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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0:34:35

이회창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24f 0%, #003478 20%, #003478 80%, #00224f); color:#C3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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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이범석 장면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허정 장면 최두선 정일권 백두진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김종필 최규하 신현확 남덕우 유창순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김상협 진의종 노신영 김정렬 이현재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강영훈 노재봉 정원식 현승종 황인성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이회창 이영덕 이홍구 이수성 고건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김석수 고건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이해찬 한명숙 한덕수 한승수 정운찬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김황식 정홍원 이완구 황교안 이낙연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정세균 김부겸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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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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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유선진당 흰색 아이콘.svg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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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총재
이회창
2대 대표
이회창
3대 대표
변웅전
4대 대표
심대평
비대위
이인제
초대 대표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 선진통일당 대표
국민중심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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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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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2 한나라당 이명박 당선
3 민주노동당 권영길
4 민주당 이인제
5 국민중심당 심대평 사퇴1
6 창조한국당 문국현
7 참주인연합 정근모
8 경제공화당 허경영
9 새시대참사람연합 전관
10 한국사회당 금민
11 이수성 사퇴2
12 무소속 이회창
1: 무소속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
2: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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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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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회창
2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당선
3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
4 민주노동당 권영길
5 사회당 김영규
6 국태민안호국당 김길수
7 무소속 장세동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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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00A8,#0095DA>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부영 낙선
2 한나라당 이상희
3 한나라당 이회창 당선
4 한나라당 최병렬 낙선
16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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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아이콘.svg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파일:한나라당 흰색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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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bgcolor=#0000A8><tablecolor=#373A3C,#DDD><-10><:> 총재와 대표위원 병행 ||
초대 총재
조순
초대 대표위원
이한동
총재
권한대행
이기택
2대
이회창
권한대행
강창성
3대
이회창
권한대행
박관용
{{{#!wiki style="margin: -16px -11px" 대표최고위원
2대
서청원
권한대행
박희태
3대
최병렬
4대
박근혜
권한대행
김덕룡
5대
박근혜
권한대행
김영선
6대
강재섭
7대
박희태
8대
정몽준
9대
안상수
비대위
정의화
10대
홍준표
권한대행
나경원
권한대행
황우여
비대위
박근혜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width: 10%; text-align: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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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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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회창
2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당선
3 국민신당 이인제
4 건설국민승리21 권영길
5 공화당 허경영
6 바른나라정치연합 김한식
7 통일한국당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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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3990,#0070BB>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신한국당 김덕룡
2 신한국당 박찬종 사퇴
3 신한국당 이한동
4 신한국당 최병렬
5 신한국당 이회창 결선
당선
6 신한국당 이수성
7 신한국당 이인제 결선
}}}}}}}}}}}}

파일:신한국당 로고.svg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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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총재
<rowcolor=#003990> 초대
김영삼
제2대
이회창
대표위원
<rowcolor=#003990> 초대
김윤환
제2대
이홍구
제3대
이회창
<rowcolor=#003990> 권한대행
이만섭
제4대
이회창
제5대
이한동
}}}}}}}}}

{{{#!wiki style="margin: -8px"<tablebordercolor=#ededed><tablealign=center><tablebgcolor=#ededed>
파일:감사원 로고.svg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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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word-break: keep-all"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심계원장 (1948~1963)
초대
명제세
제2대
함태영
제3대
노진설
제4대
최하영
제5대
김세완
제6대
이원엽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감찰위원장 (1961~1963)
초대
민영수
제2대
최재명
제3대
채명신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감사원장 (1963~현재)
초대
이원엽
제2대
한신
제3·4대
이주일
제5·6대
이석제
제7대
신두영
제8·9대
이한기
제10대
정희택
제11·12대
황영시
제13·14대
김영준
제15대
이회창
제16대
이시윤
제17대
한승헌
제18대
이종남
제19·20대
전윤철
제21대
김황식
제22대
양건
제23대
황찬현
제24대
최재형
25대
최재해
}}}}}}}}}}}}

