일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본인은 몰래 평양시를 떠나 덕천시로 피난했다. 피난 도중 반공 시위대에게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전용 리무진(소련제 ZIS-110)까지 버리고 도망쳤다. 이 리무진은 대한민국 국군에 노획되어 1951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월튼 워커 장군 부인에게 선물했다가 차량 고장으로 인해 미국에 있는 자동차 수집가에게 넘어간 후 여러 차례 소유권이 넘어갔다. 1969년부터 유엔한국참전국협회가 반공교육을 위해 수차례 해당 차량을 찾고자 수소문했고, 1981년 지갑종 회장이 미국 뉴저지주 자동차 수집상이 소유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지원 하에 이듬해에 그 사람에게서 돈을 주고 되찾아 서울 여의도광장의 종합안보전시장에 전시됐다. 1995년 경상남도 사천시로 옮겨진 후 2002년부터 항공우주박물관에 소장됐다가 2013년 전쟁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다.#1, #2

그리고 10월 19일 한국군과 UN군이 평양 탈환작전에서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을 떠나 강계시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런 뒤에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급속히 진격해오는 한국군과 UN군이 중국 입장에서는 미군이 한반도 주둔이 뻔하였기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고, 소련도 남한에 의해 통일된 한반도에 맞닿은 연해주가 있기에 꺼려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특히 미군과 직접 국경을 마주할 것을 경계한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서로 의견이 일치하였기에 스탈린은 비밀리에 중국과 접촉하여 "전쟁 예산을 대줄 테니 참전해 달라"는 요청을 중국 마오쩌둥에게 제안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순망치한을 명분으로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51]'의 기치 아래 중공군을 파견하였다.

대규모 중공군의 참전할 가능성이 적다며 무시[52]한 UN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를 비롯한 UN군은 인해전술로 끝없이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의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패주했다. 실제로 중공군은 국공내전으로 전투경험도 충분하였고,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올 때 꽹과리 비슷한 타악기로 시끄럽게 하며 내려왔는데, 인구빨로 죽여도 죽여도 밀고 내려오자 미군 및 한국군은 "총알수보다 저 중공새끼들이 더 많다."라며 경악할 정도였다.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이 대승을 거두고 한국군과 UN군이 대규모 후퇴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김일성은 좀 바깥을 돌아다니며 한숨을 돌렸다. 한국군과 UN군이 12월 4일 평양 철수를 한 뒤 12월 10일 중공군의 뒤를 따라 비로소 평양으로 나왔고 다음날 연설을 했다.[53] 한편 12월 7일, 펑더화이[54]와의 합의 아래 중국과의 연합사령부인 조중련합사령부를 구성하며 반격을 시작하는 인민군의 지휘권을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공군에 넘겼다.

조·중 연합군은 12월 25일경 북한 지역을 회복하였고 더욱 남하하여 12월 26일에는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결국 1951년 1월 조·중 연합군은 서울을 다시 수중에 넣은 뒤 평택-오산-삼척-원주를 잇는 37도선 근방까지 밀고 내려온다(1.4 후퇴). 1.4 후퇴 후 소련대사인 테렌티 시티코프와 함께 진격을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우려한 펑더화이에 의해 무시되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이 37도선 근방에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후퇴를 멈춘 후 전열을 재정비하고 매튜 리지웨이 장군의 대인해전술 작전[55] 덕에 1951년 초 한국군-UN군의 반격으로 조·중 연합군은 3월 서울을 내주고 38도선 이북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1951년 4월에 조·중 연합군은 춘계공세를 감행하여 서울 코앞의 의정부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서울 점령에는 실패했고, 5월부터 시작된 UN군의 역공세로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한 모양의 전선까지 밀리게 된다. 그리고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2년 가까이 전선 주변의 고지들을 장악하는 고지전만 벌일 뿐 양측 모두 전선이 크게 요동칠 정도의 공세를 자제하면서 현재의 휴전선 모양이 굳어지게 된다. 북한에서 먼저 무력 적화통일을 노리고 선공을 펼쳤으면서 실패한 주제에 휴전이 성사된 후 휴전협정일을 전승절이라 칭하며 정신승리하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유엔, 중국 측과 체결한 휴전 협정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종합하자면,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통일 조선의 지도자가 되고자 한 욕심에 먼저 전쟁을 일으켜놓고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역으로 자기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북한을 도우러 온 중공군한테 그 후의 전쟁을 죄다 떠넘겼을 뿐이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물론 김일성도 게릴라로 활동한 전력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파멸적인 수준이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한 이유는 마오쩌둥이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해도 국민당의 상상을 초월한 무능과 군벌들의 배신, 그리고 이 상황을 역이용한 공산당 지도자들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소련에 아부한 대가로 북한 지도자가 된 김일성에게 이런 군사적 능력은 전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정치적 감각은 뛰어나 6.25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북한에서 기반이 부족했던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서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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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중국에서 덩샤오핑(왼쪽)과 만난 김일성.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6.25 전쟁을 반대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1990년대 초에 소련이 붕괴하여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이나 북침설같은 수정주의자들이 모두 떼굴멍하게 됐는데, 김일성이 계획서를 입안했는데 그것을 수정해 준 사람이 스탈린이었던 것이다. 마치 위의 각주를 보면 스탈린은 반대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김일성이 단독으로 한 것같은 뉘앙스로 읽을 수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선제공격계획 같은 문서도 있는데 한글(한국어)로 쓰였지만 한국어가 굉장히 어색한데, 왜냐하면 소련이 써준 러시아어를 북한이 한국어로 번역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침계획서 같은 러시아어로 된 문서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북한이 소련이 반대하는데 단독으로 전쟁을 결정 할 수도 없었고, 또 소련의 지원 없이 전쟁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남침 했을 때 소련제 탱크를 끌고 왔던 것이 북한이다. 도리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준 것이 소련이었고 지원도 해줬다. 그러니까 스탈린과 김일성이 작당한 것이 맞다. 스탈린의 의도는 한반도같은 당시 상대적으로 가치 없는 땅에 미국의 역량을 묶어 놓고 유럽 쪽으로 공산주의를 확장하려는 의도나 애치슨 라인에 빠진 한반도를 공산화 시킬시 미국이 어떻게 나오냐에 대한 관측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한반도는 지금보다 전략적 가치가 낮았다. 또 한가지 이론은 미군을 시험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핫바지처럼 행동하면 스탈린이 계속 여러 곳에서 도발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김일성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발생한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명, 인민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명, 부상자 48만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명, 부상자 20만 8천 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명, 행방불명 30만 3천 명으로 모두 100만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6.25전쟁의 피해 이 밖에 부상 후유증, 이산가족, 남북분단 등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 많은 피해가 아직도 산적해있다.

더욱이 이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철천지 원수였던 일본은 전쟁특수 효과를 받아 경제적 부흥을 가져오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일본은 경제적으로 부흥할 수 있는 역량은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부흥을 앞당겼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남북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져, 결과적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이러한 분단은 통일되기는커녕 남북관계가 나아질지도 미지수다.

덤으로 김일성이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를 빼앗기자 고암산에서 3일을 식음전폐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북한의 무상의료 시스템은 6.25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리 잡았다고 한다.브루스커밍스가 바라본 북한

5. 전후재건과 천리마 운동

항목 참조

6. 절대 권력자 (1953~1970년대)

북한에서 공포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6·25전쟁의 종결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김일성은 이 전쟁을 일으키고 패배의 쓰라림을 맛 봐야 했다.
인민군이 전진할 때와 같은 속도로 후퇴하고 쫓기어 왔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패전의 죄를 씌워야 했다.
따라서 누군가 벌을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절박한 시기에 그 동안 그의 핏속에 흐르고 있던 매우 해롭고 위험한 '병균'이 드디어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적 및 그 정적과 다소나마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 사람들을 철저하게, 무제한의 숙청정책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북한 전 지역에서 한 사람의 숙청자도 내지 않은 가정이 없을 정도였다. 소련 출신 간부들로 하여금 남로당 출신 간부들을 청산시키고, 이번에는 중국 연안 출신 간부들을 이용하여 소련 출신간부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항일 빨치산 출신 간부들을 이용하여 연안 출신 간부들을 숙청해 나갔다.
수백 명의 남로당 출신 주요 간부와 연안 출신 혁명 간부들은 거의 99%가 숙청·처형되었다.
수백 명의 소련 출신 간부들도 98%이상이 숙청·처형·투옥·국외추방 등으로 탄압을 받았다.
내가 치른 북한 숙청(1)|강상호|허가이 암살|반공호서 변사체로 #
김일성의 통치 스타일: 사실 김일성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오랜 기간 권력을 유지한 인물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집권 초창기에 그는 ‘인민의 적’을 철저하게 징벌하였고, 자신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수령으로서 인민에 대한 ‘자애로움’의 표상을 갖추는 데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항상 인민과 고락을 함께하는 이미지를 주었으며, 이를 위해 일정한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김일성의 권력 유지는 흔히 독재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강권통치 방식이라기보다는 대중적 카리스마에 의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위 동영상과 같이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순신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자기 부하보다 못한 인물로 격하시킬 수 있었을 정도다. 1960년대 이후의 북한 사람들은 오로지 충성을 통해서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던 시기였다.

