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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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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전
延坪島 砲擊戰
Bombardment of Yeonp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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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 오후 3시 41분
(포격 개시일로부터 [dday(2010-11-23)]일 / [age(2010-11-23)]주년)
장소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대연평도,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 무도방어대·개머리해안 일대[1]
교전국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북한|]][[틀:국기|]][[틀:국기|]]
지휘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이명박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태영[2]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이홍기[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이승도[4]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정수[5]

[[북한|]][[틀:국기|]][[틀:국기|]] 김정일[6]

[[북한|]][[틀:국기|]][[틀:국기|]] 김정은[7]

[[북한|]][[틀:국기|]][[틀:국기|]] 김영철[8]

[[북한|]][[틀:국기|]][[틀:국기|]] 김격식[9]

[[북한|]][[틀:국기|]][[틀:국기|]] 윤영식[10]
전력
K-9 자주곡사포 4문[11]
F-15K 전폭기 4기
KF-16 전투기 4기
122mm 다련장로켓포
76mm 평사포
MiG-23 전투기 5기
피해 규모
전사 2명[12]
부상 16명
민간인 사망 2명
민간인 부상 3명
주장1[13]
최소 전사 5명
주장2[14]
전사 10여 명, 부상 30여 명
주장3[15]
전사 0명, 부상 10여 명
결과
대한민국의 승리

1. 개요2. 사건 경과
2.1. 사건 이전2.2. 사건 발생2.3. 포격과 반격2.4. 결과2.5. 혼란 속에서 활약한 해병들2.6.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2.7. 이후 조짐
3. 도발의 이유4. 피해
4.1. 대한민국의 피해4.2. 북한의 피해4.3. 경제적 영향
5. 후속 대응
5.1. 한미 연합훈련 시작5.2. 연평도 사격훈련 재개
6. 사후 보상 문제7. 반응8. 포격 이후 남북의 영향
8.1. 대한민국
8.1.1. 추모식 및 행사
8.2. 북한
9. 비판 및 논란
9.1. 발생전 대비에 대한 비판9.2. 전투 대응에 대한 비판9.3. 작전 권한과 관련한 문제9.4. 훈장 논란9.5. 명칭 변경
10. 기타
10.1. 관련 다큐/영상
10.1.1. 국방TV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 다큐10.1.2. 주성하TV 연평도 포격부대 탈북자 증언
10.2. 안상수 보온병 폭탄 논란10.3. 송영길 폭탄주 발언 논란
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대한민국영토연평도북한군선전포고도 없이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전투. 정전 협정 이래 최초로 발생한 민간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군사적 도발과는 달리 민간인 거주지역이 포격을 당했고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망자까지 나온 상황이었기에 조금만 수습이 늦었어도 휴전이 깨질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16]
[그날, 군대이야기] 14년 전 승리의 그날, 연평도 포격전 현장을 가다
영상한국사 I 173 북한,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다 | 2019.4.25. KBS역사저널 그날
잊지말아야 할 그날 연평도포격 | 2016.12.1. 국가보훈처

2. 사건 경과

파일:연평도 포격전 상황일지.jpg
연평도 포격전 상황일지

2.1. 사건 이전

북한군은 2010년 11월 23일 오전부터 호국 훈련을 실시한 대한민국 국군에게 실질적인 침략행위라고 항의하였고 대한민국 국군은 기존의 훈련이라고 통지문을 보냈다. 게다가 이후 기사에 따르면 호국 훈련보다는 그냥 일상적인 사격훈련이었다고 한다. 즉, 그냥 핑계다. 애초에 포격을 작정하고 적당한 구실을 붙인 거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훈련을 하지 않았더라도 섬을 드나드는 여객선이나 어선을 물고 늘어졌을 것이기에 연평도 포격전은 빠르든 늦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사실 단순히 북한이 대한민국과의 관계만을 테이블에 놓는다면 명분이 필요없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북한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첫째, 당시 중국은 아시안게임을 진행 중이었고 주권지역 인근에서 문제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조중동맹조약에 따라 중국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선제 공격을 당한 상황에서 발발하는 전쟁에만 개입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이라는 명분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했던 시점은 물론이고 사건으로부터 10년 후인 2020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선제 공격의 주체로 북한을 명백하게 지목하지 않고 있다. 2010년 11월 25일 자 중국 외교부 정례기자회견(@)을 보면 훙 레이 당시 대변인은 선제공격 주체에 대해 답변을 회피하고 대화를 통한 재발방지만 촉구했다.[17] 중국의 이러한 기조는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단의 중국의 반응 단락 참조.

한편, 2012년 한겨레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포격 3시간 전 국방정보본부가 수시첩보보고를 발행하여 사전에 포사격 징후를 포착해 청와대대한민국 국방부장관 등 20여 개 기관에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군 지휘부가 이를 묵살했으며 연평도 사건 직후 열린 국정감사에서 사전 보고의 존재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기사[18]

2.2. 사건 발생

연평도 포격 도중 최초 뉴스속보 (KBS 뉴스특보, 2010) | 2020.6.20. hoon916
"北,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400발 발사했다" / YTN | 2015.11.23. YTN

11월 23일 오후 2시경 연평도에서는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굉음과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당시 하교하던 연평초등학교 학생들은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때는 연평어린이집의 원생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군인의 안내를 받아 대피소 안으로 피신했고[19] 이후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있는 대피소에 모여서 컵라면을 먹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연평도에서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텔레비전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화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평도 주민들은 처음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 사격 훈련 중에 잘못 쏜 거라고 생각했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포탄이 날아오자 이상하다고 느껴 바로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3. 포격과 반격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의 포격이 시작됐다.
포격 직전 연평도로 입항했던 여객선에서 찍힌 동영상. 북한군 포격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비슷한 시각 촬영되어 제보된 동영상
한 학생이 연평도를 탈출하면서 휴대폰으로 제보한 동영상
파일:k-9.png
2010년 11월 25일 최초 피격 순간을 담은 사진

유명한 최초 피격 순간 사진을 찍은 해병대 연평부대 정훈장교 이성홍 대위의 증언에 따르면 저 상황은 다음과 같다. # 이 대위는 부대원들의 포 사격훈련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사격훈련이 모두 끝난 뒤 잠시 후 앞쪽에서 잇따라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솟자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러서 그 순간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겼다. 그 뒤 그게 적의 공격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고 "빨리 피해"라는 고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대피호 안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즉 마침 훈련 홍보촬영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적 포탄이 떨어진 직후의 순간을 그대로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폭발이 의 포격임을 파악하자 포병들은 자주포들을 일단 포상 내부로 숨기고(소산) 나머지 해병들도 대피호로 대피하였으며 14시 41분경 적의 포 공격이 멈추어 잠잠해지자 K-9 자주곡사포 3문을 포상 밖으로 다시 끌어내어 14시 47분경부터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1 #2

K-9 자주곡사포의 뒤에 보이는 화염에 대해 일각에서 열압력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진의 화염은 대구경 열압력포탄에 의한 화염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으며 열압력탄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위로 피어오르는 형태의 화염을 내지 않는다. 포상에 있던 타이어가 타서 그렇다는 의견도 있는데 실제로 2011년 진지보수 공사 때 타이어를 제거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타이어가 불에 탔든 아니든 실제로 타이어가 타는 우려가 있어 최전방 부대를 중심으로 타이어를 모두 제거하고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전량 교체되었다. 해당 사진에 대해 국방부는 장약에 불이 붙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한민국은 당일 오전에 미리 예정된 호국 훈련 계획에 따라 정상적으로 훈련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연평부대도 호국훈련의 일환으로 남쪽 바다를 향하여 사격훈련을 했으나 북한은 이를 남한 측 도발로 규정하고 오후 14시 34분 대연평도에 기습적으로 포탄을 발사했고 남한 역시 14시 47분부터 이에 대응하였다. 북한군의 초반 포격에 한국군은 2대의 K-9 자주곡사포가 손상되었고 한국군은 남은 3대[20]의 K-9 자주곡사포로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 무도의 북한군 기지를 향해 50발의 보복 사격을 가했다.[21] 30발쯤 사격할 때 1대를 긴급수리해 4대를 투입. 이후 북한이 다시 레이더 기지를 노리고 개머리 반도에서 포격을 개시하자 한국군은 다시 30여 발의 포를 개머리 반도에 발사했다. 교전이 중지될 때까지 북한군은 총 170여 발의 포를, 한국군은 80여 발의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22] 합동참모의장의 발표에 따르면 오후 3시 41분 일단 포격은 종료되었다.

북한군의 포탄 중 절반 정도는 바다에 떨어졌고 나머지가 연평도에 떨어졌다. 122mm 방사포와 76.2mm 해안포를 사용했으며,[23] 포격에 사용된 122mm 방사포 불발탄들이 연평도에서 발견되었다. 문제는 오차도 매우 크고 지상에 떨어진 것 중에서도 불발탄이 20여 발이나 되어 군이 수거하였다. 그러니까 지상에 낙하한 것만 불발탄 비율이 약 30%가 넘어갔다. 지상에 유효타를 본 것도 30% 정도. 그것도 수도권을 노리는 4군단에서 미리 준비해놓고도 이렇다는 것이다. 즉, 북한군의 탄약 관리와 제대로 된 포탄 생산/보급이 극히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평도 지상에 떨어진 것들 중에 불발탄이 아니라 제대로 폭발한 포탄들도 적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아군 포대쪽이나 군 시설에 정확히 떨어진 건 별로 없고 대부분이 엉뚱한 민간인 지역 여기저기에 마구잡이식으로 산만하게 떨어졌다.[24][25]북한군의 포 사격 수준이 매우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에 나온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도 21세기 들어서 북한은 핵개발에만 온 역량을 집중하고 있고 그 외 지상군의 사격 훈련은 실사격 훈련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부실한 수준이라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한편 포격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한국군이 14시 38분 급히 KF-16, F-15K와 해군 함정들을 보내자 북한은 MiG-23 3대를 출격시키고 경비정도 출동시켜 공중과 해상에서도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다. 이를 볼 때 북한은 확전이 될 것도 각오하고 이 도발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포병사격 최초대응사격이 13분 이상 걸려, 평소 군 당국이 공언하던 5분 이내 대응사격에 비해 지연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K-9 자주곡사포 6문 전체가 사격훈련 중 사태가 발생하여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대응사격 역시 상당히 늦게 이뤄졌으나 정밀한 타격을 위해 사격원점을 찾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군은 해명하였다.[26]

초기 추정치였던 50~200발의 포탄에 대응해 일반적인 3배 대응 원칙으로 반격했으면 150~600발을 발포했어야 하는데 80발 정도만 대응사격한 것이 안타깝다는 반응도 있다. 급작스럽게 선제공격을 당한 사건임을 감안할 필요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격한 K-9 자주곡사포 포대는 오전에 이미 포격훈련을 한지라 탄약이 없었고[27] 2대는 초기 포격으로 파손당해 전력 외였다. 1대는 오전 훈련 도중 불발탄이 걸려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포격을 실시간으로 맞는 중에 몇 발이나 떨어졌는지 일일이 셀 수도 없는 일이고.