파일:중앙선거관리위원회 휘장.svg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0%, #fff 20%, #fff 80%, #fff); color:#000000,#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중앙선거심사위원회 위원장
초대
김용무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초대
노진설
제2대
조용순
제3대
김두일
제4대
고재호
제5대
이갑성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초대
사광욱
제2-4대
주재황
제5대
김중서
제6대
강우영
제7대
윤일영
제8대
이회창
제9대
윤관
제10대
김석수
제11대
최종영
제12대
이용훈
제13대
유지담
제14대
손지열
제15대
고현철
제16대
양승태
제17대
김능환
제18대
이인복
제19대
김용덕
제20대
권순일
제21대
노정희
제22대
노태악
}}}}}}}}}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5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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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신한국당
18석
이회창 이홍구 이만섭 김명윤
권영자 김수한 김덕 신영균
박세환 정재철 전석홍 조웅규
오양순 김철 황우여 김영선
윤원중 강용식 김찬진 이찬진
김정숙 조익현 안재홍 황승민
박창달
새정치국민회의
13석
정희경 박상규 이성재 길승흠
박정수 김한길 이동원 신낙균
권노갑 천용택 한영애 방용석
김종배 송현섭 이훈평 김태랑
자유민주연합
9석
정상구 한영수 이건개 김허남
김광수 지대섭 정상천 이동복
한호선 강종희 송업교 주양자
박상복
통합민주당
6석
이중재 이미경 이수인 김홍신
조중연 하경근 이형배
14대
16대
}}}
}}}}}}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한나라당
21석
이회창 홍사덕 이연숙 강창성
신영균 서정화 이상희 박세환
전재희 조웅규 윤여준 이한구
김정숙 김락기 박창달 김홍신
이원창 황승민 임진출 이원형
손희정 김영선 유한열 장광근
송병대 김영구 박경섭 이만재
새천년민주당
19석
서영훈 <colbgcolor=#00AA7B> 최영희 <colbgcolor=#00AA7B> 장태완 <colbgcolor=#00AA7B> 이만섭
한명숙 김운용 박인상 이미경
박상희 이재정 허운나 최재승
김한길 김방림 김기재 김영진
윤철상 조재환 유삼남 김화중
최명헌 박양수 조배숙 오영식
구종태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박금자 이종성
안희옥
자유민주연합
5석
김종필 조희욱 김종호 조부영
안대륜 변웅전
민주국민당
1석
강숙자
15대
17대
}}}
비례 ·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 · 울산
경기 · 강원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경북 · 경남 · 제주
}}}}}}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갑)
제15대
홍준표[1]
제15대
이회창
제16-17대
맹형규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홍성군·예산군)
제17대
홍문표
제18대
이회창
제19-21대
홍문표
}}} ||
대한민국 제26대 국무총리
이회창
李會昌 | Lee Hoi-chang
파일:이회창 공식 사진.jpg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ca993b> 출생 1935년 6월 2일 ([age(1935-06-02)]세)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현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읍)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 신동아아파트
등록기준지 충청남도 예산군 군내면 예산리[2]
(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56-1)
본관 전주 이씨[3]
경사(徑史)
재임기간 대법관[4]
(유태흥 대법원장 제청 / 전두환 대통령 임명)
(이일규 대법원장 제청 / 노태우 대통령 임명)
1981년 4월 18일 ~ 1986년 4월 17일
1988년 7월 27일 ~ 1989년 10월 24일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88년 7월 27일 ~ 1989년 10월 24일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2월 25일 ~ 1993년 12월 16일
제26대 국무총리
1993년 12월 17일 ~ 1994년 4월 21일
서명
파일:이회창 서명.svg
링크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ca993b> 부모 아버지 이홍규, 어머니 김사순[5]
형제자매 형 이회정[6]
누나 이회영[7]
남동생 이회성, 이회경
배우자 한인옥
자녀 장남 이정연(1962년생), 장녀 이연희(1964년생), 차남 이수연(1966년생)
학력 광주서석국민학교[8]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8기)
병역 대한민국 공군 대위 만기전역 (군법무관)
종교 천주교 (세례명: 올라프)[9]
신체 163cm, 65kg, A형[10]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11]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12], 16, 18
약력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조사국장 (전두환 정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전두환 정부)
대법원 판사 (전두환 정부)
대법관 (노태우 정부)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노태우 정부)
제15대 감사원장 (문민정부)
제26대 국무총리 (문민정부)
제15대 국회의원 (전국구 1번 / 신한국당)[13]
제3대 신한국당 대표위원
제4대 신한국당 대표위원
제2대 신한국당 총재[14]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한나라당 명예총재
제2대 한나라당 총재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갑 /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제3대 한나라당 총재[15]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1번 / 한나라당)[16]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한나라당 상임고문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초대 자유선진당 총재
제18대 국회의원 (충남 홍성군·예산군 / 자유선진당)
제2대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새누리당 상임고문
바른정당 상임고문
바른미래당 상임고문
별명 회창옹, 대쪽 판사, 보수의 품격
약칭 }}}}}}}}}
1. 개요2. 약력3. 일생4. 평가
4.1. 남북통일에 대한 발언과 통일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발언4.2. 1997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추석 전 사면 추진
5. 논란6. 여담
6.1. 이인제와의 관계
7. 이회창계8. 저서9. 선거 이력10. 소속 정당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26대 국무총리.

법관으로 재직하며 명판결을 많이 남겼고, '대쪽 판사'라는 별명으로 법조계에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감사원의 위상을 확립한 인물이다.

국무총리, 대법관, 국회의원, 감사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총재 등을 역임하여,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더불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대통령 선거에도 3차례나 출마해 그중 2번은 대세론을 형성하며 지지율이 50%가 넘어가면서 "여의도 대통령"이라고 불리기까지 하였으나, 대선이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대선에서 접전패했던 불운의 정치인이기도 하다.[17]

2. 약력

3. 일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회창/일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평가

파일:Lee_Hoi-chang.jpg

이회창은 현재 민주당 및 범 진보계열에서도 당시기준으로 인정하는 개혁우파에 가까웠다.[24]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 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는 만만치 않았다.[25] 당내 정치인이나 당원에 대한 장악력도 대단해서 첫 대선에 지고도 몇 달 뒤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되었으며, 16대 총선 공천에서 이기택, 김윤환 등 거물급들 여럿을 공천탈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26]

또한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문민정부 초창기 개혁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통령 선거에 나설 만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리더십과 보수우파 정치계의 영향력 또한 당시 보수우파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제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이회창의 강력한 리더십도 대선에서 두차례 연이어 패배라는 유례없는 엄청난 치명타를 맞고 나서야 무너졌을 정도였다. 이후 정동영, 안철수 등 다른 거물급 대권주자들은 한 차례의 대선 패배 이후 지지도 추락을 겪으며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면모들을 보이고 있음[27]을 고려하면 이회창이 논란을 떠나 당시 보수 정치계에서 얼마나 거물급 정치인인지 실감이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개인 청렴도 또한 대한민국 공직자, 법조인,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남달랐다. 더 놀라운 것은 본인 청렴도 뿐만이 아니라 친인척들의 비리 의혹조차도 다른 법조인, 정치인들과 달리 단 일만큼도 의혹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매우 깨끗했다는 것이다.[28] 친인척 논란에서 나온 의혹제기라곤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 정도였고, 이마저도 위반사항이 없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괜히 당시 보수우파 지지자들이 이회창을 2번 씩이나 대권주자로 밀어준 게 아닌 셈이다.

그러나 대쪽이라던 그는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일관성이 부족했고 자기주장이 매우 강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3김 정치의 청산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김영삼을 강하게 비판하고 출당시켰으며 12월 17일, 대선 전날에는 김영삼 정권과 다른 미래를 향한 새 정권을 탄생시키겠습니다.라며 철저하게 김영삼대통령을 배척했을 정도였다.[29] 그러나 불과 대선 3달전인 9월 30일에는 대구에서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대통령의 손을 맞잡고 위세를 과시하는 행보를 보였고,[30] 2001년에 발간된 김영삼대통령 회고록에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97년 9월8일 청와대로 신한국당 주요 당직자 초청 만찬을 하면서 이총재 지지 발언을 했는데 만찬이 끝난 뒤 이회창대표가 나를 급히 따라나오면서 연방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고 되풀이하던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서술했다.[31] 이런 행보로 비춰볼때 당시 신한국당과 이회창의 행보가 당리당략에 따른 꼬리자르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충청권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종필을 배척하였고, 경선을 불복하고 나선 이인제와 매우 심한 갈등을 빚었다. 당시 대선토론회에서도 김대중과 이회창보다 이인제와 이회창이 훨씬 날선 갈등을 빚었는데[32] 이런 그의 실책으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고 만다.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와 갈등을 빚어 독자 출마를 막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 정치 청산 주장으로[33] JP자민련을 자극했고 이는 DJP연합이 이루어지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심지어 당시 이인제후보 캠프 내부에서는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차라리 DJ가 낫다, 잘됐다는 반응까지 나올정도로 이회창과 매우 격한 갈등을 빚었다.[34][35]