비록 소련의 필요와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아부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은 김일성이었지만 수십년 동안 한반도만주에서 독립활동을 한 연안파와 국내파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하였기에 김일성의 절대적 독재체제는 절대로 공짜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통치 반세기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숙청의 연속. 수십년간이나 나라 하나를 황제처럼 통치한 것은 김일성이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파 제거를 통한 권력장악에는 정말로 능수능란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그의 만주빨치산 파벌(갑산파)[56]허가이의 소련파, 김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리승엽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57][58]

한국 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 이후의 군사적 대참사로 평양의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는데,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반대파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워 버리면서 정치적 위기를 탈출했다. 연안파의 리더 김무정은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이 반 강제로(…) 평양 수비를 명령했는데, 정작 평양이 함락되자 평양 함락의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과의 명목상의 공동정권을 구성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박헌영은 남한 내부 호응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제거되었다.

사실 이건 박헌영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헌영은 전쟁 전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8.15 광복 초기에는 한국 전쟁 이후에 비해 남한이 좌파적 성향이 깊었고 북한이 우파적 성향이 강했었는데 이건 당시 평양의 별명이 '동양의 예루살렘'[59]일 정도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우파의 입김이 셌던 까닭도 있다. 반면 남한의 대구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깊었는데,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얄궂은 역사. 물론 이것도 얼마 못 가 여순사건으로 남쪽이 다 숙청됐다.

전쟁으로 북쪽으로 피신을 하는 신세에 놓인 김일성은 이같이 무모한 전쟁발안자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움직임을 알아챈 것이었다. 이에 김일성 수상이 예고 없이 전원회의를 소집하는 지능적인 대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현 정세와 당면한 임무'라는 제목의 보고를 통해 "이번 전쟁으로 불순분자·비겁자·이단분자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하고 "이들을 당의 대열에서 일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최고사령관인 자신이 아닌 김무정 같은 참모들에게 씌운 것이다. #

전쟁 이후에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 사건을 통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궤멸시켰다. 당시 300명의 장성 중 숙청당하지 않은 사람은 김일성의 최측근 15명, 그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연안파와 소련파 장교들 몇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승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들도 다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직후의 군사적 열세에서 불구하고 두 동맹국이 후원하는 두 파벌을 기어코 제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정치적 수완(혹은 독재에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이렇게 1950년대 중후반 사이 주변의 정치 파벌을 제거하고, 한국 전쟁 이후 가난으로 좋지 않았던 민심도 주민 사이에 스파이를 심고, 밀고할수록 후한 대가를 줌으로써 억누를 수 있었다. 1958년 소련으로 탈북김책군관학교 교장 출신 소련파였던 장학봉이 2005년 언급한 바에 따르면, "전쟁 이후 주민생활 형편이 점점 악화되었는데 극빈하게 되면서 한민족을 갈라서 종파를 가르고, 연안파니 소련파니 하면서 딴 민족, 적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생활은 점차 구차하게 되고 일반백성들은 정책이 옳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 불만을 토로하다가 당시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이 많다."고 할 정도로 김일성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공개총살'이 있었다고 하며, "대학교도 못나오고 말도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를 시켜서" 사상검증과 밀고를 시켰는데 이들은 "식사당번이 저녁에 자기 밥은 크게 만들고 다른 사람밥은 작게 만들었다고 하고, 식사당번 끝나고 누룽지 훔쳐왔다고 고발하기도 하였다. 고발을 많이 할수록 당과 체제에 충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1958년경부터 역사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빈번해졌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는 평양을 대상으로 한 '려행증' 제도까지 생기게 된다.

김일성의 무자비함은 어찌보면 독재체제 성립 이후에 절정에 달했는데, 1960년대에는 당내의 "군사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평생 동지였던 김광협최광 등을 가차없이 숙청한다.[60] 이 숙청은 군부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김일성 자신이 군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김광협의 몰락 이후 군을 장악한 것이 그 유명한 오진우다.

김일성이 권력이 절대적으로 강화되던 1960년대 들어, 북한칠레의 아옌데가 감명할 정도의 제법 완비된 사회체계를 만들기도 했다.[61] 보건부문에서는 1960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7차 회의에서 완전하고 전반적인 무상치료제를 실시하는 결정이 채택됐다. 의사담당구역제가 실시되어 모든 인민에게 담당의사가 배정되었다. 결핵예방원과 구강병예방원, 정형외과병원 등 전문병원들이 각지에 세워지고 요양소들이 확대되었다. 의료사업에서는 치료보다 예방을 중시하는 예방의학의 관점이 중시된 것으로 확인된다.[62]

특히 교육 부문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1967년부터 9년제 기술 의무교육이 전반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 의무교육을 받은 학생 수는 1970년에 320만에 이르렀으며, 졸업생 수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고등교육 체계도 강화되어 1970년에 129개의 대학과 약 500개의 고등기술학교에서 20만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게 되었다. 모든 군에 1개 이상의 고등기술학교 또는 고등학교가 세워지고, 주요 공장지구에는 공장고등기술학교와 공장대학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각 도마다 농업대학과 의학대학, 사범대학, 교양원대학, 공산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이 운영됐다. 보육시설도 늘어났으며, 1970년에는 탁아소 8,600개, 유치원 6,800개에 이르렀다.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에 탁아소에서 보육을 받은 어린이는 87만 7,000명에서 120만여 명으로, 유치원생 수는 79만여 명에서 95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국가와 사회가 부모를 대신하여 어린이 보육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63] 또한 1960년대 북한 산업 능력은 남한에 비해 선철 생산능력은 90배, 강철 생산능력은 13배, 비료 생산능력은 9배, 시멘트 생산능력은 5배에 이르렀고, 자동차공업도 남한보다 먼저 시작했다.[64]

일단 무상의료는 탈북민도 증언할 정도로 체제선전 수단이 되었고, 한국에서 의료보험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자신의 기반이 온전하지 못하여 1945년부터 신경썼고, 사실 1980년에도 인민보건법을 통해 의료체계의 완성을 선언하기도 했다. 마약민간요법으로 쓰여 대북지원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21세기에도 국가예산의 6~9%가 이에 쓰이고 있다고 한다. #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국 같은 나라에도 1946년부터 있는 이 제도를 자신만 하는 것으로 허위 선전하고, 호 담당구역제를 하며 또다시 감시도 겸사겸사 했다는 것이다. # 더군다나 남한보다 기대수명, 생존률이 60~70년대에도 이미 낮기도 했다. 이 시기가 오히려 북한에서 사람 수로 나눈 국부는 남한보다 많을 시기였다. # 1980년대에는 그나마 남한을 따라왔으나 1990년대 이후로는 큰 격차를 보이게 된다.

교육 부문도 사상교육 수단으로 악용되고는 하였다. 북한의 소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의 절반 이상이 이념교육이었을 정도였다. # 1964년에 판소리가 자취를 감추고#, 음력설이 1967년 폐지되는 등 민족문화와 전통 파괴도 있었다. 도서정리사업은 아예 선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제대로 못 가지게 할 정도였다. 음력설은 1980년대 후반 부활하지만 판소리는 지금도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7. 남조선 혁명론과 군사 모험주의의 발호 (1960년대)

북한은 1960년대 초반 남조선혁명론이라는 대남 노선을 확립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남한의 혁명화를 기도 및 무장 게릴라를 남파했었다. 남조선혁명론은 우리 조국의 통일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서는 북반부의 사회주의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남조선의 혁명역량을 강화해야 하며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하는 동시에 남조선에서 혁명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쉽게 말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는 북한에서의 사회주의 발전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남한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이 일어나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실제로 남한 통일혁명당 창당 준비위원회 결성에 관여했으며, 반미구국통일전선의 결성 작업에 착수했는데, 북한 대남 전략 목표는 통일혁명당의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혁명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이를 위한 북한의 대남공작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효과를 크게 보지는 못했다. 특히나 북한은 1968년에 1.21 사태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주도했는데, 이는 역으로 한국 박정희 정권의 극단적 반공주의만을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또한 통일혁명당 건설도 김종태 최영도 등 관련 핵심 인물들이 1968년 7~8월에 대거 검거되면서 좌절되었고, 결과적으로 북한의 대남 무장 게릴라 침투는 국제사회에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더욱 각인시킨 채 실패로 끝났다. 북한 지도부는 남조선혁명론에 기초한 대남 전략이 실패하자 1970년대부터 당국 간 대화 노선을 병행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 및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8.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와의 외교관계 그리고 연대 (1960~1970년대)

