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장 김양건 金養建 | Kim Yang Geon | |
출생 | 1942년 4월 24일 |
평안남도 안주군 | |
사망 | 2015년 12월 29일 (향년 73세)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외문학부 (불어불문학과 / 학사)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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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자 외교관.2. 생애
2.1. 초기 이력
북한의 보도에 따르면 1942년 4월 24일, 품팔이와 삯빨래로 연명하던 극빈가정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것으로 보이며 1959년 인민군에 입대했다. 제대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김대 졸업 이후 청년동맹일군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1973년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지도원에 부임, 1977년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이 됨으로 당중앙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부과장, 과장으로 승진, 1986년 9월,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86년 10월, 조선외교협회 부회장을 겸하였으며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91년 7월, 북일 우호친선협회 회장을 겸하였다1995년 10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7년 2월, 전임 국제부장 현준극이 황장엽 망명 사건에 연루되어 경질되자 그 후임 국제부장에 임명되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이 시점이 되면 남한에서도 주목받는 외교관료가 되었다.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측 대표단으로 배석하였으며 2000년 8월,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태복, 통일전선부장 김용순, 선전선동부장 정하철, 문화상 강능수, 로동신문 책임주필 최칠남, 조선중앙방송위원장 차승수와 함께 방북 남한 언론대표단과 대화를 가지기도 했다. 2001년 1월, 김정일의 상하이 방문을 수행하였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5년 6월 국방위원회 참사에 임명되면서 국제부장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을 지냈다.
2.2. 통일전선부장 시절
2007년 3월, 전임 림동옥 부장 사망 이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통일전선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북쪽 주역으로, 당시 북쪽에서 회담에 유일하게 배석해 김정일 위원장을 단독 보좌했다.그 이후 2007년 11월에는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초청으로 남한을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다.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2009년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고 김대중 대통령 조문을 위한 북쪽 사절단 일원으로 김기남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이때 호텔에서 임태희와 양주로 러브샷을 마셨다. 당시 김양건과 면담한 사람들이 회고하기를 김영남과 같이 인자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속은 강하다고 한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스타일의 성격이 조문같은 외교활동에서는 잘 나타나는 것.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싱가포르 비밀 접촉’을 하는 등 대남정책을 주도해 왔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0년 9월, 김정은 후계체제를 다지기 위한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자 정치국 후보위원 겸 비서국 비서에 선출, 통전부장에 유임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10월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때에도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룡해 당 비서와 함께 남한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는 말을 남겼다.
2015년 2월 1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2015년 8월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으로 유발된 서부전선 포격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8·25 남북고위급접촉에서 북한 권력 서열 2위 황병서와 함께 남한을 방문하였다. 이 회담에서 유감 표명,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 등 여러 조치에 합의하였다.[1] 그 공로로 11월 황병서와 함께 북한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훈장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정작 북한에서 나중에 발표한 김양건의 수훈에는 공화국영웅이 없었던 것을 봐서는 그냥 오보로 보인다.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사망
북한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오는 길목에서 군용차량과 충돌하여 2015년 12월 29일 오전 6시 15분(평양시)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사망이 24시간이나 지난 뒤 공표된 점도 그렇고[2], 결국은 김정은의 눈 밖에 난 것이 아니냐는 정치적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위 당국자가 이른 아침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심지어 김양건을 충돌한 자동차가 실제로는 고사포탄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당장 김양건의 전임자인 김용순 당비서도 운전사는 살았는데 큰 상처도 없이 죽었다고 발표가 나서 암살 의혹이 일었다.그리고 사망 일주일 뒤인 2016년 1월 6일, 북한은 기어이 4차 핵실험을 단행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김양건의 후임으로 대남 무력도발 총책임기관인 정찰총국의 총국장이자 강경파의 대표주자인 김영철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볼때 앞서 설명한 바를 토대로 김양건은 4차 핵실험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강경파에게 '암살'당했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의혹 외에는 특별한 증거가 없는데다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어 국장으로 치러지는 점, 로동신문에 비교적 크게 부고가 난 점을 보아 사고가 맞다는 시각도 있다. 장례기간이 국장치고는 3일이어서 짧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지극히 대한민국 기준에서만 평가하는 것으로, 북한의 국장 기간이 3일이면 상당히 긴 것이다. 김정은 집권기 주요 인물의 국장 기간을 보면, 장갑차로 운구하는 최상의 예우를 한 리을설의 국장 기간이 1일, 김기남의 국장 기간이 2일, 현철해의 국장 기간이 3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선 상당한 수준에서 장례를 진행해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음주운전이 잦은 데다가 교통량이 적어서 과속도 잦기에 의외로 교통사고가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북한은 파티에 다른 사람은 참여가 엄격히 금지되어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경우가 많아 돌아올 때 음주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양건도 그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김양건은 운전사가 있었을테니 운전사도 파티 참여가 허가되어 음주를 하고 운전한 것 같다는 시각도 많다. 그리고 김정은의 눈 밖에 난 것이라면 장성택이나 현영철처럼 역적으로 몰아 살해하면 간단한데 번거롭게 교통사고로 위장할 이유가 없다.
북한에서 공개한 김양건의 장례식. |
김양건의 입관식에서 김정은이 오열하고 허리를 숙이며 애도한 것으로 보아 숙청이 아닌 사고사로 무게가 기울었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증오하여 숙청한 사람을 저렇게 애도할 수 없다. 김정은은 함께 손잡고 할 많은 일을 앞에 두고 간다는 말도 없이 야속하게 떠나갔다며 비통한 심정을 드러냈다.
