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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5 09:28:02

리하일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가.

2. 생애

1935년 량강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북한에서 공개한 묘비에 따르면 1928년 1월 1일 출생이다.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이후 소련군사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귀국 이후 군사 커리어를 밟은 것으로 보이며 인민무력부 작전국장을 하다가 1975년 인민군 525부대 사령관에 임명, 1977년 534훈련소 사령관이 되었다. 525부대 사령관 근무 시절 경보병 특전부대와 저격여단 보강대책을 김정일에게 건의하여 김정일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는 썰이 있다.

이후 1979년 인민군 8군단장이 되었고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7기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82년 3월 군사부장에 임명,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일 간부정책에 정통한 현성일 책에는 딱히 언급이 안된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0년 5월, 9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1기 국방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태병렬, 조명선, 김룡연, 리종산, 리병욱, 리봉원, 리동춘, 장성우, 조명록, 김일철, 김영춘, 김봉을, 전재선, 박기서, 김리창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5년 10월 8일, 조명록, 김영춘과 함께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공동결정에 따라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하였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며 선군정치의 초창기 멤버로 김정일을 지근거리에서 적극 수행하였으나 90년대말부터 건강상 문제인지 김정일의 신임을 얻은 것인지 공개활동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국방위원회 위원에서도 탈락했다.

이후로도 공개석상에 안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김정일 최측근으로 보기는 영 급이 낮아보이는 수준이었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모두 해임되었다.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을 지냈다. 충격적이게도 김정일 장의위원에서도 빠진 것을 봐서 그 이미 이전에 할일 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을 받았고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에 위촉되어 생존은 확인되었다. 하지만 2018년 김영춘 장의위원회 목록에서는 빠졌다.

그러다가 2018년 9월 9일, 정권수립기념 열병식에 참여하면서 정말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시 잠적했다. 숙청까진 아니고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021년 8월 1일에 사망했으며 2023년 9월 14일,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이였던 리하일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받들고 우리 당의 군사로선관철,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복무의 길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다."라고 보도했으며,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