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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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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일성1997년 10월 대표자회 김정일
1997년에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직함 변경
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colcolor=#FED11E> 가나 <colbgcolor=#fff,#222>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정일·김중린·김영남·김환·연형묵·윤기복·홍시학·황장엽·박수동
1981년 10월 6기 4차 전원회의 허정숙
1982년 4월 6기 5차 전원회의 현무광
1983년 6월 6기 7차 전원회의 안승학·채희정
1983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허담·김용순
1984년 12월 6기 10차 전원회의 박남기
1986년 2월 6기 11차 전원회의 리근모·김환(재임명)·계응태
1986년 12월 6기 12차 전원회의 강성산·연형묵(재임명)·전병호·최태복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박남기(재임명)·김중린(재임명)
1988년 12월 6기 15차 전원회의 한성룡
1990년 1월 6기 17차 전원회의 윤기복 (재임명)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김용순 (재임명)
1992년 12월 6기 20차 전원회의 김국태·김기남
2001년? 정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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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두철 김일철 박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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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계획재정부장
前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박남기
朴南基 | Pak Nam Ki
파일:박남기.jpg
<colbgcolor=#024FA2><colcolor=#FFF> 출생 1928년 2월 21일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사망 2010년 3월 12일[1] (추정, 향년 82세)
평양시 순안구역 남산동 강건종합군관학교 운동장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1948~2010) (공민권 박탈 / 2010)
학력 김책공업종합대학 (학사)
프라하체코공과대학교 (학사)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공학 / 학사)
수훈 김일성훈장(1985) (훈장 박탈 / 2010)
김일성훈장(1992) (훈장 박탈 / 2010)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출당·제명 / 2010)

1. 개요2. 생애
2.1. 김일성 시대2.2. 김정일 시대2.3. 숙청과 죽음
3. 경력4. 가족관계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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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관료, 정치가. 국가계획위원장,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맡은 테크노크라트였으나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의 실패의 희생양으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김일성 시대

1928년 2월 21일 황해도 해주군에서 출생했다.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5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공대, 소련 레닌그라드 공대에 유학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재였다.

귀국한 후 1972년 5월 금속공업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976년 5월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79년 12월 국가계획위원장 로태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장의위원을 지냈다.

경제지식과 숫자에 해박하여 김일성의 눈에 들었고 1984년 6월 중앙위원회 제2경제사업부 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4년 7월, 조선로동당 6기 9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2월의 6기 10중전회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거되었다. 1984년 국가계획위원회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1985년에 정부경제대표단장 자격으로 오스트리아핀란드를 방문했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6년 11월 8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2월에 정무원 국가계획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이에 따라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국가계획위원장직에 전념하기 위해 비서에서 소환되었지만 1987년 10월 14일 직무조동을 이유로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되고 홍성남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88년 10월, 중앙위원회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1월 조선로동당 6기 14중전회에서 다시 비서에 선출되었다. 1990년 4월 9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그는 뜻밖의 일로 좌천되었다. 김일성 궁핍해지는 북한의 사정을 의식하여 경공업과 농업 증진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딸인 김경희를 노동당 경공업부장으로 임명하고 박남기에게 그녀를 보좌할 것을 지시했지만 박남기는 고지식한 성격으로 김경희에게 전혀 아첨하지 않아서 김경희의 미움을 샀으며 김경희는 경공업 부문이 부진한 책임을 박남기에게 뒤집어씌웠다.

이 때문에 1993년 11월 박남기는 비서에서 해임되어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좌천되었으며 199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예산위원장에서도 해임되어 한성룡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타이밍 상 6기 21중전회에서 비서 해임이 추인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으나 1996년 2월에는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에서도 쫓겨나서 황해도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이임하게 되었다.

2.2. 김정일 시대

하지만 1998년 유훈통치가 종식되면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 전문가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박남기가 복직되었다. 1998년 7월, 10기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홍성남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장에 복직되었다. 김정일은 그를 크게 신임하여 경제정책에 관련해선 무조건 박남기를 거쳐 보고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홍성남 내각 밑에서 7.1 경제관리조치의 세부 시행계획의 입안을 담당하였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 단장에 임명되어 장성택[2], 박봉주, 김광린, 문경덕 등을 데리고 남한을 방문하여 한갑수 농어업특위 위원장에게 김정일이 선물한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했으며 2003년 9월, 11기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한성룡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국가계획위원장에 해임되어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책임참사인 김광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정일을 보좌하며 2004년 4월 김정일의 방중을 수행하였고 2005년 3월 원자바오 총리의 초청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을 지냈다.