1960년대 김일성은 중-소 분쟁 속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기도 했다. 1966년 8월 김일성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장문의 글에서 1960년대 격화된 중-소분쟁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할 것을 선언했고, 8가지 항목을 강조했다.
1)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스스로 생각한다.
2) 자기의 힘에 의존한다.
3)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원칙 아래에서 자국의 당을 이끌어 나갈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한다.
4) 다른 나라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자기나라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5) 민족허무주의를 청산하고 자신감을 복돋운다.
6) 자기가 선택한 외부의 원조만을 받아들이면서 자국의 경제를 건설한다.
7) 자국의 자주성을 존중한다.
8)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의 반제 연대투쟁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자주성을 지킨다.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177쪽.
1966년 10월의 제2차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은 외교관계에 관한 이제까지의 침묵을 깨고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의 북한 인민들의 자주적 지위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미제국주의를 길게 비난한 뒤에 아시아에서의 일본 군국주의와 유럽에서의 서독 군국주의의 위협에 대해 언급했다. 계속해서 김일성은 베트남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밝힌 뒤에 베트남 인민은 자기네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했으며, 형제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들을 원조해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김일성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들의 투쟁을 지원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뒤에 국제공산주의운동은 현재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로 말미암아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수정주의는 창조적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계급투쟁을 반대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교조주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의 견해를 관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반면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일컬어진 체코 사태가 일어나자, 이 사건에 병력을 보낸 소련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소련과 함께 동해 부근의 해양지질에 대한 공동탐사에 참가했다가 1970년에 소련이 일방적으로 일본도 참여시킨 데에 불만을 품고 철수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 목표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중-소분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제3세계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과 제3세계의 관계는 1960년대부터 강화되었다. 1961년 9월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제3세계와도 친선관계를 맺고 국제연대를 강화 및 확대했다.
국제 생활에서 우리 당이 시종일관 견지하여 온 원칙의 하나는 피압박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확고한 지지입니다. 과거 오랫동안 외래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억압을 받아왔으며, 오늘도 나라의 절반 땅을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점당하고 있는 조선 인민은 온갖 형태의 식민주의와 민족적 억압을 결정적으로 반대하며, 모든 피압박 인민들의 해방투쟁을 열렬히 지지성원하고 있습니다. 조선로동당과 조선 인민은 자유와 민족적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 인민들의 편에 항상 튼튼히 서 있을 것이며, 그들의 해방투쟁을 계속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그들과의 련대성을 부단히 강화히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65]
이처럼 북한은 주체를 강조하면서 소련이나 중국보다는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 외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등 비동맹 세력과 힘을 합쳐 반미반제 투쟁전선을 강화히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며, 북한 정부는 라오스를 비롯하여 알제리·기니·말리·콩고·예멘민주주의공화국·소말리아·수단·탄자니아·잠비아·부룬디·자이르·앙골라·모잠비크·과테말라·우루과이·브라질·콜롬비아·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도미니카 등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혁명세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66]

북한은 1959년 혁명으로 탄생한 쿠바와의 동맹 밎 국제연대를 추진했다. 쿠바 혁명으로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탄생하자 북한은 쿠바 혁명을 지지하고 축하를 보냈으며, 1960년 8월 쿠바는 체게바라를 방북시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지게 하면서 수교를 맺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쿠바를 압살하고자 했는데, 북한은 쿠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천명했다. 1962년 10월 25일 북한은 성명을 발표해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행위를 규탄했고, 소련 흐루쇼프의 양보에 대해 수정주의적 투항적 행보라고 신랄히 비판했다. 또한 쿠바와 연대하기 위해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 국제연대회의가 창설되자, 북한도 이에 참가했으며, 직간접적으로 1962년 11월 미국이 쿠바 해상봉쇄를 해제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67]

또한 이 시기 북한은 북베트남하고도 동맹 및 연대를 강화했다.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 항불전쟁 및 한국 전쟁 당시 수교를 맺은 상태였다. 이들의 관계가 보다 강화된 것은 1957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평양을 방문하면서 부터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호찌민은 1957년 7월 7일부터 12일까지 북한을 방문하여 대미항쟁에 힘쓰기 위해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를 강화하자는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평양 인민들의 환영회에서 북한과 북베트남의 분단문제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며, 양국은 반미의식을 통해 공동연대의식을 갖게 됐다.[68] 또한 김일성도 1958년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해서 연대를 표명했으며, 이것은 베트남 전쟁당시 실질적인 반미투쟁의 연대로 이어졌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은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 "전 세계 진보 세력이 단결하여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견해를 달리하기도 했다.[69]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은 '윁남 문제에 관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 성명'을 채택해 지지와 연대 의사를 보냈고 1967년 8월부터는 베트남에 무기 10만 정과 군복 100만 벌 등 군수물자를 무상 지원했으며 공군부대와 공병부대로 구성된 지원병을 파견해 제공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군사지원 사례로는 공군부대 파견을 들 수 있다. 북한은 1966년부터 1967년까지 3차례에 걸쳐 87명 규모의 공군부대를 베트남 전쟁에 참전시켰다. 이들 중 14명의 공군조종사가 전사했고 26대의 미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성과를 올렸다.[70]

북한은 1963년 이집트의 나세르 정부와 공식적인 수교를 맺었으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에서 군사지원을 했다. 6일전쟁이라고 불린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군에게 대패했는데, 이를 반면교사 삼아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보다 철저히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북한은 이집트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북한의 군사고문단은 병기 지원과 전략·전술·정훈교육 자문을 통해 이집트군을 도왔고, 이집트군은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시나이반도-수에즈 운하 일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71]

흥미롭게도 김일성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72] 등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인 반제반미 투쟁전선을 만들어 남조선 혁명의 힘을 얻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북한은 고립을 피하고 국제무대에서 남한과 경쟁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에 국교 수립과 국제기구 가입에 적극 노력했으며, 그리하여 1970년까지 사회주의 국가 이외에 25개의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들과 총 영사 관계를, 프랑스 등 6개 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한 80여 개 국가들과 무역 및 통상 관계를 맺었으며, 106개의 국제기구에 가입했다.[73]

9. 김정일에 점차적인 왕위승계 (1974 ~ 1994)

권력을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계승[74]함으로써 북한이 사실상 전제주의국가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전설로 자신에 대한 숭배도를 높이는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봉건국가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독재정권이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권력 계승을 자기 자식에게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국가 운영에 민주적으로 참여해야 할 사회주의에서 세습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기에 동독에서도 반신반의하거나# 소련에서도 반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일단 김일성좌파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지지했던 인사들도 세습으로 인해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며 실망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나라는 총애하는 부하에게 넘겨주긴 할 지언정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넘겨주지는 않았으며, 그나마 국가 원수 자리를 형제에게 넘겨준 쿠바조차도 원수 자리를 계승받은 동생 역시 과 함께 혁명 투쟁에 참가한 서열 2위 원로였기에 계승한 것이지,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된게 아니다.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을 존경해 그를 따라하려다가 벌집이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모양… 물론 김일성은 제 딴에는 합법적이라는걸 강조하려고 최고인민회의 선거라는 쇼를 벌였지만 이건 말 그대로 쇼일 뿐[75]이라…

또한 홍길동이 썼다는 축지법쓸 줄 안다고 한다. 축지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기행이 있는데… 예를 들면,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는 낙엽을 타고 두만강에서 일본군 함대를 격침시켰다던지 솔방울수류탄으로 바꾸어서 싸웠다고 한다.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100% 거짓말. 다만 이건 보천보 전투 이후 한반도 민중 내에서 퍼진 소문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박완서의 어머니가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을 때(아마 1920 - 30년대쯤)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로 변했다고 한다. 근데 진짜 1990년대에 들어 북한에 기아가 왔을 때 그런 액션을 전혀 취하진 않았고 그냥 죽어 버렸다.
파일:Kim il-sung 1984.png
1984년 당시 모습

1987년 6월 9일에는 《남남협조를 확대발전시키자》라는 제목의 ‘로작’을 발표하였다.
파일:1289557211.png
1987년 11월엄지척하는 김일성.[76]
파일:Kimilsungismization_of_the_whole_society.jpg
2000년대 이후 선전물.
유교적 가부장주의, 샤머니즘적 개인숭배, 기독교 교리 왜곡, 미륵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대중 심리 자극, 공산주의 특유의 통제 경제, 일본 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찰국가 등, 전근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권력 장악도는 매우 높았고, 이런 모습이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주화입마를 당한 독재자들로는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적도 기니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시리아하페즈 알 아사드 등이 있다.

===# 1994년 4월 21일 문명자의 김일성 인터뷰 #===
1994년 4월 21일 문명자의 김일성 인터뷰

문명자 씨는 1930년 대구에서 출생해 일본 명치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했습니다. 1961년 조선일보 주미특파원으로 워싱턴에 부임한 뒤 동아일보경향신문, MBC 워싱턴 특파원을 거쳤으며 백악관에 33년간 출입했습니다. 문 씨는 1973년 MBC 특파원 시절 보도통제 중이던 '김대중 납치 사건'을 보도한 것과 관련, 중앙정보부의 체포를 피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했습니다. 또 전 미국 여기자클럽 회장, 워싱턴 외신기자 클럽 부회장, 세계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재미한인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깊숙이 진출한 인물로 평가받아왔습니다. 한국 출신 기자로는 유일하게 중국의 덩샤오핑과 북한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해 주목받았습니다.

재미언론인 문명자 씨는 지난 94년 4월 21일 평양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불바다 소동에서부터 핵사찰, 남북대화, 통일문제 그리고 단군묘 발굴에 이르는 광범위한 현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월간 말 94년 6월호, 여섯번째 본 평양.

