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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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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이름의 민생당과 헷갈릴 수 있다. 물론 둘 다 정치 조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 항목에 나오는 민생단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단체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민생당대한민국정당이었다. #
1. 개요2. 사건의 배경3. 민생단이란?4. 간도 지역의 상황5. 민생단 사건의 시발점, 송노톨사건6. '반민생단 투쟁'
6.1. 숙청의 격화 (출처 없음)
7. 북한과의 관련성8. 캉성의 김산 처형9. 외부 링크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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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民生團 事件.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만주국의 동만주, 즉 간도 일부 지역에서 민생단과 관련된 혐의로 조선인 공산당원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체포, 살해한 사건. 중국 측이나 조선족 측에서는 '반(反) 민생단 투쟁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마녀사냥으로, 간도참변에 이어서 조선족 사회를 작살냈다. 중국공산당의 조사에서 밝혀진 희생자만 367명이며 실제 피해자의 규모는 이보다 많은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공식적인 증언[1] 등에 따르면 약 2,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좌익계 독립군들과 후배지 역할을 하던 조선족 인사들이 처형당했으며 이런 마녀사냥을 주도하던 조선인도 막판에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그 처형을 주도하던 인사들까지 민생단으로 처형당한 후에야 끝났다. 민생단으로 몰려 탈출하여 일만군경에 투신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2. 사건의 배경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과 21개조 요구로 알려진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중국 측에서 중일민사조약(中日民四條約)[2]이라고 부르는 조약들 중에서 소위 ‘만몽조약(滿蒙條約)’[3]은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 지역에서 일본인의 토지 소유에 관한 특권과 영사재판권 등을 규정하였는데 일본은 조선인도 이 조약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청나라 시절부터 조선인들이 간도로 많이 넘어가 터를 잡고 있었던 만큼 일본은 간도 지역의 조선인에 대한 ‘보호’를 구실로 만주에서 자신의 세력을 손쉽게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약 체결 이후에도 중국은 조선인 이민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1913년 11월부터 간도 지역에서 설립되기 시작한 친일 어용단체인 '조선인민회(약칭 '민회')'가 일본영사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조직 규모를 점점 늘려가고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와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 행동을 벌이는 등 만주 지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태도를 바꿔 조선인에 대한 압박과 탄압을 벌였고 현지 중국인들 또한 조선 이주민을 경계와 배척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간도 지역의 조선인은 일제의 탄압, 친일 단체의 통제, 중국인의 배척이라는 3중고에 빠졌다. 1929년에 대공황이 일어나자 조선인들의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군사적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인과 조선인의 사이의 갈등도 더욱 심해졌다.

3. 민생단이란?

민생단은 1932년 2월 15일에서 1932년 7월 14일까지 존속한 단체로서 간도 지역의 기존의 민간단체들, 특히 조선인민회와 민족주의 운동가 등이 모여 설립하였다. 박석윤(朴錫胤)[4], 조병상(曺秉相)[5]김동한(金東漢)[6], 김택현(金澤鉉), 이경재(李庚在), 이인선(李仁善), 최윤주(崔允周), 전성호[7]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다. 10월 7일 룽징(龍井, 용정) 일본 총영사관에 서면으로 설립을 신청하였고 총영사관은 12월 24일 조선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이를 허가했다.

민생단은 간도 지역 조선인의 생존권 확보, 구체적으로는 조선인 권익 옹호, 조선인 자치를 표방하였으나 막상 설립 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지지하며 친일, 반공 활동을 벌여 지역 대중의 분노를 샀고 중국공산당 조직과 조선인 독립군 등 반일 무장세력은 민생단에 대한 탄압에 들어갔다. 각지에서 민생단 가입자에 대한 살해 위협, 폭행 등이 이어졌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민생단 탈퇴로 이어졌다. 실제로 3월 26일자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민생단 혐의분자 7명이 공산당에 의해 살해된 사건도 벌어졌다. 한편 민생단은 이에 대항해 마을마다 자위단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고 일본총영사관과 특무기관의 허가를 얻었다. 이어 간도자위단훈련소를 세우고 자위단원 후보들을 뽑아 7월 1일 개소하였으나 간도에서 조선인들이 무장 단체를 갖추고 정치적 조직을 키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일본은 정책을 바꿔 자위단 결성에 반대하고 민생단에도 압력을 가했다. 이에 민생단은 1932년 7월 14일 사무소 폐쇄를 신고하고 자진 해산했다.

