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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06 01:01:59

한상규(북한)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26년, 삼수에서 혁명유자녀로 태어났다는 정보가 있었지만, 북한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함경북도 선봉에서 떠살이군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려서 막노동을 했고 일제 말기에 징병을 피해서 산속에 숨어지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화학공장 민청 조직부장으로 사업하였으며 이후 조선로동당 함경북도당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농민동맹 함경북도위원회 문화부장을 거쳐 6.25 전쟁 중에는 함경북도 군사위원회 대포로 어랑지역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중앙당학교 교원으로 배치되었다가 1955년, 당중앙위원회 보조지도원으로 배치, 1957년에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으며 1960년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이 됐고, 김일성의 청산리 현지지도를 수행하였다. 1962년 1월, 조직지도부 당위원장 겸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63년, 중앙당학교 당건설강좌장도 겸하였다. 1964년 4월,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에 배치되었을 때 그를 맞이했던 것이 다름아닌 한상규라고 한다. 1967년 4월 17일, 조선로동당 4기 15중전회에 앞서 열린 당총회에서 <도, 시, 군 및 공장당책임비서협의회에서 하신 김일성동지의 교시집행정형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올려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을 맹비난하는 등 갑산파 숙청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반에 동립군 협동농장 경영위원장으로 혁명화당하기도 했는데, 이유가 다소 뜬금없는 것이 환경보호 문제로 책벌당했다고 한다.(...) 이후 지방에서 덕천군 책임비서를 하다가 중심군 책임비서로 조동되었다. 덕천군 책임비서 재임 시절 일을 잘해서 우리 군당 책임비서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카더라.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국가검열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법안심의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검찰소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선로동당 6기 5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4월 13일, 당창건 40주년, 해방 40주년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법안심사위원, 중앙검찰소장에 재선되었다.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89년 11월에 검찰소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다녀왔고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법안심의위원, 중앙검찰소장에 다시 재선되었고 1990년 8월, 검찰소 대표단장으로 소련, 쿠바를, 1991년 5월, 중국을 다녀왔다.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92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회의에서 리룡섭에게 검찰소장 자리를 내주고 쫓겨났으며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에서 법안심의위원에서 소환되었고 이후 동정보도는 없다. 199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소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장의위원, 오진우 장의위원조차 못지냈고 그렇다고 해서 부고가 발표된 것도 아닌 것을 봐서 숙청이 확실하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중국의 개혁개방, 북한의 경제난으로 뒤숭숭했던 상황 속에서 주민들의 기강해이를 잡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중앙검찰소장 해임 이후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복권됐는지 회상자료도 남겼다고 하며 2002년 5월 28일자 로동신문은 <위대한 령도의 거장을 따르는 길에서: 한상규 동지를 견결한 혁명가로 키워 준 위인의 손길>이라는 한상규 관련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7년에 발간된 <위대한 한생> 3권에도 한상규가 김정일에게 충성하여 갑산파에 대한 투쟁을 잘 했다고 칭찬하는 얘기가 실렸다.

3. 여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한영선은 군관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했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