파일:2002 경제시찰단.jpg

2002년 방남 때의 모습. 의자에 앉은 사람들 기준으로 오른쪽에서부터 박남기,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장성택, 경공업부 제1부부장 김히택, 화학공업상 박봉주. 김히택 바로 뒤에 앉아 있는 인물은 조선대양회사 총사장으로 방남한 문경덕으로 추정된다.

그가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박봉주 내각 때였다. 박봉주는 김정일의 신임을 바탕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매우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주도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보수파와 김정일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에 2005년 5월 노동당은 박남기에게 박봉주의 급진개혁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7월에 90년대 당중앙위원회 경제부서 정리 과정에서 폐지되었던 노동당 계획재정부를 다시 설치하여 박남기를 부장에 임명함으로 박봉주를 견제시켰다. 2006년 박봉주는 김정일로부터 받은 권력을 빼앗기고 공금유용 혐의를 뒤집어쓰고 직무정지 징계를 당했으며 2007년 육해운상 김영일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박봉주가 제거된 후 박남기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시장경제를 제거하고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반개혁 조치를 주도하였는데 이때 김정일의 현지지도 수행을 가장 자주 동행하는 핵심 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2006년 1월 김정일의 방중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2009년에만 무려 77차례나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수행하였다.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숙청과 죽음

2008년 6월 18일 김정일은 6.18 담화를 발표하여 개혁 조치 철회를 공식화하였고 8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개혁도 잠시 주춤하였으나 그가 복귀한 후 다시 본격화되었다. 2009년 4월 12기 대의원 겸 예산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2009년 11월, 화폐개혁의 단행을 주도하였지만 화폐개혁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 북한은 2달도 못 되어 조치를 되돌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박남기는 최대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화폐개혁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고 당이 외화사업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인민군을 적으로 돌렸는데 이 때문에 더욱 가혹한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1월 4일 희천발전소 건설장 현지지도 수행과 김책제철연합소 종업원들의 새해 공동사설 관철 궐기모임 참석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리제강이 밝힌 바에 따르면 김정일이 2010년 1월 본부당 대논쟁에 박남기를 회부하여 비판하였고 2월 4일 간부들을 소집하여 "박남기는 혁명대오 안에 기어든 간첩으로 앞으로 총리가 돼 자본주의 경제로 끌고 갈 흉심을 품고 있었다"고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3월 12일에 계획재정부 부부장 리태일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년 7월에는 대북인권단체 '좋은 벗들'이 북한 보안당국 간부들의 발언을 인용하여 박남기의 친인척들이 회령 22호 관리소(회령 수용소)로 비밀리에 수용됐다고 전했고 박남기와 연관된 인사 10여명도 강건군관학교 마당에서 처형되었다고도 했다.#

박남기의 처형 후 북한은 모든 기록영화에서 그의 생전 모습을 없애 기록말살형에 처했으며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 이미 201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제강이 김정일의 지시로 정리해 두었던 <혁명적 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가시는 나날에>라는 유고가 출간되어 박남기의 숙청 비화를 밝혔는데 여기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 한 혐의로 처형당했다고 하며 박남기가 정체를 숨기고 그때까지 생존한 친일파의 아들이자 지주의 외손자로, 조상들의 부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그랬다는 황당한 가족배경 조작까지 이루어졌다. #

2013년 12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숙청될 때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는 장성택의 죄목으로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라고 박남기를 다시 한 번 부관참시했다. 박남기 처형 이후 그의 이름 석자가 북한 매체에서 언급된 마지막 사례였는데 북한이 정권 차원에서 박남기를 역적으로 선포한 게 확인되면서 박남기 생존설 등은 쑥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최후는 박근혜 정부 시기에 탈북한 고위급 탈북자가 2021년 8월 월간조선에 언급한 내용들을 통해 소상히 밝혀졌다. 박남기는 군부가 운영하는 외화벌이 회사들을 노동당으로 통폐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총정치국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박남기 세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 이권에 큰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김정은의 최측근이던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은 이러한 박남기의 계획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화폐개혁의 실패 원인을 박남기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와중에 박남기는 김정일의 면전에서 화폐개혁 이후 상황에 대해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직언을 남겼고 이에 격분한 김정일과 김정은은 바로 그 순간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을 박남기로 결정지었다.

