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1월 27일 ~ 1994년 7월 8일 (향년 70세)
1. 개요
북한의 항일 빨치산 출신 군인, 정치인.2. 생애
2.1. 초기 이력
1923년 11월 27일에서 함남 영흥군 요덕면 입석리(현 요덕군 입석리)에서 태어났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1933년 장백현 19도구에서 농사를 짓다가 김일성 빨치산 투쟁의 영향을 받게 되어 1937년 6월에 빨치산에 가담, 소년중대에 입대하였다. 림강현 6도구전투, 쌍산자전투, 돈화현 륙과송전투 등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위중대에 배속되어 김일성을 호위하였다.해방 이후 귀국, 보안간부훈련소 교관을 지내다가 조선인민군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50년 8월, 민족보위성 부상 및 사단장에 임명되어 6.25 전쟁에 참전했다. 종전 이후 여단장, 사단장, 부군단장, 군단장, 집단군 참모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을 지냈다.
2.2. 정치인 경력
1966년 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72년 12월에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선되었다. 1972년 김일성훈장도 수훈받았다. 1977년 2월, 지병학 장의위원을 지냈다.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사회안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음으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와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9년 강건종합군관학교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박성철, 서철, 김익현. 손종준, 최성숙, 강위룡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고,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태병렬, 김룡연, 리종산, 리하일, 리병욱, 리봉원, 리동춘, 장성우, 조명록, 김일철, 김영춘, 김봉을, 전재선, 박기서, 김리창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사망
1994년 7월 8일 0시 10분에 7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날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필이면 김일성이 사망한 바로 그날, 즉 김일성이 사망하기 딱 2시간 전이라서 그의 죽음은 김일성 죽음에 철저히 묻혀버렸다.[1] 이후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이 김일성 명의의 화환을 보내주고 사회장을 치러주었다고 한다.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반신상이 제막되었다.김정은 시대에도 대표적인 충신 중 한 사람으로 소개기사가 나오는 등 현재까지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2020년 11월 11일자 로동신문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한생토록 간직하고 산 참된 전사>라는 기사를 통해 "참으로 조명선동지의 생애는 혁명의 수령을 신념과 의리로 받들고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한 참다운 혁명가의 한생이였다. (...)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혁명적동지애와 고결한 의리가 있기에 조명선동지는 오늘도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으며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원히 수령의 참된 전사로 길이 전해지게 될것이다."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조선대백과사전 17권.
[1] 보통 북한에서 일반인은 물론 고위층의 생일/기일마저도 수령의 생일/기일이랑 겹치면 공식적인 서류상으로는 앞뒤로 3일 이상 당겨서 신고하는 게 당연하나 조명선의 경우는 김일성의 사망 주변일에 사망한 것도 아니고 김일성이 사망한 딱 그날에 사망했으므로 선전효과도 있고 해서 그냥 놔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