그리고 해병대가 설사 포탄이 200발 이상이 떨어진 것을 정확하게 알았어도 600발을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평도는 섬이다 보니 언제 포탄이 다시 보급될지 알 수가 없다. 사용된 포탄은 어떻게든 보급을 다시 해 놓으면 된다지만 더 중요한 건 포병 입장에선 이것이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도발인지 아니면 6.25 전쟁의 재발인지 알 도리가 없다. 즉 현장에 있던 해병대로선 다음날에도 포격전을 해야 할지 아니면 오늘만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전이 결정난 상태라거나 아니면 지휘부가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포탄을 대량 소모하겠다는 판단을 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3배 대응 원칙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원칙이라는 비판이 있다. 연평도에 주어지는 보급의 한계를 감안했을 때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연평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 군에 적용되는 것이며 보급에 걱정이 없는 본토의 경우는 지키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연평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지키기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보급조건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육지에 있는 포대를 상대하는 불리함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2.4. 결과

1시간 가량(14시 34분~15시 41분) 북한군이 발사한 포탄들로 인해 군 막사가 파괴되고 인근 숲 등 10곳이 불에 탔고 떨어지는 포탄들 중 몇 개가 주민들이 사는 가구 위로 떨어져 민간인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상가 건물이 붕괴되었다. 또 해당 지역 소방서에는 차량이 1대뿐이며 전담 소방요원도 2명밖에 없는 데다가 전기도 끊어진 상황이라 진화 작업이 힘든 탓에 마을이 전소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다급히 24일에 소방차 24대가 긴급 투입되면서 포격으로 10여 곳에 발생한 산불과 가옥과 창고 등을 태운 주택가 화재까지 모두 진화되었다.[28] #

대치 중이던 F-15KMiG-23은 결국 MiG-23이 도주하면서 대한민국 공군 측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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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의 호위를 받으며 인천 본토로 피란하는 연평도 주민들

1,7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피를 완료했다. 포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오후 2시 20분에 인천항에서 온 여객선이 도착한 뒤 포격이 시작되자 미처 내리지 않은 원래의 승객과 부두로 도망쳐 온 주민 일부를 태우고 인천항으로 회항하기도 했다. 발발 직후 연평도로 향하는 모든 항로는 폐쇄되었고 23일 오후 11시 일부 주민들은 자기들의 어선으로 인천 본토로 대피하였으며 나머지 주민들은 방공호에 대피했다.

다음 날인 24일부터는 본격적인 피난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이하 해경)의 지원 하에 어린이, 노약자, 환자를 우선하여 346명의 주민들이 해경 경비함 두 척에 나눠 타고 오전 7시에 연평도를 출항, 오후 2시경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 해경 공기부양정과 해군 공기부양정(러시아제 무레나급)이 167명을 추가로 더 태우고 오후 3시에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7시에는 다시 추가로 17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25일에는 운항이 재개된 여객선과 해경 경비정을 이용하여 추가로 172명이 인천 본토로 피난했다. 25일까지 연평도 전체 주민의 80%에 달하는 1,115명이 인천으로 대피했고 남아 있는 민간인은 약 280명 선이었다. 외신들은 연평도 마을들을 둘러보며 유령도시(Ghost town)란 표현까지 썼다.

처음에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는 걸로 파악되었으나 11월 24일 오후에 민간인 2명의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25일 오후 4시 10분 인천 본토에 도착했다.

25일 오전, 주민대책회의를 통해 꼭 남겠다는 사람을 빼고는 모두 섬을 떠나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본래 연평도에는 900여 가구, 1400여명이 살았으나 남은 사람은 단 47명뿐이었다.

2010년 11월 26일 오후부터 어민들의 조업이 재개되었다. 쳐놓은 그물들을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허가를 내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목숨 같은 그물을 건지러 가는 어민들의 심정을 차마 짐작하기 어렵다.

이 사태로 연평도 주민들이 일정 기간 연평도를 비운 사이에 몇몇 절도범들의 절도 행위가 발생하여 경찰에 도난신고가 접수되었다. #

이 무렵 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주민들은 거의 없었고 언론인들이 훨씬 많았다. 수백명의 기자들이 묵을 곳이 없어 인근 학교 교실에서 생활했다. 소수의 기자들은 용감하게 섬을 떠나지 않고 민박을 운영하던 주민들 집에서 지냈다. 이때 기자들은 돈이 있어도 쓸 수 없었다. 식당 등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어서였다. 따라서 현찰이건 카드건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연평도에서 먹고 자는 기자들은 그들이 속한 회사에서 배편을 통해 보내주는 생필품 소포를 받으며 연명했다. 담배나 술 같은 기호품도 그렇게 조달했다.

이때 섬에 남은 소수의 주민들은 대부분 경찰관, 소방관, 면사무소 및 우체국 직원 등 공무원들이었다. 2교대로 24시간 비상근무를 서며 위험을 무릅쓰고 각종 지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옹진군이 연평도 주민에게 지급한 주민 위로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고 한다.

헌데 '북파 특수 공작원'들의 모임인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HID) 회원 100여명이 여객선을 타고 도착, "북한의 포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연평도에서 어수선한 치안을 틈탄 간첩 침투에 대비해 신고ㆍ체포망을 구축하겠다"며 "북 도발시 남은 민간인의 대피를 돕고 파괴된 민가 및 시설물 복구, 가축 돌보기 등 봉사활동도 벌이겠다"고 목적을 밝히더니 태극기를 들고 열을 맞춰 행진을 벌인 후 연평초등학교에 숙소를 차렸다. 말로는 치안 보조 등 자원봉사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대거 연평도에 들어와 '김정일을 처단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섬 내부를 행진하면서 '응징 보복'과 같은 정치 구호를 외쳤다. 29일 12시를 기해 '통합방위 을종 사태'가 선포돼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반경 1km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민간인 출입이 전면 통제됐으며, 취재진들마저 이날 "군 당국의 작전에 지장을 주지 않겠다"며 소수를 제외하고 전원 철수했는데도 그랬다. 일부 주민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높여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 아니냐"며 우려했다. #

이 사실이 나가자 해당 단체 회원들이 언론사로 험악한 분위기의 목소리로 전화를 해 '윤전기를 세워버리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아서였는지 이틀 만에 그들은 연평도를 떠났다.

주민 대부분이 빠져나간 뒤 방치되고 있는 연평도 내 반려동물의 열악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동물보호단체도 섬을 방문해 구호활동을 폈다. 고립된 섬의 특성상 많은 주민들이 키우고 있던 개와 고양이들이 먹이를 구하지 못해 거리를 떠돌고 있는 상황에서 섬 주민들에게는 가족과 다름 없는 반려동물들을 돌봐 나중에 주인과 재회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였다. 게다가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극도로 예민해진 동물들이 사람이 공격을 당할 수 있는 등 더 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들 단체 회원들은 당시 수의사 2명과 함께 연평도에 들어와 임시보호소를 설치하고 1년 이하 어린 동물들을 돌봤으며, 연평도 곳곳을 살피면서 주인 없이 배회하는 다 자란 동물들은 일일이 집을 찾아 묶어 놓은 뒤 매일 사료를 제공했다. 이들의 보살핌이 섬 내 반려동물들을 살렸고, 시간이 지나 주인과의 재회를 가능하게 했다.#

인천지방경찰청은 포격 직후 경찰인력 30명을 추가로 섬에 투입, 주.야간 조를 나눠 24시간 섬을 순찰하는 등 연평도 내 치안 활동에 주력했다. 섬 내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이나 잔류 주민이 모여 있는 곳에서 거점 근무를 하며 피폭으로 훼손된 건물 총 134곳에 대해 폴리스라인을 설치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등. 또 하루 2차례 여객선이 입항할 때마다 강화된 검문, 검색을 실시해 여객선을 통한 외부인의 유입을 막았다. 12월 3일 연평도에 강풍주의보가 발령됐을 당시에는 피폭 지역의 유리 파편과 깨진 벽돌 등을 치워 강풍 피해 확대를 예방했으며 11일에는 주민 박모씨가 집에 있던 금이 없어졌다며 경찰에 신고하자 경찰관들이 피해자 집 일대를 수색해 금을 찾아 주기도 했다.

피란민이 임시 거처해 온 중구의 찜질방 '인스파월드'에 순찰차와 방범순찰대를 배치하고, 유언비어 유포 행위에 대해 단속을 강화하는 등 연평도 밖에서도 섬 주민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2.5. 혼란 속에서 활약한 해병들

[연평도 포격도발 7주년] 3인의 해병이 말하는 7년 전 '그날' | 2017.11.22. 국방TV
각 계급은 교전 당시의 계급이다.

2.6.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대한민국 정부는 확전을 우려하여 중국 측에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북한군에게 사격을 중지하라는 전통문을 지속적으로 보냈으나 포격이 2010년 11월 23일 오후 3시 40분경까지 계속 진행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포병 사격도 계속되었다.

군 당국은 23일 국지도발 최고 대비태세인 진도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경찰청 또한 인천광역시 전역에 갑호비상을 내렸다.

개머리 해안 근처 해안포 진지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한민국 국군K-9 자주곡사포연평도에 주둔 중인 자주포를 동원하여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으며 F-15K 전폭기 및, KF-16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켰다고 한다.[30] #

그리고 미군오키나와F-22공중급유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켰다고 밝혔다. 한반도 상공 美 F-22랩터 출격대기 중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은 '단호히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대응 지침에 따라 일단 이 상황의 확산을 막고 부상자의 후송과 치료를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표명하였으나 이후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에 의하면 민간인 포격은 용납할 수 없으며, 추가 도발이 있으면 강력하게 타격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호한 대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23일 9시 30분에는 청와대의 공식 브리핑에서는 '추가 도발도 예상되므로 몇 배의 화력으로 응징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다시는 도발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응징을 해야 한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언급이 나왔다. 청와대 발표

이 확전 자제라는 지시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정부의 해명은 회의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가는 과정 중 일부 참모들의 발언에서 그런 말이 야기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다음 날인 24일 오전 대한민국 국회에서 증언한 김태영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의 발언 역시 오후에 번복되었으며, 청와대 공식 트위터의 내용 역시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靑 말바꾸기' 입증한 '靑 트위터', 사라지다!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확전하지 말라고 얘기 안 했다. '공군 뒀다 뭐하냐'고 했다. 당시 (국가위기관리센터 긴급회의에) 배석했던 한 인사가 청와대 대변인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전한 거다. 그 후 나도 책임 추궁을 했다."며 그 트윗과 관련해서 책임을 추궁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사건 종료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관계자는 K-9 자주곡사포로 적의 포병 진지를 집중 사격했으므로 북쪽에서도 피해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연평도 포격 당시 로버트 게이츠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 <임무(DUTY)>에 따르면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때 대한민국이 보복을 계획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말렸다고 한다. "보복계획에 공중공격과 포격이 포함됐으며 과도하게 공격적이었다"고 한다. 미국은 보복이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자신, 마이크 멀린 합참모의장까지 며칠에 걸쳐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등을 설득했다고 한다.