결국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게 된다.[36]

이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민주당계 진영이 후단협 등의 잡음을 뒤로 하고 일단 선거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우파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김영삼과 박근혜는 이회창을 명목상으로는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 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김종필을 비롯해서 이회창으로부터 배척 당했던 김윤환, 이한동[37]과 같은 우파 정치인들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거나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 같은 꼬마민주당 출신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다만 15대, 16대 2회의 대선에서 이회창의 낙선이 보수 분열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단 15대 대선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인제가 이회창의 표만 잠식했다(이회창의 표를 주로 잠식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으며 김대중의 표 역시 잠식했을 가능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당장 위 문서에서도 김대중의 당선 이후 이인제 캠프 내에서 '차라리 잘됐다, 이회창보다 김대중이 낫다'는 반응이 나왔음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이인제 캠프(로 대표되는 이인제 지지층)의 정서에서 이회창에 대한 반감이 그만큼 강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러니까 이인제가 선거에서 빠진다면 김대중이 그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높았다는 근거도 되는 것이다. 결국 해당 선거에서 중도후보의 포지션을 차지했던 이인제가 어느 쪽의 표를 더 많이 잠식했을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해당 문서에서 계속 지적되었듯, 해당 선거에서 이회창-이인제의 단일화, 즉 보수 후보 단일화가 가능했는가도 의문이다. 예를 들어 이회창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예시로 제시된 3김 청산 주장을 보더라도 당시까지 3김씨중 둘이 여전히 현역 정치인이었음을 너무 경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중은 대선에서의 직접적인 경쟁자이니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김종필은 여전히 잠재력이 남아있어 여차하면 보수 대권주자로써 이회창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고,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이회창이 정치적 본진으로 삼으려 했던 충남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맹주의 위상 및 보수 지지층 전반에 상당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인물을 무슨 뒷방 늙은이 취급하며 '왜 그를 포용하지 못했느냐'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그를 정말 끌어들이려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정치적 지분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이회창의 정치적 행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종의 족쇄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따라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이회창으로써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청구동계와 자민련을 끌어안고 정치적 지분을 내주기보다는 (또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선명성을 잃기보다는) 자력으로 그 표를 뺏어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 즉, 위의 주장은 15대 대선 당시 김종필&자민련이나 이인제와 그의 지지자들 역시 (이회창과는 구별되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정파였음을 너무 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지나친 결과론' 이라고 비판받는 주장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해당 주장이 논점으로 삼는 조건만 변수로 보고, 나머지 모든 조건은 상수로 보는 것', 즉 해당 조건을 바꾸더라도 다른 조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 섣불리 단정하고 그 조건을 변경할 경우 (실제 역사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너무 안이하게 예측하려 든다는 것인데, 위의 주장 역시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주장 중 15대 대선에 대한 부분은 그나마 흥미로운 점이나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16대 대선에 대한 부분은 그냥 억지라고 보아야 한다. 이회창에 대한 김영삼, 박근혜 등 한나라당 내 주류의 지지는 '명목상으로는 지지한 것'이라는 식으로 폄하하여 보수진영 내부의 분열상을 침소봉대하면서 반대로 새천년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모여 사실상의 후보교체를 요구하며 자당 후보의 사퇴까지 요구한 초유의 상황이었던 후단협 사태에 대해서는 '그런 잡음을 뒤로하고 노무현을 중심으로 단결했다'고 억지로 일축하려 든다는 것은 그 주장을 하고 있는 이에게 양측의 상황을 대등하고 상식적으로 비교할 생각이 전혀 없다, 즉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은 보수 분열때문에 낙선한 것이다' 라는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그에 맞는 근거는 없으면 지어내고, 어긋나는 근거는 있더라도 무시하겠다고 작정한 수준으로밖에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회창에 불복해서 노무현을 지지한 이기택이 있는것처럼, 후단협에서도 김원길, 박상규, 원유철등은 노무현으로의 단일화에 불복하여 이회창을 지지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즉 위의 주장과는 정 반대로 16대 대선 당시 진영 내의 사분오열은 보수우파 진영보다 민주당계 진영에서 훨씬 심했다. 게다가 실제로 출마한 후보의 면면을 보면 그래서 독자출마한 이한동의 득표율은 고작 0.3%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수준이었었던데 비해 노무현측은 3.89%를 득표한 권영길과 서로 지지기반이 겹치는 관계에 있다고 여겨졌다. 아무리 봐도 지지층 내 분열과 이로 인한 표 분산은 노무현쪽이 훨씬 더 심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위의 주장은 이를 정반대로 뒤집어놓기 위해 이회창쪽의 근거는 과장하고, 노무현쪽 근거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주장은 상당부분 이회창의 패배를 납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 패배의 원인을 찾아내려 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2020년대 이후보다 훨씬 보수우위 구도가 강하던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당시 15대 대선에서는 '여당이 대선에서 패배하여 대권을 내줬다'는 생전 처음보는 현상에, 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보다 훨씬 이름값이 높았던 이회창이 패배했다는 현상에 당황하고 믿기 어려워하던 사람들이 '보수가 분열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라는 이유를 만들어냈다는 것.

원칙과 정공법을 강조하는 그의 이미지는 3김 정치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에게 신선함을 주고 지지도의 동력이 되기도 했으나, 반대로 각종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했다.

