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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9 16:27:22

오백룡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매체에서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가.

2. 생애

본명은 오수현으로 1914년 10월 14일, 함경북도 회령의 빈농 가정에서 출생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유격대 토벌에 가족들을 잃자 자기가 직접 만든 권총으로 세관에서 일하는 순사를 쏴죽이고 그의 총을 빼앗아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에 입대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소대장, 중대장을 거쳐 연대장까지 승진하였다고 한다. 1937년 보천보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소대장 시절에 김일성의 백마를 먹일 사료를 구하기 위해서 김일성의 허락도 받지 않고 주재소를 습격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민생단 사건 때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전우들의 보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오백룡이 자신을 민생단 프락치로 몰았던 중대정치지도원을 직접 죽여버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6년 10월, 철도여단 군사부여단장, 1947년 10월 인민군 4사단 군사 부사단장, 1949년 12월 내무성 경비국 제1여단장을 역임하였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8사단장 겸 23기포여단장으로 참전했다. 전후 부군단장을 지내다가 한창 김일성의 횡포로 인해서 정부 내의 갈등이 심해전 1956년 4월, 김일성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정부호위국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2월 내무성 부상 겸 호위총국장, 1963년 12월 민족보위성 부상을 역임했다. 60년대부터 항일 빨치산 회상기를 연재하며 김일성 우상화에 조력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어 4, 5, 6,7기까지 재선되었다. 1968년 2월 3일, 김창봉, 석산, 허봉학, 최광, 오진우와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7월 25일, 6.25 전쟁 종전 15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원수의 현명한 령도를 받는 인민군대는 필승불패이다>라는 기고를 발표하며 주접을 떨었다.

1968년 11월부터 1969년 3월까지 강점구의 뒤를 이어 잠시 수산상을 지내다가 김원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8년 12월, 허봉학, 김창봉이 숙청되면서 중앙위원회 군사부장에 임명되었으며 노농적위군 사령관도 지냈다. 1970년 8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군단을 겸하였다. 1972년 10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성렬의 뒤를 이어 잠시 륙해운상을 지내기도 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3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1] 1977년 10월,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2]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유임, 중앙인민위원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겸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중앙인민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2중 수훈자가 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다.

말년에 병마에 시달리다가 1984년 3월 김일의 장의위원을 지낸 것이 거의 마지막 활동이었으며 4월 6일에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공동 명의의 부고가 발표되어 "오백룡동지의 전 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싸운 충직한 공산주의혁명가의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그가 발휘한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높은 혁명성,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은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모범으로 되어왔다. 지금 전체 인민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한 국가와 혁명무력의 훌륭한 지도간부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라고까지 하면서 그를 크게 칭송했다.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004년에는 오백룡 사망 20주기 추도식이, 2014년 10월 24일에는 오백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중앙보고대회가 열렸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도 그의 생애를 기리는 소개편집물 <수령결사옹위로 빛나는 삶>이 제작되는 등 항일 빨치산 1세대로 대접받고 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5. 매체에서


[1] 1977년 3월에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없었다. 1977년 4월, 5기 13중전회에서 임명이 추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 1977년 10월에도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없었다. 1977년 12월, 5기 15중전회에서 임명이 추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