간도 자치 얘기는 애초부터 민생단이 중국공산당에게 확실하게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간도 지역은 중국 영토에 속하지만 조선인이 이미 인구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동북지방 군벌 정부의 부실한 행정으로 인해 만주 지역의 안정성도 흔들리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여 그 일대가 완전히 정치적, 행정적 진공 상태에 빠진 상황에 조선인 자치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중국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도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민생단은 2월 18일에 갓 세워진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당국을 대상으로 조선인 특별자치구 설정 청원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조선인을 만주 지역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족과 중국인의 기득권을 뺏을 목적으로 이용했다[8].

4. 간도 지역의 상황

당시 동만주, 즉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농부들이었다.[9] 만주에 가면 농사가 잘된다 카더라 식의 총독부의 선전에 혹해서 이주해온 사람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개중에는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조선인 이주 초기에는 만주 지역은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단 등 조선에서 만들어진 기존의 조직을 중심으로 그들끼리 조선해방, 조선혁명에 역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8년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 즉 본국 외부에서 활동하는 공산당은 자국 공산당이 아닌 주재국의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30년 10월 간도 지역을 관할하는 동만주특별위원회(이하 동만특위)를 구성하고 밑으로 옌지현(延吉縣, 연길현), 허룽현(和龍縣, 화룡현), 왕칭현(汪清縣, 왕청현), 훈춘현(琿春縣, 혼춘현) 4개 현에 위원회를 두었다. 동만특위는 90% 이상의 당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간부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러던 중 1932년 4월 일제는 공산당, 반일 세력을 뿌리뽑겠다며 간도지역 조선인 마을들을 토벌하였다.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피해 조선인들은 산간오지 곳곳에 숨어들어 현지의 공산당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여러 항일 근거지, 즉 항일 유격대를 만들고 각 위원회들도 유격구 내로 옮겼다. 항일 근거지의 인구 절대다수를 조선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이들 근거지는 종종 '한인(韓人) 소비에트'로 불렸다. 이런 상황은 나중에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유격구의 공산당외 여러 조직들이 민생단의 조선인 간도 자치 주장에 호응한 증거라고 판단하는 불씨가 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이와 관련된 일이 벌어졌는데 '조선일보 만주동포의연금사건'이 그것이다. 만주 지역 동포들이 일제의 토벌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의연금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 경찰 측이 횡령 혐의가 포착되었다는 구실로 조선일보 경영진들을 다수 체포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조선일보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5. 민생단 사건의 시발점, 송노톨사건

중국 지린성 옌지현 라오터우거우(老頭溝, 노두구) 당 위원회의 비서 송노톨[10]은 자신이 1932년 8월경 라오터우거우 일본 헌병 분견대에 체포되었다가 일주일 쯤 지난 후 항일유격대로 찾아와 일본 헌병대 구류소를 탈출했다고 진술하였다. 당 위원회에서는 그의 체포 및 탈옥 과정에 대해 의심하여 원래의 비서 직무를 취소하고 옌지현 농민협회에서 꾸리는 '농민투쟁보' 사로 보내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감시와 조사를 진행했다.

10월 16일 시린허(細鱗河, 세린하) 일대에서 활동하던 옌지현 항일유격대는 매봉산에 지형정찰을 나온 라오터우거우 일본 헌병 분견대 소속 상등병 고노(河野)와 통역인 등 3명을 발견해 유격대 장총대 분대장 최현 지휘하에 이 중 2명을 사살하고 통역관을 생포했다. 통역관은 심문에서 송노톨은 현병대유치장에 갇혔을 때 헌병대에 매수되어 '민생단'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사명을 가지고 파견된 사람이라고 진술했으며 헌병대에서 이런 임무를 받을 때 자신이 통역을 섰다고 덧붙였다. 최현 등은 그 통역인을 데리고 동만특위로 갔고 동만특위에서는 송노톨을 체포하여 밀정 혐의에 대해 심문했다. 처음에는 혐의를 강력히 부정하였으나 통역인과 대질시키니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이어서 민생단원 명단을 대라며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송노톨은 20명의 조선인 간부, 당원들을 민생단 동료로 지목하였다.