지금으로 보면 오히려 첫 대선에서 낙선 후 의외의 면이 많은데, 장외 투쟁[38][39]이나 단식[40]과 같은 강대강 노선보다는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과 정부 인사들의 비리에 대해 (비교적) 정공법으로 싸웠다는게 특이점이다.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시키고 옷 로비 사건 특검, 각종 게이트 폭로, 국회 안기부 분실(529호) 폭로, 도청 폭로 등으로 정권과 대결하면서도 영수회담 등을 통해 최소한의 협의는 했다.[41] 또한 재보궐을 통해 다수당이 되어 총리를 두 차례나 낙마 시키며 결국 후임 정부인 노무현 정부부터는 (헌법 상의 규정이 없는 관례였던) 국무총리 서리제를 폐지하고 선 청문회, 선 표결 후 취임하도록 하는 바탕이 되었다. 비록 그의 정치가 기반인 보수정당의 색깔론이나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은 한 세대 뒷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헌법에 보장된 견제 기능을 통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싸우는 전범을 만든 인물에 가까웠다. 부정선거론 등으로 선거로 통해 선출 된 대통령을 부정하는 행보는 일찌감치 없었는데, 대선 직후 김대중 당선인을 이회창이 천주교 미사에 참석해 축하하고 김 당선인 역시 '이회창 후보의 논리가 엄밀해 대선에서 혼이 났다'며 그를 박수로 격려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42] 제6공화국 역사는 물론 이전의 역사에서도 2위를 득표한 패자가 낙선 직후 승자의 자리에 참석해 당선을 축하한 경우는 이 사례가 유일하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회창과 7번의 영수회담을 했고, 6번은 합의가 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반면 차떼기[43]총풍사건[44], 아들들의 병역 논란으로 인해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고 97년 추석 때는 내란수괴로 구속수감 중인 전두환과 비밀리에 사면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아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45]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설훈, 김대업은 처벌받았지만[46], 총풍사건과 차떼기와 97년 추석 때 전두환 사면 추진에[47] 대해서와 2002년 전두환대통령과 면담정치[48], "이런놈의 나라" 발언 등 다양한 구설과 스캔들이 청렴과 정공법을 고집하던 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며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적인 이미지가 다소 약한, 개혁지향적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49] 김영삼을 대체하는 보수우파 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흔히 말하는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우파 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중도우파 ~ 우파 지지자들 사이에서 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 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적어도 한나라당 등 보수정당이 일본 자민당이나 남북전쟁과 링컨 대통령 암살 이후의 미국 공화당이나 19세기의 영국 보수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거나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개혁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에 손을 내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 때만 하더라도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다.[50] 박근혜가 권위주의 정권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 확장을 위해 민정계, 권위주의 정권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새로운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건실한 보수우파 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 공화계에게 넘어가고 만다.[51] 남은 민주계 인사들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 정부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52]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보수우파 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53] ,박성호, 김대희,[54]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김숙,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55] 등이 있다. 지금은 유명 친민주당 유튜버가 된 김용민한때 이회창을 지지한 전적이 있다. @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올바른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엔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보수 우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연예인은 이순재, 송해, 최불암 정도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 이덕화, 김영철, 이경규[56]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우파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나타나기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57] 이후에 나올 세상만인들로부터 지탄을 당할 한나라당 보수 대선후보들인 이명박박근혜와는 달리 당시 사회에서 이회창을 지지하더라도 주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을 정도로 그의 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비난당하기 어려울정도의 도덕적인 명분과 힘이 좋았다는 뜻이다.[58]

다만 이 부분에서는 이회창의 정치적 전성기인 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한국의 사회상과 사회적 분위가가 이후 시기와는 많이 달랐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터넷의 사회적 영향력이 그리 대단치 않았기에 연예인등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다고 해서 (인터넷을 매개로) 거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고 드러나리라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까지만 해도 인터넷이 현실 정치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을 짐작한(최소한 실감한) 이는 거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인터넷이 가지는 막강한 파급력이 처음으로 명확히 드러난 계기가 바로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회창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이름값이 약했던 노무현이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엄청난 이변이 일어났고, 그 원동력으로 인터넷을 통해 촉발되고 팽창한 소위 노풍이 지목되면서 인터넷이 현실 정치, 그중에서도 최대급 이벤트인 대선을 뒤흔들어버릴 가능성을 가진 매체임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한국 사회에만 충격을 준 것도 아니라, 영국의 주요 일간지인 가디언에서도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온했다"는 표제의 기사로 이에 주목했을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은 현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인터넷은 안 쓰는 사람들에게는 "요즘 그런게 유행한다더라", 열심히 쓰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에서 정치적 이슈를 주도하던 민주당계 지지자들에게는 신문, 방송등 기존의 주요 매체 대부분에서 보수의 영향력이 강한 상태에서 그 대체제로 찾아낸 (그렇기에 아직 주요 매체로 자리잡지는 못한) 대안 매체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59]

게다가 세대론적으로 보면, 젊은 세대의 압도적인 진보, 또는 민주당계 지지 분위기가 명확히 드러난 것 역시 16대 대선 당시였다. 물론 그 이전까지도 상대적으로 노년층에서 보수정당, 청년층에서 진보정당이나 민주당계 정당 지지세가 강하다는 분위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온라인 커뮤니티들의 활성화등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드러난 당시 젊은 세대의 정치성향은 상상 이상으로 압도적인 민주당계/진보 성향의 우위였던 것. 좀 삐딱하게 말하자면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동안 한국 인터넷 사회에서 한나라당을 까는 것은 스타크래프트 1에 맞먹는 민속놀이였다. 그리고 이정도까지 온라인 사회의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나타나자 '인터넷은 젊은이들의 공간'이라는 당시의 인식에서[60] 젊은 층의 인기에 신경써야 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들로써는 이들과 충돌하기 쉬운 자신의 정치성향을 드러내거나 특정 정당 및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는데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결국 2002년 대선 당시 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 사이에서 공개적인 이회창 지지선언이 많이 나타났던 것은 상당부분 그로 인해 당사자의 인기가 깎이고 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아직 없었다는 점과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이지, 단순히 '이회창의 이미지가 좋고 명분이 튼튼하여 지지선언을 해도 주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보 성향 네티즌 사이에서 이회창에 대한 인식이 이명박이나 박근혜보다는 상대적으로 좀 낫지 않았느냐고 하면 그렇다고 볼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이회창이 안 까인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그 당시는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규모와 영향력이 아직 작았고[61], 그 매체 특유의 쌍방향성이 얼마나 폭발적인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후폭풍을 우려하지 않고 그런 정치적 입장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던것 뿐이다[62]. 그런데 '90년대 말~2000년대 극초반'과 '2000년대 중반 이후, 특히 2010년대 이후'라는 시대적 상황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이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려 드는 것은 오해와 오류의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이회창의 말년 경력인 17대 대선 무소속 출마와 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의 불완전하게 구성한 선진과 창조의 모임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는 경력이다. 우선 이회창의 영향력이 참여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친 2007년에도 남아있었다는 뜻이며, 강력한 이명박을 위시로 12명의 후보가 난립한 대선에서 개인 브랜드 파워로 무소속 후보로 선거비용을 보전하며 3위를 기록했다는 점도 그렇다.[63] 결국 이명박의 과반 득표를 저지한 것은 이회창인 것이었다. 또한 공중분해된 자유민주연합을 기실은 가장 대극점에 있었던 이회창이 명맥을 이어, 구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 인사까지 포섭하여 중부권 보수야당으로의 지위를 굳히고, 심지어 본인이 정계를 은퇴한 19대 총선까지도 지역구/비례에서 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특기할 점이다.

