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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9:09:36

조창덕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광업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29년 10월 3일에 태어났으나 고향은 불명이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1969년에 광업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 경제 및 과학기술 협조위원회 4차 회의를 위한 북한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72년 12월, 정무원 광업총국장에 임명, 1973년 1월, 정권 대표단장으로 잠비아를 다녀왔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창덕의 수기를 보면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 이전에 이미 광업위원장으로 사업하고 있었다.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6기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정무원 광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80년 11월 경제대표단장으로 짐바브웨를 방문하였으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10월, 공업기술총연맹 광업협회 위원장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다녀왔다. 1984년 6월 유색금속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김일성 시대 중후반기부터 열성적으로 활동한 테크노크라트였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4년부터 단천지구 공업총국장으로 재임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채취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90년 1월 2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채취공업위원회가 광업부와 석탄공업부로 쪼개지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이후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탈락했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에 위촉되긴 했으나 그 서열이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김락희보다도 떨어져서 통일부는 조창덕이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만약 강등이 사실이라면 1990년 1월 조선로동당 6기 17중전회 즈음에 인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일 집권 이후에 중용되어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홍성남 내각에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장 및 조선과학기술총연맹 중앙위원장을 겸하였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1년 8월,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을 수행하였으며 9월의 북중 정상회담에도 배석하였다. 2002년 4월, 경제대표단장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하였다. 이걸 보면 김일성 시대부터 대러 외교업무에도 동원된 걸 볼수 있는데 정백사원 제막식에도 이 사람이 참석했었다.

그러다가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재선되었으나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부총리에서는 물러났고 공식활동을 중단했다. 70대 후반의 나이였다는 점에서 고령으로 인해 대의원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2013년 5월 9일에 사망, 2013년 10월 16일 애국렬사릉에 내각 부총리 직함으로 안치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그의 시신 안치를 보도하면서 "내각 부총리였던 조창덕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헌신분투함으로써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고있다."라고 그를 좋게 말해주었다.

3. 여담

정일룡의 사위인데, 이상하게 남한에서 파악을 거의 못하고 있다. 조창덕이 정일룡의 사위인 것은 로동신문에 실린 정일룡 추모기사에 언급되는데, 조창덕의 이름 석자는 안나오지만 1978년 1월 시점에서 사업하던 광업위원장이 정일룡의 사위라고 적고 있다. 조창덕은 1977년 12월에 광업위원장에 임명되었으니 조창덕이 정일룡의 사위임이 분명하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