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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순(1934)

초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
김용순
金容淳 | Kim Yong Sun
파일:허담.jpg
출생 1934년 7월 5일
평안남도 평원군
사망 2003년 10월 26일 (향년 69세)
평양시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외교학 및 국제관계학과(학사)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파일:/image/028/2003/10/28/00300000012003102711.jpg
방남 당시 김용순

1. 개요2. 생애3. 기타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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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순북한의 전 정치인이다. 조선로동당 대남비서,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등을 지냈다.

2. 생애

1934년 7월 5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가난한 광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정숙의 친척이라는 말이 있으나 근거가 없어 보인다. 젊어서 16살에 군에 입대,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교학 및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했다. 북한에서 공개한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상당한 미남이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였다는 정보가 있지만 그 사람은 김용순이 아니라 김영순이다. 평양방송에만 의존해야 했던 과거의 오기록이 현재까지 남은 것으로 추정. 1980년대부터 조선로동당 대남담당 비서였으며 1994년부터는 대외적으로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활동하면서 대남 대화에 나섰다. 대남비서직 수행 당시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와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김씨 일가 중에서도 김정일, 특히 김경희의 총애를 받아서 그녀를 등에 업고 위세가 대단하였다. 1979년 9월, 국제부 부부장 재임 시절 정준기와 함께 김일성을 수행하여 덴마크 대표단을 맞이할 때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라고 직함이 보도된 것을 보아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3년 12월, 대남비서 김중린이 아웅산 테러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해임되자 국제비서 김영남이 새로 외교부장에 임명되고, 외교부장 허담은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공석이 된 국제비서에는 김용순이 임명되었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정일의 총애로 빠르게 국제비서가 된 김용순은 대단히 교만해졌는데, 만취하여 정치국 상무위원 겸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에게 반말로 네가 뭘 아냐고 시비를 거는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 빽으로 무사할 수 있었고 오히려 김정일은 자신의 측근인 김용순이 오진우에게 깝치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높여준다고 흡족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비서 인선에 당내에서 불만이 가득해졌고 특히 김용순보다 더 큰 신임을 받는 허담의 부인 김정숙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질시 어린 눈이 자신에게 주목된 상황에서 김정일이 북한 외교관들이 사교장에 나가서 춤도 못춰서 외교가 안된다고 질책하자, 김용순이 주도하여 국제부에서 댄스 강습을 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과하여 신소가 들어왔고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의 공격을 받은 후에 사상검토대회가 열려 덕천탄광 탄부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른바 북한 간부들이 한번씩은 다 겪는다는 혁명화를 당한 것이다.[1] 김용순은 나는 지도자 동지께서 시키는 대로 일처리를 했을 뿐이데 왜 이러냐고 항의했다고 하는데, 이는 김정일이 지나치게 교만해져서 세도를 부리는 김용순의 기를 꺾기 위한 조치였다. 김용순의 후임으로는 황장엽이 국제비서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김정일, 김경희 남매는 김용순을 좋아했지만 김일성은 김용순이 노는데 환장한 양아치라고 싫어했기 때문에 김정일은 김일성 눈치를 보아서 김용순을 벌줄 필요가 있었다.

김용순은 1년 반 동안 탄광에 있었는데, 황장엽의 회고에 따르면 김경희가 빽을 봐주어 혁명화되어서도 크게 고생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성이 소개편집물에 나와서 한 회고에 따르면 1984년 12월 말에 김정일이 몸보신하라고 선물도 내려줬다고 하는 등 쇳물로 화상 입어가며 구른 장성택에 비해서는 다소 널럴한 혁명화였던 것으로 보인다.[2] 김용순은 1987년이 되어서야 용서를 받고 다시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돌아온 김용순은 다시 국제비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역시나 국제비서 자리를 노리던 국제부 제1부부장 현준극과의 세력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황장엽은 김정일과 김경희의 총애를 받는 김용순이 우세하다고 판단하고 괜히 김용순이 자신을 공격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김정일에게 국제부장으로 김용순을 임명해달라고 추천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김일성이 김용순은 아첨기가 심한 사람이라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짐짓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결국 1988년 즈음이 되어서 김용순이 국제부장, 그리고 김용순을 통제할 허담이 국제비서, 그리고 김용순과 사이가 좋지 않던 현준극은 로동신문 주필로 내보내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그리고 황장엽은 당력사연구소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허담이 가지고 있던 대남비서에는 김중린이 임명되었다.