다만 다른 정당에선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폐지된 총재제를 고수하고, 거대 야당프리미엄등에 기대어야 생존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이회창이 한 때 외쳤던 개혁보수의 가치는 퇴색되어 젊은 층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갔다. 그저 자민련 시즌2, 국민중심당 리뉴어버전이었다는 평가. 자유선진당의 당론이었던 강소국 연방제조차도 결국 지역할거를 위한 명분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4.1. 남북통일에 대한 발언과 통일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발언

1997년 15대 대선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통일에 대한 반대의견이 50%를 넘는 여론에 따라 국민이 반대해도 통일을 추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민이 통일을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선 현실적이지 못하며 국민들은 당연히 통일을 원한다. 부정적인 견해는 통일이 과연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과 통일 후 우리가 겪어야 할 부담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지 통일의 본질적 의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남북통일 이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지금까지는 단순히 남북대립이나 안보차원에서 미군 주둔이나 철수 문제를 다뤄왔는데 통일 이후엔 미군 주둔의 필요 여부를 정치적 국제관계차원에서 봐야 하며 동북아시아 세력균형과 생각해 봐야한다. 이 지역 강대국인 미중일의 세력균형 속에 중국미군의 주둔을 원할 때가 있다.라고 밝혔다. 1997.10. 한겨레신문 이회창 후보 인터뷰

4.2. 1997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추석 전 사면 추진

1997년 9월 1일,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표가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전 사면을 곧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대표가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을 건의하기로 한 것은 국민대통합의 정치를 표방한 이후 취한 첫번째 조처라는 점에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이회창 대표가 전.노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석전 석방을 건의하기로 하고, 오늘 당차원의 준비를 지시했다. 당시 이사철 신한국당 대변인은 전두환.노태우 사면건의 문제는 이대표께서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시 건의드릴 예정이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셨습니다.라고 밝혔고 이사철 대변인은 이대표의 이같은 조치는 국민대통합의 정치를 위해서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정보화 세력이 통합해야 한다는 당내 주장을 구현하는 측면에서 취해졌다고 밝혔다. 전.노氏에 대한 은전은 일단 신병을 풀어주되 형 선고의 효력은 유지하는 형 집행정지 형식으로 취해진뒤 적정한 시점에서 형 선고의 효력을 면제하는 사면을 단행하는 2단계로 취해질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창 대표는 오늘 확대 당직자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어떠한 편집적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전.노氏에 대한 은전 조치의 명문을 시사했다. 이회창대표는 지역적 또는 계파적 또는 어떤 편집된 이념적인 그러한 장애가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밝혔고 이에 청와대측은, 사면문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만큼 김대통령이 판단할 문제라면서, 이대표가 공식 건의해오면 이를 검토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표에 의한 전.노氏의 석방 추진은 구 여권세력의 결집을 통해서 통합정치의 성과를 가시화하고, 아울러서 여론 지지도를 회복하기 위한 고단위 처방으로 해석돼 앞으로 여론의 향방이 주목되었다.[64]

9월 2일,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표가 재기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에 대해서 김영삼 대통령이 추석전 석방은 불가하다며 이회창의 추석전 전노 조기석방요구를 거절했다. 당시 회동은 이회창 대표 측근에서 재기한 두 전직 대통령 조기 사면 요구를 청와대가 일축하자 이 대표가 긴급 면담을 신청해 이루어졌다. 이회창 대표는 회동에서 조기 사면론을 재기한 배경을 설명할 예정이며, 김 대통령은 사면 문제가 정치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쟁점화 될 경우 대선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였다. 측근들의 말을 종합할 때 김 대통령과 이 대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의견조율을 이룰 것으로 관측됐다. 김 대통령과 이회창 대표는 또, 당의 대선체제 구축을 위한 총재와 후보 간의 협조 방안을 폭넓게 논의 할 것으로 보여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아침 임기 중에 사면을 생각하고 있으나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 대표 측근에서 재기한 조기 사면 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 대통령은 문종수 민정수석을 통해 기자들에게 입장을 밝히면서 사면은 전직 대통령 사법처리라는 역사적 의미를 도외시 한 채 정치적 고려로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문제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문종수 민정수석은 정치권이 거론한 추석 전 사면이나 형집행 정지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당시 사면 파동은 김 대통령이 결코 남에게 넘길 수 없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이 대표 측근들이 손을 댄 데에서 빚어낸 일과성 사고라는 게 청와대 주변의 분석이다.[65][66]

당시 이회창이 자신이 직접 김영삼대통령에게 추석 전노 조기사면을 건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문민정부 집권 기간동안 TK홀대론으로 흔들리던 TK 민심을 잡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당내 주류파였던 김영삼계 PK를 견제하고 TK 중심의 민정계와 이회창 본인의 충청, 수도권을 중심으로 당내 권력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15대 대선은 모든 후보가 전노의 사면을 내밀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나버렸다. 결론적으로는 대국민 화합의 차원에서 당선인 신분의 김대중이 현직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에게 요청하는 형식으로 사면이 이뤄졌다. 낙선한 이회창후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김대중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독재자들을 사면하지 않았다는 책임은 덜고 동시에 화해와 용서라는 이미지를 취한 것이었고, 김영삼은 후임 대통령의 부담은 덜어주는 동시에 TK홀대론을 달래주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67] 당시 이회창측이 추석전 전두환 사면을 건의하자 수감중인 전씨가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시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당시 이회창 후보는 추석 전 전두환 사면건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국민공감대 측면엔 소홀 시인 1997.10.11 한겨레