로버트 게이츠는 이후 대한민국미국이 핵항모 조지 워싱턴함이 참가하는 서해 연합훈련 실시에 동의했다고 밝혀 이를 조건으로 보복계획이 철회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게이츠의 회고록 내용은 당시의 연평도 포격과 관련해 미국에서 공개한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에서 2010년도 당시 서해상에서 실시된 한미연합군사훈련과 동일하다. 관련 기사

2.7. 이후 조짐

이전까지 북한이 일삼았던 어떤 도발과도 다르게 직접적인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볼 때 확전의 가능성이 어떤 형태의 도발보다 높았다.

백령도에서도 북한군 해안포 입구가 개방된 것이 확인되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에서 민방위 동원령이 발효되었으며, 연평면에 대하여 통합방위 을종사태를 선포하였다. 더불어 오후 4시를 기해 서해 5도 지역에 북한군의 무력도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공식적으로 대피령이 발효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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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당한 연평도 위성사진

포탄이 산너머 섬 남쪽에 착탄한 것을 봤을 때 직사로 쏘는 해안포가 아닌 곡사포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다만 76.2mm 포가 아닌 이상 주력포인 130mm, 122mm포로는 충분히 타격이 가능하다는 관측이다.

26일 북한에서 급작스럽게 포성 비슷한 2번의 폭발음이 3시 3분, 3시 40분 두 차례 총 4번 들려왔으며 국방부에 의하면 총 6번의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조사 결과 연평도와 인근 해상에 이상이 없었던 점을 미뤄 볼 때 포격 훈련을 했던 것으로 추측했다. 훈련한다는 핑계로 애꿎은 섬을 날려 버린 주제에 자기들 훈련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

3. 도발의 이유

연평도에 가해진 북한군의 공격은 그 전에 비교하면 유례가 없는 수위의 무력도발인데 그 이전까지는 간첩이나 특수부대의 침투나 테러행위를 제외한 정규군간의 충돌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난 적이 없을 뿐 아니라[31] 군 기지와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 거주지까지 포격을 가하여 인명살상까지 자행한 것은 전쟁해서 죽이자고 협박하는 수위이기 때문에 왜 이렇게까지 나왔느냐에 대한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공격한 지역들이 10년 전 보안대의 위치였거나 해병대 생활관 위치이기에 의도적으로 조준 사격을 한 것 아니겠냐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KBS 기사에 의하면 민간인 거주구역 전체에 걸쳐 총 '38곳'이 골고루 피격당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격받은 몇 곳이 옛날 군사관련시설이라 북한군이 군사관련 시설만 타격하려 했으며 민간인을 사살할 의도가 없었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킬 경우 대한민국 국군에게 상대도 안 되는 북한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은 북한 군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를 반영하는 신문 기사도 있다.

현재까지도 북한군이 포격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김정은 후계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일종의 무력 시위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에는 '김정은이 해안포대초소에서 신분을 숨기고 근무하고 있다'처럼 허무맹랑한 김정은 우상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포술에 조예가 깊대나 어쨌대나는 식의 소문 말이다. 게다가 김정은이 승전(?)한 해당 포병대를 극찬하며 위무했다는 사실이 북한 내에 보도되면서 설득력이 높아졌다.

또한 북한이 본격적인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하여 우라늄탄을 만들 정도의 우라늄을 확보했다는 말이 나온 게 고작 이틀 전(11월 21일)으로,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예상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시각도 있다.

4. 피해

4.1. 대한민국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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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난 피탄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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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연평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전직 사진기자였던 군청 공무원이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4.1.1. 대한민국 국군

포격이 끝난 후 확인된 한국군 피해는 해병대원 2명 전사, 6명 중상, 10명 경상이며#, 민간인 피해는 2명 사망, 3명 경상이다. 단, 조선일보에서는 민간인 경상자를 58명이라고 했는데 사건 이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격전 이후 연평도 주민 중 58명이 (가까이에 포탄이 터져서) 귀가 잘 안 들린다든지 잠이 안 온다는 등의 각종 이유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경상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보냐의 문제인데 사실상 연평도 주민 전체가 PTSD라는 부상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게 된 셈이다.

해병대 장병 중에서는 중상자 4명을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중상자 연평부대 소속 서정우 하사[32]문광욱 일병[33]해병전사했다. 두 해병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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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전 하루 전, 서정우 하사[34]가 싸이월드에 남긴 글

포격전 하루 전, 서정우 하사가 싸이월드에 남긴 글이다. 휴가날이었으니 연평도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첫 번째 댓글과 전사한 군인이 자신의 친구가 아니기를 바라는 두 번째 댓글이 많은 사람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서정우 해병은 휴가를 가기 위해 부두에서 배 편을 기다리던 중 북한군의 포 공격이 시작되자 휴가 인솔 부사관의 복귀 명령에 따라 차량을 타고 가다가 다른 동료 해병 두 명과 내려서 인근 방공호로 몸을 피하려다 방공호를 300여미터 가량 남겨 놓고 인근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1 #2

문광욱 일병은 대피호에 있던 중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주변에 터진 포탄 파편에 가슴을 관통당해 전사했다. # 그런데 이를 두고 군 장성 출신이자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황진하 의원은 대피호에 들어가 있던 중 선임과 함께 담배 피우러 대피호 바깥으로 나갔다가 파편에 맞았기 때문에 전사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해서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2010년 11월 24일자로 전사자계급 특진 때문에 보도에는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으로 나왔다. 발견 당시 서정우 하사의 시신은 두 다리가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고 전해지며 23일 밤이 돼서야 나머지 신체를 피격 현장에서 찾아내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 서정우 하사가 휴가 때문에 착용하고 있던 정모해병대 모표가 떨어져 나무에 박혀 있던 것을 뒤에 사진 촬영 후 수습했다. 문광욱 일병은 눈을 뜬 채 숨져 있어 영안실에서 큰아버지가 눈을 감겨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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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박힌 서정우 하사의 모표

서정우 하사의 모표는 이후 다시 복원하여 보존해 놓았다. 사진의 모표는 교체된 듯.
제26기계화보병사단 UCC "엄마는 울지 않는다" | 2012.8.14. 대한민국육군

서정우 병장의 어머니가 슬픈 심정을 적은 글에 육군 제26기계화보병사단 병사들이 작사, 작곡한 '엄마는 울지 않는다' 라는 UCC가 있다.

군 부대 시설도 공격을 받아서 파괴되었다. 그러나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K-9 자주곡사포는 파괴된 것이 아니라 3대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1대는 바로 직전 사격훈련 때 발생한 불발탄이, 2대는 전자장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전자장비가 고장난 2대 중 1대는 임시로 해결 후 사격을 계속했다고 알려졌고 다른 2대도 발사를 못 했을 뿐 별 다른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4.1.2. 민간인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북한의 전쟁범죄
민간인 피해는 김치백(61), 배복철(60) 씨 사망, 경상 3명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연평부대 관사 신축공사를 하던 인부들로 처음에는 실종된 상태였으나 결국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망자 두 명 모두 시신이 손상된 상태이며, 한 구는 신체 대부분이 손상되었고 다른 한 구는 컨테이너 화재로 인해 하체가 손상된 상태로 발견됐다. 포격에 의한 화재가 원인인 듯하다.

연평도 주민들은 북한군이 민간인 거주 지역에까지 포격을 가하여 살상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대피한 주민들은 그 당시 상황에 대한 큰 충격으로 심각한 후유장애까지 호소하고 있다. PTSD마저 우려되었다.[35] # 아예 영구 이주를 하자고 주장하는 주민들도 있을 정도였다.

인천시에 따르면 연평도는 피격으로 주택 110동(전파 21동, 반파 3동, 일부파손 86동)과 주택 부속건물 6동, 창고 8동, 사무소 및 상가 4동, 공공건축물 5동이 피해를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옹진군도 4호선을 비롯해 연평지역 6개 도로 700m가 피격으로 인해 파손되면서 7억원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하였다. #

또한 연평 내연발전소, 고압변전기가 포격을 당해 파괴돼 전체 820가구 가운데 420가구의 전력 공급이 끊기고 산불도 10여 곳 이상에서 발생했다. 연평도 전체 임야의 70% 정도가 소실됐다. 4개의 이동통신기지국도 대부분 파괴되거나 정전으로 통신기능이 마비돼 휴대전화가 불통되었다. 인터넷 전화와 유선전화만 일부 통화가 가능하였다. #

다행히 곧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24일 새벽 3시30분경 해양경찰관 65명, 한국전력 등 유관기관 10명 등 모두 75명으로 구성된 연평도 현장 대응반과 구호품 500상자, 응급의료 장비 등을 실은 500t급 경비함정이 연평도에 도착했다. 현장 대응반은 어선 통제, 치안질서 유지, 긴급 구호 및 화재 진압 등에 나섰다.

가장 시급한 정전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기 위해 한국전력은 추가로 직원 20명과 발전기, 트럭, 크레인 등을 실은 840t급 수송선을 연평도로 보내 마을 곳곳의 피해 현장을 찾아다니며 포격으로 부러진 전신주와 전선을 교체하며 하루 만에 전력 복구를 마쳤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위기 상황실을 가동하고 해병대 사령부 협조를 얻어 연평도로 통신 복구팀을 출동시켰다. 통신3사가 공동으로 복구반을 꾸려 인원 60명, 발전차량 36대가 투입돼 11월 24일 복구됐다.