지난 94년 4월 15일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82회 생일이었다. 필자는 그 며칠 전인 4월 11일 북·중 국경지대에 위치한 UNDP 지역 취재를 마치고 베이징시에 돌아와 있었다. 워싱턴 D.C.를 떠날 때 4·15 취재를 위해 뉴욕의 유엔 북한 대표부에 비자 신청을 해두긴 했지만 UNDP취재로 너무 지쳐 바로 귀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CNN의 보도담당 부사장,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윌리엄 테일러, 『워싱턴 타임스』의 여기자 조세트 샤이나와 그의 언니인 사진기자 자매, 그리고 중남미 지역의 여러 전직 수상과 장관들이 4월 12일 북경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뭔가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필자는 심기일전해 4월 13일 평양으로 들어갔다. 필자로서는 남북고위급회담 제2, 4, 6, 8차 취재와 지난 92년 김일성 주석의 80회 생일 취재(인터뷰)에 이어 6번째의 방북이었다.

사실 UNDP 지역을 취재하는 동안 필자는 최근 북한에 다녀왔다는 한 조선족 교포로부터 으스스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북한에는 지금 길가 모퉁이마다 탱크들이 서 있고 자동차들은 나뭇가지를 꽂아 위장한 채 다니며 총을 든 군인들이 몇 미터 간격으로 배치돼 있는데, 그들은 수류탄까지 차고 있어 배나 허벅지 쪽이 불룩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가서 본 평양은 전혀 달랐다. 4월 13일 오후 평양 거리에서는 아이들 손목을 잡고 나온 시민들이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전후한 10일 정도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전쟁 분위기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아무리 통제사회라 한들 국민들로 하여금 강제로 웃고 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는 4월 15일의 오찬에 초대돼 김 주석을 잠깐 만났다. 정식 인터뷰일은 4월 21일이었다. 그 사이에 필자는 평양의 식물원, 황해북도의 농촌사회, 동명성왕릉,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씨의 집 등을 방문했다.
21일 오전 11시 필자는 금수산의 주석궁으로 안내됐다. 놀랍게도 김 주석은 지난 92년 인터뷰 때 필자가 본 모습 그대로였다. 오찬을 겸한 인터뷰는 오후 1시 40분까지 진행됐다.

“불바다 소동에 깜짝 놀랐다”

-고령이신데도 불구하고 2년 전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놀랍습니다. 현재 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반도의 긴장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제가 평양에 들어오기 전에 하도 으스스한 얘기를 들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에 관한 질문부터 드립니다. 김정일 사령관이 단추만 누르면 전쟁이 터질 정도로 전쟁 준비가 다 돼 있다는데 과연 북한은 전쟁을 하려는 것입니까.

“문 선생, 여기 와서 보니 과연 으스스한 얘기가 그대로 입니까. 어디든지 가 보시오. 우리가 전쟁 태세를 갖추고 여차하면 쳐 내려갈 참이라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입니다. 우리는 전쟁할 꿈도 꾸지 않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역대정권들이 우리가 남침한다고 주장해온 지 수십 년이 됐습니다만 과연 우리가 남침했습니까.”

-그렇다면 판문점의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가 했다는 ‘불바다 발언’은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미국 신문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북측의 박 대표가 메모를 보면서 불바다 발언을 했다. 때문에 그것은 박 대표의 자의적인 발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 같은 사회에서는 위의 지시 없이 그런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김 주석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나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조선과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하기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지요. 보고를 받고 보니 전후사정이 있더군요. 사람과 사람이 회담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말에 따라 이쪽 말이 나오는 것이지 우리 대표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혼자서 하겠습니까. 우리 대표는 계속 아니라고 하는데 남측 대표가 신경을 건드리는 발언을 계속하고 다시 그에 대응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일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필자는 다음날인 22일 김용순 당 외교위원장과 식사를 같이 했는데 이 문제를 묻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말이다.
“하루속히 남북관계를 정상화시켜야 할 텐데 너무 답답합니다. 말이란 싸울 때도 전후좌우 동기가 있는 법인데 생선에서 대가리 떼고 꽁지 떼고 극히 일부분만 부각시켜 ‘불바다 운운’해 우리를 전세계에 전쟁 미치광이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판문점 실무접촉은 비공개로 되어 있는데 남측은 약속을 위반하고 그 부분만을 남조선 텔레비전으로 방영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위반을 따질 분위기도 아니고 해서 그대로 넘겼는데 이처럼 사사건건 약속을 위반하는 것은 바로 남측입니다.”)

핵무장한다고 나라 발전되나

-남한과 미국은 집요하게 북한이 핵을 가졌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주석님의 입장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들은 전에는 있지도 않은 핵폭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핵폭탄을 제조할 능력이 있다고 하는 등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면서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 왔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구태여 미국과 대화를 할 것 있습니까. 우리는 전력이 필요해 소련제 원자로를 들여와 원자력 발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플루토늄이 나오는 양이 많다고 해서 작년 6월과 7월 뉴욕제네바에 있었던 조·미 회담 때 우리는 ‘그 점이 의심스럽다면 우리의 모든 원자로를 의심스럽지 않은 경수로로 대치해주시오. 우리에게는 돈이 없으니 원조를 하든지 차관을 주든지 해주시오’ 했습니다. 미국도 그렇게 하려 했습니다. 작년 12월 조·미 양국은 뉴욕에서 다시 합의했고 이 합의를 실천해가려는 참인데 또다시 우리가 핵을 가졌다는 의심이 튀어나와 조·미간 합의가 실천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핵폭탄을 가졌다면 실험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실험을 어디서 한단 말입니까. 지난 시대 인도태평양의 섬을 돈 주고 빌려서 핵실험을 해가며 핵무장을 했지만 그것이 인도의 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오히려 핵폐기물을 내버릴 곳이 없어 극도로 애를 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핵을 가진다면 대체 누구를 겨냥해 핵폭탄을 만든다는 말입니까. 결국 우리 동족을 겨냥한 핵무장이란 얘기가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핵을 우리가 왜 가져야 합니까. 그런데도 남조선에서는 불바다 발언이다 뭐다 하면서 금방이라도 우리가 쳐 내려올 것처럼 연일 목소리를 높였으니 온 국민이 한동안 공포 속에 살았을 것 아닙니까. 지난 정부 때 북남고위급회담을 해서 우리 민족의 힘으로 미국이 놀랄 정도의 합의서까지 이루었는데 현재 우리는 1~2년째 허송세월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전개돼야 하는지 나는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북한의 모든 원자로를 경수로로 대체하라고 했을 정도로 핵투명성에 자신이 있다면 IAEA가 보자는 대로 모든 곳을 다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보여 달라는 곳을 보여주고 나면 다른 곳이 의심스럽다고 하고 그곳을 보여주고 나면 역시 또 다른 곳이 의심스럽다는 태도를 계속해왔습니다. 현재 그들은 우리의 군사기지가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는데 군사기지 사찰 문제는 IAEA 사찰과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북과 남은 북남합의서의 부속합의서에 따라 상호군축이 이루어지면 서로 군사기지까지 다 보여주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때문에 군사기지를 보려면 우선 북과 남이 군축을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북과 남이 단계적으로 군축을 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북남이 합의한다면 우리에게는 방대한 군비와 무력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우선 남북 쌍방이 무력을 10만 명 선으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단계적으로 무력을 축소한 후 자체적으로 방위할 수 있을 때 미군이 철수하라는 것이지 당장 미군이 나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같은 합의는 지난 북남합의서 채택 때 이미 이룩된 것으로 나는 기억합니다.”

“북남대화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없다”

-그간의 쌍방 접촉을 현상적으로 보자면 북한측이 특사교환을 원치 않는 것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남쪽과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 정권 때 남측이 소련, 중국과 수교했던 것처럼 우리가 조·미 회담을 통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려는데 왜 ‘북남특사교환’ 문제가 거기에 조건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남조선이 중국, 소련과 수교할 때 우리가 북남간의 어떤 문제가 해결돼야만 수교가 가능하다고 가로막고 나섰다면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남측이 중·소와 수교할 때 어떠한 압력도 넣은 일이 없습니다. 특사교환 문제는 북남 스스로 대화해서 처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북남이 만나 해야 할 일들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손으로 이룩한 합의서를 단계적으로 이행해 북남 사이의 거리를 좁히면서 민족통일을 위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북남대화 문제가 왜 조·미 회담에 조건으로 붙어야 하고 있지도 않은 핵 때문에 못한다, 오히려 경제제재를 하겠다 이런 얘기들이 왜 나옵니까. 문 선생과 만나기 며칠 전에 남측 스스로가 특사교환문제를 조·미 회담 전제 조건에서 철회한 것으로 아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할 문제였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계속하셔야지요?

“물론입니다. 북남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 일각에는 ‘북한은 걸핏하면 합의를 위반하는 믿을 수 없는 존재 내지는 행동이 예측 불가능한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시각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합의된 원칙을 위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럽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상대방의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까지도 이상하게 보이는 법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석께서는 현재의 핵문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하려 하십니까.

