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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0:48:14

21개조 요구

1. 개요2. 전개
2.1. 요구 내용2.2. 중국 정부의 대응2.3. 파리 강화 회의
3. 결과4. 위안스카이 야합설과 쑨원 날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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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5년 일본 제국중화민국 북양정부에 제출한 21개조 요구.

2. 전개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협상국으로 참전하고, 독일 제국이 조차하고 있던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반도 일대를 공격, 점령한 후 산둥성의 독일 이권을 접수하였다.

1차 대전중 일본군 산둥성 침공로

파일:p0792.jpg

녹색: 중립지대, 황색: 영국 조차지, 자주색: 독일 조차지, 화살표: 일본군 진격로

2.1. 요구 내용

1915년 1월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히오키 마스 공사를 통해 외교부를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 대총통을 접견하게 하여 그에게 직접 5개호로 이루어진 21개조의 요구를 하게 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21개조의 내용에 대해 기존의 주된 평가는 일본은 서구열강이 서로 박터지게 싸우느라 중국에 눈돌릴 경황이 없는 틈을 타 배짱 좋게 21개조를 내밀어 중국을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였으나, 사실 21개조 요구를 제출할 당시의 일본은 이제 막 열강에 진입해 끗빨이 딸린 상태였으며 이미 이전부터 서구 열강들은 21개조 요구 수준으로 중국을 실컷 뜯어먹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일본이 진짜 전쟁으로 중국을 통째로 삼키려던 야욕에 비하면 21개조 요구는 "우리도 서양 애들 만큼 해줘!" 수준의 나름대로 소박한(?) 욕구였다. 그리고 30년대처럼 내각이고 군 지도부도 알바 아니라고 일선의 겨우 좌관급 장교들이 미쳐서 날뛰면서 중국을 단순히 굴복시켜야 할 군벌떼로 여겨 독단전행을 일삼던 때와 달리 내각이 군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매우 계획적으로, 무엇보다도 중국을 일단 대등한 주권국가로 협상에 임했다는 점에서 일본 역사에서 매우 드문, 철저한 영국식 제국주의를 했던 사례였다. 대공황으로 폭주하기 전까지는 일본 역시 국제사회의 일원이자 정상국가로서 상대적으로 얌전하게 굴었고.
문제는 일본이 요구한 21개조가 기존 열강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그 요구를 유럽이 세계 대전으로 정신 없는 틈을 타 시도를 했다는 점, 충분히 말로 할 수 있는걸 외교적 프로토콜을 무시하고 포함외교를 동원해서 중국의 민족적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는 점, 내부적으로도 대중 방침이 통일되지 않은 상황에서 졸속으로 추진했다는 점으로 심각한 국론 분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추진한 가토 외상과 오쿠마 총리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2.2. 중국 정부의 대응

1915년 1월 18일에 가토 외상이 중화민국 외교총장 루정샹에게 21개조를 제출했는데, 조항 하나하나가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들어줄 경우 중국은 일본의 보호국 내지 식민지가 될 상황이었다. 북양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요구 내용을 외부에 흘려 열강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이게 먹혀서 미국, 영국 등이 크게 반발하며 일본을 비난하자, 일본은 경과를 지켜보다가 5월 7일 5호 항목을 뺀 나머지 조항을 중국 정부가 수락하든지 아니면 전쟁을 할 건지 고르라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당시 북양정부의 수장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서구 열강이 전쟁 중이라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중국이 아직 일본에 맞설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틀 뒤인 5월 9일에 이 요구를 수용하고 말았다. 중국인들은 이 날을 국치일로 정하고 중국정부를 비난하며 일본 불매 운동을 벌였고 5.4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3. 파리 강화 회의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중국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승전국 입장에서 중국 내에 설치된 열강의 조차지를 포기 및 반환하며, 관세자주권을 승인하고 일본이 전쟁 중 빼앗은 영토와 권익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 등 열강의 중국에 대한 권리의 포기와 21개조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한 달여만에 참전해 독일을 산둥 반도에서 축출하는 전공이라도 있던 일본에 비해 전쟁이 다 끝날 무렵에 비전투병만을 파견해 전과가 미미했던 중국의 발언권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일본을 밀어주기로 비밀 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전쟁의 지분과 영프의 암묵적 지지를 앞세운 일본의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었고 중국의 요구는 거부되었다.[9]

파일:크기변환_2015072802193_1_4 (1).jpg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주요 전승국 정상.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3. 결과

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반제국주의 운동인 5.4 운동이 일어났고[10], 이게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중국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 조인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날로 폭주하던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하던 미국은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를 개최하여 일본에 압력을 행사했고, 이에 굴복한 일본은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에 돌려주는 등 21개조 요구의 대부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923년 직예군벌의 수장 차오쿤은 열강의 지지와 민심 확보를 위해 21개조 요구 무효화를 선언했다.