이후 대부분의 주민들이 섬으로 귀환했으나 이 같은 공격이 계속 발생한다면 연평도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후 보도 통제와 민간인 통제가 이뤄지고 있어서 앞으로는 군 기지만 남을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포격전 1년 5개월 후인 2012년 4월 기준으로 연평도 포격전 이후 섬 인구가 오히려 150~170명 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 주민들도 연평도 포격전의 끔찍함을 잊고 꽃게잡이 등 생업에 열심이라고. 이후 2012년 4월에 500여 명이 피난할 수 있는 1호 대피소가 세워졌고 앞으로 연평도 전 인구가 대피하여 생활할 수 있는 7개 대피소 시설이 건립될 예정이다. # 연평도는 포격전의 후유증을 벗어나려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그러나 일부 세력이 피해 보상 등을 노리고 일부러 외지에서 이주하는 등 악영향이 발생했고 연평도의 치안과 분위기는 매우 악화되었다. 사건 이전에는 원주민들만 있었기에 연평도 내의 학교에 자유로이 통학도 하고 집도 열고 잘 수 있을 정도였으나 사건 이후에는 보통의 도시와 같이 등교 때도 부모가 데리고 가야 하고 문은 꼭꼭 잠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4.2. 북한의 피해

북한 측의 피해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36]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은 "북한 측의 피해 역시 상당하리라 본다."고 언급했으며 대다수 군 관계자들과 전문가들 역시 이에 동의했다. 방위사업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포대 2개 정도는 초토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군도 한국의 대응사격을 예상했고, 더 나아가 공군 폭격까지 예상했을테니, 아마도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는 포격 거리에서 대부분의 병력과 주요 장비를 미리 이동시켰을 테고, 그 전선의 일부 병력도 이오지마 전투때처럼 굴을 파 폭격에 견딜 수 있도록 준비 했을 것이다.

2010년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에 따르면 무도에는 50여 발이 낙탄했고 이 중 15발 정도는 막사에 떨어진 탄착점이 확인되었는데 155mm 고폭탄의 살상반경으로 보아 북측에도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또 무도의 교통호가 매몰된 게 확인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무도에서 갱도로 추정되는 곳이 직진갱도에서 u자형태로 바뀌어지는게 확인되면서 북한 해안포 중 일부는 운용 인원과 함께 매몰된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1 #2 #3

그러나 미국의 전략정보전문기관인 스트랫포가 공개한 디지털 글로벌 위성사진 자료 및 분석에 따르면 개머리 진지에 가해진 30여 발이 북한군에 유의미한 피해를 끼쳤다는 근거는 없다고 한다. #1 #2 #3 북측 방사포대를 겨냥했던 대한민국 국군 자주포 포탄 중 14발이 포대 뒤쪽 논밭에 떨어졌는데 이 포탄이 박힌 위치들은 북한군 방사포 6문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한 북한 개머리 지역에 쏜 포탄 30발 중 방사포가 전개한 지점에 떨어진 것은 한 발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국회 정보위에서도 위성사진이 공개되었는데, 당시 사진을 본 의원들은 "우리 군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느냐. 이런 사진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공개할거냐"고 화를 냈으며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 일부 의원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으로 전해졌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및 김무성 원내대표 역시 “위성사진 확인결과 K-9 자주포 80발 중 탄착점이 확인된 것은 45발이고 나머지는 바다에 떨어졌다”며 “확인된 45발 중 14발을 사진으로 확인해보니 모두 주변 논과 밭에 떨어졌다”고 확인했다. #[37]#1 #2 또한 김무성 원내대표는 "(K-9 포탄이 떨어지면) 반경 50m는 쑥대밭이 된다고 했지만 논에는 조금 불탄 흔적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

국회 정보위에서 해당 위성사진을 본 다른 국회의원들의 반응은 엇갈렸는데, 무도 진지를 향해 쏜 50발 가운데 탄착 지점이 확인된 15발은 모두 부대 안에 떨어졌지만 막사 주변 25~30m 떨어진 한 발과 부대 부속 건물 두 채의 10m 부근에 각각 떨어진 두 발을 뺀 12발은 엉뚱한 곳에 떨어진 사실이 확인됐다고 한다. 이에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은 “막사와 다른 군 시설물 부근에 떨어진 세 발로 북한군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재성 민주당 의원은 “북한군 막사 주변에 떨어져 파편 정도 튀었을 수준이고 나머지 건물도 창고 수준의 부속 건물이라 실패한 반격이란 점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은 해당 두 발은 군사 시설로부터 10m 이내에, 나머지 한 발은 막사에서 25m 거리에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 또한 이범관 의원에 따르면 “해안포 진지 안에 15발이 떨어졌으며 영내에 북한군이 있었다면 사상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정원이 설명했다고 한다. 구글 어스가 포격 직후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무도 북한군 군사시설에서 화재가 나거나 건물이 파괴된 흔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

국회 정보위에서 공개된 위성사진을 근거로 당시 대응사격 결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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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사진으로 본 북한 지역의 탄착군

일각에서는 K-9 자주곡사포의 유효살상반경이 50m이므로 직접 타격이 아니라 근처 논밭에 포탄이 떨어졌어도 타격을 주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이 역시 가능성은 별로 없다. 당시 연평도에서 북한이 사용한 122mm 방사포[38]는 차량적재형이어서 기동성이 높은 까닭에 5분~10분 내로 갱도로 피신이 가능하며 이는 국군의 대응 시간이었던 13분보다 짧기 때문이다. # 즉, 유효살상반경 50m를 거론하면서 북한군의 피해를 가정하는 것은 북한군이 방사포 포격 후 13분동안 그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미 북한의 방사포들은 자리를 이탈하고 난 뒤였을 가능성이 더 크고 실제로도 연평도 포격전 당시 북한 방사포의 피해사실은 입증된 바가 없다.

한편 네티즌들이 당시 위성사진을 수집한 결과 사건이 일어난 시각 연평도에서는 검은 연기가 확인되었으나 북한의 강령반도에서는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 #2

대한민국 국군의 탄착 지점과 북한의 피해 상황이 확인될 때까지 대응의 적절성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또 UAV 등을 이용해 정찰한 결과로는 별다른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

그러나 이는 '갑작스레 민가 사격을 당한 측'과 '철저히 계획적으로 준비해 포격한' 양측의 상황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위 기사에 나오듯 대응 사격한 지역에 존재한 것은 이미 '빈 막사'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큰 효과를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안포에 대한 타격 대책은 물론 마련해야겠지만 단순 비교는 힘들다. 일단 이러한 의혹들에도 불구하고 25일 군에서는 북에 상당한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피해결과를 계속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포병 레이더도 문제로 작용했다. 북한군의 1차 사격 당시 좌표를 알아내지 못해 시간이 지난 후 2차 사격 때 좌표를 잡아냈다고 대한민국 국방부는 발표했다. 거기에다가 연평도에 배치한 대포병 레이더는 스웨덴제 신형 아서-K가 아니라 기존에 운영하던 구형 미국제 AN/TPQ-37이라서 표적 입력을 수동으로 해야 하며 ECCM(electronic counter-countermeasures)능력이나 자동 추적능력 등이 결여된 것이다. 물론 주한미군의 것은 신형이라서 앞에서 언급한 기능은 보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동으로 포병과 자료공유가 가능하다지만 실제로는 기상제원의 문제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포병부대는 X시간마다 군단 관측소의 메트로를 받아 장입하는데, 이 기상은 사격위치와 상당히 먼 지점에서 측정하고, 측정값도 X선까지만 측정하여 정확도가 낮다. 과거에 K-9 자주곡사포 실사격 훈련시에는 반드시 기상관측반의 동행을 요구했고, 인근에서 15선까지 측정한 완벽한 기상을 BTCS에 장입하면 조정없는 효력사가 초탄에 가능했다. 문제는 이 관측반이 군단에서도 매우 제한적으로 존재한다는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력만 중시하고 그에 따른 지원을 무시하는 군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 사태다. AN/TPQ-37 등 구형 대포병레이더 자체가 전개 시간이 너무 길며 기본 데이터 와 암호 입력만으로도 1시간, 진지로 가장 가까운 이동까지 한다고 치면 아무리 빨라도 3시간은 걸린다. 즉 이미 사태가 끝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민국 국회 질문에서 K-9 자주곡사포가 6문밖에 없다는 것이 지적당하고 1개 대대(18문)를 배치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은 12문을 배치하겠다는 답변을 했는데 26일 18문으로 추가 배치하겠다고 다시 정정되었다. 군의 발표에서 초기 대응한 k-9의 숫자가 계속 바뀐 것(6->4->3)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민간 대북매체 열린북한방송[39]의 보도에서 인용된 함경북도 회령에 존재하는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2010년 12월 27일 김정은대한민국 국군의 대응사격으로 인하여 사망한 북한군 5명에 대해서 영웅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해당 매체를 신뢰한다면 북한군의 인명피해는 최소 5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3월 2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북한 내부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당시 북한에서는 남한의 대응포격으로 1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여기에 따르면 북한 측 사상자는 평양에 있는 북한군 총참모부 산하 중앙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3월 15일, 북한이탈주민 인터넷신문 뉴포커스에 따르면 연평도 포격전 당시 북한군이 주변 농민들에게 수혈을 요청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북, 연평도 포격 이후 내부 피해 인정

한국군은 북한군 전사 10여 명, 부상 20여 명으로 추정했다. #

연평도 포격전 직후 평양 시민들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불안에 동요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6일 보도했다. 고위 간부 자재들이 많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 측의 대응 포격에 놀란 북한군 병사 3명이 도망갔다 잡혔다는 소문도 돈 것으로 알려졌다. #

한편 2020년 10월 27일,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연평도 포격 당시 도발을 행한 부대에서 복무했던 탈북민을[40]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북한군은 한국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발사 직후 바로 이동했기 때문에 포병 부대의 피해는 전무했고 다만 무도를 향한 2차 포격 당시 막사를 직격한 포탄이 있었으나 이미 모두 갱도로 대피한 상태라 10여 명의 북한군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고 주장했다.[41] 다만 본인이 확인한 것이 아니라 후배 군관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정보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4.3. 경제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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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 당시 YTN 제보사진

연평도 포격전 직후 코스피가 하락하긴 했으나 이것은 당일 발생한 유럽 재정위기 + 중국의 긴축우려에 의한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다만 코스피200선물은 마지막 3시 15분 동시호가에서 대폭락했으며 덩달아 금값과 채권 금리와 환율도 상승 중이었는데[42] 환율이 10원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드물어 순식간에 40원이 급등한 것은 패닉 수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다우존스 지수도 대폭 하락했다. 중동, 아프리카, 유럽, 중남미 주식시장외환시장이 열리자마자 재정위기, 중국 긴축 우려, 연평도 포격전과 함께 52주 최저치를 달성하였다.

