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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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총리 홍성남 洪成南 | Hong Sung-nam | |
<colbgcolor=#bc0021><colcolor=#ffffff> 출생 | 1929년 10월 2일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 | |
사망 | 2009년 3월 31일 (향년 79세)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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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으로 김정일 시대의 최초의 내각 총리 및 정무원 부총리 등 요직을 지냈으며 유명한 '7.1 조치'를 취한 인물이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929년 10월 2일, 일본 제국령 조선의 평안북도 정주면의 빈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해방 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프라하 공대에 유학하여 기계공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1954년, 중앙위원회 중공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가 구성기계공작 지배인에 임명되었다. 1964년에 중앙위원회 중공업부 부부장에 임명,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71년,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1973년 9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5년 9월 즈음에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는데 이때 중앙위원회 위원에서도 소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면서 홍성룡에게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1978년에 주석부 참사실장으로 이동,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경제 부관으로 활약하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어 1978년 12월에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2.2. 80년대 경제사령탑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2월에 평안남도 경제지도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2년 4월, 조선로동당 6기 5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1982년 12월, 평안남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나 뭔가 사고를 쳤는지 1983년 9월에 경질, 1983년 11월, 조선로동당 6기 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소환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9월 정무원 국가계획위원장 부위원장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돌아왔고 1986년 2월 4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홍성룡의 뒤를 이어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홍시학과 함께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86년 12월,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및 정무원 제1부총리에 임명되면서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를 박남기에게 물려주었다.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리근모와 함께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7년 9월 30일, 북한-폴란드 경제 및 과학기술협의위원회 제11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정부대표단장으로 폴란드를 방문하였다.귀국한 후 1987년 10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제1부총리에서 해임, 박남기의 뒤를 이어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재임명되었다. 홍성남 해임과 함께 제1부총리 직함 자체가 폐지되었다. 1988년 3월 31일, 북한-루마니아 경제 및 과학기술협의원회 제13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정부대표단장으로 루마니아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난 속에서 1988년 2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또 다시 해임되고 김달현에게 자리를 내준 다음에 정무원 부총리 직함만 유지하였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8년 6월 2일, 김달현이 대외경제위원장으로 조동되면서 다시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수난은 끝나지 않아서 북한 경제가 신통치 않은 것 때문에 질책을 받았는지 1989년 초부터는 정치국 후보위원 현무광보다도 서열이 떨어져 정치국 후보위원 강등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1988년 11월의 6기 14중전회나 12월의 6기 15중전회에서 강등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연형묵 내각의 부총리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는 최영림에게 물려주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고 이후 조선국제합영총회사 이사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강성산이 총리가 되자 부총리로 유임되었고, 파키스탄, 중국 등을 방문하여 경제협력을 추진했다. 1994년 7월, 김일성과 강희원 장의위원, 1996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부총리 재임 시 정무원을 강화하려는 김정일의 지원을 받았으며 1997년 2월, 와병한 강성산을 대신하여 정무원 총리 대행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외부에 강성산 경질로 잘못 알려져서 위키백과 등에는 홍성남이 1997년 2월부터 총리에 취임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적고 있다. 이후 강성산이 다시 활동을 하면서 총리 대행에서 물러났다.
2.3. 내각 총리 시절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김일성 헌법 선포와 함께 내각총리가 부활하면서 첫 내각총리에 임명되었다. 즉 김정일이 임명한 첫 총리였던 것이다. 김정일은 권력을 장악하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에 각각 국가대표권과 정부대표권을 위임하였다. 그의 권위는 상당하여 200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돐 열병식에서 김정일, 김영남, 조명록, 김일철에 이은 주석단 서열 5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7월, 김병식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그가 임명된 시기는 고난의 행군으로 온 나라가 신음하던 상황이었고 이에 김정일은 1999년 6월, 홍성남 총리에게 내각이 경제를 통일적으로 장악하여 경제관리방식을 과감하게 개편할 것을 지시했으며, 2000년 6월 3일, 경제관리방식에 대한 대담한 개혁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홍성남은 2000년 6월, 삼성 대북투자 조사단과 만나 삼성의 북한 투자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으며 6.3 그루빠를 조직, 2002년, 당,군 경제의 축소, 경제하부기관 조직 개편, 기업 자율권 확대, 번 수입에 의한 기업관리, 물가-임금 현실화, 노동 인센티브 보강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김정일이 이 중에서 당,군 경제 축소를 제외한 부문을 받아들임에 따라 홍성남은 2002년 역사적인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시행, 북한에 시장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의 밑에서 박남기, 곽범기, 조창덕 등 김정일 시대의 주요 테크노크라트들이 부총리,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치면서 성장하였다.
