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00:31:59

조맹선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성호(聖浩) / 원석(圓石)
본관 한양 조씨[1]
출생 1870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고지방 오림동[2]#
(현 황해남도 봉천군 대룡리)
사망 1920년 12월 또는 1922년 1월
중화민국 고륜(庫倫)
(현 몽골 울란바토르)
또는 중화민국 중동철도 수분하지구
(현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쑤이펀허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91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사망2.2. 사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0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고지방 오림동(현 황해남도 봉천군 대룡리)에서 아버지 조천항(趙天恒)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동필 등과 같이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의 이름으로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박정빈, 우병렬, 이진룡, 박장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을 역임하며 황해도 평산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남만주로 망명한 뒤 홍범도·윤세복·차도선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해 봉천성 장백부(長白府)[3]·봉천성 장백부 무송현(撫松縣)[4]·봉천성 임강현(臨江縣)[5]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동포를 규합해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면서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하고, 애국청년들을 만주로 불러들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16년 10월에는 이진룡과 함께 평안북도 운산군에 진입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운산금광에서 금을 수송하던 차량을 습격하였으며, 그후 신봉황(申鳳荒)·차도선 등과 함께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목릉현(穆棱縣) 제2·3경찰구(第二三警察區) 팔면둔(八面屯)[6]에 비밀결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국내진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박장호·백삼규(白三圭)·조병준·전덕원 등과 함께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 삼원보(三源堡)[7]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총재에 박장호를 추대하고 자신은 총단장이 되어 국내진입 활동을 지휘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단원 모집 및 만주 지역의 친일단체인 일민회(日民會)·만주보민회·강립단(强立團) 등을 타도하는 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봉천성 유하현으로 이주하였다.

1920년 2월 봉천성 동변도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8]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가 조직되자, 그는 사령장(司令長)에 임명되었으며, 여순근·이탁·김승학·유응하(劉應夏)·박이열(朴利烈)[9]·홍식(洪植)·양기하 등과 함께 일경주재소 습격, 일경사살 등 무력투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대한독립단 총단장 명의로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고, 그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2.1. 사망

그 뒤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일제 외무성 기록인 「선인(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발신일:1921년 1월 20일자)[10],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 11 기밀(機密) 제4호에 의하면, 1920년 12월 중순에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이 사망했으며 조맹선 사망 후에 혈성단(血誠團) 단원인 윤(尹)바실리가 대한독립단 단장에 취임했다고 한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11] 1921년 4월 2일자 기사 「大韓獨立團長(대한독립단장) 趙孟善氏逝去說(조맹선씨서거설)」에서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20년 2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아령(俄領, 연해주)으로 가서 있던 조맹선이 서거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소왕영(蘇王營, 우수리스크)에서 외몽골 고륜(庫倫, 몽골 울란바토르)로 갔다가 일본인의 손에 살해를 당했다고도 전하나 아직 확실한 전보를 접하지 못하여 그 진상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밖에 독립운동가 김승학이 편찬한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 의하면 조맹선은 길림성 빈강도(濱江道) 빈강현(濱江縣)[12]에 주둔한 러시아국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세묘노프 장군과 교섭해 백군 안에 2000여명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로 합의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1922년 길림성 추풍(秋風)[13]에서 순국했다고 하는 등 조맹선의 죽음을 알려주는 기록마다 그 내용이 서로 달랐다.

다만, 조맹선에게 1922년 1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내려진 것으로 보아 1922년 1월 9일 이전에 별세한 것은 확실한 듯하다.

2.2. 사후

부인 하양 허씨 허순의 딸과의 사이에 아들 조태부(趙泰釜)와 손자 조수동(趙壽東), 양동(陽東), 흥동(興東)이 황해도 평산군 서봉면 당우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해월리) 숨은골에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조맹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다.

[1] 22세.[2] 인근의 달성리·대룡리·봉암리·송정리와 함께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3]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장백 조선족 자치현.[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푸쑹현(撫松縣).[5]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린장시(臨江市).[6]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 바몐퉁진(八面通鎭).[7]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 이 지역에 삼원포촌(三源浦村)이 생긴 것은 1922년의 일이며, 1934년에서야 통화성(通化省) 유하현(柳河縣) 관할이 되었다.[8]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샹루거우촌(香爐溝村).[9]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이열과 동명이인이다.[10] 발신자는 우치다 고사이 당시 외무대신, 수신자는 기쿠치 요시로(菊地義郞)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였다.[11] #에서 열람할 수 있다.[12]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13] 당시 중동철도(中東鐵道) 수분하지구(綏芬河地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쑤이펀허시(綏芬河市)를 말하는 듯하다. 수분하지구에는 1923년 3월 수분하시정분국(綏芬河市政分局)이 설치되어 동성특별구(東省特別區) 수분하시(綏芬河市)가 되었는데, 여기서 수분하 지역을 원주민들이 '수이푼'이라고 불렀던 것이 조선인들에게 '추풍(秋風)'으로 받아들여진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