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리춘구 李春久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42년 4월 12일 평안남도 평양부 교구정 (現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 |
사망 | 2023년 6월 13일 (향년 81세) 평양시 |
직업 | 작가 |
주요서훈 | 김일성훈장, 김일성상, 로력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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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시나리오 작가, 정치인.2. 생애
1942년 4월 12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온돌쟁이, 굴뚝소제공으로 뜨내기 노동을 하던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손윗형제를 모조리 전염병으로 잃고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다가 해방 후에야 평천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과를 졸업했다. 하도 어렸을때 가난하게 산 콤플렉스 때문에 학창 시절 교수의 질문이나 토론시간에도 말을 차마 못했다고 하며 이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후에도 취재를 꺼리며 자기가 쓴 영화를 보는게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하지만 대학 졸업 이후 5년간 작품을 내지 못하다가 1967년 혹은 1968년부터 조선문학사 창작사에 입사하여 1974년 영화 열관리공의 시나리오를 맡았다. 장진성의 증언에 따르면 젊은 작가들의 처지를 대변하다가 한상순, 백인준, 김희봉, 리종순 등 선배작가들의 미움을 샀으나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에 신소까지 하면서 버텼고, 1977년 이 세상 끝까지가 성공하면서 유명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이후 1980년 열네번째 거울을 시작으로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며 북한의 대표적 시나리오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한때 김정일의 총애를 차지했던 신상옥과 최은희가 탈북하면서 당 예산이 조선영화문학창작사에 집중되면서 활동 조건도 더 좋아졌다. 특히 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를 보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 최초로 당 간부를 상대로 한 비판적인 영화를 창작하였는데 이는 1980년대 초중반 김정일이 잠시 허용하였던 사회 비판물 허용 정책의 결과였다.
1982년 2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이 세상 끝까지, 열네번째 겨울, 청춘의 심장 창작의 공을 인정받아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당과 혁명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혁명적열의를 남김없이 발휘 (...) 영화문학을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훌륭히 창작함으로써 우리나라 영화예술발전과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다그치는데 크게 공헌"한 일군으로 선정되어 로력영웅 칭호, 마치와 낫 금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2월 7일자 로동신문으로 발표) 그리고 불과 2달 후인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당중앙의 방침을 충성으로 받들어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을 반영한 사상예술성이 높은 문예작품들을 창작"한 공을 인정받아 김일성 탄생 70주년 문학예술, 출판보도 부문 일군들에게 주어진 김일성상을 받았다. (4월 13일자 로동신문으로 발표)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7년 10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우리 당의 문예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 우리 인민의 지향과 생활을 반영한 영화문학작품들을 훌륭히 창작함으로써 주체적인 문학예술을 발전시키고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교양하는데 크게 공헌"한 공을 인정받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0월 7일자 로동신문으로 발표) 1989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자신에게 물어보라, 생의 흔적 창작의 공을 인정받아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우리 당의 문예정책을 구현하여 (...) 시대와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는 혁명적인 영화문학작품들을 많이 창작함으로써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 영화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일군으로 선정되어 2중 로력영웅 칭호 및 마치와 낫 금메달, 국기훈장 1급을 또 받았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90년대 이후에는 공동 창작을 많이 했다. 1991년에는 방북한 황석영과 함께 임을 위한 교향시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하기도 하였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민족과 운명 창작에도 참여했는데 이때 선전선동부 부부장 최익규가 그를 시기하여 충돌했으나 최익규가 혁명화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이후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재선되었으나 민족과 운명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 창작에 참여한 이후로 갑자기 실종되었으며 북한 매체에서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에 대해서 장진성은 홍영자편 제작 당시 김정일이 홍영자가 삼각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두고 의견을 굽히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량강도의 농장원으로 혁명화보내버렸다고 증언했다. 이후 3년간 감자농장의 농장원으로 굴렀으며 결핵과 급성간염이 와서 폐인이 되었고 복권 후에도 다신 김정일 측근진으로 복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 반면 2005년 9월, 데일리 NK는 리춘구가 오히려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영전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 망명북한펜센터는 리춘구가 김정일에게 "그래도 영화문학이야 제가 지도자 동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기야 하겠습니까"라고 개겼다가 투옥되었다는 보고서를 낸 바가 있다. # 통일부 자료에서는 2010년대까지만 해도 그를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기재하였는데 근거가 어떻게 되는지는 불명.[1]
이후 20년간 소식이 없다가 2023년 6월에 사망하였고 6월 14일에 김정은이 화환을 보내주었다. 화환을 보내준 시점을 보아서 6월 13일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묘비가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김일성훈장수훈자,김일성상수상자,2중로력영웅인 백두산창작단 작가 리춘구동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화환을 보내시였다. 절세위인들의 각별한 보살피심속에 재능있는 영화문학작가,창작지도일군으로 성장한 리춘구동지는 지난 50여년간 혁명영화 《민족의 태양》과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예술영화 《이 세상 끝까지》,《군당책임비서》,《생의 흔적》,《자신에게 물어보라》,《심장에 남는 사람》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문학들을 시대의 명작들로 창작하여 주체영화예술발전에 공헌하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보내신 화환이 14일 고인의 령전에 진정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9월 14일,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렬사들가운데는 김일성훈장수훈자,김일성상수상자이며 2중로력영웅인 전 백두산창작단 단장 리춘구동지가 있다. 리춘구동지는 지난 50여년간 혁명영화 《민족의 태양》과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문학들을 시대의 명작들로 창작하여 주체영화예술발전에 공헌하였다."라고 그에게 가장 큰 비중을 할당했다.
3. 집필작
- 이세상 끝까지(1977)
- 열네번째 겨울(1980)
- 군당책임비서(1982)
- 장산리녀성들(1985)
- 민족의 태양(1987~1991)
- 자신에게 물어보라(1988)
- 생의 흔적(1989)
- 심장에 남는 사람(1989)
- 곡절많은 운명(1989~1995)
- 임을 위한 교향시(1991, 공동집필)
- 효녀(1991, 공동집필)
- 민족과 운명 최현덕 편(1992, 참여)
- 민족과 운명 윤상민 편(1992~1993, 참여)
- 민족과 운명 홍영자 편(1992, 참여)
- 민족과 운명 리정모 편(1993, 참여)
- 민족과 운명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 편(2001~2003, 참여)
4. 참고문헌
- 이명자(2010), 현실과 혁명적 양심 사이에서: 북한 영화문학 작가 리춘구론, 남북문화예술연구 7.
[1] 다만 홍영자편은 1992년에 나왔는데,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 편이 마무리된 2003년까지 아무 문제를 삼지 않다가 갑자기 문제 삼아 혁명화를 보냈다는건 그림이 이상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