“우리는 그간 핵문제 해결을 위해 제안할 것은 모두 제안했습니다. 보여줘야 할 것은 다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의심스럽다고 하니 문제입니다. 이번에 CNN 등 서방언론들이 취재한다고 해서 ‘찍어 갈 것 다 찍어 가게 모두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고 알려 이것이 현실이란 것을 납득하게 말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핵문제가 무난하게 해결되게 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고 일부에서는 여전히 중국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한 일도 없고 그들이 그렇게 하지도 못하며 우리가 중국의 속국도 아닙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김영삼 대통령 방중 후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우리는 그같은 영향력이 없다’고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위성국가도 될 수 없습니다. 과거 소련블록에 위성국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시 강대국 소련이 요구한 상호협력이란 것은 전력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다 대주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 소련 블록에 들어갔다면 우리도 소련이 요리하는 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 이후 체제는 후손들이 결정할 문제

-북한에 대한 모든 의심의 근원은 고려연방제 같은 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일종의 공포감과 불신에서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석께서는 남북통일 과정에서 남한의 자본주의체제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왔을 때 ‘주석에게 물을 것이 꼭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했더니 문 목사의 말이 ‘장차 통일할 때 자본가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입니까’ 하더군요. 이제 문 선생도 똑같은 것을 물으니 그때 답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내가 1930년대 항일운동할 때도 운동가 사이에서 저건 우파다, 저건 좌파다, 또 같은 공산주의자 내에서도 ML당이다, 무슨 당이다 심지어 저건 반동이다, 저건 죽일 놈이다 하는 바람에 제일 골머리를 앓았지요. 당시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해 일본에 대항하던 시절 아닙니까. 목사님이 말하는 자본가 중에도 조국과 민족을 팔아가면서까지 오로지 돈만 벌려는 악덕자본가들도 있지만 반면에 작은 장사로 시작해 그것 키우는 과정에서 자본이 없으니 미국돈 빌려 일어서고 벌어서 또 빚 갚느라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나는 일제때도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합쳐야 독립된다고 말해왔습니다. 이 같은 도움이 없었다면 항일 무장투쟁 때 너무나 고생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돈벌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판 악덕자본가는 분명히 가려내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힘을 합쳐야만 통일이 된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는 외국에 빌린 돈 많지 않습니다만 남조선 정부나 기업은 그렇지 않은데, 정부나 기업이나 빚 다 갚아야 큰소리할 것 아닙니까. 외국빚 다 갚고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그들이 걸어온 길에 대해 우리가 논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일부에서는 공산주의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사상이 우선이라 보기 때문에 주석의 지금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회고록에도 썼지만 내가 겪은 일을 하나 들겠습니다. 항일운동 시절 내 생명을 구해준 분으로 손정도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중국 간수를 매수해서 꺼내주었고, 조금 후 일본 경찰이 본격적으로 잡으러 다닐 때 제 손에 돈을 쥐여주면서 ‘빨리 이 고장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 길로 저는 항일 빨치산운동에 들어갔는데 손 목사에게는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큰아들 손원일 씨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국방장관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친형처럼 따르던 둘째 손원태 씨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네브래스카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일하는 그를 찾았습니다. 그와 가족을 평양으로 초청해 수십년 만에 만났는데 처음에는 ‘손 선생 오래간만입니다’하고 공식적인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손원태가 ‘주석님, 내가 옛날에 쭈평(중국 꽈배기) 사 달라고 손목 붙들고 졸랐는데 그것 안 사주시겠습니까’합디다. 순간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어린 원태에게 쭈평을 사 주던 그 옛날로 돌아가 나도 ‘원태야’ 하면서 붙들고 울었습니다. 내가 사상에 집착한다면 무엇 때문에 수십년간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그를 초청했겠습니까. 원일은 남에서, 나는 북에서, 원태는 미국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우리가 해방된 조국에서 함께 못 살았다는 게 비극일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과정에서 한 민족 두 체제라는 과도기를 거친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체제로 가야 할 것 아닙니까. 한국의 일부에서는 고려연방제 역시 적화통일로 가는 한 전술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체제 문제는 우리 후손들이 결정할 문제이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를 남한사회에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민족이 하나 되어 오스트리아스위스와 같은 중립적인 독립국가를 만들면 자자손손 번영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상당히 시일이 걸리고 우리가 못다 한 일은 젊은이들이 하겠으나 일단 우리가 하나가 돼야겠다는 고위급회담의 합의를 합의에 그치게 하지 말고 실현하는 방향으로 쌍방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식량 배급 안 준다는 것은 낭설

-이제 북한 내부 문제로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현재 중국 연변 쪽에 가보면 ‘북의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다’ ‘평양만 제외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한 톨 배급 못 받았다’ 심지어 ‘누구는 굶주려서 자살했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식량난은 실제로 어느 정도입니까.

“식량난이라니오. 우리는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은퇴한 사람 등 처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배급은 정확하게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과거 우리 못사는 조선 사람들의 꿈이 이밥에 고깃국에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사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꿈을 이루려고 계속 노력해왔고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배급이 없다는 것은 낭설입니다. 혹시 의심스러우면 문 선생이 여행하다 사전에 예고하지 말고 아무 시골집이나 식사시간에 문을 두드려 물어보시오. 또 시골길 걷다가 아무 행인에게나 물어보시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작년에 냉해 때문에 흉작이라고 야단이었는데 북한도 흉작이 아닐 수 있습니까.

“남쪽이나 일본이 흉작이라는 것은 듣고 있습니다만 하늘이 도왔는지 우리 농작물은 대풍년까지는 아니나 풍년이니 이것도 농촌사람들에게 직접 한번 물어보시오.”
(필자는 실제로 농촌마을을 보기 위해 황해북도 쪽의 시골길을 자동차로 여행하다가 한 농촌집에 들렀다. 그곳은 청산리 마을처럼 소문난 곳이 아닌 그저 평범한 농촌이었다. “식량관계는 괜찮습니까”하는 질문에 집주인은 “우리가 매일 고깃국 먹을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먹을 식량은 배급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강경파들은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하면 경제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조·미가 흑연원자로를 경수로로 교체하는 문제까지 합의해가는 마당에 IAEA가 들고 일어나 유엔에서 경제제재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휴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미국측으로 인해 달러권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실질적인 경제제재를 받아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제재 이상의 또 어떤 경제제재를 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한 번 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자는 그 후 북경에서 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한 북한 관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에게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는 나라의 무역관리가 현장에서 겪는 고충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이다.
“우리는 신용장을 내는 것도 일본의 아시카가 은행 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 중국 은행에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력으로 물건 파는 것도 보따리장사식으로 해야 합니다. 남쪽 상인들은 중국이나 홍콩, 싱가포르, 일본, 미국 등의 회사를 통해 우리 물건들을 사가고 있습니다. 자연히 몇 단계에 걸쳐 중계 무역업자들의 이윤을 보장해주다보면 남쪽 소비자들은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우리 물건을 사 먹어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 감동적이었다

-한국에는 30년 만에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한 해가 넘었습니다. 문민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는 작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굉장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우방국가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라는 것은 외교사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 아닙니까. 때문에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뭉치면 동맹국들과의 조약들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 스스로 먼저 그 조약들을 파기할 것입니다. 그 같은 감동적인 취임사가 발표된 후 나는 10대강령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1936년 보천보 전투 때 무송에서 내놓았던 10대강령과 유사합니다. 그때의 골자도 ‘우리 항일운동하는 사람들이 주의, 주장 가지고 흩어지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민족이 하나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하겠고 서로 오해나 의심이 있으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텐데 김 대통령은 ‘북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 ‘중단시켜야 한다’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느니 ‘핵문제 해결 안 되면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라느니 하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가 왜 그토록 감동적인 취임사를 발표한 후 1년도 안 돼서 분단된 민족의 현실을 더욱 분열적으로 몰고 가게 됐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체제에서 살더라도 하나라는 긍지를 버리지 말아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 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주제를 바꾸어 질문 드립니다. 일전에 평양에서 단군묘가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주석께서 발굴 과정에 간여하셨다고 들었는데 단군묘는 어떻게 해서 발굴된 것이며 그것이 단군묘라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 고고학자들이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평양 근교의 한 지점을 발굴하다 굉장히 오래된 뼈를 발굴했는데 지역이나 연대로 봐서 대단히 중요한 유물 같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가 현장에 가서 보니 분명 사람의 뼈였습니다. 정확한 생존 연대를 알기 위해 독일스위스에서 연대 측정기구를 사들였는데 미국에 세계 최고 성능의 기구가 있다고 해 이것까지 사 와서 측정을 했더니 ‘5천 11년 된 뼈다’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올해가 단기 4327년인데 5천년 전 평양을 도읍으로 한 왕의 뼈라면 ‘이것은 단군의 뼈가 아닌가’하는 분석이 나온 것입니다. 나는 ‘그곳이 단군의 무덤이라면 그 주변에 색시묘도 있을 것이다. 계속 찾아보라’고 했는데 진짜 색시묘도 발굴이 되었습니다. 현재 발굴된 무덤과 뼈들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복원공사가 진행중인데 오는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 단군묘역을 전세계에 개방할 예정입니다. 남조선에서는 단군숭배자인 대종교 교주 안호상 박사와 종무원장이 이번 개천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 사람들과 북경에서 접촉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나는 환영의 뜻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회고록 6권까지 집필 마쳐

-우리가 (웅녀)의 자손이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된 셈입니까.