옌지현 현위원회는 송노톨의 자백을 근거로 서둘러 옌지현의 모든 당조직과 항일단체 내부에서 민생단 숙청운동을 벌였다. 송노톨은 변절자로 인정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진술을 통해 지목된 20여 명도 바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가혹한 고문, 자백 강요를 거쳐 '적발'되는 '민생단원'은 날로 늘어났다. 민생단원으로 지목된 많은 사람들이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모조리 체포, 감금당하여 심문받았고 이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6. '반민생단 투쟁'

이리하여 민생단이 이미 해체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옌지현에서는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해 겨울 웨이즈거우(葦子溝, 위자구)에서는 소위 '당내 민생단조직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몇몇 공산당 당원이 바다오커우(八道溝, 팔도구) 일본 경찰 분서(分署)에 가서 귀순한 뒤 유격구에 돌아와 가족들을 함께 데려가려다 체포된 사건이었다. 계속되는 일본·만주국 군경의 잔인한 토벌과 극도로 곤궁한 유격구의 생활, 이에 더해 유격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反) 민생단 투쟁'까지 점점 험악해지자 이에 동요하여 투항, 변절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유격구의 공산당 조직은 이러한 상황을 모두 내부에 잠입한 민생단의 소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하고 '반 민생단 투쟁'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따라 당에서 동요, 변절하는 자는 더욱 늘어나고 다시 '반 민생단 투쟁'은 더욱 격렬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이 '반 민생단 투쟁'은 얼마 안 있어 허룽현, 왕칭현으로도 퍼졌다.

그러던 중 1933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 만주성(滿洲省) 위원회에서 시찰 임무를 띠고 간도에 파견된 조선인 반경유(潘慶由)[11]가 왕칭현을 거쳐 훈춘현에 갔다가 훈춘현 유격대 정치위원이었던 박두남(朴斗南)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두남은 앞서 열린 확대회의를 통해 반경유와 동만특위 파견 대표에 의해 파벌주의자로 비판받았고 이미 공산당 당적 박탈, 정치위원직 취소를 당한 상태였다. 박두남은 유격구를 탈출해 일제에 투항하고 그 앞잡이가 되어 유격구 파괴에 앞장섰다.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 조선인 사회, 항일 유격대를 뒤흔들었다. 먼저 9월에 동만특위에서는 확대회를 소집하고 "조선인 파벌주의자들이 민생단과 하나가 되어 당내에 일본 첩자 세력을 구축하여 당의 지도기관을 차지함으로써, 중앙당에서 제시한 임무를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당과 혁명운동에 다대한 손실을 끼치게 하였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했으며 이와 함께 자체적으로 관할 지역의 민생단 색출,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과거에 조선공산당의 각 계파와 그 산하의 반일 혁명 조직에 참가한 적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민생단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고 민족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이어서 12월 7일 중국공산당 만주성에서도 현지 공산당 조직 내에 민생단 출신 일제 밀정이 실제로 암약하고 있다고 보고 직접 동만특위에 민생단 숙청 지시를 내렸다. 우선은 "일본의 첩자인 민생단 및 파벌투쟁에 반대하는 것에 관해 조선 민중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파벌주의자들은 엠엘파, 화요파, 상해파, 서산회의파, 고려공산청년단파 등으로 나뉜다. 이들은 민족주의의 앞잡이, 첩자로서 중국공산당, 항일 유격대, 항일 단체 등의 중국 내 조직에 잠입하여, 일본의 첩자로서 활동하면서 조선인ㆍ중국인 민중 연합과 항일 민족혁명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다. 일체의 민족주의적 파벌 지도자들과 민생단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첩자이며 반혁명 분자로서 우리 민족의 계급의 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12월 11일에는 동만특위에 편지를 보내 "당의 계급 성분과 민족 성분을 교체하고, 상급 간부부터 하급 간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당조직, 항일단체, 농민단체, 인민 혁명정부, 유격대 등 군중 조직ㆍ단체의 지도기관 전부를 개조하여 파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는, 조직상의 철저한 교체"를 지시하였다.

