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62년 11월 23일 (음력 10월 2일) |
평안도 의주부 비현면 체마동 배양마을 (現 평안북도 피현군) | |
사망 | 1931년 10월 2일 (향년 68세) |
사망지 미상 | |
묘소 |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주음동 (現 평안북도 피현군)[1] |
직업 | 유학자, 독립운동가 |
학력 | 유학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별명 | 자 유평(幼平) / 호 국동(菊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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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려서 한학과 경학에 뛰어났던 조병준 선생은 젊어서는 고명한 유학자들을 찾아 학문의 세계를 논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국모가 시해당하고 나라가 없어지는 국치를 격자 붓을 꺾고 분연히 총칼을 잡아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이후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항쟁의 전면에 나선다. 남만주 대한독립단 총참모를 지냈으며, 민국독립단 도총재, 평북독판부 독판, 광복군 참리부 참리부장, 내몽고지역 의민부 총재로서 조국 독립의 기운과 불길이 만주와 몽고에서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젊은 시절에 유학자로 활동을 했으나, 나라의 위기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2. 생애
그는 1862년 10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 체마동 배양마을에서 조승규(趙承奎)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유평, 호는 국동, 본관은 풍양이다. 그의 고조부 조성유(趙聖維)가 신임옥사로 평안도 구성군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 곳에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다. 대대로 구성군 내동면 마장리(지금의 구성군 양하리)에 세거했다.그는 3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0살이 되었을 때부터 서당에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3살에 신병옥(申炳玉)과 혼인해 3남 3녀를 두었다.[2] 여러 분야를 잘했으나 점점 경의학 공부에만 전력하였다.
의주에서 권익형과 토론하며 함께 공부했고 여러 인물들과 함께 공부했다. 오학민(吳學敏)의 초빙으로 전임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의 스승으로 운암 박문일(朴文一)은 그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기품이 청수하며 학문이 넓고 뜻이 돈독하다"
운암 박문일
운암 박문일
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조병준은 분노해 의병을 일으켰다. 조병준과 그의 동료들은 의병으로 활동하다 일본의 헌병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고종 황제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그 이후 동료 신우현이 학당을 만들어 조병준을 초빙했다. 조병준은 스승 박문일의 초상을 지냈고 경의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신우현이 세운 학당 증곡재에서는 국사에 대한 토론도 했다. 이 때 조병준은 나라가 위태롭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도이(섬나라 오랑캐)와 4백년 동안 원수인데 지난 을미년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왜적과는 불공대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선비들로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멸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그러므로 삼남지방의 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혈전을 마다하지 않는데 우리 지방의 선비들은 묵묵 부동하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조병준
조병준은 눈물을 흘리며 제자들에게 때를 보아 거사를 치를 것과 해외로 나가 군대를 양성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고 그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조병준
그는 자신의 학문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간재 전우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고 귀향하던 길에 유인석 선생을 만났다.
결국 일어나서는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있어났다. 경술국치를 당하고 조병준 선생은 여러 명과 의병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한다. 선생은 박장호 등과 농무계, 향약계 등을 조직해 식산과 교육에 전념했다. 이들은 각 시가지에는 학교를 설립해 신학문을 배우게 했고 농촌에는 서재를 두어 구학문을 배우게 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압박을 피해 모인 사람이 수만명에 달하자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독립운동을 하게 했다.
그해 560명 정도가 모여 각 단체를 해산하고 대한독립단을 만들었다. 조병준 선생은 총참모에 선임되었고 박장호, 조맹선 등과 힘을 모아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많은 무기를 구해 독립운동을 했고 친일 단체의 회원들을 제거했다. 대한독립단이 급성장하자 일제는 당황해 국경의 경비를 강화했고,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는데 중국 정부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독립단은 복벽주의파(기원독립단), 민주주의파(민국독립단)로 갈라졌다. 조병준은 민국독립단에 속했다. 갈라졌기는 했어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서로 도움을 주며 힘썼다.
조병준이 소속된 민국독립단은 여러 단체와 통합해 임시정부 소속의 대한광복군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조병준은 남만주 통의부 통의부장에 피선되었지만 사임했다. 그리고 일제가 곧 만주를 침략할 것을 예견해 여러 사람들을 이주하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이주는 안창호 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몽고 포두진은 황하의 상류방면으로… (중략)
평안도 출신인 신우현 외 네 명의 조선 사람들이
이르러 삼천여 명의 자금으로 부근의 토지를 사고 산림을 벌리는 동시에 수백 명의 조선사람 단체를 이주케 할 계획이라는데 그들은 본시 조선독립단의 수령 안창호 씨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인에게 자금을 얻어다가 포두진에 근거지를 삼는 중으로…'
「동아일보 」1923년 2월 28일자에서
이 기사에 따르면 조병준 일행은 적어도 1923년 11월 이전에 포주에 이주하였고 이들의 이주 자금은 인창호가 지원해 준 것.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내몽고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안창호 선생과 조병준 선생이 긴밀한 사이였다.평안도 출신인 신우현 외 네 명의 조선 사람들이
이르러 삼천여 명의 자금으로 부근의 토지를 사고 산림을 벌리는 동시에 수백 명의 조선사람 단체를 이주케 할 계획이라는데 그들은 본시 조선독립단의 수령 안창호 씨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인에게 자금을 얻어다가 포두진에 근거지를 삼는 중으로…'
「동아일보 」1923년 2월 28일자에서
내몽고에 조병준 일행은 정착해 땅을 개간하고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한인촌을 만든 조병준 선생은 이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이곳에 터전을 잡고도 계속되었다.
조병준 선생은 이주한 곳에서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생을 마감했다. 향년 68세. 묘는 평안북도 구성군 사기면 신시동(지금의 천마군 신시리) 선영 아래에 있다.
조병준 선생은 여러 책을 남겼다. 이 책들은 백범 김구 선생이 보관해 오다 해방 후 유족에게 전달했다. 이 책들은 유족들이 월남할 때 북한에 의해 압수되어 끝내 출판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병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