전반적으로 국가신용에 관련된 여러 경제수치들이 모두 요동쳤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음 날인 24일 주가와 환율은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이것은 개인 투자자가 순매도한 반면 기관과 외국인이 저점에서 순매수로 돌아선 영향이 크다. #

그러나 26일 미국의 핵 항공모함 조지워싱턴의 한미 합동훈련 참가의 영향으로 인해 코스피 지수가 다시 하락하고 환율도 다시 올랐다. #

5. 후속 대응

군 당국에서는 전사한 두 장병 유가족들에게 브리핑을 하는 과정에서 사망시각, 장소, 최초 목격자 등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바람에 유가족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장례절차 논의를 거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에 의해 사망한 것인지, 아군의 포탄에 당한 것인지 밝히라,[43] 이러니까 천안함 피격 사건이 미궁인 것이다'라고 외치는 등 격한 감정을 쏟아내었다. #

유가족의 발언이 한때 논란이 되긴 했으나 일단 명확히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군 당국에 대한 원망[44]에서의 발언이기에 과대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당국에서 상세 브리핑을 하면서 장례절차에 합의했다고 한다. 27일 영결식이 치러졌다. #

또 중상자 후송에 헬리콥터가 아닌 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작전상황이라 헬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45] 천안함 피격 사건이나 제1연평해전 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북한에 대한 모든 지원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으며 민간단체들을 통한 지원도 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수해지역에 지원할 예정이였던 쌀 등 각종 물자들은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평도 포격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관영 인터넷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는 이 판국에 "금강산 관광 재개를 가로막기 위한 고의적인 책동을 통해서북남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면 부당한 구실에 매달리지 말고 관광재개를 위한 회담탁에 나와야 한다. 우리는 악화된 북남관계를 풀고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해 대화와 관계 개선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등으로 금강산 관광 재개 관련 회담이라는 개드립을 시전했다. # 그러나 얼마 안 돼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북한의 도발에 따른 대응조치의 첫 번째로 서해 한미연합훈련을 28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핵항모인 조지 워싱턴이 참여했다. 공식적으로는 계획된 훈련을 날짜만 확정했을 뿐이라지만. 또한 연합위기관리팀을 가동하고 상황분석과 연합대응 방안 마련에 나섰다. 연합위기관리팀에서는 정규전 확산가능성과 데프콘 격상 여부를 평가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조지 워싱턴호 파견에 대해 중국 측이 '한반도 평화에 방해만 될 뿐이며, 외교적 노력과 대화로 풀어야 한다'며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46] 일단 미국은 한미연합훈련 일정을 북한과 중국 측에 통보한 상태이며 이 두 나라의 반응에 따라 한반도가 한동안 잠잠해질 것인지, 아니면 정말 확전 내지는 전면전이 될지 판가름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대응조치에 대해선 사실상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양자조치에 초점을 맞추고 한미공조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이 경우도 북한이 예전부터 반복된 이런 류의 대응에 단련된지라 실효성이 적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11월 25일부터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5도의 여객선 운항이 재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태영 국방부장관의 사의가 수용되어 김관진합참의장이 새로 국방부장관에 내정되었다.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경질된 데에는 사태가 발발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한 발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이야기했다는 청와대 측근들의 불만 및 국지도발 시 작권권한과 관련해 우리군의 행동제약을 주장해서 이명박 대통령을 화나게 했다는 것이 작용했다고 한다. 일단은 확전 방지에 초점을 맞추려는지 심리전 계획은 취소시켰다. 남북관계 악화 우려, 심리전 재개 포기

포격도발에 대한 대응으로서 발생한 사건은 아니지만 11월 28일 파주의 육군 1사단 모 포병부대에서 훈련 중 잘못 발사된 155㎜ 견인포 포탄 1발이 비무장지대에 떨어지는 오발 사건이 있었다. # 비록 해당 포탄은 군사분계선 수백미터 이남에 낙탄했고 사건 발생 직후 대한민국 국군이 오발사고임을 북측에 통보하자 북한에서는 반응이 없이 종결되었으나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국군의 선제포격으로도 인식되어 군사적 충돌로 번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라 당시 전방 부대의 군인들은 사건 직후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부대의 포진지를 점령하거나 배수로로 뛰어들어가는 등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9일 연평도K-9 자주곡사포 6문과 K-136 다연장로켓을 추가로 배치했다. #

뒤늦게 확인된 바로, 대한민국 국군은 육·해·공군을 총동원한 보복공격을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 실제로 로버트 게이츠미국 국방장관이 2014년 1월 14일 출간한 회고록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의 원래 보복계획은 공중공격과 포격이 포함된 공격적인 수준의 대응이었고 이에 미국은 보복이 서해에서의 국지적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한·미 간 협의 끝에 연평부대의 포병대가 북한 해안포대에 보복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수준을 낮췄다고 한다.

미국이 한국의 보복계획을 축소시킨 배경은 미국 내부 사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07년 말부터 시작된 대침체의 여파로 미국 경제는 박살나고 있었으며 이라크 전쟁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미군의 피해가 커지면서 추가적인 대외전쟁에 개입하기엔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2011년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군과 나토군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리비아 시민군을 항공전력으로만 지원했을 뿐 전면적인 지상군 개입은 하지 않았으며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시리아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두고도 개입하지 못했다.[47]

5.1. 한미 연합훈련 시작

CVN-73 조지 워싱턴을 포함해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스테담, 피츠제럴드,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샤일로, 카우펜스, 원자력 잠수함 버지니아급인 하와이, 화물탄약선 1척, 보급선 1척 그리고 유조선 1척이 한국시간으로 2010년 11월 28일 저녁쯤 서해안에 도착하여 예정대로 한미합동훈련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28일 오전 11시쯤 북한 지역에서 약 21발의 포성이 울려 주민들이 긴급 대피하고 전군이 비상전투태세에 돌입하는 일도 있었다.

29일 오후 1시부터 연평도가 통제구역으로 설정되어 주민, 관공서 직원을 제외한 인원의 출입이 제한되어 취재진은 최소 인력만 남기고 30일 아침 철수했다.

5.2. 연평도 사격훈련 재개

2010년 12월 20일 14시 30분경 연평도 주둔 해병대는 포격전로 인해 중단되었던 사격훈련을 재개했다. 앞서 북한은 전통문을 통해 사격훈련을 재개할 경우 "자위적 타격"을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였으나 당일 실제로 대응사격은 없었다.

이후 북한은 "최고사령부 보도"를 통해 "우리 혁명 무력은 앞에서 얻어맞고 뒤에서 분풀이하는 식의 비열한 군사적 도발에 일일이 대응할 일고의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

6. 사후 보상 문제

현실적으로 피해주민들에게 가장 와닿는 부분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헌법상 사후 보상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처리된다. 북한이 포격을 가했음에도 대한민국 헌법상에서 북한은 국가가 아니고[48], 아무리 유엔(UN)에 가입했더라도 대한민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법률상으로 북한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다. 그 예로 북한 주민이 대한민국 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으며 그 친자확인소송이 승소한 사례가 있다. #

고로 법률이 우선 적용되는 보험약관 규정상의 '외국의 무력행사는 보상하지 않음'이 적용되지 않아야 한다. 이 판례가 차후 유사한 북한의 도발행위 피해 보상판결 시 중요해 보이는데, 초기에는 혼란 속에 숙식제공도 제대로 안 되기도 했다. 기사 다만 외국인이 포격의 피해를 당했다면 북한=외국 이니 '외국의 무력행사'에 해당되어 보험처리가 안 될지도? 모른다.[49]

하루 뒤인 12월 1일, 인천광역시에서 임시 거주지를 마련했고 그동안 피해주민들이 대피소로 이용한 '인스파월드'의 사용비를 지불하기로 발표되었다. #

그나마, 북한의 공격을 받은 준전시 상황임이 인정되어 최종적으로는 민방위기본법에 의해 주민들의 주택 신축 및 개축 비용과 부상한 주민의 치료비 전액이 지원되고 사망자에게는 위로금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7.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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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포격 이후 남북의 영향

8.1. 대한민국

우선 북한과 휴전 중일 뿐 전쟁 중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덕분에 말 많던 주적 개념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어졌다. 2013년 당시 북한의 전쟁 위협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역으로 보면 북한이 주적임이 명백하다는 점을 국민들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북한의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전력이자 가장 큰 위협으로 꼽는 포병으로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에 북한군 포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덕분에 포병은 즉각대기 임무 등 훈련과 경계가 매우 빡세졌다.

사건 이후 서해 5도 지역 주민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으며 그로 인해 특별전형 중 하나인 서해5도특별전형이 생겨났다.
연평도 도발 3년...첨단무기 배치 완료" | 2013.11.22. YTN

이 전투로 해병대와 서북도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이것저것 해병대가 득을 많이 봤으며 가장 많은 푸쉬를 받은 유일한 시기였다. 국방개혁 2020으로 갈려나갈 뻔한 제6해병여단연평부대가 증강된 것이 좋은 예시. 그 외에도 스파이크 NLOS 미사일, 구룡 MLR 등이 서북도서에 배치되었고, 공기부양정/고속단정으로 편성된 해병 전투주정대가 창설되었다. 원래는 해군이 운용할 예정이었던 상륙기동헬기가 해병대로 넘어간 것 역시 이 사건의 여파.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국군은 또 다른 북한의 도발행위를 대비하고자 10여년 동안 수백 억 달러의 거금을 투자해 신형 대포병레이더, 천무 다연장로켓, KGGB 등의 무기체계들을 대량으로 실전배치 해버렸다.
연평도 포격 4주기, 대규모 사격훈련 실시" | 2014.11.21. YTN

당시 20대, 즉 1980년 중후반~1990년대 초반생들의 대북관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평가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유년기에 겪었기 때문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연평도 포격전의 경우 어느 정도 철이 들고 처음으로 경험한 북한의 이미지가 바로 남한 영토에 대한 최초의 포격도발인 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점은 이들의 반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시 군복무 중이던 청년들은 휴가, 외박이 취소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등 실질적인 불이익을 본 이들이다 보니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8.1.1. 추모식 및 행사


8.2. 북한

앞서 있었던 천안함 피격 사건의 경우 북한 입장에서 최고의 결과였다. 멀쩡한 군함을 격침시켰고 초기에 적극적인 부인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해서 주변국 모두 우왕좌왕하느라고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그동안 내부선전용으로 잘 써먹었고 반대로 대한민국은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설왕설래하느라 국론 분열에 전통적인 대정부 불신도 매우 강해졌다.

반대로 연평도 포격의 경우에는 공격 자체는 일단 성공했지만 그 후폭풍은 북한에게 영 안 좋게 돌아갔다. 빼도박도 못하게 공격자가 명확한 데다 민간인 거주구역에 대한 직접 공격이라는 점에서 대북여론이 이 이상 나빠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나빠졌다. NLL 지역의 해전이나 천안함 피격 사건은 군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무력 충돌로 받아들여졌으나 이 사건은 민간인까지 피해를 입은 국지전이므로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나 위험도가 다르다. 이 포격 한 번에 천안함 주장들 중간에서 긴가민가 하던 사람들 중 북한의 소행으로 확정짓는 이들이 늘었고 북한을 옹호하던 견해는 모조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미국이 대한민국의 보복을 막아서 일단 넘어갔지만[50] 다음에도 미국이 막아 줄지는 의문이었고 결국 북한은 그 뒤 서해에서는 비슷한 무력 도발을 하지 않고 있다.

