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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09:09:33

리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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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음모론4. 장의위원회 구성5.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사회안전부장, 국가안전보위부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1920년 9월 11일 함경남도 함흥군 성천동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다가 1940년부터 흥남비료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안전 및 검찰 부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량강도 정치보위 업무를 책임지는 자리까지 갔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요 직책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1955년 3월, 로동신문에 <미제와 리승만 역도가 빚어낸 참상>이란 논설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956년 김정일이 혁명 전적지 답사단을 꾸리고 량강도와 백두산 현지지도를 갔을때 자처하여 일군들을 모아놓고 현지답사를 돕는 한편 김정일이 머무르던 여관을 직접 경비하면서 김정일에게 엄청난 아부를 하였고 덕분에 김정일의 눈에 들게 되었고 리진수 칭찬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7년 최고검찰소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선민주법률가 협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65년 3월 <남조선 녀성에게 민족적 모욕을 가한 미제 야수들은 인민의 심판을 면치 못할것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1970년 중장 계급을 받고 사회안전성 제1부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 출석, 사회안전기관을 대표하여 토론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국가정치보위부가 신설됨에 따라 전임 사회안전부장 김병하가 초대 보위부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973년 2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이 발표됨으로 리진수가 후임 사회안전부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5기 7중전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북한 측의 선전을 보면 김정일이 불시에 지하철 건설 현장에 나타났을때 이를 제때 모시지 못했다고 자책했다고 하는 걸 봐서는 사회안전부장 시절 평양 지하철도 건설도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1976년 12월 2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원익에게 사회안전부장 자리를 내어주고 정동철의 뒤를 이어 중앙검찰소장으로 이동하였으머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으로 재선되는 한편, 중앙검찰소장에 유임되었다. 또한 법안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8년 최원익이 사회안전부장에서 밀려나면서 다시 사회안전부장을 맡게 되었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일성이 직접 리진수를 불러서 자리를 맡겼다 카더라.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도 사회안전기관을 대표하여 토론자로 출석했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중전회에도 출석, "사회안전기관들은 당과 혁명을 튼튼히 보위하며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자"라는 보고를 올렸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김일성 훈장, 국기훈장 1급, 자유독립훈장 1급 등 여러 훈장도 받았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법안심사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또한 최현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84년 리철봉에게 사회안전부장 자리를 물려주고 숙청당한 김병하의 뒤를 이어 2대 국가안전보위부장으로 이동하였다. 김정일이 리진수를 따로 불러내어 "혁명의 천만리길을 함께 가자"라고 해주었다고 한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4년 김일성의 동독 방문을 수행하였다.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87년 8월 23일 오후 6시 40분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의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여 "리진수동지는 안팎의 원쑤들의 온갖 책동으로부터 우리 당의 통일단결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고 주체사상에 기초한 전당과 전체 인민의 정치사상적 통일을 반석같이 다지며 우리 당의 혁명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왔다. (...) 리진수동지는 당의 유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혁명적 수령관을 확고히 세워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일편단심 우리 조국의 안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침이 마르도록 리진수를 칭송하였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이 빈소를 새벽 2시에 방문해 "리진수 동무는 일을 잘하였다.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라고 유가족들에게 교시하였다 카더라.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조명록, 김광진, 김두남, 전재선, 윤치호, 리동춘, 김하규, 심창완과 함께 리진수를 언급하였다.

3. 음모론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리진수가 '밤나무 가스 중독'으로 죽었는데 이는 사실 김정일의 '배려암살'이라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는 김책에서부터 근래에는 김양건에 이르기까지 북한 엘리트들이 갑자기 죽을때마다 상투적으로 나오는 음모론으로 스탈린 시대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설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주장이다.[1] 현성일의 연구에서 리진수는 김정일을 후계자 시절에 보좌하며 측근 반열에 든 대표적 인물로 언급이 되며 1987년 시점에서 김일성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실질적으로 수령을 대행하고 있던 세자 김정일이 리진수를 정말로 숙청하고 싶었다면 리진수의 전임자 김병하, 그리고 후임자인 김영룡을 조졌듯이 조지면 그만이지 '배려암살'이라는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는 기괴한 방법을 쓸 이유가 없다. 또한 당사자 김정일까지도 죽고 김정은이 집권한 상황에서도 과거 충신의 대표적 예로 언급이 되는 것은, 수령과 조금이라도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인물들은 철저히 기록말살해버리거나 없는 사람 취급해버리는 북한 관행상 리진수가 정말로 김씨 일가의 눈밖에 났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보위부 운전병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구대명도 리진수의 사위 김창혁이 보위부에서 근무한 걸 봤다면서 만약 리진수가 김정일에게 죽었다면 사위가 어떻게 보위부에 있을 수 있겠냐면서 리진수는 자연사가 맞다고 증언했다.

4. 장의위원회 구성

5. 참고문헌


[1] 오랫동안 연구자들까지도 스탈린이 '인기 많은' 키로프를 시기해서 죽였다는 음모론이 유행했으나 정작 소련 문서고가 개방된 이후 스탈린은 관련이 없고 오히려 키로프의 죽음에 격노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직접 레닌그라드까지 달려가 암살자를 심문했음이 밝혀졌다. 몰로토프 역시 키로프가 스탈린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으며 스탈린의 대안이었다는 서방 측의 주장에 코웃음을 치면서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