당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김양건동지는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부장,비서의 중책을 지니고 우리 당의 자주적인 조국통일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김양건동지는 주체혁명위업수행의 중대한 력사적시기 당중앙의 유일적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우리 당을 위대한 김일성,김정일동지의 당으로 강화발전시키며 위대한 수령님들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온갖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였다. 김양건동지는 위대한 주체사상,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다. 김양건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수령에 대한 고결한 충정과 높은 실력을 지니고 오랜 기간 우리 당의 위업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김양건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라고 아주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서 조명록, 전병호 등 거물들과 나란히 당중앙위원회 비서 직함으로 안장되었으며 이후 2016년 1월, 김영철이 후임 대남비서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다.
한국 정부는 남북 관계를 위해 통일부 장관 명의로 조의를 표명했으며 2016년에는 김정은이 조국통일상을 추서해주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김양건을 언급하였다.
여담으로 일시적으로 숙청됐던 최룡해가 김양건 장의위원에 위촉됨에 따라 다시 공식석상에 복귀한 것이 확인되었다.
류현우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은이 김양건의 아내와 아들 2명에게 집 두 채를 선물로 줬다고 하는데[3] 정치적 타살이라면 숙청한 사람의 가족들을 보살펴주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다. #
3.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 ||
1997년 2월 | 2005년 6월 | 황장엽 망명사건으로 국제부장 교체 국방위원회 참사로 조동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 | ||
2007년 3월 | 2015년 12월 29일 | 전임 림동옥 부장 사망 이후 임명 재임 중 사망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
2010년 9월 28일 | 2015년 2월 18일 |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승진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대남비서 | ||
2010년 9월 28일 | 2015년 12월 29일 | 3차 당대표자회에서 임명 재임 중 사망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
2015년 2월 18일 | 2015년 12월 29일 |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보선 재임 중 사망 |
4.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정은.
- 위원: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병서(총정치국장, 이상 정치국 상무위원), 박봉주(내각총리), 김기남(선전선동부장), 최룡해(정치국 위원, 비서국 비서), 최태복(정치국 위원, 최고인민회의 의장), 박영식(인민무력상), 리영길(정치국 후보위원, 총참모장), 양형섭(정치국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강석주(정치국 위원, 국제부장), 리용무(정치국 위원, 국방위 부위원장), 오극렬(정치국 후보위원, 국방위 부위원장), 김원홍(정치국 위원, 국가보위상). 곽범기(정치국 위원, 경제비서). 오수용(정치국 위원, 계획재정부장). 김평해(정치국 후보위원, 간부부장), 최부일(정치국 후보위원, 인민보안상), 로두철(정치국 후보위원, 국가계획위원장), 조연준(정치국 후보위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임철웅(내각부총리), 김덕훈(내각부총리), 김용진(내각부총리), 리무영(내각부총리 겸 화학공업상), 리철만(내각부총리 겸 농업상), 김영대(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류미영(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리일환(근로단체부장), 리만건(군수공업부장), 김만성(총무부장), 최상건(과학교육부장), 리영래(민방위부장), 김정임(당력사연구소장), 김중협(문서정리실장), 홍인범(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김경옥(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최휘, 리병철(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김용수, 전일춘(39호실장), 정명학(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제1부위원장), 김히택, 전경남, 서홍찬(인민무력성 제1부상), 노광철(제2경제위원장), 림광일(훈련국장?), 조남진, 렴철성, 조경철(보위국장), 윤동현, 김형룡, 김영철(정찰총국장), 오금철, 태종수(함경남도 책임비서), 김수길(평양시 책임비서), 박태성(평안남도 책임비서), 김능오(평안북도 책임비서), 전승훈(함경북도 책임비서), 박영호(황해남도 책임비서), 박태덕(황해북도 임비서), 김재룡(자강도 책임비서), 박정남(강원도 책임비서), 리상원(개성시 책임비), 강양모(남포시 책임비), 림경만(라선시 책임비서), 김완수, 원동연(통일전선부 부부장), 리종혁, 김진국, 박진식.
5. 수훈
6. 여담
- 2018년 초부터 이어지는 최근의 남북 화해무드로 인해 그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확실히 북한 내에서 평화적 대화에 대한 유한 입장을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 그러나 2015년에 사망함에 따라 북한 내 대남 온건파가 사라졌다는 점은 남북 교류 분야에서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북한 엘리트들이 수령의 정책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김양건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 혼자 큰 변화를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다.
- 미국 해군분석센터(CNA) 국제관계국장 켄 고스는 김양건이 김정일의 사촌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한국 언론의 질의에 여러 소스로부터 확인했다는 답변만 하면서 구체적인 정보는 내놓지 않았다. 다만 한국어의 엄밀한 '사촌'과 달리 영어의 cousin은 좀 더 넓은 친족이 포함될 수 있으므로 김영주나 김철주의 아들이란 소리라는 의미는 아니고 가까운 전주 김씨 혈족 정도라면 말이 안되진 않는다.
[1] 당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협상 결렬"을 외치며 강경하게 나가자, "결렬은 무슨 결렬"이라고 팔을 붙잡으며 만류했다고 한다.#[2] 진짜 암살이면 그냥 발표를 안하고 죽은지 며칠 있다가 보도하는 것도 매우 흔해빠진 것이 북한의 상황인데 억지춘향이라고 밖에 할말이 없는 얘기다.[3] 고위급 간부가 자기 자식의 집도 제대로 못 줬다는 말인데, 사실 북한의 고위 관료들은 청렴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동차를 주는 것도 사실상 '해당 직책'을 위한 자동차로, 쉽게 말해 39호 실장이 은퇴하면 은퇴하는 전임자가 아닌 새로 임명된 후임자가 그 자동차를 가져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