북한 내부적으론 심리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북한 사람들은 남한이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건 알면서도 '남조선 사람은 강냉이밥 대신 이밥을 먹으니까 싸울 기력도 없는 물닭들이다.'라면서 남한의 군사력에 대해 내심 깔보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남한 최신 무기의 진가를 맛보면서 북한군, 북한 주민이고 한국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우린 전쟁나면 끝이다.'라면서 패배주의가 퍼졌다고 한다. #1 #2

그런데도 북한은 이 사건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연평도 포격전은 남한의 도발"이라고 우기고 있으며, 포격전도 자신들이 압승하며 '도발자들의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줬다'고 전공 왜곡까지 하고 있다.

9. 비판 및 논란

9.1. 발생전 대비에 대한 비판

당시 적의 포탄을 탐지하는 대포병 레이더(AN/TPQ-37)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 # 이에 대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는 "연평도 인근에 배치된 포병레이더가 너무 낡았다. 지난번에도 지적받은 포병레이더를 그대로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 연평도의 대포병레이더(AN/TPQ-37)는 그 해에만 3차례나(4,5,7월) 고장으로 정비를 받았으며, 그 이전 해인 2009년 2월과 3월에도 고장으로 정비를 받는 등 매년 수차례씩 고장이 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인근 백령도에 배치된 같은 기종의 대포병레이더 역시 앞선 2009년 2월과 2010년 2월에 고장이나 정비를 받았다. #

민주당 장병완 의원은 "정부가 대북강경정책을 고수한 것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다"고 비판했다. 장 의원은 "참여정부가 예산을 편성한 2005~2008년 국방비 증가율은 연평균 8.0%인 반면 2009~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의 증가율은 연평균 5.6%에 그쳤다"면서 "MB정부는 2006~2020년 국방개혁 기본계획을 변경해 당초 계획보다 22조원 감소한 기본계획을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포격전 이후 군은 아서-K 레이더를 도입해 서북도서에 배치했다.

9.2. 전투 대응에 대한 비판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공군기를 동원해서라도 공격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북한이 1시간 가량 계속 포공격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과 "적의 무력도발에 2~3배로 응징한다는 교전규칙을 감안할 때 북한의 170여발 포격에 대해 K-9 자주포 80발로 대응한 것은 부족하다"는 지적, 그리고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매번 강조하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있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

북한측 피해 상황과 관련해 원세훈 국정원장은 미국 등의 위성사진을 통해 우리가 80발을 대응사격했는데, 개머리 진지쪽에 30발, 무도 진지쪽에 15발이 떨어졌고, 나머지 35발은 확인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군의 포격이 북한군 포대를 벗어나 인근 논바닥에 떨어진 것으로 위성사진 판독 결과 나타났다. 이에 대해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피탄흔적을 못찾은 35발은 결국 바다에 떨어진 것 아니냐. 그나마 14발 중 북이 이미 이동한 포대 근처에 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멀리 논밭에 떨어졌다. 우리 군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느냐", "709문의 장사정포가 수도권을 겨냥하고 있으나 북의 도발 후 5분만에 응사해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반복해온 국방부의 말은 거짓말", "군을 믿고 있을 국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말을 못할 지경"이라고 비판했다. 軍 자주포, 북 방사포대 커녕 논밭·바다만 때렸다 연평도 국군 반격 오폭 드러나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번 사태를 통해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안보에 무능한 정권인가를 똑똑히 보았다"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를 강조하지만 대응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무능한 정권이다"고 비판했다. #

이회창 前 한나라당 대표는 “초기 대응은 아주 낙제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천안함 폭침 사건 때에는 반격을 못 했다고 하더라도, 연평도 포격전 때에는 즉각 반격해서, 공격원점을 초토화하는 강력 대응을 했더라면 아마 초기에 상당한 사건의 진전이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비판했다. #

보수 정치평론가인 전원책 변호사도 당시 방송에서 제대로된 대응을 못했다며 이를 비판했다.


기갑 갤러리를 비롯한 밀리터리 관련 갤러리에서는 이를 보고 미온적 대응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작정하고 들어오는 공격인데 왜 참냐는 반응. 공대지 무장을 장착하고 출격한 KF-16F-15K는 공격하지 못하고 초계비행만 하다 돌아왔다.[51]

사실 이러한 경우에는 민간인을 공격했기 때문에 제네바 협약 위반이며 때문에 폭격이고 뭐고 다 동원하고, 여기에 최고 지휘관인 김정일이 시킨 게 명백했기에 주석궁을 폭격했어도 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확전되지 않게 방지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나가는 말과 내부적으로 논의하는 사항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큰 문제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확전되지 않게 지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찌되건 전쟁이 나면 어차피 개판이라 잃을 것도 없는 북한과는 달리[52] 남한은 잃을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최소 수천에서 많게는 10만에 이를 인명피해와 코리안 리스크가 문제다.

언론에는 사후 보고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확전방지나 교전수칙만을 운운한 장성들에게 크게 화를 내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2014년 1월 이슈가 되었던 게이츠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전투기와 대포를 이용한 대규모의 보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확전을 우려한 행정부의 며칠간의 기나긴 설득에 의해 무력 시위로 수위를 낮췄다고 한다.

9.3. 작전 권한과 관련한 문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군 참모들은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대구 공군기지F-15K 4대를 출격시켰다고 하는데, '한미연합사에 전투기 폭격을 건의했으나 연합사가 폭격을 만류해 결과적으로 선택을 주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사 교전규칙에 따르면 전투기 폭격 시 한미연합사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는 취지의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 김태영 국방장관도 대통령에게 연합사령관이 규정한 교전 규칙에 위배된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이는 연합권한위임(CODA)라고 하는 비밀조약에 기인한 것으로, 1994년에 평시작전권이 이양되었음에도 평시 활동 중 일부 핵심 권한은 계속 연합사령관이 갖는다는 내용이다. 비밀조약답게 당연히 일반에 전문이 공개되지도 않았으며, 동급 수준의 무기사용 따위의 잘 알려진 규정 같은 수준이 아니다(국지도발 작전계획과 혼동하지 말자). 미사일이나 전투기 등의 전략무기의 사용에 관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명분은 확전 방지의 취지에 따른 것과 한국군의 재량이 확전 사태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53] 이와 관련해 김태영 장관 경질에 이어 취임한 김관진 국방장관은 "합참의장이 전투기에 공격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자위권 차원에서 한국군 단독으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합참의장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아 밝힐 수 없는 속사정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

이러한 한국 정부의 단독 전투기 작전 명령 움직임에 대해 주한미군은 전투기 4대를 긴급 출격시켰다. 한국 전투기를 요격(!)[54]요격(Intercept)은 차단, 가로막기라는 뜻이다. 절대 격추가 아니다.] 하려는 듯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지만 이후에 한국 정부는 이륙한 어떤 한국 공군 전투기에도 공대지 미사일이나 폭탄은 전혀 탑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에 연합사에서는 포격 당시 한국군의 대응을 말리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신빙성은 낮다.

며칠 후 김태영 국방장관이 경질되었는데 평시작전권도 전투기 공습과 같은 핵심권한은 연합사에 있다는 취지로 전투기 폭격을 반대한 이유 때문일 확률이 크다. 새로 임명된 김관진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국제법상 자위권 행사는 유엔군사령부가 규정한 교전 수칙에 우선하기 때문에, 한국 마음대로 전투기 공습이 가능하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다. #

SBS 김태훈 국방전문기자는 "최고 지휘부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연평부대 포7중대는 사선을 넘나들며 싸웠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도발 원점인 개머리 진지를 공습할 것을 지시했는데 군 관계자들이 주저해서 실행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뽑은 군 참모들은 당연한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최종 판단과 결심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몫입니다. 결심을 했다면 대통령은 명령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군 통수권자는 결심도 명령도 안 했습니다.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반격을 안 한 것은 오롯이 군 통수권자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입니다."라고 비판했다. #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크게 화를 내어 새로운 작계를 요구했지만, 이후 새로 작성된 작계에서도 문제가 된 내용은 수정되지 못했다. 이후 한국군은 국지도발 시 전투기의 사용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번 사건에서 경험하고서, 연평도에 스파이크 미사일을 배치하는 등 현장의 일선 장교에게 첨단 보복수단을 지급하여 일선 지휘관의 자위권 행사이지, 청와대가 특별히 한미 합의를 깨는 등의 작전권 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방향의 대책을 마련했다.

9.4. 훈장 논란

대해적 작전인 아덴만 여명 작전때는 장교 12명이 무공훈장을 받은 데 비해 북한 군사도발에 맞선 연평도 포격전 때 훈장을 받은 장병은 전사한 서정우·문광욱 일병 2명 뿐이었다. 북한의 빗발치는 포격에도 목숨을 걸고 반격에 나섰던 해병대원들에게는 너무 박한 대접이 아니냐는 지적이 군 안팎에서 제기되었다.[55] <연평도 포격 1주년> 아덴만 12명 훈장받았는데 연평도 2명뿐

2년 후인 2012년에도 모 해병대 관계자는 “아덴만에서 소말리아 해적과 싸웠던 청해부대에는 훈장이 수십개나 수여됐는데 정작 북한과 싸워 북한군에 더 큰 타격을 준 해병대에는 부대 표창만 주어졌다”며 “표창을 받은 사유도 ‘전공’이 아니라 ‘모범적인 부대생활’로 표기됐다”고 불만을 표했다. #

유낙준 전 해병대사령관도 "전투에 참가했던 16명이 다쳤다"면서 "장관표창은 평시에도 받을 수 있는데 훈장을 줘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시 지휘관으로서 전투에 참가했던 애들에게 이건 꼭 해주고 싶다.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

2021년 10월 1일, 11년만에 연평도 포격에 대한 생존 장병에 대한 대대적인 추가 수훈이 이루어졌다. 연평도 포격당시 자주포 대응을 지휘한 공로로 김정수[56] 해병 소령이 화랑무공훈장을 수훈받았고, 연평도 포격당시 전투에 참가한 해병대원 18명에게도 훈/포장을 수여함으로써 훈장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

9.5. 명칭 변경

2010년 당시 이명박 정부는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 도발'로 규정했다. '포격전'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것은 '전투'라는 명칭에서 오는 상호 대응의 성격을 감추고 북한의 일방적인 도발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명칭이 2021년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 쓰였다.