6.1. 숙청의 격화 (출처 없음)

처음에는 조선인 민생단 첩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숙청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첩자의 기준이 모호한 데다 무엇보다 민생단에 몸을 담았다는 물적 증거 따윈 없었다. 나중에 가면 할당량을 정하고 마음에 안 들면 민생단으로 낙인을 찍어서 홍위병과 같은 열성분자들을 동원해 민생단원이라는 죄명을 씌워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일례로 동만특위에서 선전부장 리상묵(李相默)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을 영도하게 했더니 리상묵은 훈춘당조직, 혁명정부, 유격대와 군중단체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무단으로 선포하고 현위위원 오일파(吳一波) 등 구급(區級) 이상의 주요 간부 60여 명을 체포하여 영북, 영남의 3개 구류소에 감금해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갖은 흉악한 고문을 거쳐 6차에 나누어 60여 명 간부 중 한창혁 한 사람을 제외한 전부를 총살하거나 타살하였다.

그리고 지주, 부농 가정 출신인 자, 문장을 쓸 수 있는 지식인, 노간부, 과거 조선독립군과 조선공산당 당파에 참가했던 자, 공작 중에 착오가 있었던 자, 공작 표현에 이상이 있다고 보이는 자, 유격구의 생활 곤란에 불평 표현이 있었던 자, 심지어 식사 중에 밥알을 흘린 사람(식량을 낭비한 잘못)까지 모두 민생단원이라고 몰아세우면서 100여 명이나 체포, 학살하여 전체 유격근거지는 내부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야말로 간도판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중국공산당 문서나 일제 자료를 봐도 민생단 숙청으로 인해 희생된 조선인의 숫자가 일제 토벌에 희생된 조선인보다 더 많아졌다. 심지어 일제 문건에 따르면 진짜 민생단원은 겨우 7~8명이었다. 7~8명 색출한다고 수천여 명을 희생한 것이다.

민생단 문제 때문에 간도에는 그야말로 지옥이 열리고 말았으며 간도의 조선족 공산당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렸다.

7. 북한과의 관련성

이 사건은 북한 체제의 성격과 핵심지도부 인맥, 주체사상 성립에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3년간의 반민생단 투쟁으로 만주 지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중견 간부들의 씨가 말라버리면서 지도부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더불어 조선인 사회의 민심이 흉흉해진 것도 당연지사. 이것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2-30대의 젊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발탁해서 간부층의 공백을 메우고 조선인들의 성난 민심을 달랬는데 이들 중 선두주자가 바로 김일성김책이다. 특히 김일성은 이후 보천보 전투를 주도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김일성도 민생단 사건이 터질 무렵 동북항일연군 간부여서 민생단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할 뻔했는데 이 사건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활동 중이었고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소환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일성은 자칫하면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중국인 왕윤성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다.[12]

그리고 이후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를 편성할 때 처음에는 중국과 국내의 우수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2연대를 사단 주력부대로 편성할 생각을 했다가 마안산 밀영에 가서 마음을 바꾸고 민생단 혐의 때문에 전투대오에서 배제된 100여명의 대원들로 새 사단 편성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김일성이 새 사단을 편성하기 위하여 미혼진을 떠나 마안산지구에 이르렀을 때에 새 사단의 모체로 되어야 할 2연대는 교하 방향으로 가고 없었고 앞서 말한 100여 명이 남아 있었으며 이들은 김일성이 오는 걸 보고 자신을 처형하러 오는 줄 알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김일성은 이들에게 민생단 혐의를 없던 것으로 하고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 대오에 넣겠다고 선포하고 민생단 문서 보따리를 소각해 버린 뒤 이들과 관련 유족들을 포섭해 주력부대로 편입시켰다.[13]

말하자면 민생단 혐의를 입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김일성에 의해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로 편입되어 후에 북한 요직에 앉아 김일성파, 백두산 줄기파를 형성한 핵심 간부들이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 세뇌교육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김일성을 정말 어버이로 인식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게 가능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후 김일성은 이들을 통해 타 세력을 종파라고 숙청하고 부자세습을 용의주도하게 수행했다. 그야말로 동물농장나폴레옹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이 민생단 사건 당시 김일성이 호되게 고생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중국에게 아쉬운 것이 있을 때 중국 측 대표한테 반민생단 투쟁을 언급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14]