2.4. 말년
하지만 고질적인 공급 부족, 중국과의 관계 악화에 따른 신의주 특구의 실패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홍성남 내각의 개선 조치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홍성남은 2003년 3월, 김정일에게 종합시장 장려를 건의하여 5월에 허락을 받아 시장을 국가 유통망으로 흡수하고 물가 안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계속된 경제부진에 실망한 김정일은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홍성남은 화학공업상 박봉주로 교체된다. 박봉주는 더욱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해임된 홍성남은 함경남도 당책임비서로 이동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함남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내각총리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 경질이나 숙청으로 보기도 하지만, 도당 책임비서 정도면 아무나 주는 자리는 아니고 특히 죽을 때까지 계속 재임한 점, 사후 국장이 치러진 점을 보아서 김정일의 기본적 신임은 유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함남 책임비서 시절은 주로 함경남도의 지방행사를 다녔으며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2008년 말부터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사망 직전인 2009년 3월 8일에 치러진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불과 2주 후인 2009년 3월 31일 6시, 79세를 일기로 요독증성심근장애 때문에 사망하였다. 곧 죽을 홍성남에 대한 예우성 선거로 보인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홍성남동지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지던 시기에 정무원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정무원 제1부총리,당중앙위원회 부장의 중책을 지니고 당의 경제정책을 관철하며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기 위한 사업에 온갖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였다. 홍성남동지는 1990년대초부터 정무원부총리,내각총리의 중임을 지니고 나라의 경제를 추켜세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으며 최근년간 함경남도당위원회 책임비서로 사업하면서 도안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우리 당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우고 당의 로선과 정책관철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킴으로써 강성대국건설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는데 공헌하였다. 홍성남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 홍성남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홍성남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라고 극찬했다. 4월 2일, 국장이 거행되었고 최태복이 추도사를 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영남.
- 위원: 조명록, 김영일, 김영춘, 리용무, 리영호, 김정각, 김일철, 전병호, 최태복, 양형섭, 김국태, 김중린, 김기남, 최영림, 곽범기, 로두철, 전승훈, 태종수, 장성택, 최익규, 박남기, 김성규, 김양건, 채희정, 홍석형, 김평해, 김락희, 최룡해, 박도춘, 리철봉, 김히택, 리용철[1], 김병팔, 강창욱, 로성실.
4. 여담
- 4년 11개월 가량 총리로 재직하면서 역대 내각총리 중에서 박봉주의 뒤를 이어 2번째로 긴 재임기간을 기록하였다. 정무원총리까지 합친다면 박봉주, 강성산, 리종옥의 뒤를 이어 역대 4번째다. 최고인민회의 임기 시작과 함께 총리 임기를 시작하여 중간에 교체되지 않고 임기를(10기 최고인민회의 임기 완수) 완수한 유일한 총리이기도 하다. 나머지 총리들은 정무원총리까지 모두 합쳐서 임기 중에 교체된 기록이 있다. 다만 최고인민회의 임기를 완수해본 기록 자체는 박봉주와(13기 최고인민회의 임기 완수) 리종옥이(6기 최고인민회의 임기 완수) 포함된다.
5. 참고문헌
- 간대욱, 「김정일 시대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성」 『사회과학연구』 17(1) (2001.12)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인물 주요정보』(서울: 통일부, 2020)
- 홍민 외, 『북한 변화 실태 연구: 북한 시장화 종합 분석』(서울: 통일연구원, 2018)
[1] 사로청 제1비서 리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