2012년2015년에는 해병대사령부가 ‘연평도 포격 도발’ 2주년을 앞두고 명칭을 ‘연평도 전투’로 변경할 것을 국방부에 건의했다. 이명박 정부가 기존의 서해교전을 연평해전으로 격상한 것을 예로 들며 해병대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도발이란 명칭은 그 주체가 북한인 데다 우리 군의 적극적인 대응을 담아내지 못했다”면서 “연평도 포격 도발이 아닌 연평도 전투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연평도 도발→‘연평도 전투’로 바꿔달라”

이후 해병대사령부와 전사자 유족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2021년 3월 국방부는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 도발'에서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했다. 사실 변경되기 전에도 이미 해병대 내에서는 '연평도 포격전'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다. 대응 사격도 했고 피해도 더 크게 입힌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승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연평도 포격 도발→포격전' 명칭 변경

이와 관련해 2017년 SBS 김태훈 국방전문기자는 "당시 청와대, 국방부, 합참은 확전을 우려했습니다. 북한의 기습 공격에 당황했고 당했습니다. F-15가 출격했지만 도발 원점인 개머리 진지를 공습할 수 있는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하지 않았고, 해군 함정들은 연평도의 해병대를 홀로 남겨두고 연평도와 북한 사이의 바다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피한 청와대와 군 지휘부에게 2010년 11월 23일은 그저 연평도 포격 '도발'입니다. 연평부대원에게 훈장 하나 내리지 않는 이유도 이런 데 있는 듯합니다. 해병대 연평부대에게 2010년 11월 23일은 북한의 기습 도발에 용감히 맞서 싸운 명백한 '포격전'입니다."라고 비판했다. 훈장 없는 외로운 승리…7년 전 연평도 포격전

10. 기타

10.1. 관련 다큐/영상

10.1.1. 국방TV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 다큐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특집 다큐 1/5부 | 국방TV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특집 다큐 2/5부 | 국방TV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특집 다큐 3/5부 | 국방TV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특집 다큐 4/5부 | 국방TV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특집 다큐 5/5부 | 국방TV

10.1.2. 주성하TV 연평도 포격부대 탈북자 증언

[최초공개] 연평도 포격부대 탈북자 생생 증언. 포격 전말, 북한군 피해 종합 증언.

위는 동아일보 기자이며 탈북자인 주성하씨가 참여 부대에 복무하던 탈북자와 인터뷰를 나눈 영상이다. 이 탈북자는 추후 2019년경에 평양에서[59] 탈북한 이도건 씨로 알려졌다. 충성계층 출신으로 추정되며, 다른 탈북민과 비교할 때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과 어울렸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국군의 폭탄을 맞던 무도에서 복무하며 그곳 방어대장의 대응 사격을 허가한 정치지도원이 된 사람이 부하였던 이도건 씨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도 출연하여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하게 된다. 그는 북한 도발의 원인은 북방한계선에 대한 문제를 삼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군의 일상적인 훈련을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이 도발의 시작이라고 한다. #

자신이 직접 포 사격 현장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부대의 장교로 복무하는 후배들에게 전해들은 것이라고 한다. 북에서는 한국 민간인이나 군인 중 사상자가 없었다고 선전하였고, 이 때문에 저 영상을 찍을 때만 해도 저 탈북자는 진짜로 연평도에 사상자가 없다고 믿어 어두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다만 국방부가 이런 증언을 들어 좀 더 국방에 신경써야 한다는 주장에 감사하다는 댓글을 단 정도다. 뒤늦게 연평도의 피해를 알게된 그는 준비없이 유튜브에 출연한 것은 자신의 실수였고, 기회가 생기면 그 부분을 사과 드리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뜻을 자신의 유튜브 댓글을 통해 밝혔다. # 추후 개인 유튜브에서 북한군에 무고하게 희생된 호국영령, 민간인 희생자 등에 대한 명복을 빈다는 뜻을 밝히고 이런 끔찍한 도발이 북한군에서 김정은의 지략으로 선전되고 있다는 주장도 하였다. 국군이 대대적인 보복타격을 준비하자 도망쳤다는 견해도 가진 것으로 보인다. #

해당 탈북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해당 포격 도발은 단기간 준비가 아닌 상당한 기간 동안 김정은의 지시로 우리 국군이나 미군의 정찰장비에도 걸리지 않도록 야간에만 기동을 하고 장비위장을 하는 등 철저히 준비를 해 왔던 것이었으며 우리 국군은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에 북한의 개머리진지에서 첫 번째 북한군의 포격도발이 시작된 걸로 알고있지만 그게 첫 번째 포사격이 아니고 그 이전에 연평도 북서쪽 1km 정도에 훈련에 대한 트집용 위협 포격을 가한 게 첫번째 포사격이라 한다. 우리 국군이 알고있는 첫번째 포격은 사실 두 번째 포격인 셈이다.

그리고 북한군의 포사격으로 연평도가 피해를 입고 우리 국군이 13분 뒤 K-9자주포 3문을 북한 무도로 대응포격을 했는데 여기 무도에 위치한 북한군 부대는 인적 피해가 상당히 발생하였고 거기 부대의 방어대장[60]이 우리 국군 쪽으로 대응 포격을 하였다 한다. 북한도 무도가 전투준비태세가 아니여서 이것은 예상을 못했다고 밝혔다. 여기는 포격 계획도 몰랐고, 지시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 상황'에 방어대장의 지시에 자체적으로 돌입했으므로 북한군은 갱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무도에서 부상자가 10여 명 나온 것으로 보며 무도에서 병실이 무너지는 피해는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국군이 북한 개머리진지에도 대응포격을 했지만 그 때는 이미 개머리진지에 있던 북한군들은 포격 이후 곧장 다른 곳으로 피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떠한 인적 피해가 없었다 하며 이후 북한군이 다른 방면에서 연평도로 세 번째 포격을 또 가했다는 것이다.

10.2. 안상수 보온병 폭탄 논란

YTN 돌발영상 - 보온병이 포탄? | uniucc

연평도 포격전으로 연평도를 방문한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착각한 것이 돌발영상에 딱 걸려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탄피와 비슷하게 생겨서 오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로켓탄과 혼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군 복무자라면 잘 알겠지만, 탄피는 목표지점에 있을 리가 없는 물건이고 장약의 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122mm라도 탄피의 크기는 탄두의 수십 배이다. 그리고 포탄의 탄두는 목표지점과 충돌하며 폭발하고 산산조각 나서 살상력을 높이게 설계되므로 그 자리에 보온병처럼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정말 포탄이였어도 불발탄은 터질 위험이 있으니 건드리지 말고 즉시 대피해야하는데 그걸 손에 든 순간 "나는 더 이상 살기 싫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 길동무 삼아 저승 가련다."라고 공표하는 꼴이다. 그야말로 군알못 면제자가 만들어낸 희대의 개소리. 동아일보에 의해 조작설이 제기되었지만 곧바로 YTN이 법적 대응을 선언하면서 열심히 치고받은 끝에 동아일보가 8개월 만에 정정보도를 내면서 돌발영상은 사실이고 오히려 조작설이 허구라고 인정해야 했다.

사실인지를 떠나서 안전하게 해제한 것도 아닌 불발탄을 아무 생각 없이 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는 성인이라면 알 만한 작자들이[61] 피폭 현장에서 저러고 노는 것이 보는 이들의 어이를 상실케 했다. 게다가 옆에서 포탄이라고 맞장구쳤던 황진하 의원은 하나회 끄나풀이자 대한민국 육군 포병 출신 예비역 중장이라 더 조롱거리가 되었다. 다만 황진하 의원의 인지도가 낮아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데다 석연찮은 병역미필 사유까지 있던 안상수 대표가 더 까였다.[62]

한편 한 달 후 연말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이 국회를 견학 차 방문했는데, 어떤 초딩이 "보온병 아저씨다!"라면서 안상수를 따라다니는 통에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

안상수 대표의 발언이 중국 언론 환구시보에 보도되었다. #.

최훈패러디했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서도 포탄으로 등장해 전투 장면에서 "보온병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풍경"이라는 식의 멘트를 날린다.

이 드립을 친 안상수 말고도 동명이인 안상수가 있어 애먼 동명이인 안상수가 이 일로 까이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름뿐만 아니라 생년, 출신 정당, 출신 대학, 본관, 군면제 사유까지 닮은 점이 굉장히 많아 그런 듯. 이후 네티즌들은 안상수를 언급할 때 '인천시장 안상수'와 '보온병 안상수'로 구분해서 불렀다. 보온병 발언을 한 안상수가 이 드립을 친 곳인 연평도가 속한 인천광역시는 동명이인 안상수가 송영길 직전에 시장을 지냈던 곳이고 당시에는 아니었으나 동명이인 안상수의 지역구가 연평도가 속한 옹진군을 포함하고 있는 곳이었다.

10.3. 송영길 폭탄주 발언 논란

여담으로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송영길이 이날 폭발을 면한 소주 1병을 들고서 "이거 완전 폭탄주네"라는 망언으로 구설수에 올랐지만 상술한 안상수 보온병 발언으로 인해 묻혔다. 어떻게 생각해도 포탄착각보다 민간인구역 참사현장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한다는게 더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언론에선 유독 안상수 발언만 집중보도를 했기때문에 송영길이 이런 망언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상당수다. #

다만 2021년에 송영길이 더불어민주당의 대표가 되고 그 이듬해에는 서울시장 후보로까지 출마하면서 그의 이 망언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개그콘서트의 前 코너 슈퍼스타 KBS에서는 보온병에서 소주병을 꺼내며 안상수의 보온병 폭탄 발언과 송영길의 폭탄주 발언을 같이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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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대한민국 국군/사건 사고 }}} }}} }}}




[1] 대한민국 국군의 보복 포격 지점 기준. 이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제도적인 행정구역(이북5도위원회가 관리)은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일대다.[2] 국방부장관[3] 당시 중장,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4] 당시 대령, 해병대 연평부대장#[5] 당시 대위, 해병대 연평부대 포7중대장#[6] 국방위원장[7]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8] 당시 대장, 정찰총국장[9] 당시 대장, 조선인민군 육군 제4군단장#[10] 당시 대좌, 조선인민군 육군 제4군단 포병여단장#[11] 대한민국 해병대 연평부대 전력[12] 대한민국 해병대 병장 서정우, 이병 문광욱(사후 각각 하사, 일병 추서)[13] 출처 | 대북매체 열린북한방송함경북도 회령 내부의 현지 소식통에게서 들었다는 내용.[14] 출처 | 북한군 4군단 대대장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는, 중국에서의 취재에 응한 황해남도 출신 현지인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15] 출처 | 포격전에 직접 참전했던 후배 군관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는 평양 출신 북한이탈주민 이도건 씨의 증언.(동아일보 주성하 기자)[16] 진먼 포격전과도 유사한 양상을 띈다. NLL 무력화를 노린 북한과 진먼 섬의 장악을 노린 중국이 기습하였으나 결국 군사적 목표가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7]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개편으로 과거 기자회견속기록이 모두 지워져서 아카이브로 대체한다. 다음은 관련 내용.