8. 캉성의 김산 처형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한 조선공산당 중앙 관계자가 캉성(강생, 본명은 장슈핑)인데 캉성은 김산을 민생단에 연루시켜 처형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캉성은 중국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4인방은 아니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4인방과 보조를 맞춘 마오빠돌이 극렬분자 중 하나로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박해에 관여했다. 사후에 덩샤오핑이 당내 주도권을 잡게 되자 당에서 제명됐고 혁명공원에서도 매장된 유해가 제거되기도 했다. 한편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복권했다.

9. 외부 링크

한겨레,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밥을 흘려도 죽였다
한홍구, 민생단 사건의 비교사적 연구, 2000.06
연변일보, 40. 반《민생단》투쟁1

10. 같이 보기



[1] 동북항일연군 지휘관 중 저우바오중(周保中)의 회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2] 민사(民四)는 민국 4년(1915년)을 의미한다.[3] 실제로 이런 명칭의 조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일민사조약은 '산동성에 관한 조약' 및 이에 부속하는 교환공문(exchange of notes) 2건,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 조약' 및 이에 부속하는 교환공문 8건, 기타 교환공문 3건으로 구성되는 조약이다. 이 중에서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 조약{(중)≪關於南滿洲及東部內蒙古之條約≫, (일)南満洲及東部内蒙古に関する条約} 및 그 부속 교환공문들을 편의상 '중일만몽문제조약(中日滿蒙間題條約)'으로 통틀어서 부르고 이를 다시 줄여 부르는 명칭이다.[4] 최남선의 매부이자 매일신보 부사장을 지냈다.[5]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6] 한때 공산주의 계열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했지만 이후 변절해 일제 밀정으로 활동하였다.[7] 청산리 전투 참가자로서 연변자치촉진회 활동 중 1928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해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 민생단에 가담하였다. #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12연대장을 맡았다.[8] 출처: 윤욱 (2017). 中華民國 國民과 滿洲族 사이. 역사학보, 234, 265-307.[9] 일제강점기 조선 인구의 80%는 농부였는데 대부분은 지주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사는 소작농들이었다. 그런데 이 소작농들이 지주들한테 바치는 세금이 1년 수익의 절반이었다. 이러니 먹고 살기 어려운 소작농들은 만주에 가면 땅을 가져서 가난하고 지긋지긋한 소작농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기대를 품고 만주로 이주했다. 그런 조선인 이민자들의 후손이 바로 오늘날의 조선족들이다.[10] 송일(宋一). 본명 이송일(李宋一). 30대 초반의 중년이었지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서 노톨=老頭(라오터우)이라고 불렸다.[11] 본명 이기동(李起東)[12]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김일성이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에 중국인 간부에게 자신이 민생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중국어로 항변하여 설득해서 간부가 처형을 면하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6.25 전쟁에 북한을 지원하러 나간 펑더화이가 김일성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이 중국어를 유창하게 해서 믿음이 간다고 회고할 정도로 김일성은 중국어를 잘 했다. 해방 이전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이미 친분이 있을 정도였다.[13] 이 이야기는 북한 영화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다뤄진다. 북한 영화 〈조선의 별〉에서는 눈 쌓인 산골에서 조선인 중국공산당원들이 반민생단 투쟁을 빌미로 노인, 여성,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총살하려고 했던 찰나에 백마를 타고 나타난 김일성이 처형을 몸으로 막고 죽지 않고 민생단 문서를 불태운 뒤 인민들의 환성 소리를 뒤로 하고 떠난다.[14] 1932년부터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주보중과 같은 이들과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 일제 패망 직후인 1947년 무렵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한테 밀려서 한때는 만주로까지 몰릴 만큼 위태로웠는데 당시 중국공산당 휘하에 있었던 조선인 병사들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많은 활약을 벌였으며 내전의 승리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후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됐다. 최소 2개 사단 정도 규모의 이 병력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으며 6.25 전쟁 초기 북한의 남침 당시 주력부대이기도 했다. 1950년 중국이 북한에 병력을 보내기 전 마오쩌둥이 한 말은 '과거 만주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국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