5.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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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6.1. 이인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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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427149302010201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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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관계는 3개의 짤방으로 요약 가능하다.
15대 대선 당시 이인제는 최연소 노동부 장관에 이어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이는 이회창도 마찬가지긴 했다. 적어도 대선 이전까지는 같은 당원으로서 교류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선술한 15대 대선의 과정 속에서 둘은 경쟁하게 되었고 네거티브를 퍼붓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위에도 서술했듯 결과는 둘 다 낙선하여 결국 상처만 남긴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인제는 '피닉제'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성공적인 철새테크를 탔고, 5년이 지난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 되어 네임밸류를 밀어붙이며 경선 초창기엔 독보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한 이회창과 리턴매치가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이인제는 노무현의 영남을 중심으로 강세를 몰아친 노풍을 이기지 못하여 경선에서 떨어지며 무산되었다. 낙선한 이인제는 탈당하여 자민련으로 갈아타 과거 행적에 대해 거듭 사과한 뒤 이회창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다시 5년이 흘러 17대 대선 시즌이 되자 민주당[75]으로 돌아간 이인제는 출마를 선언하며 정식후보가 되어 기호 4번을 부여받았다. 초반에는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무시할 수 없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하면서 판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네임밸류가 컸던 포스를 몰아붙이며 충청도의 지지기반을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로서 이인제의 지지율은 소수점대로 폭삭 무너졌으며, 이회창은 무소속 후보로서 중도층을 어필하며 15.1%의 득표율로 마감한 반면 이인제는 손써보지 못한 채 0.7%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굴욕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탈당하여 무소속 국회의원 자리를 지낸 이인제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이 이끄는[76][77]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78] 이로서 껄끄러웠던 관계였던 둘의 사이는 개선되었고 14년 만에 동지로 회복되었다. 어쨌든 이인제로선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생활을 이어갔고 이후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회창은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 이인제도 이끄는 당을 새누리당과 합당시키면서 둘은 새누리당에서 한솥밥을 먹는 신분을 이어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인제는 정계활동을 이어나가는 반면에 이회창은 은퇴하며 평당원으로만 지낸다는 것. 악연과 인연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1997년여당 신한국당에서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대선후보로 달리던 이회창은 2017년에는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으로 옮기고,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 출마를 감행했던 이인제가 자유한국당에서 대권주자로 달리다 경선 탈락했다. 이후에는 둘 다 정계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데, 이회창은 2012년 이후 정계 은퇴를 했고 이인제 역시 2018년 충남도지사 낙선과 2020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경선 탈락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7. 이회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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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저서

9.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3,730 (34.52%) 당선 (1번) 초선[79]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9,935,718 (38.74%) 낙선 (2위)
1999 6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서울 송파 갑 42,901 (61.47%) 당선 (1위) 초선
[80]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7,365,359 (38.85%) 당선 (1번) 재선[81]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1,443,297 (46.58%) 낙선 (2위)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3,559,963 (15.07%) 낙선 (3위) [82]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예산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49,908 (60.99%) 당선 (1위) 3선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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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총선 (신한국당 전국구 1번) 15대 대선 (대한민국)
파일:송파갑 재선거 이회창.jpg 파일:16대 총선 전국구 한나라당1.jpg
1999년 6월 재보궐 (서울 송파구 갑) 16대 총선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
파일:이회창2.jpg 파일:이회창3.jpg
16대 대선 (대한민국) 17대 대선 (대한민국)
파일:이회창4.jpg
18대 총선 (충남 홍성군·예산군) }}}

10.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3 - 1996 정계 입문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6 - 1997 입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07 합당[83]
정계 은퇴[84]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7 - 2008 탈당[85]
정계 복귀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창당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1 - 2012 합당[86]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탈당[87]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복당[88]
정계 은퇴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7 탈당[89]


[[바른정당|
파일:바른정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18 입당[90]