4. 위안스카이 야합설과 쑨원 날조설


5.4 운동 당시부터 최근까지 위안스카이가 일본 제국주의에 굴복했으며 홍헌제제에 대한 일본의 지지를 대가로 일본과 굴욕적으로 야합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나름 저항했다는 것이 발굴되면서 처음엔 저항했지만, 안될 것 같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제 즉위를 받기 위해서 일본과 밀약을 맺었다...라는 식으로들 논지는 유지해서 설명했는데 근래에는 쑨원이 위안스카이를 음해하기 위해 살포한 날조라는 설이 정설이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반응은 매우 격앙된 것이었으며, 일본인 군사고문 반자이 리히치로를 소환해 일본은 중국을 우호국이 아니라 식민지로 여기고 있다고 격렬히 항의하고, 법률고문 아리가 나가오[11]를 일본에 파견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차오루린 등의 친일 인맥들을 총동원하고, 자신이 직접 외교부 회의에 매일 출석하여 관련보고를 받으며 루정샹, 구웨이쥔 등 친영미 외교관들을 통해서 미국과 영국에 하소연하는 등 전쟁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다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오쿠마 내각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반대하던 정권으로,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 하자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일본의 군사지원이 절실해서 21개조 요구에도 닥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서 좀 심하지 않냐고 한마디 할 정도로 막나가던 판이었다.

Ernest Young은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한 이유를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정도이며 Shan은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안스카이가 터무니없는 음해를 당했다고 결론 내린다. 정작 위안스카이의 저항은 속임수에 불과하며 황제가 되기 위해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하던 쑨원은 같은 시기에 일본에 만주를 줄 테니 지원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No controversy posed a more excruciating headache for Yuan than Japan’s Twenty-One Demands of 1915. Traditional historiography claims that Japan took advantage of the First World War to press China for imperialist gains and that Yuan accepted those demands in exchange for Japan’s support for his monarchical project. Accordingly, Yuan’s acceptance was an act of treason, and his negotiation with Japan was a “dirty deal.” (Jian Bozan, Zhongguoshigangyao [An outline of Chinese history], 145.)
According to scholars’ recent research, that claim originated in Sun Yat-sen’s political propaganda, which soon became accepted as the “ironclad truth.” (Ma Liangyu, “Yuan Shikai yuershiyitiao” [Yuan Shikai and the Twenty-One Demands], 61.)
Patrick Fuliang Shan, Yuan Shikai: A Reappraisal(Toronto: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2018), 197쪽. # 참고.
(...) Lastly, the uprising was precipitated ahead of schedule by the rumor that a secret pact was being negotiated between Peking and Tokyo.36a The rumor, while incorrect, seems to have been related to the recent turn in Tokyo toward recognition, which had been known to Yuan. In view of the confidential nature of the information, how did the Junta know about it?
Kwanha Yim, Yuan Shih-k'ai and the Japanese,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24, No. 1 (Nov., 1964), 67쪽. # 참고.
손문의 이전의 수많은 동료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애국적 중국인들이 원세개가 일본에 저항하는 동안 그를 후원하거나 그를 방해하는 일을 자제하였지만 손문은 다른 편에 서 있었다. "호랑이를 쫓아내고 늑대를 불러들이지는 말라"는 황흥의 경고를 무시하고 손문은 그의 원세개와의 싸움에 계속 우선성을 부여하였다. 황제가 되려는 욕심에 대해 일본의 지원을 얻으려했기 때문에 사실상 원세개가 21개조 요구를 불러들인 것이라는 주장하기는 했지만 손문은 비밀리에 일본측에게 비슷한 특권을 제안하고 있었다.
해롤드 시프린 저, 민두기 역, 손문평전(서울: 지식산업사, 1990) #


[1] 옌타이시의 옛 이름이다.[2] 현 옌타이시 룽커우시.[3] 펑톈성 안둥펑톈을 잇는 철도.[4] 이에 따르면 관동주는 1997년, 남만주철도 및 안봉철도는 2004년에 반환될 예정이었다.[5] 지린성 지린장춘을 연결하는 철도.[6] 1890년 청나라의 중신 장지동이 세운 철강기업으로 후베이성 한양과 다예, 장시성 핑샹 일대의 철광 개발과 철강 생산을 담당한, 당시 중국 최대의 철강기업이었다. 이름 역시 한양(陽)과 다예(大), 핑샹(鄉)에서 유래했다. 이후 중일전쟁 때 한야평공사의 설비와 인력이 임시수도 충칭으로 이동해 충칭강철의 전신이 되었고 한양에 남은 제철소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우한강철의 전신이 되었다.[7] 쉽게 말해 합자회사로 전환해 같이 운영하자 이 소리다. 꺼낸 이유는 당연히 일본의 중국 철강 시장 독점 아욕.[8] 원칙상 중국 정부가 수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본 정부에 의해 권고되는 조항.[9] 조르주 클레망소는 중국 측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당신들도 베트만홀베크가 되고 싶느냐?"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10] 이러한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힘을 얻던 배경에서 오늘날 중국 근대사를 일컫는 개념 백년국치가 생겨났다.[11] 이 시기에 고문 직함 달고있던 사람 중에서 흔치 않게 중국과 위안스카이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인물. 본래 법학자였는데, 위안스카이의 고문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 법학 연구를 이어 나가며 중국 근대 법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위안스카이가 칭제할 때는 일본 황실을 모델로 삼아 신 중국 황실의 법적 개요를 제공했다. 한편 21개조 요구에 강력히 반대한 후 1919년 고문 업무가 끝나자 일본으로 돌아와 와세다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 때도 계속 중국에 우호적인 주장을 펴다가 대중 강경론자들의 공격으로 사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