问:朝鲜和韩国都表示是对方先开火,中方对此有何看法?
질문: 남북이 서로가 선제 포격했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중국 측의 견해는?
答:相信大家都注意到当事方对事件起因有不同说法。中方呼吁朝韩双方保持冷静克制,尽快进行对话接触,避免再次发生类似事件。
답변: 사건의 원인에 대해 당사자들이 서로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두 알아챘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은 남북 쌍방 간에 침착함과 자제를 유지하고 가능한 한 빨리 대화와 접촉을 진행해서 유사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을 촉구한다.
[18] 단, 한겨레의 기사 자체에는 사실관계에서 몇 가지 오류가 보인다. '정보참모부'가 발행했다고 한 수시첩보보고를 인용하였으나 형식을 보았을 때 국직단위인 정본에서 발행한 형식이다. 정보참모부는 육해공군 본부에 각각 설치된 '정보작전참모부'를 오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적해병신문 역시 수시첩보보고를 발행한 주체를 정보참모부가 아니라 '정보본부'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묵살했다'고 서술한 것도 당시 정권을 비판하고자 호도하는 의도가 의심된다. 아군의 정기 해상훈련 시기 북한은 통상적으로 위협적 병력배치와 성명발표 등을 해 왔고 북한군의 진도개에 해당하는 특별경계근무 조치 상향도 빈번하다. 그러나 수시/정기 첩보보고의 발행 지침에 따르면 적의 동태에 대해 통상인지 비상인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러한 판단은 결정권자의 몫이고 정보본부에서 멋대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매번 북한군이 비슷한 동태를 보일 때마다 유사한 첩보보고가 누차 발행되며 정부에서는 해당 보고를 받고 북한의 통상적인 대응으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맥락을 배제한 채 마치 '정보본부가 특수상황이라고 보고했는데 정부가 무시했다'고 보고하는 것은 군 지도부와 정부를 폄훼하고자 호도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19] 연평도에는 대피소가 상당히 많다.[20] 원래는 포병의 1개 포대당 화포 보유량이 6대이므로 4대가 남아야 하지만 1대는 이미 훈련 때 불발탄 문제로 고장난 상태였다.[21] 대포병 레이더가 당시 가동이 중단되었으므로 우선순위로 정해진 사격목표인 무도에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22] 자주포 절반만 작동... 포탄장전도 4발씩만... "안 쏜 게 아니라 못 쐈다", 한국일보, 2010.11.26[23]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북한군 포병 전력의 무서운 점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물론 방사포의 정확도는 현저하게 낮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24] 그래서 민간 건물 등 민간시설 피해가 많았다. 주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대피소에 빨리 대피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다행히 많지 않았지만.[25] 실제 전시라고 생각을 해 보자. 군사시설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 본인들이 바로 반격받을 게 뻔한데 왜 굳이 민간인에게 타격을 하겠는가? 언제든 반격받겠지만 1차적으로 해당 지역의 군사를 빠르게 무력화 시켜야 했는데, 민간지역에만 포탄이 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사격이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6] 사실 말이 쉽지, 장거리도 아니고 그런 지근거리에서 포를 발사했는데 이를 사전에 포착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피격 원인 파악을 서두르다 오판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대응하면 얄짤없이 2차 한국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27] 자주포 내부에 적재된 탄이 없어서 포병들이 탄약고에서 일일이 포탄과 장약을 꺼내와 포까지 옮겨야 했다.[28] 의용소방대뿐만이 아니라 자진해서 소방작업을 지원한 시민들로도 부족해 인천에서 배타고 온 소방 요원들까지 가세한 후에야 제대로 진압을 끝냈다.[29] 해병대교육훈련단, 육군의 신교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대 배치 전 대기 및 사전 교육을 맡는 일종의 대기대이다. 보충중대의 확장판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30] 북한측은 MIG-23을 띄워서 대응했는데 F-15K에서 레이더조사를 키자 바로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31] 그 전까지는 해상이나 GOP 부근에서 간간히 교전이 일어난 적이 있어도 민간인이 거주하는 대한민국 영토에 포격을 한 적이 없었다.[32] 사후 추서 계급[33] 사후 추서 계급[34] 사후 추서 계급[35] 실제로 연평도 포격전이 1년이 넘도록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면 깜짝 놀라는 주민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36] 북한은 이런 피해를 숨기려 하고 대한민국 측에서도 피해 규모를 산정하는 과정에서 군사기밀이 유출될 수 있으므로 국민들에게는 두루뭉술하게 발표하기 때문이다. 시일이 지나고 북한이탈주민들이 들어와서 증언해야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대청해전에서 사망한 이의 이름이 그로부터 1년 뒤인 2011년 11월 로동신문에서의 발표를 통해 바뀐 학교명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걸 공식매체에서 확인한 적도 있다.[37] 14발과 6발은 빈 논두렁에 착탄했고 10여 발은 북한군 방사포 진지 인근에 착탄한게 확인되었다.[38]소련BM-21를 개조한 것이며 연평도 포격에 사용된 것은 M1992에 해당한다.[39] 국회의원 하태경이 정치 입문 전 대표로 있던 곳이다. 현재는 활동 중단.[40] 정확히는 연평도 포격전 당시엔 복무를 안했고 후배 군관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라고 한다.[41] 이 탈북민은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도 전했다. 댓글 중 달린 답글 참조[42] IMF 구제금융(1997년 외환 위기) 시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금은 전쟁 등으로 경제가 혼란에 빠지면 그나마 표준 화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혼란해질 것 같으면 오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 달러가 전세계에 통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 연방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금 보유량 덕분이었다.[43] 당시 연평도 남쪽에서 포 사격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유탄 의심이 제기되던 상황이었다.[44] 사태 초반이었기에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함부로 밝히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45]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5도북한군대공 미사일 사거리 내에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서해 5도로 어떤 형식이든 항공기가 들어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편이다. 평상시에는 육지의 병원으로 즉각 후송해야 할 환자가 있을 경우 헬기가 뜨긴 한다.[46] 중국은 근대에 들어 서해에서 진짜 쓴맛을 많이 보았다. 90여 회의 크고 작은 사건이 서해에서 있었다고 하니 당연히 중국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것이다. 게다가 사건이 있었던 때는 아시안 게임이 한창 진행될 때. 만약 서해에 항공모함이 오면 일시적으로 대만 - 미국 - 대한민국이라는 라인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미국 항모전단 서해 파견은 자동으로 '중국 공격 훈련'도 겸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반기고 싶을까?[47] 그 이전인 1976년에 터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에도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의 도끼 도발에 죽은 초대형 사건임에도 미국은 무력시위로 위협만 했을 뿐 베트남 전쟁석유 파동의 여파로 북한을 칠 엄두는 못냈다. 오히려 한국군이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을 하고 싶어 안달났을 정도.[48] 헌법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다고 쓰여 있다.[49] 하지만 북한을 상대로 개별적인 소송을 걸어서 받아내는 방법이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오토 웜비어가 있는데 2018년 4월에 웜비어 부부는 미국 워싱턴 D.C. 연방법원에 11억 달러(약 1조 309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내었고, 2018년 12월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은 북한 정부에 웜비어에 대한 고문과 살해가 이뤄진 책임을 물어 5억 113만 달러(약 5,643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50] 당시 이명박 정부의 반응과 보복을 위해 준비한 전력을 보면 지상포격은 물론 공군의 공중포격까지 준비되어 있었고 최소한 황해도 해안은 초토화시킬 수준이었다.[51] 다만, 여기에 대해선 높으신 분들의 사정이 있는 듯.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에.[52] 단, 시각에 따라서는 북한이야말로 전쟁 나면 곤란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의 모든 활동은 "김일성 일가의 안위"가 궁극적 목표인데 이 상황에서 전면전으로 확전될 경우 대한민국은 비록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을 것이나 그래도 국체 유지도 못할 정도에 이를 가능성은 낮은 반면, 경제력과 군사력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인 김씨 왕조는 확실하게 몰락한다. 중국의 개입이 있다고 해도 확전까지 간 상황에서 그 주범인 김씨 왕조의 유지는 미지수이다.[53] 민감한 사안인 만큼 당연히 해석의 차이도 존재하는데, 미국의 법률해석 견해는, CODA에 명기된 사항에 한해서는 한국이 군사작전권의 소유권 자체를 양도 또는 이전했다고 보는 취지이며, 한국의 법률해석 견해는, 한국이 군사작전권의 소유권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며, 다만 미국에 위임을 했다는 취지이다.[54] 여기서 말하는[55] 아덴만 여명 작전은 훈장 수훈 12명을 포함해 무공포장 13명, 대통령 표창 10명, 국무총리 표창 11명, 국방부장관 표창 28명, 합참의장 표창 46명, 해군참모총장 표창 10명 등 모두 130명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반면 연평도 포격전은 훈장 수훈 2명을 포함해 51명이 각종 표창을 받았지만 대통령 표창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후 당시 화재 진압에 나섰던 이충민 병장의 공적이 뒤늦게 인정돼 2011년 국군의 날에 맞춰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56] 당시 대위, 연평부대 포7중대장으로서 자주포 대응 사격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57] 천안함 음모론 신봉자다.[58] 이런 식으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외국 언론에 일방적으로 투고한 후 '외신도 주의깊게 지켜본다' 혹은 '외신에서 비판한다'고 국내 여론을 호도하는 전략은 한국의 민주화세력에서 자주 사용하는 선전전략 중 하나다. 2020년대 들어 화두가 된 검찰수사권 축소 관련 의제에서도 이런 식으로 여론을 호도했다.[59] 70% 이상의 탈북민 대부분이 물리적으로 탈북이 그나마 가능한 함경도 권역에서도 북부 출신인데 출신 지역부터 독특한 케이스다. 사투리도 어감이 경상도 느낌이 섞인 함경도와 많이 다르다.[60] '방어대' 라는 부대의 장이라 하는데 해당 탈북자 이야기로는 우리 군의 중대와 대대 사이의 규모라 한다.[61] 실제로 군대 내의 폭발물 처리반은 작업 시 다들 "전부 엎드려!"라고 말하며 땅과 물아일체가 된다. 물론 그걸 이해 못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거니와 오히려 불쌍해하고 실제로도 목숨을 담보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불쌍하다.[62] 안형환 대변인도 학사장교 출신이긴 한데 이 쪽은 공군 + 의무복무기간만 채우고 나온 단기복무자여서 그리 까일거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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