[[바른미래당|
파일:바른미래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8 합당[91]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8 - 현재 탈당[92]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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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이홍규 · 남동생 이회성
역대 선거 제15대 대통령 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 제17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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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선 무효 판결 전에 의원직 사퇴.[2] 본적이 충청도라 충청도 출신 인사로 분류되곤 한다. 실제로 충청도 지역 정당이었던 자유선진당을 창설하여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3] 주부공파 23대손, 시조 41세손 회(會)◯ 항렬.[4] 1981년 당시 대법원 판사, 1988년 재임부터 대법관[5] 생물학자 김삼순과 자매다.[6] 1932년 출생.[7] 1929년 출생. 여동생으로 이회윤이 있으나, 이회창보다 연상인지는 불명이다.[8] 현 광주서석초등학교.[9] 본래는 무종교인이었으나, 아버지 이홍규자유당에게 밉보였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던 위기로부터 장면이 구해주면서, 가족 차원에서 가톨릭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장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유명하다.[10] 출처[11] 탈당 전 소속 정당은 바른미래당.[12] 15대 국회가 진행되는 도중 의원직 사퇴 후, 대선에 나간 뒤, 재보궐선거로 다시 당선되어서 당선된 횟수로는 4번이다.[13] 대선 출마로 인해 1997년 11월 사퇴.[14] 한나라당 창당 후 민주당 총재 조순에게 당권을 주며 사퇴.[15] 대선 출마로 2002년 5월 사퇴.[16] 대선 출마로 2002년 11월 사퇴.[17] 국무총리, 국회의원, 대법관으로 행정/입법/사법의 3부는 물론 5부 요인인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전서열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다음이다), 문민정부의 첫 감사원장까지 지낸 이회창의 역임직은 전무후무하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감사원장으로서의 이회창은 역사상 한 획을 그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도 제6공화국 최초의 위원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18] 국민학교 졸업 이후 광주서중학교에 합격했으나 부친 이홍규청주시로 발령되면서 청주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경기중학교로 전학했다.[19] 49회 졸업생이며 이세중, 이홍구, 김덕중이 동기생이다.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 형 이회정, 동생 이회성(60회) 모두 경기고 졸업생이다.[20] 당시 제15대 대통령 선거 경선 출마를 위해 잠시 대표직을 내려놓았다.[21] 대선 경선 끝난 직후 대표직 복귀.[22] 당시 당총재 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명예총재로 추대했다.[23] 송파구 갑 국회의원이였던 홍준표가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고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송파구 갑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4] 엄숙한건 나도 싫어' / 이후보 `원고없는 연설'.거리시민에 친근감 유도[25] 당시 김영삼 정부의 경제위기 실책으로 인하여 지지율이 폭락했음에도 고작 1.6%p, 2.3%p 차이로 졌다.[26] 이기택과 김윤환은 당시 한나라당 양대 계파의 거물이라 불리울 정도로 상당히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27] 안철수는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를 시도했지만 단일화 과정에서 오세훈에게 밀렸고, 홍준표박근혜 탄핵 상황에서 치뤄진 19대 대선에서 나름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패배했고, 이후 당 대표를 하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으로 당내에서 쫓겨나듯이 떠나 무소속으로 21대 총선에 나와야만 했다. 이후 20대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 20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전했으나 당심에서 외면받으며 윤석열에게 후보 자리를 내 줘야 했다. 비록 여론조사상에서 앞섰음에도 당 내 영향력에서 윤석열에게 밀린 것이 패인이었다.[28] 이회창의 부인의 10억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 자금지출명세서는 폭로자들이 위조한 문서이다. 당연히 이들은 허위사실 유포죄로 처벌된다.[29] 1997.12.17 mbc뉴스[30] 신한국당, 이회창 신임 총재로 선출로 새로 출범 1997.9.30 mbc[31] 문화일보 2001[32] 1997.12.14 mbc[33] 그러나 그 당시 이인제후보도 3김 청산을 주장하였다.[34] 1997.12.19 동아일보[35] 1997.12.19 경향신문[36]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40만 표 차로 이회창을 이겼는데, 여기에는 DJP연합으로 인한 충청권에서의 우세와 이인제가 500만 표를 들고 나간 것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이회창을 이기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37] 단독 출마를 한다.[38] 98년 의원 빼가기 반발과 2000년 의약분업 강행처리(날치기) 국면 등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강행처리 과정에선 국회 몸싸움도 벌어졌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이회창이 장외 투쟁에 있어서 오히려 온건파에 속하여, 장외투쟁을 계속하자는 강경파들을 통제하는 역할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0년 장외 투쟁의 경우 16대 총선에서 1당은 유지했으나 과반을 얻지 못한 한나라당에서 낙선자를 중심으로 '4.13 부정선거' 조사(...) 주장이 횡횡했는데, 이걸 영수회담을 끝으로 접은 쪽은 여하간 이회창이었다. 장외투쟁을 정국 주도권, 영수회담을 위한 도구로서 활용한 수준. - 이를 위해 깜짝 쇼를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회고록에 따르면 98년 10월 8일까지 정권 퇴진을 외치다가 10월 9일 전격 등원 선언을 한 경우가 있다. 당내 강경파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전략으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여당인 국민회의와 야당 강경파에겐 일절 언질이 되지 않아 당혹스럽다는 반응도 나왔다. '제왕적 리더십'의 일장일단인 셈.[39] 재미있는 건 2000년 당시의 박근혜 부총재인데, 장외투쟁은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집회 참여를 포함해 장외투쟁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렇게 당 전체를 장악한 '여의도 대통령' 같지만 동시에 대 정권 강경파, 온건파에게 묘하게 어중간하다는 반응을 받는 것이 이회창 리더십의 특징이었다. 강경하면 삼김 보스정치의 부활이라고 비판받고, 온건하면 삼김보다 약한 지도자라는 평을 받기 딱 좋은 과도기의 인물이었다는 난점도 있었다.[40] 의외로 정치 생활 중 단식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98년 당시 정당의 제2주주 격이었던 이기택의 단식은 만류하는 입장이었고, 대선 낙선 후 대표가 된 최병렬은 여지 없이 단식을 해 이미지를 깎아 먹었다.) 후일 정계 은퇴 후에는 탈북자 북송반대 문제로 일일 단식한 바 있다.[41] 역설적으로 이회창의 보수 야당이 정치 사찰에 반발하면서 군부 시대부터 내려 온 관행적 안기부-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새삼 개선된 것이다.[42] 엄밀히는 김수환 추기경의 작품으로, 이회창도 처음엔 내키지 않았으나 김 추기경의 설득에 참석했으며 김대중 당시 당선인도 나름의 예우를 해준 셈이다.[43] 이회창을 위시한 한나라당의 선거 캠프에서 선거 자금을 차량 째로 받은 것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 상대 후보였던 노무현 측도 불법자금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차떼기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불법자금 비율은 약 1:8에 달할 정도였다.[44]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에다 무력 시위를 할 것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낸 게 드러난 사건.[45]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시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46] 보론하자면 이회창의 장남의 경우 전혀 검증이나 검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남의 경우 몸무게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신장 조사만 이루어졌고 본인 여부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결은 정확히 설훈과 김대업의 사칭과 허위성 판결이고 재판시 허위 판결은 실체적 진실 판결이라기보다는 위법성 인식에 관한 허위성 판결이다. 다만 병역면제 당시가 아니라 현재의 몸무게를 공개하라는 당시 반대측의 의견도 검증과는 동떨어진 측면은 있었다.[47] 당시 전노사면은 원론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9월 1일, 신한국당 이회창 전 대표가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추석전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조기 석방을 요구하여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비화되었던 것이다.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 요구[48] 파일:Screenshot_20231227_184214_Chrome.jpg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이후인 2002년 1월 8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방문해서 새해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가 나아져 다행이지만 정치가 잘 풀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정치보복은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회창 총재는 공감을 표시하면서 국민 대통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93][49] 지역 기반으로 보자면 TK와 PK 모두 해당한다. 권위주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구분은 지역기반이 아니므로 TK, PK 구분과 연계시켜 분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50] 김대중과 박근혜는 과거가 껄끄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사이가 어느 정도 화목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와 사이가 안 좋던 동교동계 상당수(김경재, 한광옥, 한화갑 등)가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정도였다.[51] 두번째 대선 패배 이후, 즉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의 대표가 순서대로 최병렬 - 박근혜 - 강재섭이다. MB는 이런 당 내의 열세를 민선 3기 서울시정의 성과를 통한 당 바깥의 일반 시민의 지지로써 대선 경선 여론조사에서 뒤집은 것이다.[52] 이명박 또한 민정계와 공화계에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삼재, 김덕룡 등 일부는 나중에 아예 문재인을 지지하게 된다.[53] 다만 강성범을 비롯한 일부 개그맨들은 소속사 관계자의 강권 혹은 압박에 의해 참석했다고 말한다. 