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6:16:13

최익규(1933)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정치인.

2. 생애

1933년 2월 26일, 함경북도 화대군에서 태어나 김형직사범대학 러시아어문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다큐멘터리 김정일에는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최익규가 자신이 보통간변의 빈민촌인 토성랑 출신으로 땅굴에서 거지생활을 했었다고 한 걸 봐서 평양 출신이 확실하다.

원래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연출가로 일하다 영화광 김정일의 영화 가정교사가 되어 그를 보좌하였다. 이때 유격대 오형제, 내가 찾은 길 등을 창작하여 김정일의 총애를 얻어 김정일이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승진한 후에 발탁, 1957년부터 1959년 사이 선전선동부 영화과장에 임명되어 문화예술 분야에서 '종파여독 청산' 및 유일사상체계 확립, 항일빨치산 혁명전통 구현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을 거쳐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최익규가 자신의 동창생이었다고 하는데, 김성갑의 집에서 과외교사를 하던 김현식에게 최익규가 찾아와서 앞으로 김성애 측이 크게 화를 입을 것이니 그집에서 연필 하나 주는 것도 받지 말라고 미리 충고를 했고, 이 말을 들은 김현식은 김성갑에게서 개인적인 대가를 전혀 받지 않았는데 1974년 2월,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포된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에서 철직돼서 지방 중학교 교사로 하방당할 뻔했다고 한다. 그나마 최익규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아무말 없이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였고, 철직 지시가 번복되어서 겨우 교단에 남을 수 있었다고.

1971년 피바다가극단 연출가를 했다. 1972년 4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상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12월 29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꽃파는 처녀 창작의 공을 인정받아 로력영웅 칭호 및 마치와 낫 금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은 발표되지 않아 재선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78년 신상옥, 최은희의 납치를 주도하고 이들이 북한에서 세운 신필름 운영도 맡은 것을 보아선 가능성이 있다.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김정일 연회에도 자주 동행했으며, 김정일이 예술에 대해 지시할 때 어쩔줄 모르면서 절절 기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은희에게 자기는 거지 출신이지만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배려로 당예술담당 부부장까지 되었다고 자랑을 했다고. 신상옥도 김정일의 측근 중에서 최익규를 가장 인상깊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신상옥이 술을 마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오진우, 김경희, 장성택, 김기남 등 면면이 화려하지만 장성택은 아예 이름도 기억 못하고 김경희 남편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으며 로동신문 책임주필이었던 김기남은 사장으로 잘못 기억하는가 하면 석방기념 연회에서 만났다고 한번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최익규는 자주 언급한다. 하지만 신상옥, 최은희가 탈북하고 그 책임을 묻고 대사상투쟁 대상에 올라 부부장에서 철직,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좌천되었으나 1987년 5월, 김일성 탄생 75주년 5000명 대공연 연출을 성공시킴으로 1988년에 다시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복귀하였다. 1991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승진과 강등을 반복하다가 1997년 시점에는 대외선전과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영화 민족과 운명 제작에 참여했으나 장진성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리춘구를 시기하다가 혁명화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 다시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복귀, 2001년 보천보전자악단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강능수의 후임으로 내각 문화상에 임명되었으며 문화상으로 각종 행사에 참여하다가 2005년 10월 26일, 윤이상 서거 10돐 추모음악회 개막식에 참석하여 개막연설을 한 것으로 동정보도가 끊기더니 2005년 12월에 문화상에서 해임되어 김진성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3월 21일자 조선중앙통신 보도에서 김정일의 홍루몽 창조사업 현지지도에 장성택, 김양건과 함께 당 부장으로 직함이 보도되었다. 해당 자리가 선전선동부장이란 말도 있고 영화부장이란 말도 있다. 2009년 4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4월 9일, 태양절기념 영화상영순간 개막식에 국가영화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개막사를 함으로 국가영화위원장 재임 역시 확인되었다. 이후 김정일 현지지도에 동행하는 한편 여러 행사를 다녔으나 2009년 9월 29일, 예술영화 《내가 본 나라》(제2, 3부)에 대한 주체적문예사상연구모임에 당 부장 자격으로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동정보도가 끊겼다.

이후 2010년 1월에 강능수가 영화부장 및 국가영화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해임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3차 당대표자회에서도 탈락했으며 동정보도는 없다. 단순한 은퇴로 보긴 너무 갑작스럽게 해임되고 이후 대접도 너무 좋지 않다. 마이니치 신문은 중국 소식통을 인용하여 화폐개혁 홍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숙청한 것으로 보도하였는데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후 김정은 시대에 충신들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는 혁명전우관에 김정일이 최익규를 자신을 받들어 모신 충신이라고 교시한 현판이 걸린 것이 확인되면서 숙청된게 맞더라도 복권된 것이 확인되었다.

3. 매체에서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