“우리가 곰의 자손이라면 5천년 역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간 우리 학자들의 유적발굴 과정에서 현재의 북경 일대에서까지 고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언젠가는 중국 역사학자들도 그에 동의하겠지만 현재 조·중 학자들이 합동으로 고대사 연구를 해보자는 분위기까지는 조성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이 곰의 자손이란 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입니다. 자신들의 역사는 2천 몇 백년에 걸친 유구한 역사요, 우리의 5천년은 신화이며 조센징은 곰의 자손이라 날조한 것입니다. 나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운동할 때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지금 동북지방 요녕성에 개평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김 주석은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내 서재 들어가는 좌편에 지도가 있는데 1~4권 중 3권을 가지고 와. 그것이 중국지도야.”
비서가 지도를 가지고 오자 주석은 “그것 한번 열어봐”했다. 비서가 지도를 꺼내자 그는 돋보기까지 꺼내 들고 지도를 들여다 보다가 중국 동북지방의 한 지점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필자에게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개평현. 이것은 내가 일제 때 이 지역에서 모택동, 주은래와 만났을 때 그들에게 여기에 얽힌 조선역사 얘기를 자세히 하고 ‘이 곳은 고구려연개소문이 평정하게 만들었으니 개평현이라 하시오’라고 권고해 뒤에 주은래 수상이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앞으로도 일본인들이 날조한 우리 역사를 정사로 고치는 데는 전민족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주석님의 회고록을 4권까지 읽었습니다. 회고록은 계속 쓰고 계십니까.

“계속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6권까지는 다 써놓았는데 아마 5월 초에 5권이 출판될 겁니다. 내 기억력이 확실하게 유지될 때까지는 계속 쓸 것입니다.”

-지난 92년의 인터뷰 후 2년 만에 뵙는데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특별한 건강 유지 비결이라도 있으십니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지금도 계속 지방 현지 시찰 같은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 활동해서 좋고 건강해져서 좋고 여러 가지로 좋습니다.”

사실 2시간 40분간의 인터뷰 동안 그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즐겁게 식사를 했으며 먹는 양도 많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화중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1930년대의 회상에서 연도나 지명, 사람 이름들에 대한 기억력이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걸음걸이 역시 활달해 “부축을 받으며 걷는다”는 일부 보도가 근거 없다는 점을 재삼 확인하며 필자는 인터뷰를 마쳤다.

엉터리 북한 정보의 산실, 중국 조선족

지난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취재차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을 때는 필자 역시 지난 40년간 들어온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후 6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평양의 여러 고위 인사들만이 아니라 농민, 공장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기자의 눈으로 만나고 취재하면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퍽 달라졌다. 그들은 매우 예의바르고 공손하며 때가 묻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아는 사람끼리만 더 없이 좋은 관계이지만 북한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족과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어떤 이들은 “북한도 개방되고 나면 중국처럼 변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만연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일 관광객들의 통역으로 나선 중국 처녀들은 매춘까지 서슴지 않고 있으며 연길가라오케에는 소련 미인 호스티스까지 와 있는 상황이다. 북한 사람들 또한 이같은 중국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닌 듯했다. 필자는 “우리는 온통 도덕은 무너지고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그 같은 개방은 원치 않는다”는 얘기를 취재중에 여러명의 북한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언론에는 북한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필자는 그 대부분이 북·중 국경지대, 즉 연길이나 단동 지역에서 북한을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생산된, 공작의 냄새가 다분히 나는 엉터리 정보라고 보고 있다. 필자가 가서 본 북한과는 너무나 다른 보도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은 세 갈래다. 하나는 몇 천명뿐이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들이다. 그들은 중국 국적 갖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조선족들은 중국 국적인데 이들은 성향에 따라 친북과 친남으로 나뉜다. 친북 성향의 사람들은 당연히 북한을 자주 드나들지만 친남 성향의 사람들도 친척방문, 장사 등의 명분으로 위장해 얼마든지 북한을 드나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은 한약재 등을 가지고 한국땅에도 수시로 드나든다. 그들에게 한국은 속된 말로 봉을 잡는 땅이고 북한은 자기보다 못사는 멸시의 대상이다. 그들은 셋만 모이면 한국에 가서 돈 버는 얘기, 북한이 얼마나 못사는지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런 얘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연변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몸 성히 돈을 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이 그들의 북한 정보들도 불확실하고 부정확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교포 중국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떠벌리는 “북한 주민들이 굶주려서 오늘 내일 죽는다”든지 “곧 전쟁이 날 것”이라든지 하는 대단히 부정확한 정보들이 ‘현지 소식통’ ‘정통한 소식통’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연일 한국 언론에 보도되는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특히 연변이나 단동 지역의 교포 중국인들이 하루 속히 민족의 양심으로 돌아가 북한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한국에 제공했으면 하는 게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분단 시대에 해외교포의 최대 과제는 분열된 민족이 화해하고 하나 될 수 있도록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양에서 다시 만난 이인모 노인

평양에서 맞은 4.19 아침 필자는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의 이인모 노인 댁을 방문했다. 지난 1992년 6월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의 김상원 씨 집에 의탁하고 있던 그를 찾아가 인터뷰한 후 꼭 두 해 만이었다.

그의 집은 1백5층 호텔로 유명한 유경호텔 건축 현장 근방이었다. 자택은 2층 양옥으로 상당히 넓고 큰 집이었다. 집에 비해 아담한 정원은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었다. 필자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지 노인은 연신 현관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93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구급차에 실려 힘없이 삭정이 같은 손을 흔들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는 혈색이 돌고 살이 오른 건강한 모습이었다. 두 해 전 진영에서 작별하며 필자는 “평양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인사했었다. 그때 노인은 말없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필자의 손을 잡았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이다.

필자가 열댓 평은 됨직한 널찍한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노인은 필자의 손을 잡고 눈물부터 흘렸다. 꿈에 그리던 고향땅에서 아무 걱정없이 살건만 남쪽에 두고 온 이들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이 유일한 아픔이라고 했다. 필자를 보니 두고 온 사람들을 만난 듯 하다며 노인은 필자의 두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다 죽어가는 상태로 고향에 돌아온 노인을 살려낸 것은 북한식 표현으로 하면 ‘당의 결심’이었던 듯했다. 김정일 비서가 “우리의 정성과 의료진의 기술로 리인모 동지 하나 못 살릴 것인가”라며 매일 일일 보고를 받으며 노인의 병세를 챙기고 의료진을 독려했다고 한다.

거실벽에는 “리인모 동지는 신념의 화신입니다”라고 쓴 김정일 비서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노인이 북송되기 전인 92년 11월 그의 외딸 현옥씨가 김정일 비서에게 아버지의 조속한 송환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냈을 때 그 회답으로 받은 것이라 했다.

그의 병실을 찾아온 김일성 주석은 자필로 써서 만든 노인의 당원증을 그에게 전달했다. 부인 김순임 씨는 이같이 전했다.
“주석께서 병원을 찾아오셨을 때 저는 ‘이 모든 것이 우리 당과 위대한 수령 그리고 지도자 동지 덕분’이라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석께서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나라와 당이 노력했다 해도 부인이 평생 동안 집념으로 남편을 기다린 그 의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부인의 위대한 의지 덕분입니다’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녀 역시 눈물 없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에게는 북한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북한 최고의 기념일인 7.27 전승기념일(휴전협정 조인일)에는 노인은 주석단에 앉아 군사퍼레이드를 사열했다고 한다. 비행기로 백두산에도 다녀왔다. 달리 아픈 곳은 없는데 감옥에서 고문으로 부러졌던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

“그래 20대에 헤어져 70대에 다시 맞이한 신혼생활이 어떻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인모는 살아 있다. 꼭 돌아온다’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모든 게 아들 하나 기다리며 평생을 살다간 그 분의 정성 덕분이지 싶어 현옥 아버지와 아이들과 함께 어머님 무덤에 가서 통곡했습니다.”

이 부부의 신혼시절 아내가 그토록 소원했으나 끝내 사주지 못하고 전장으로 떠났다던 피아노가 한 방에 놓여 있었다. 김정일 비서의 선물이라고 했다. 부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 부부는 그들이 해방 후 풍산군에서 활동할 때 함께 불렀다는 노래를 합창했다.

노인의 방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몸에 좋다는 약재를 비롯해 먹을 것, 입을 것 등 각양각색의 물건들이었다. 그 중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노병 할아버지께’라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시작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이것은 저의 정성입니다.” 소년은 사탕을 보내왔다고 했다. 그 같은 편지와 선물들은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계속 답지하고 있다고 했다. 상 위에는 노인이 그 사이에 쓴 것인 듯 한 원고뭉치도 눈에 띄었다. 노인은 말했다.