강성범은 이를 계기로 소속사와 갈등이 생겨 소송까지 이어졌다고 다수의 팟캐스트에서 주장했다. 강성범은 2022년 기준 현재에는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54] 심현섭이 주도한 이 흐름에 김철호·이병진·황승환·이태식·김숙·김미진 등이 참석했다. #[55] 물론 베이비복스는 항목에서도 보듯이 소속사 DR뮤직에 의해 억지로 동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56] 다만 이경규는 보수 성향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는데, 그가 실제로 이명박을 지지한 전적은 있지만, 막상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김대중을 꼽은 바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MBC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 출연한 영향도 있는 듯 하다. 비슷한 이유로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한 적이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경실이 존경하기도 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 이전만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심상정 같은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 당선을 축하한다며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였을 만큼 보수 성향을 딱히 드러내지 않았으므로(시니컬하게 말하면, 중도 코스프레를 꽤나 꼼꼼하게 했다.), 당시에는 그를 지지했다고 무작정 보수 성향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57] 상술한 연예인들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년층, 연예계 원로들이다. 민주당 성향인 강성범, 보수정당 성향인 최국김영민 등도 1970/80년대 초반 생들로, 정치 유튜버가 되기 전에 이미 지상파 개그맨으로 명성을 많이 쌓아놨다. 1980/90년대 태생으로 갈수록 연예인(예능인, 배우, 가수 등)이 정치적 소신을 분명하게 밝히면 상대편 진영 커뮤니티에서 심하게 매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밝히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풍토에 있다.[58]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정치 중립화시켜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전직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과는 차별화를 시도했던 것이다.[59] 스마트폰등의 보급으로 모든 사람이 24시간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당연해지고, 각종 언론이나 다양한 서비스들의 기반 플랫폼이 대부분 인터넷으로 옮겨온 2010년대 후반 이후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2000년대 초중반의 인터넷이란 방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켜야 접속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나마 90년대 말~2000년대 초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으로 사용자층과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기는 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것, 안 써도 사는데 별 지장없는 것이었다.[60] 사실 크게 틀린 인식도 아니었다. 201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인터넷 주 사용자층의 세대 격차는 상당히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61] 본 문서에서 여러번 지적된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지지자의 상당수는 이회창이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인식 역시 어느정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인터넷상에서야 노무현의 인기가 압도적이고, 또 수많은 지지자 하나하나가 정치적 컨텐츠의 소비자인 동시에 공급자가 되는 일종의 정치적 혁신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노무현의 당선은 '어디 노무현 지지자가 있는줄도 몰랐는데 날벼락처럼 벌어진 일' 에 가까웠던 것이다.[62] 또 이 점에서는 당시까지 굳건해보이던 보수 우위 구도의 영향력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02년 대선 당시 대기업들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보낸 불법정치자금 규모가 무려 8배 차이났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힘을 가진 쪽은 보수정당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위 연예인들 중에서도 강성범, 베이비복스등 소속사의 요구로 지지선언을 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회사 입장에서는 '어차피 이회창이 당선될 것 같으니 그쪽 지지선언을 공개적으로 해두면 손해볼 것 없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소속 연예인들에게 그렇게 요구할 수 있던 것이 그 당시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회창 자신의 낙선은 둘째치고 그 당시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방향에서 엄청난 반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생겨버린 것.[63] 덕분에 이회창은 직선제 개헌 이후 대선에서 역대 최다득표를 한 무소속 후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64]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추석 전 사면 추진 1997.9.1 kbs[65] 김영삼 대통령.이회창 대표,두 전직 대통령 특별 사면 파문 관련 심야 긴급 회동 1997.9.2 mbc[66] 신한국당 이회창,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추석전 조기 석방 건의 1997.9.1 mbc[67] 당시 전노사면은 원론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9월 1일, 신한국당 이회창 전 대표가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조기석방을 요구하여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비화되었던 것이다.신한국당 이회창 대표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 요구 mbc 1997[68] 아이러니한 것은 60대 이상에서 가장 적은 지지율을 보였다.[69] 단 이때는 이인제, 김대중, 이회창 라인업의 유력 대선 후보 모두가 전두환의 사면을 공약으로 걸었었고 맨처음에 전두환 사면을 정부에 건의한 것은 신한국당의 김윤환 등 민정계인사들이 신한국당 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가며 TK 정체세력들의 공약인 전두환 사면을 이회창에게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70]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71] 1998년 이회창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 빼가고 정치 사정해서 국회의원 잡아갈 생각이나 하고, "이런 놈의 나라"가 이런 놈의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라 발언하며 김대중 정권과 국가를 맹비난했다.[94][95] 그러자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대변인은 "이회창 총재가 국가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을 이런놈의 나라라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 정치지도자로써 해서는 안될 망언"이라며 강력 비판했다.[96][97][98][99]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또다시 김대중 정권을 비난하며 "이런놈의 나라"라는 표현을 써 논란을 빚었다.[100][101][72] 파일:Screenshot_20231227_184214_Chrome.jpg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이후인 2002년 1월 8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방문해서 새해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가 나아져 다행이지만 정치가 잘 풀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정치보복은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회창 총재는 공감을 표시하면서 국민 대통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102][73] 참고로 의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이회창의 아들의 검사 기록이 BMI 환산값으로 14 정도인데, 2008년 병역검사에서 BMI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어(당해에는 17미만이 4급 기준, 2009년에 16으로 바뀜) 당해 검사대상자들 이외에 기존의 판정받은 미필자들의 재검이 허용되면서 상당한 검사자들이 나왔고, 병무청 검사자료상 BMI 14~15, 즉 키가 180 근처인데 몸무게가 50kg 미만인 사람들이 의외로 한국에도 꽤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이회창의 아들과 똑같은 키와 몸무게를 가진 검사자들도 발견되었다.[74] 판사+검사.[75] 당시에는 열린우리당과 갈라진 뒤로 주요인사가 전부 빠져나가 지리멸렬해진 상태였다.[76] 입당한 2011년 당시에는 이회창은 이미 총재직에서 물러난 상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77] 자유선진당국민중심연합과 합당할 때 동시에 합류했다.[78] 참고로 이인제는 자민련과 자유선진당과 합당한 국민중심당에 잠시 몸담갔던 시절이 있었다.[79] 1997년 11월 사퇴 (대선 출마)[80] 전임자 홍준표 선거법 위반 판결 전 의원직 사퇴.
이회창이 당선된 적이 있는 15대 국회의 보궐선거이므로 국회의원 당선증이 두 장이더라도 의원 선수가 추가로 올라가지 않는다. 유사한 사례로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후 비례대표 사표를 내고 대구 동구 을 재보선에서 당선된 유승민이 있다.
[81] 2002년 11월 사퇴 (대선 출마)[82] 국민중심당과 선거연대.
직선제 개헌 이후 무소속 대선 후보 중 최고 득표율.
[83]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84] 16대 대선 낙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평당원으로 당적만 유지하고 있었다.[85] 17대 대선 출마를 위한 탈당.[86]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87] 19대 총선 직후 탈당.[88] 박근혜 대통령 후보 지지.[89] 바른정당 합류를 위한 탈당.[90] 유승민 대통령 후보 지지.[91] 국민의당과 신설 합당.[9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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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이회창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 방문 kbs 20020108[94] 사정 강경기류에 여야 긴장, 상호 비난 1998 mbc뉴스데스크[95] 경향신문 1998.9.7[96] 이 총재, 이런놈의 나라 대변인끼리 설전 한겨레신문 1998[97] 경향신문 1998.9.7[98] 이회창 죽을 각오로 싸운다 한나라당 대응 1998.9 경향신문[99] 한나라 의총 반격 1998.9 동아일보[100] 이회창후보 말-말-말 2002.6. 세계일보[101] 엄숙한건 나도 싫어' / 이후보 `원고없는 연설'.거리시민에 친근감 유도[102] 이회창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 방문 kbs 200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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