박남기는 2010년 3월 10일 평양 순안구역강건명칭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노동당 부부장급, 각 성 부상급 이상 고위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남기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리한 화폐개혁을 단행해 당과 국가,[3] 그리고 인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이는 '민족반역죄'에 해당된다"는 판결문이 읽힌 후 머리, 가슴, 다리 순으로 각각 3발씩 총 9발의 총탄을 맞으머 총살형되었다고 한다. 처형 당시 보위부에 얻어맞아 얼굴이 하도 부은 나머지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하며 공개처형을 목격한 고위직 간부 중에는 "우리도 필요 없으면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며 흥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박남기의 나이는 82세.[4] 39호실장 전일춘의 사위 자격으로 은덕촌에 살고 있던 류현우 대사대리는 당시 박남기 일가가 새벽 1시에 갑작스레 들어닥친 보위부에게 모조리 끌려나와 트럭에 실려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는데 이 때 끌려나오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아파트 단지에 울려퍼졌다고 한다. 온 식구들이 겁에 질려서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 박남기는 "자신은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아 당에 감사하는데 김정은 저놈은 안된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사실을 안 김정은은 격분하여 박남기를 남포 용광로에 던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5] 화폐(돈)개혁에 실패했으니 돈(동전)을 만드는 용광로에 넣어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게 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이렇게 박남기는 총살 후 북한 최고위층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신마저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용광로에 던져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6] #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비서
1984년 12월 10일 1986년 12월 27일 6기 10중전회에서 선출
6기 12중전회에서 해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1986년 12월 30일 1987년 10월 14일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임명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해임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비서
1988년 11월 30일 1993년 11월? 6기 14중전회에서 선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9기 예산위원장
1990년 5월 26일 1993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해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1998년 9월 5일 2003년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퇴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11, 12기 예산위원장
2003년 9월 3일 2010년 3월 10일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임기 중 처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장
2005년 7월? 2010년 3월 10일 임기 중 처형

4. 가족관계


이들이 현재에도 생존하고 있다면 명간 제16호 관리소에서 수감중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처음 수감되었던 회령 수용소가 2012년에 폐쇄되면서 수감자들을 명간 관리소로 이동시켰기 때문. 물론 완전통제구역의 참상은 현세의 지옥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2020년대에도 생존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5. 참고문헌



[1] 3월 10일이라는 설도 있다.[2] 김정일의 매제이자 최측근라는 위치상 시찰단의 단장은 박남기였지만 실세는 당연히 장성택이었다. 이에대한 일화로 장성택이 술에 취해 늦게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북한 시찰단 전원이 장성택이 일어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고.[3] 여기서 '당'을 국가보다 앞에 둔 것에서 북한에서 조선로동당이 국가 위에 있는 조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장성택도 처형 당시 67세였다.[5] 여담으로 김정일도 김일성이 사망하기 약 4~5개월 전에 자신들을 암살할 계획을 짠 군인 10여명을 강건명칭종합군관학교 운동장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 그야말로 부전자전인 셈.[6] 하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의 이야기라 월간조선에서도 북한 정보의 소식통의 부정확성들을 지적한 후 그 탈북자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 탈북자라는 것을 입증하고 나서 박남기의 최후를 전할 정도였다. 사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현송월 총살설 같은 가짜 뉴스를 보도했다가(강건군관학교 운동장에서 현송월 등을 고사포로 처형했다는 것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욕을 무더기로 먹은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이 사건도 거짓말 취급을 받을까 봐 이 소식을 전한 소식통의 신뢰성을 더욱 명확히 확인해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7] 류현우의 딸과 동년배 친구라고 한다. 영상(자유아시아방송) 2010년 2월에 할아버지 박남기가 숙청되면서 새벽에 울부짖는 가족들과 함께 은덕촌에서 끌려나와서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이미 역적 딱지가 붙고 참혹하게 처형 당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심지어 그 장성택과도 엮였기 때문에, 손녀인 이 아이의 삶도 순탄치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