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40001><colcolor=#fff> 출생 | 1889년[2][3] 4월 17일 |
경기도 양근군 읍내면 신애리 (현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신애리 297번지)[4] | |
사망 | 1950년 6월 3일 |
북한 | |
본관 | 남양 홍씨 당홍계 |
이명 | 한산(韓山)·강우(江宇)·유포심(劉怖深) 진덕삼(陳德三)·이극화(李克和)[5]·김지강(金志剛) |
호 | 일강(一剛) |
학력 | 중앙학교 (졸업) |
묘소 | 애국렬사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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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888년 4월 17일, 경기도 양근군 읍내면 신애리(현 양평군 양평읍 신애리 297번지)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홍순복(洪淳復)과 어머니 이중경(李中卿)[6]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 누이 홍경순(洪景順)이 있었고, 이후 정숙자(鄭淑子)와 결혼하였다.1910년부터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고, 1912년 중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9월 경상남도 양산군[7]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소속 사립 명신학교(明新學校)의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1915년 1월 사직하였고, 1915년 7월 강원도 원주군[8] 지정면 사립 동명학교(東明學校)의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1915년 12월 사직하였다. 1916년 2월 경기도 고양군[9] 사립 한남학교(漢南學校)의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1916년 11월 사직하였다. 1919년 1월 독립운동 단체 '자유단'의 결성에 참여하고 기관지 『자유보』 발간에도 기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뒤 3월 말에 미국으로 유학할 목적으로 조선을 출발하여 중화민국 펑톈성 안둥현(安東縣)[10]에 건너가 그곳에서 경상북도 대구부[11] 출신의 이시영(李時永)을 만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현재 '조선독립운동' 발발로 인해 조선인의 왕래는 취체가 엄중하여 기차나 기선으로 미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이를 중지하고 육로로 러시아 막사과로 가서 거기에서 유학하라"는 권유를 받자, 이에 동의하여 이시영이 붙여 준 안내자와 함께 펑톈성 퉁화현(通化縣) 다마오쯔(大茂子)로 갔다. 그곳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소속 검찰(檢察)에 의해 일본 제국의 밀정으로 간주되어 사흘간 대한독립단 지방사무실 구류장에 수감되었으며, 이어 다시 결박된 채로 퉁화현 싼위안푸(三源浦)[12]의 대한독립단 본부로 이송되어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조맹선으로부터 대한독립단에 입단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중화민국으로 건너 온 이유가 독립운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이후 싼위안푸 거리에 있는 조선인 여관 '삼흥원'으로 돌아와 머물렀고, 이때 우연히 일찍부터 한문을 수학했던 이복대(李復大)를 만나 친해져 싼다오거우(三道溝)에 있던 이복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러 그곳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 8월 말, 평소에 안면이 있던 김형식(金衡植)으로부터 독립운동 단체 '한족회'에 가입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또한 거절하였다. 같은 해 9월 초에 김형식으로부터 '해남학교(海南學校)'라는 서당의 교원으로 일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해남학교는 이탁이 회장으로 있던 한족회에서 관리하던 학교로, 퉁화현 싼위안푸에 있었다. 이에 일단 거절하였으나, 거듭된 부탁 끝에 무보수로 한문·산술·이과를 가르치되 언제든지 일을 그만둘 수 있도록 약속을 받아내어 1919년 9월 중순부터 1920년 6월까지 해남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며 30여 명의 학생들에게 조선독립의 의지를 고취하였으며, 만주군사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20년 6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중화민국 봉천군벌 순경의 박해를 피하여 지린성 화뎬현(樺甸縣) 등지에서 머물렀고, 1921년 2월 베이징시로 건너가 둥청 쓰파이러우(四牌樓) 우탸오후통(五條胡同)[13] 쥔쉐궁(軍學公)에 거주하면서[14] 중국어와 영어를 배웠고, 군사통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어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1921년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3년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에 참여한 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 6.10 만세 운동을 계획·실행했다. 이후 가평군 북면 소법리 157번지 정석주(鄭錫疇, 1874.9.14. ~ 1948.8.6.)[15]의 집에 은둔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 산하 장쑤성위원회 법남구(法南區)[16] 한인분회를 조직하여 중국공산당 상하이시 한인지부 책임자로서 1932년까지 활동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조선공산당 재건을 꾀하다 체포되어 1939년까지 복역하였다. 이후 석방되었으나 1940년 다시 체포되었고, 8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없다는 조건 하에 석방되었다. 1943년에 경기도 경성부에서 공산주의자 지하 그룹 '조선공산주의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4년 7월에 또 검거되었고, 이후 석방되었다.
2.1. 광복 후
8.15 광복 후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교통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 조직 재건의 일환으로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국대회에 참석하였다. 이어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의장으로 회의의 사회자를 맡아 보았다. 1946년 1월 19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노력인민'의 편집자로 근무하였다. 1946년 12월 9일,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중앙감찰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에 체포되어 4개월간 복역하였다.석방 이후 월북하였으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남조선로동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8년 8월, 제1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28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1차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합당되어 조선로동당이 출범하면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유임되었다. 당시 남조선로동당 주요 당원 중 최고참 원로 당원으로 상당한 명망을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3일, 오후 7시 30분에 계속 앓아온 중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홍남표 선생의 서거는 평화적 조국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자주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조선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 조선인민은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에 바친 홍남표 선생의 공로와 업적을 길이 기억할 것이다."라고 추모했다.
이후 한참 있다가 2005년 11월에야 애국렬사릉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반일애국렬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애국렬사릉의 안장 서열이 꽤 좋은데 조명록, 김양건, 손종준과 같은 열에 묻혀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김남식, 남로당 연구(돌베개, 1984).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남표 평정서, 동국대학교팀 번역.
[1] #[2] 1921년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33세로 기록되어 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남표 평정서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인물사전,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는 1888년생으로, 1927년부터 1928년 사이에 작성된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899년생으로 각각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4] 조선연감 1947년판·1948년판과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는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5] 2009년 10월 23일 경기일보 기사에는 李克華로 표기되어 있다.[6] 2009년 10월 23일 경기일보 기사.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이중향(李中鄕)으로 기록되어 있다.[7] 현 양산시[8] 현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9] 현 고양시[10]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11] 현 대구광역시[12] 현 중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 싼위안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13] 현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 둥쓰우탸오(東四五條).[14] 1921년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15] 경주 정씨 양경공파(良景公派)-병판공파(兵判公派) 후손이다.[16] 프랑스 조계 남부지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