김정일이 김용순을 통제하기 위해 배치한 허담은 말년에 당뇨병 때문에 운신을 못하는 상황이었고, 1990년 5월, 6기 18중전회에서 김용순이 새로 국제비서에 임명, 일본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과 일본 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를 방북시켜 김일성과 3자회담을 여는 공을 세웠다. 허담이 끝내 1991년 5월에 당뇨병으로 사망하자,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의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월, 북핵 문제 해결차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 아놀드 켄터와 협상하여 최초로 북미 차관급 회담을 열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으며 1992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3차 회의에서 허담이 가지고 있던 외교위원장 자리도 꿰어찼다. 하지만 켄터에게 북미수교 의사를 밝혔음에도 묵살당하자 김정일이 김용순이 외교엔 영 젬병이라고 여겨서 외교부 제1부부장 강석주를 중용하기 시작했는데, 강석주가 오창림 사건으로 혁명화를 가게 되자, 강석주에게 자신의 자리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여겼던 김용순이 강석주가 오만해서 정치국 회의에서 늘 정치국 위원들보다도 더 앞자리에 앉는다고 규탄해댔지만, 그건 김정일이 강석주에게 그때그때 의견을 들으려고 한거라서 억지 비판이었고, 강석주는 한달 정도 농장에서 구르다가 복귀하였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2월, 6기 20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하고 대남비서로 이동하여 2003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비서로 재임하였다. 후임 국제비서에는 최태복이 임명되었다.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와 관련하여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최태복에게 외교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통일정책위원장으로 옮겼다. 통일전선부장에도 이때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뭔가 사고를 쳤는지 1993년 12월에 정치국 후보위원 해임이 확인되었다. 1993년 12월, 6기 21중전회에서 해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례식 때 오열하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김경희를 옆에서 부축하면서 김일성의 시신에 조문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었는데, 이 때문에 둘이서 내연 관계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3] 고난의 행군으로 난장판이 된 북한에 일본이 인도적인 쌀을 지원하자 북한은 쌀이 부족하지 않고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로 쌀을 진상한 것이라고 주접을 떨었다가 격노한 일본 측에서 해명하지 않으면 추가적인 쌀 지원은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자 일본의 쌀 제공은 인도주의 정신에 따른 것이라고 싹 꼬리를 내리는 망신을 사기도 했다. 1998년 10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과 금강산 종합개발 서면계약을 체결하였다. 2000년 9월에는 북한대표단 단장으로 제주도를 방문하여, 한라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2000 남북정상회담에 참가하였고, 6.15 남북공동선언의 합의서 서명식 등에 참여하였다. 2000년 9월, 방남하여 임동원 특보와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미국으로 망명한 고용희의 동생 고용숙에 따르면, 1990년대부터 고용희의 측근이 된 상황이었다고 한다. 2002년 5월, 방북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 회담을 가지고 했으며, 2002년 6월, 최홍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전임 대남비서 허담이 김정일의 신임을 바탕으로 대남부서들을 철통같이 장악한 것과 달리 김용순은 오극렬, 강관주 등에 비해서 측근 서열도 밀렸고 김일성의 미움을 산 전적도 있고 해서 대남부서에 대한 장악력이 대단히 약했기 때문에 림동옥과의 파워게임을 벌여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허담은 작전부를 비롯해서 모든 대남 공작 부서들에 대한 지휘권이 있었지만 김용순은 통일전선부만을 관장했다.

그러다가 2003년 6월 16일 발생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가 4달간 치료를 받았다. 6월 16일은 고용희의 생일인데. 고용희 생일잔치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선 8월에야 교통사고가 일본 언론을 통해 알려졌으며, 뇌수술을 받았다는 뉴스 등이 전해졌다. 하지만 10월 26일 오전 5시에 끝내 사망했다. 김용순을 아꼈던 김정일은 그의 죽음에 매우 애석했다고 한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의 대외적권위를 높이고 우리 혁명의 국제적 련대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으며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아래 조국통일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는데 온갖 정열을 바치였다. (...) 김용순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선군령도를 충실하게 받들었으며 조국통일위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오랜 기간 높은 충성심과 실력으로 우리 당을 받들어온 김용순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혁명의 큰 손실로 된다."라고 후히 평가해주었다. 10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으며,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조의 표명과 조문단 파견을 고려했으나 냉전 분위기가 가시지 않던 사회 분위기상 결국 취소하였고, 북한 정치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첫 조의 표명은 2년 후 연형묵이 사망했을 때 나왔다.

통전부장은 통전부 제1부부장 림동옥이 대행하다가 나중에 통전부장에 취임하지만 곧 폐암으로 사망하고 김양건이 다시 통전부장직을 승계한다. 공교롭게도 김양건 역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2005년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05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가 북한을 방문했을때 애국렬사릉을 참배하고 "당신들의 애국의 마음을 길이길이 새기겠다. 다시 찾은 애국 열사들을 기리며 특히 장기수 선생님들과 김용순 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라는 방명록을 남긴 것 때문에 남한에서 정치적 논란으로 이어진 일이 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김용순을 언급하였다.

3. 기타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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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담이 아니고 혁명화를 안 간 북한 고위층은 찾기 힘들다. 누군가가 권력이 너무 커지는가 싶으면 바로 견제를 위해 혁명화를 보내버리기 때문. 높은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혁명화 갈 확률은 계속 적립되는 셈이다. 한때 절대권력에 매우 가까웠던 존재인 장성택도 젊은 시절에는 혁명화 몇 번 갔다온 적 있으며 강석주도 혁명화를 다녀왔다.[2] 장성택도 1차 혁명화가 죽을 맛이었지 2차 혁명화는 요양 수준이었다고 한다.[3] 참고로 김용순과 함께 김경희를 부축한 사람이 김기남이다.[4] 영양 상태가 좋은 남한의 2000년대생 기준으로 보면 190에서 2m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