“남쪽에서 고생하시는 여러분들께 혼자 편히 지내 죄송하다는 말, 통일되는 날 꼭 만나자는 얘기를 전해주십시오. 현실을 기록하는 인민군 종군기자의 사명을 다하려 노력하면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10. 동구권의 해체와 남북회담 그리고 북미수교 시도(1991~1993)

1980년대부터 북한의 경제침체는 동구권의 흐름과 같이 진행됐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은 덩샤오핑이 집권함에 따라 흑묘백묘와 같은 개혁개방 노선을 걷게 됐고,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또한 1986년부터 도이모이라고 표명한 개혁개방의 길을 걷게 됐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후 해체되었으며, 교조적인 사회주의권 지도자가 통치하던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역시 그의 사후 자본주의화 과정을 거쳤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동유럽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졌다. 당시 북한은 소련에 대해 자주적인 태도와 정책을 취해왔지만, '사회주의 조국'으로서 소련의 존재는 모든사회주의 진영의 든든한 배경이었기에 북한의 자립경제도 소련과 동구진영의 협력 없이는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89년부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하나씩 몰락하자 북한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는데, 더욱이 남한이 1990년에 소련과 수교를 맺고 1992년에 중국 베트남과 수교를 맺으면서 전통적인 사회주의 동맹체계에도 흠이 생겼다.한중수교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는데, 중국은 1992년 4월 김일성 생일 80회 기념사절로 국가주석 양상쿤을 보내, 한중수교를 단행할 것임을 통보하고 북한 지도부의 양해를 구했지만, 북한은 남한과 수교하려는 중국의 정책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또한 한중수교가 이루어지자 이를 배신행위로 간주했다. 한국과 소련의 수교 이후 북한은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한다는 방책을 취했다. 즉 소련이 한국과 관계를 맺으니 자신들도 한국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패배한다는 인상을 이미지적으로 지우려 했던 것.

이와 더불어 북한의 김일성은 북미수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1980년대 말 소련의 붕괴와 함께 남한에 경제를 추월당한 북한이 흡수통일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체제 위협을 느낀 북한은 1992년 남한의 군 작전권을 가진 미국과 수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했고, 이 결과 북한은 핵이라는 카드를 선택하게 됐다. 미국이 북한의 수교 제안을 거부한 이유는 북한이 당시 동유럽 국가들처럼 망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북한은 미국을 교섭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벼랑끝전략으로 돌진하게 됐다. 1993년 2월 25일 IAEA 이사회는 북한에 2곳에 대한 특별감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지만, 북한 측이 이를 거부했으며 3월 12일에는 NPT 탈퇴선언을 했다.

준선시체제는 3월 25일까지 지속됐으며, 4월 1일 IAEA 이사회는 북한의 사찰협정 불이행 사실을 안보리에 보고하기로 결의했으며, 5월 11일 안보리에서 북한에 대해 NPT 탈퇴를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결의가 채택되었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5월 29일 중거리 미사일 로동의 발사실험을 단행했다. 6월 2일 미국 국무차관보와 강석주 외무차관이 참여하는 북미 고위급회담이 개시되어 6월 11일 북미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7월 14일에는 제네바에서 제2차 북미고위급회담을 개최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회담에서 합의가 도출되었으나, 1994년 전쟁위기로 인해 무마되기에 이른다.

남북한 UN 동시 가입에 대해 "(남한과 북한의 정세를 보는 관점인) 두 국가를 고정화시키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고 전해진다. #

11. 사망 (1994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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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8일 02시에 김일성묘향산에 있는 '향산특각'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2.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1책임비서
1945년 12월 18일 1946년 8월 31일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선출
1차 당대회에서 김두봉에게 위원장 양보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9일 1948년 9월 9일 북조선 각정당 사회단체, 각 행정국 및 각 도 시 군인민위원회 확대협의외회에서 선출
정부수립으로 수상으로 이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46년 8월 31일 1949년 7월 1일 1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회에서 재선
남북로당 합당에서 위원장으로 추대
조선로동당 1,2기 정치위원회 위원
1946년 8월 31일 1956년 4월 29일 1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회에서 재선
3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1948년 9월 9일 1972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9년 7월 1일 1966년 10월 12일 남북로당 합당 때 추대
3차 당대회에서 재선
4차 당대회에서 재선
2차 당대표자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50년 7월 4일 1991년 12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추대
김정일에게 이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상[77]
1950년 10월 1일 1950년 11월? 최용건에게 다시 이임
조선로동당 3기 상무위원회 위원
1956년 4월 29일 1961년 9월 18일 3차 당대회에서 선출
4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4,5기 정치위원회 위원
1961년 9월 18일 1980년 10월 14일 4차 당대회에서 선출
6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6년 10월 12일 1994년 7월 8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추대
5차 당대회에서 재선
6차 당대회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1966년 10월 12일 1970년 11월 13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추대
5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2년 12월 28일 1994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추대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상무위원
1980년 10월 14일 1994년 7월 8일 6차 당대회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9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78]
1990년 5월 26일 1993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추대
최고인민회의 9기 3차 회의에서 김정일에게 이임


[1] 보천보 전투 당시 일본군측 기록에 29세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는 1908년생이라는 설이 있는데, 당시엔 최소 1-2년, 많게는 5년 이상 늦게 호적에 등록되던 일이 빈번했던 시기라 어느정도 신빙성은 있다.[2] 다만 1908년생이 맞다면 김형직강반석은 겨우 13세, 15세에 부모가 되었다는 소리가 된다. 아무리 조혼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지만 저 정도 나이에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3] 참고로 이날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날이다.[4] 독실한 개신교도로 김일성도 어렸을적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반석이란 이름도 베드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5] 11세였던 1923년 만주 팔도구에서 만경대까지 14일간 천리길을 걸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배움의 천리길이라는 이름으로 우상화하고 있다. 물론 이 당시에야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도 사치품 취급이었던 시절이니 그 정도 걷는 일이 흔하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진짜로 천리길을 걸었다니 운운하는것은 본인의 허세에 가까울 것이다.[6] 창덕학교는 개신교 미션스쿨이어서 성경 수업이 있었다.[7] 출처는 만주 독립운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조선족 연구자 유순호(1959년생)가 쓴 <김일성 평전>. 여담으로 유순호는 8~90대였던 중국의 항일 군인들과 그 가족들 등 관려자 100여 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등 꼼꼼히 자료를 수집했기에 자료 수집부터 집필까지 2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북한의 출판 방해와 한국의 출판사 100여 곳의 출판 거부로 2016년 자비 출판하는 지경까지 갔고, 약 4년 뒤인 2020년에야 총 3부작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8] 명목상으로는 다른 부대이지만 같이 동년현성을 공격했던 상관격의 인물이라는 뜻이다.[9] 왕윤성은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머리가 커서 왕다노대'로도 불렀다고 소개된 인물이다.[10] 안찬일 박사님의 해설, 이 영상 23분부터 시청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1[11] 2018년부터 조선인민군 창건기념일은 2월 8일로 변경되었다.[12] 그 산하 제2방면군장이 김일성이었다. 흡수했다는 주장조차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것.[13] 여기서의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북한에서 발생한 대기근이 아닌, 1930년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났던 사건을 의미한다.[14] 집단부락은 미국베트남 전쟁 때 세운 전략촌의 원조 격으로, 항일 유격구와 근거지를 철저하게 토벌하고 불태워버린 뒤 그 주변에 흩어진 농가의 백성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하나의 부락에 수용하는 집가병둔 정책에서 비롯됐다. (간도특설대 200쪽을 참조)[15]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8, p.35[16] 와다 하루끼, 남기정(역),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창비, 2014, p.37[17]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p.379[18]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p.380[19] 주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은 이런 보도에 격분하여 이를 보도한 '노보예 브례먀'라는 러시아 언론사에 "자꾸 이런 보도가 이어진다면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까지 하였다.[20] 이 글은 김일성은 가짜라고 주장하나, 가짜는 아니다. 다만 보천보 전투에서 이름이 알려진 실체가 불명확한 김일성은 실제 김일성과 다르다는 뜻이다. 인용한 글 자체는 사실이다.[21] 즉 김일성이 지휘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것이 독자적인 조직이 아닌, 중국공산당 휘하에 있던 부대라는 얘기다.[22] 오히려 김일성이 자리 잡은 평안도 같은 곳이 우파 색이 강했다. 좌파 색이 강한 곳은 경상도였다. 다만 나중에 김일성은 1955년 자신의 토지개혁에 대한 북한 내 반발을 두고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주장한 제국주의자의 악선전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사회주의적으로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으면서 너무 폭력적으로 땅을 빼앗으려고 들기에 주민들이 싫어했던 것이다.[23]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349-350[24] 조선로동당 창건일의 유래다.[25]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26] 공산주의는 당시에는 직접 내세우지는 않았다.[27] 정작 8시간 노동제도를 도입하고 나서는, 훗날 다른 8시간은 노동이 아니고 '사상교육'으로 주장하여 더 노동권을 침해하였다. 준마처녀 같이 초과근무를 옹호하는 작품도 제작되었다.[28] 2009년에도 이런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여 시장 같은 것이 서서히 허용되고, 국가의 탄압이 있어도 더 커져가는 지경에 이르렀다.[29] 상인은 상도덕이 없다며 비하하는 표현[30] 민청은 오늘날의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약칭 '청년동맹'이고, 여청은 '여맹', 즉 '조선사회주의녀성동맹'이다. 북한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조직에 강제로 가입당해 조직생활의 일환으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31] 평온한 자리에서 뜻밖의 분쟁이 일어남[32]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 p.252[33] 소련의 대일전에 소련의 붉은 군대로서 참전했던 인물이다. 1945년 이후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소련에서 생활했다.[34] 반면에 브루스 커밍스는 "적어도 1946년까지 소련과 북한이 분단 정권을 수립하려는 모습을 보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35] 1947년 초 미국의 군정보망에 따르면, 최소 80% 이상의 북한군(당시는 경비대) 장교가 국공내전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이었다.[36] 소련 세력을 얻은 김일성에 수세에 몰린 박헌영은 이런 주장을 통해 기존 주장을 번복하여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다.[37]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도 박헌영이 문동기에게 "하루 10km씩 진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38]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을 심하게 무서워했다. 그런 게 모스크바에 떨어질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싸우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1949년 핵실험과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소련의 핵무장 또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39] 공산주의에 대한 극동 최종방어선은 필리핀-일본으로 정하는 애치슨 국방장관의 선언이다.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는데, 이는 6.25 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 애치슨 라인은 전쟁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설이 중론이라고 한다.[40] 물론 남한의 이승만 정부 또한 자신들이 북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미국에게 여러번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1949년 6월 군대를 철수하면서, 소수의 군사 고문단만 남겨놓고, 이승만이 북진을 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으로 군사지원을 했다. 참고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1949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 육군성 장관 로얄과 주한미국대사 무초와의 대담에서 육근을 증편하고 무기와 장비로 무장시켜 짧은 시일 안에 북진을 실행하고 싶다고 언급했는데, 이걸 이승만 북진통일론의 시초로 보고 있다.[41] 사실상 최고위 측근을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42] 현재는 대구광역시 의 일부인 달성군 사문진 나루터에 상륙하기도 했다. 사문진을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문진교가 있고 바로 옆에 화원동산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강정고령보도 존재한다. 사문진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오면 화원역이 보이고 상인월배지구까지 이어진다.[43] 전선사령부가 있던 수안보(충청북도 충주시 소재)까지 내려오기도 했다고.[44] 만약 그 시각에 인민군 전차가 한강으로 쇄도하여 한강 다리가 끊겨 도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국군을 공격했다면, 한강 북단 곳곳에서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을 것이다.[45] 흔히 빨치산으로 대변되는 남한 내 공산세력은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로 지리산 일대를 제외하면 거의 박살난 상태였다. 6.25가 아니었으면 1950년 이내로 완전 와해되었을 것이란 것이 중론이다.[46] 당시 김일성에게 호언장담을 했다가 몸이 단 박헌영은 6월 28일 남로당원과 당 조직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연설을 했다. 그것은 연설이 아니라 차라리 남로당원들을 향한 힐책과 비난이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그렇게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이라고 다그쳤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전역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반기는 남로당의 폭동은 단 1건도 일어나지 않았다.#[47] 사실 러시아에서도 그리 자발적이진 않았다. 중국에서나 러시아에서나 사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만큼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한마음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응원한적은 한번도 없고, 이러니깐 거기서도 체카를 비롯한 공산권 특유의 악명높은 정치경찰, 대중통제 체제의 근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한국 전쟁 당시 한반도와 달리 적백내전 당시 적어도 적군이 초반부터 확보했던 국력의 원천, 모스크바와 주변부 중부 러시아 평원지대의 농민들과 도시 프롤레타리아에겐 백군보다는 덜한 차악으로 인식되었고, 전쟁 발발 이전 이미 내부 숙군, 숙청 작업으로 인해 막상 뚜껑을 까보니 호응할 자체적 내부 빨치산, 노동자 파업도 없었던 한반도와 달리 극동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그 넓은 구 제정 러시아 땅에서 적군이 진출한 곳마다 호응할 빨치산 세력이 생겼다는 건, 적어도 훗날 한반도의 사례보단 훨씬 더 인민의 자발적인 지지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단이 강압 말고도 있었다는걸 반증한다.[48] 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2016, 84~85쪽).[49]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1)-38선 초기전투와 지연작전』, 1986, 명성출판사, 1986, 97쪽.[50] 저 둘도 끔찍한 학살자지만 전혀 다른 점은, 정권을 잡기 전에는 몸을 사리다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 숙청을 시작했다. 내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학살과 약탈은 할 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51]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과 조국을 지키자[52] 중공이 개입하기 이전 제6보병사단압록강까지 도달했을 정도로 승리에 가까웠던지라 미군도 승리에 취해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난다"며 탄약 보급을 반송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53] 단, 연설의 대부분은 김책이 했으며, 이후 김일성은 성진시김책시로 부르도록 지시하였다.[54]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6.25 전쟁을 통해 매우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는데 김일성의 전쟁감각은 전무했고 도움받는 주제에 중공군에게 왜 진격을 안하냐며 사사건건 중공을 앞세우려고 하였고 의견을 나누다가 어이가 없던 나머지 펑더화이는 "당신은 요행으로 전쟁을 할 생각이었냐"며 일갈과 함께 싸대기를 때렸다. 국가수반이 중국의 일개 관료에게 맞은셈이어서 김일성은 충격 먹어 며칠간 식음을 안 했다고 전해질 정도다.[55] 당시 중공군이 중장비가 부족해 인해전술로 밀고오는 것과 공세가 시작되면 병사 개개인에게 3일분의 전투식량을 보급하고 보낸다는 점이었다. 이에 리지웨이는 포병의 우월한 사거리와 화력, 촘촘한 화망을 구축하고 그 포병대를 지켜줄 방어라인을 만든 이후 3일간 밀고내려오는 중공의 공세를 막은 뒤 중공이 후퇴할 때 대대적인 반격을 취한다는 작전을 짰으며 정보의 유효기간을 확립하여 불확실한 정보를 차단했다.[56] 그나마 갑산파들도 김정일의 승계 과정에서 숙청된다. 지금 남은건 이른바 '백두파'라 하는데 한마디로 그냥 김씨 가문의 아첨꾼들이다.[57] 그렇다고 김일성이 오늘내일 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곤란하다. 정당성이 어찌되었든 제일 힘 쎈 놈이 짱이라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박헌영만 해도 본인의 실질적 기반은 죄다 남쪽에 남겨진 채로 자기 몸만 북쪽에 온 케이스라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58] 정치학자 서동만은 다양한 정파가 공존하고 있던 1950년대의 북한을 지금의 북한과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 시기로 보았다. (서동만, 1950년대 북한의 정치갈등과 이데올로기 상황)[59] 사실 원본 예루살렘도 아시아에 있으니 엄연히 동양이지만[60] 다만 최광은 김일성 통치 말기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해 죽을 때까지 유임했다. 물론 군 상층부에서는 그냥 늙다리 바지사장이라고 뒷담화를 깠다지만.[61] 살바도르 아옌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통령이 되기 전 아옌데는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했었다. 당시 북한에서 실행되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에 아옌데는 많이 감명받았늗데, 이는 당시 자본주의 칠레가 북한보다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가 형편 없었다는 얘기다.[62] 김성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창비, 2004, p.194~195[63] 김성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웅진씽크빅), 2004, p.194~195[64] 이재승, 북한을 움직이는 테크노크라트, 도서출판 일빛, 1998, p.21~22[65]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196쪽.[66] 김성보·기광서·이신철,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 175~176쪽.[67]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199~200쪽.[68] 도미엔, 붉은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65~66쪽.[69] 이종석, 북한의 역사 2 주체사상과 유일체제 1960~1994, 역사비평사, 2011, 39쪽.[70]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201~202쪽.[71]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203쪽.[72] 티토의 경우 북한과의 관계가 초기부터 안 좋았다. 특히나 냉전 초기 스탈린과의 갈등과 한국 전쟁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유일하게 북한의 남침론을 주장했던 국가가 유고슬라비아였다. 북한은 1940년대 후반부터 티토 정권에 대해 수정주의 반동 혹은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거세게 비난했다. 한국전쟁 전후로 유고슬라비아가 알바니아를 전복시킨다는 등의 로동신문 기사들이 제법 나왔었으며, 1960년대에도 미제 앞잡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관계가 개선되면서 티토에 대한 비판 및 비난을 하지 않게 됐으며, 동지라고까지 표현하게 됐다.[73] 김성보·기광서·이신철,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 176쪽.[74] 1974년에 아예 김정일을 '후계자'로 확정시켰고, 20년 후 사망하여 자연스레 김정일에게 넘어갔다.[75] 북한에도 선거 제도가 있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김정일도, 김정은도, 그 외 여러 권력자들도 전부 다 투표로 뽑힌거다. 다만 후보는 단 1명 뿐이며, 투표소에 보위부 요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반대표를 행사하면 누가 썼는지 다 보이니까… 그 외 다른 투표라고 해봐야 조선로동당에서 하는 거수 투표 정도가 있지만 주체가 그 조선로동당이니 결과가 너무 뻔하다. 사실상 말 그대로 그냥 쇼일 뿐이다.[76] 참고로 북한에서는 '가르쳐주다'라는 말은 최고지도자만 쓸 수 있다. 일반인들은 '배워주다'라고 해야 한다. 사전엔 일반인도 쓴다고 하지만 북한 문헌에서의 용례는 그렇지 않다.[77] 김일성의 민족보위상 겸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소련 외교문서에서 확인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남한의 인민군 지휘체계가 붕괴되고 최용건과의 연락이 두절되자 당황한 김일성은 최용건을 해임하고 자신이 민족보위상을 겸하여 잠시 전쟁을 직접 지휘했었다.[78]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국방위원회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